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개선식
―아즈디샤트.
주민들은 행방불명되고 반쯤 파괴된 성채였지만 지금은 부상자들의 피난처였다. 곳곳에 세운 임시 병원에서 아우성이 요란했다.
“제발, 살려 줘!”
“눈이, 눈이! 아악!”
“누가 나 좀 도와줘!”
일반 사람들이라면 그 근처론 아예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곧 죽은 사람이 망령이 되어 돌아올 것 같은 그 원통한 감정에. 이런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건 신관들이었다. 긴급하게 아즈디샤트로 달려온 신관과 신전 치료사들이 성녀 트라야브나의 지휘에 따라 투입되었다.
“가장 급한 중상자들이 많은 남쪽 천막으로 가장 경험 많은 부류가 들어가도록 해요! 어서!”
“네, 지금 갑니다!”
“공간 좀 마련해 봐, 지금 들것에 실린 환자가 더 들어간다!”
“어떡해요, 약이 다 떨어져서 지금 당장 조처가 안 되는데. 치료사님, 도와주세요!”
“예, 지금 갑니다!”
이 낡은 성채의 중심에서 트라야브나는 정신이 없었다. 가뜩이나 계속된 강행군과 연이어 사람을 치료한 덕분에 발이 꼬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대종정의 걱정은 오직 한곳에 쏠려 있을 뿐이었다.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엘레나, 네마냐 그리고 모두들. 제국군이 그렇게 허망하게 당해 버릴 줄이야.”
좀 더 지켜봐야 알 일이지만 재앙을 간신히 면하고 살아남은 생존자 기병 400여 기는 전투 불능에 빠진 상태였다. 지금도 밤만 되면 악몽으로 인해 도시 전체를 울리는 통곡과 울음소리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렇게까지 심리가 파탄이 나는 대규모 사례는 하야스단의 오랜 전쟁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니콜라오스 특사께서도 대단한 충격을 받고 이번 사건을 바로 보고하셨습니다. 원로원에서도 심각하게 당황한 모양입니다.”
가기크 신관이 대충 성도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전령이 전한 말이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성녀는 마땅히 할 만한 질문을 건넸다.
“이 부상병들은? 제국군에서 이들을 어떻게 한답니까? 전역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치료는 해 주겠지?”
“음. 그것이 말입니다. 쯧, 불명예한 전투를 치른 원흉이니 아무런 대가 없이 강제로 전역시키겠다고 합니다.”
“뭐?”
참으로 기가 막힌 대책이 아닐 수 없었다. 제국은 아예 새로운 승리를 통한 타개는 물론, 아예 전쟁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 작정이었다.
“정말 ‘효과적인’ 대책이군요. 피해자는 잊어버리고 패배는 망각하여 불패의 제국군 신화를 이어 나가겠다라.”
“가기크 대신관께선 혹여나 이 소식을 듣고 성하께서 격노하실 것이 두렵다 하셨습니다. 충분히 불의한 일이지만 일단은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시라는 말밖엔…….”
숙부의 일이란 그랬다. 제국과의 문제에선 항상 한 수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전대 신관인 안드라시 시절까지 제국의 탄압을 받던 마나교가 지금처럼 제국과 협조하는 관계로 변할 수 있었다.
‘숙부의 공헌이야 알고 있지.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다가왔다. 불의와 싸워야 한다. 마나의 순수한 흐름을 교란하고 불순하게 만드는 것은 불의, 살인과 같은 행동이었다. 마나를 이용해 거침없이 그런 짓을 일삼았던 초기 마법학은 대표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왜곡하고 오염시켰다. 그 결과, 이 세계에는 검은 마나 또는 검은 던전이라 부르는 이해 가능한 영역 밖의 존재가 생겨났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우리로서도 별수 없겠구나.’
만약 제국에 조금이라도 밉보인다면 성국이 잘못되는 건 아무 문제도 아니다. 그보다는 제국군이 아예 손을 뗀 하야스단으로 새로운 고블린 대군이 몰려들 것이 문제였다.
“일단……. 그들은 정중하게 대우하도록 해요. 적어도 우릴 위해서 싸웠던 건 맞으니. 본국은 푸대접하더라도 우린, 그러면 안 되죠.”
“알겠습니다. 충분히 잘 조처하겠습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쌓인 피로로 온몸에서 피가 말라붙어가는 기분인 트라야브나였다.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전령을 보낸 뒤 등받이에 힘없이 고개를 기댔다. 이젠 그저 후방에 남은 바난드 군이 승리든 패배든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시내를 울렸다.
“바난드 군이다! 성기사단장 전하와 바가반드 경의 입성이야!”
