166화 하야스단인의 전쟁 (1)
바가반드 영지의 기술자들이 갑자기 활활 타오르는 열의로 기술개발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흥분을 가라앉힌 환영 군중이 개선식을 뒤로하고 귀가한 켈리도니온에선 새로운 전투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일단 이렇게 전선은 유지를, 아니 오히려 적을 일시적으로나마 밀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건 참 다행인 일이군요.”
대종정 트라야브나가 개선식과 함께 치료를 받고 처음으로 주재한 회의. 임시로 도시와 신관회 운영을 맡고 있던 가기크 법관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고블린들도 감히 우리 하야스단과 지케르니아를 두려워할 겁니다.”
“참으로 갸륵하고 장한 일입니다. 우리 장병들이 그렇게나 대단한 성과를 거두다니요, 허허.”
자리에 참석한 신관들은 하나같이 안도에 찬 표정이었다. 특히나 다르빌 너머의 작은 요새와 도시, 농촌을 관할 영지로 두고 있는 신관들은 이제 곧 관할 교구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눈치였다.
“기쁘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군요…….”
“성하? 어쩐지 성하께선 그다지 기쁜 표정은 아니시군요. 달리 아직도 염려되는 구석이 있으신 겝니까?”
솔직하게 자기 뜻을 밝히자면, 트라야브나는 성도의 일반 주민들이나 이 태평한 신관들에 비해 몹시 불안했다.
‘만약 아즈디샤트의 그 사건이 사실이라면…… 이미 놈들은 인간 변절자들을 미끼로 낚아 들여 곳곳의 영지를 공격하려 했지. 고차원적인 수단을 쓰진 못했지만 고블린이 이제는 정보 조작까지 가능하게 되었다면?’
몹시 불안했다. 단지 전에 없던 일이라서만은 아니다. 불가능이 깨어졌다는 것이었다. 한번 상식이 깨지면 대체 어디까지 상황이 달라질 것인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솔직히 매우 불안합니다.”
“불안이요?”
이제나저제나 관할지로 돌아가 편하게 꿀을 빨 생각에 바쁘던 신관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쯧, 도대체 승전 한두 번에 고블린 문제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들뜨다니.
‘지난 10년이 넘도록 고블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긴 한 건가?’
슬슬 열이 오르는 성녀를 그나마 진정시키는 건 숙부인 가기크였다. 신관들이 어째서 곧 전쟁이 인간의 위대한 승리로 귀결될 것이며, 마나교는 어째서 다시 사람들의 숭앙을 받을 것인지 해괴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숙부는 그 장밋빛 해괴한 전망을 애써 들으면서 성녀의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인내하거라. 그리고 받아들이거라.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다.]
마나의 전언으로 직접 전해지는 숙부의 속마음에 트라야브나는 속에서 울컥하며 무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문제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모르는 천진난만한 사람들을 데리고 이날 이때까지 끌어온 숙부가 사실 대단한 사람이었다.
“……법관 각하? 성하? 두 분 어째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만.”
다르빌에서 급히 상황을 알리기 위해 달려온 파울루스 주교가 슬쩍 상황을 바꾸었다. 그러자 한껏 시끄러웠던 주변이 조금 가라앉았다. 모두가 트라야브나를 향해 시선을 꽂고 있었다. 지금 바로 고블린의 문제가 악화되고 있단 걸 얘기해 볼까? 그러나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지금도 은연중 성녀가 부덕하여 마나가 뒤틀려 이런 문제가 생겼단 소리가 나오고 있지. 아마 그 뒤엔 마탑이 있기야 하겠지만…….’
아라가트의 늙은이들이 적대적인 건 별로 신경이 쓰이는 일도 아니었다. 그 늙은이들과 적대한다고 무엇이 문제가 되랴. 문제는 신관회나 지케르니아 성국 안에서도 성녀가 고블린 사태를 불러온 게 아니냔 소리가 있단 것이다.
‘단순한 사람들. 고블린 상대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그깟 정확한지도 알 수 없을 원인 규명이 뭐라고.’
태평스럽게 얼른 돌아가 주교구를 재건하고 하던 옛일을 회복하는 것. 이 신관이란 사람들의 희망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블린의 새로운 위협을 언급하며 전쟁을 위해서 좀 더 희생해야 한다고 얘기한다면?
‘단번에 책임론이니, 망국이니 하면서 절망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근거 없는 막연한 희망은 무너질 때 결코 혼자 무너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 자신이 잡고 있던 정신줄, 맡고 있던 일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 적어도 분위기를 급격히 바꿀 것이 아니라 천천히 만들어 가야 했다.
“후. 아닙니다. 부상을 입은 제국군의 처우 문제와 제국군 주둔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아, 그렇지요. 제국군 문제가…….”
“하긴, 제국군이 버티고 있어야 평화를 고블린들이 깨지 못하도록 억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국이 정말 주둔병을 남길지 모르겠군요. 니콜라오스 특사는 어떻답니까?”
콜라케르트 총독령에서 벌써 반년 가까이 머무는 중인 니콜라오스에게선 아직 별다른 입장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가기크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오. 우선은 제국군 참패에 대한 소문에 제국 정계도 복잡한 모양이더군.”
“허어. 큰일이군요.”
“제국군이 주둔만 하면 전쟁은 바로 끝날 터인데, 거참.”
신관들과 달리 트라야브나는 기사단장 엘레나와 네마냐가 문서로 만들어 보내 준 분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국은 이미 동방 군부에 군사를 주는 것을 쿠데타 위협으로 보고 경계 중. 여기에 참패까지 더해졌음. 하야스단에서 총독부를 제외한 전면 철수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니콜라오스 특사경이 만약 무슨 소식이 있다면 가장 먼저 켈리도니온으로 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더 왈가왈부할 건 없습니다. 각자 위치를 지켜 주세요.”
그리곤 성녀는 파울루스를 조용히 불렀다.
“성하, 말씀하시죠.”
“파울루스 주교께선 마라반 주교 가라스를 비롯해서 여러 점령지 및 전투지역 담당 사제들에게 다르빌과 인근 지역 신전을 내어주세요.”
“……지금 와서 말씀입니까? 머잖아 상황이 해소되면 다시 자신들의 관구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사제들이 걱정할 만한 건 역시나 생계유지다. 신전에 집을 두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납금을 바탕으로 생활한다. 그러니 관할 주교구를 잃은 사제들이 이곳 켈리도니온에 모여들어 허구한날 음모론을 꽃피우는 것이다.
‘우선은 여기에 모여든 파리 떼부터 적당히 먹이를 주고 쫓아내는 게 좋겠어.’
팔걸이를 굳세게 움켜잡은 트라야브나는 우선 켈리도니온부터 전시 체제를 재정비할 작정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점령지를 되찾는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해요. 사제단 여러분이 다시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건 뻔합니다. 그러니 일단은 다르빌 인근 주교구에서 분담하도록 합시다.”
최근 ‘황금도시’란 별명을 얻게 된 다르빌. 최근 급격한 인구 성장과 시내 농작물 경작 기술의 발달로 경제력이 급격히 성장하는 중이었다.
‘일단은 사제단의 눈을 돌려놓고 다음 전쟁을 대비하겠다, 이거군. 대견하구먼.’
가기크가 어느새 날카로운 정무 능력을 갖추게 된 조카를 갸륵하게 보는 사이, 니콜라오스 특사경과 채널을 통일해 놓은 영상구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니콜라오스 경이로군.”
“부디 좋은 연락이어야 할 텐데요.”
“음. 담당관, 와서 통신을 개설하게.”
“네.”
―디링.
맑은소리와 함께 이내 채널이 열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둥그런 수정구 안쪽으로 굴절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왜곡되긴 했지만 수염이 없는 모습으로 보아 환관인 특사경 니콜라오스가 분명했다.
“성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각하. 개의치 마시고 편하게 이야기하시지요. 아마도 지금 연락을 주셨다면 제국군의 주둔과 처우에 대한 문제겠지요.”
황제의 신임을 받는 늙은 환관은 의례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딘지 씁쓸한 빛이 난다는 것은 눈치만 좀 있다면 놓칠 리가 없는 특이한 점이었다.
“하하……. 역시 영민하십니다. 맞습니다. 제국군의 문제입니다.”
이따금 화면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최근 통신석과 영상석이 꽤 넓게 사용되기 시작했고, 제작 기술은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정석 수정 간을 연결하는 마법적 기교는 부족해서 통신이 불안정했다. 결국 100% 확신이 필요한 전장에선 옛날처럼 수기 친필과 봉인, 암호, 전령 등이 필요한 이유였다.
어쨌거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성녀는 니콜라오스 특사의 이야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때 잘못된 결정 하나가 나온다면 하야스단의 역사가 뒤바뀔지도 모를 일이니까.
“먼저 이것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음, 좀 난데없는 일이라 저도 당황스럽습니다만.”
그리곤 화면 너머 니콜라오스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설마 그 능청스럽다는 환관이 땀을 흘리고 있는 건가? 긴장감에? 뭔가 일이 생겼다는 직감에, 트라야브나는 재촉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지요?”
“음……. 황제께서…… 지병이 악화되어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현재 폐하의 국사와 정책이 모두 정지된 상태입니다. 원로원이 임시로 모든 권력을 대행하고 있지요.”
“황제께서, 쓰러지셨다고?”
가기크가 창백한 표정으로 신음처럼 흘린 소리였다. 그 표정만 보더라도 이게 얼마나 낭패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야스단의 적극적인 방어를 주장하던 황제다. 원로원이 압도적으로 철수를 입장으로 세웠음에도 제국군이 철병하지 않고 싸운 건 군부와 그 군부를 밀어준 황제 덕분인 것이다.
‘물론 하야스단을 기꺼워해서라기보단 자신에 충성을 바치는 군부를 키워서 원로원에 대항마로 세울 생각이었겠지만.’
문제는 바로 그런 황제가 와병했다는 것이다. 하야스단 방어도 끝나지 않았고, 따라서 원로원을 압도해 권력을 강화하지도 못한 상황. 황제가 만약 일어나지 못하거나 원로원이 대권을 받게 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큰일이로군.”
“지금이라도 원로원 측에 공작을 벌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라스를 비롯하여 선임급 사제들은 걱정스러운 듯 이런저런 말을 속닥이기 시작했다. 트라야브나는 상황이 점차 자신이 생각해 두었던 ‘암울한 스토리’로 흐른다는 걸 깨달았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가, 슬퍼해야 하는 건가.
“저, 특사경.”
“예, 성하.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하야스단에서 제국군이 철병하고 총독부 및 특사경 휘하의 병력도 철수한다는 의미입니까?”
“…….”
니콜라오스도 사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으로 보였다. 황제가 중병에 걸려 쓰러졌다면 원정군은 만약의 반란을 염려해 회군하는 것이 상식이다. 지금 황제는 젊은 나이에 자식도 없어 더 문제였다.
“일단, 저와 제 휘하 병력은 돌아가게 될 겁니다. 황제께서도 원정군에 대해선 평화를 되찾을 때까진 머무르라고 엄명을 내려두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한은 한 달이겠죠.”
“이제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남은 기한은 3주겠군요.”
사제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속닥이는 소리는 곧 소곤거리는 의기소침한 저음으로 변했다.
“좋습니다. 그럼 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기왕 떠나시는 길이니.”
“어떤 부탁이십니까? 가능한 제가 들어드릴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급한 성녀의 제안이 영상구로 쏟아져 들어갔다.
“하야스단 방위와 관련해서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관계자를 저와 연결해 주실 수 있습니까?”
“관계자라, 어떤 분을 염두에 두고 계신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든 좋습니다. 결정권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원로원 의장이건, 군사국 국장이건 방위성 장관이건 상관없습니다.”
네마냐와 엘레나가 하야스단의 한구석, 손톱만 한 봉토를 가지고서도 저렇게 열심히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반면 트라야브나 자신은 아무리 경험이 일천하고 실권이 약하다 해도 성국의 대표다. 가만히 앉아서 남이 떠주는 결실만 얻어먹는 건 있을 수 없다.
“만약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특사경과 만나서 협의할 수도 있습니다.”
“성하, 몸소 모든 일에 직접 움직이시는 건 예법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움직이더라도 모든 절차가…….”
성녀가 몸소 반박하려 들자, 가기크가 대신 손짓을 하며 자신이 대신했다.
“괜찮네. 지금 같은 비상시국, 특히나 제국군의 주둔 문제라면 우리 같은 아랫사람보단 성하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게 효과가 좋을 테지.”
들고 일어나려던 주교들은 덕분에 잠잠해졌다. 가기크는 이제 오로지 트라야브나만을 보며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자, 일이 그리되었으니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엘레나와 네마냐 경, 두 사람에게 연락해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숙부.”
주변에 들릴락 말락, 가기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성녀. 피식 실소를 짓는 숙부의 등 너머로는 어느새 하늘을 밝게 메우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환했다.
“그동안 일선의 전사들과 기사들에게 많은 짐을 지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텅 빈 이 고원을 지키는 기둥. 이제부턴 우리도, 그리고 특히 나도 우리 친구와 동맹, 이웃을 구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봐야죠.”
지케른 성국의 모든 신전, 마을, 요새에 [완전한 승리를 위한 대규모 동원]이라는 요지의 신관회 결의가 배포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날 밤, 휘영청한 달빛이 지나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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