모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 성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무사했구나. 시산혈해, 고통 및 악몽과의 전장에서 홀로 소모되어가던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메마른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다행히도 좋은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야스단의 승리다! 무수한 고블린의 수급을 담은 수레가 들어오고 있어!”
“고블린을 완파했다!”
“만세!”
“하야스단 만세! 영웅들에게 환호를!”
휘익―
“승리…….”
지금처럼 철석같이 믿은 신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하야스단인 자신들이 일군 승리의 소식. 절망에 빠져 있던 부상병과 병사들, 주민들에게까지 더없이 클 희망이 될 터였다.
“성공했구나. 기다렸어, 너무 오랫동안.”
먼 옛날. 십 년도 전의 어느 불타오르던 마을. 그 중앙 광장에서 울부짖으며 떠돌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남몰래 눈물을 닦는 트라야브나였다.
* * *
“만세!”
“하야스단 만세!”
“바난드의 성기사 전하, 바가반드의 영웅이여 영광을 받으라!”
아즈디샤트에서 오밤중에 열린 개선식. 엘레나나 네마냐는 희생자가 워낙 많았으니 승리가 어쨌든 개선식은 원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건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아닌 걸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들 않습니까.”
“하지만 그게 고인들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 지금은 오히려 장례식이라도 치러야 할 때야.”
6천 명. 늪지대에서 태반을 제대로 수습조차 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떠나보내야 했다. 그 전과 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로 수천의 주민과 수백의 병력도 유명을 달리했다. 고작 1만과 5천, 그리고 그 이상의 적을 섬멸했어도 간담이 서늘하긴 마찬가지였다. 네마냐도 역시 어딘지 씁쓸한 눈치였다. 다만 그는 제눌트의 이야기가 정론이란 걸 빠르게 받아들였다.
“……제눌트의 이야기가 맞아.”
“……네마냐?”
“물론 옳은 도리가 아니라는 건 알지. 수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난 이상, 기쁨의 개선식보단 정중한 장례가 먼저겠지만.”
그러나 전쟁이란 무엇인가? 아직 서준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기억을 잠시 꺼냈다. 그리고 회귀 이전,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과 지금의 전쟁까지 떠올렸다.
“전쟁, 전쟁은…… 정치야. 정치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고 그 연장선에 있지. 그리고 정치를 결정짓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의 구체적인 구절이야 이제 와서 기억이 날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어리둥절한 엘레나나 제눌트에게 와닿지도 않겠지. 그저 자신의 말로 풀어낸 이야기가 필요할 뿐이다.
“고인들을 위해 단순히 슬퍼하는 걸 넘어서, 고인들의 뜻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하자는 거지.”
“뜻을 완성…….”
“그래. 그들의 뜻은 하야스단인의 사기를 북돋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지켜내는 거였지. 그리고 우린 개선식으로 우리의 승리를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을 거야.”
“그런……. 나는 구역질이 나려고 하는데.”
“그럴 테지. 하지만 우리 같은 ‘대표’들이 하는 일이란 으레 그런 것 아니겠어, 전하?”
연이은 패전과 오랜 전쟁으로 바닥을 치는 하야스단에 새 희망을 안겨 주는 계기. 그리고 그 희망을 바탕으로 언제까지고 이어질지 모를 전쟁의 단단한 근간을 만들어 가는 일. 바로 그것을 위해서, 조금 더럽고 역함을 느끼더라도 대표들은 기꺼이 나가길 자처할 뿐인 것이다.
“…….”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겠군. 제눌트 장군도 굳이 악역을 자처하길 바라서 건넨 말이 아니라서 나도 함께 이야기한 거야.”
“휴…….”
졸지에 악역으로 주군에게 성토당할 뻔했던 제눌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목덜미를 풀었다. 네마냐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안심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제눌트는 답례로 눈인사를 했다.
“그렇군. 어찌 되었든 목적으로 가는 길을 고르라 이 말이군. 대의와 명분조차도 결국은 그 수단으로.”
“제대로 잡으셨군, 우리 전하께서.”
“하하.”
깊은숨을 몇 번 들이 내쉰 엘레나는 결론을 정했다.
* * *
“제대로 손 좀 흔드세요, 전하. 별로 안 기뻐 보이십니다.”
“난 생전 이런 곳에서 웃어 본 적이 없다니깐.”
손을 애써 흔들어 보이는 엘레나의 어색한 표정을, 환하게 웃고 있는 네마냐는 몇 번이고 지적했다. 하지만 좀처럼 엘레나는 화사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역시 전장을 날뛰던 때에 비해서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군. 어쩔 수 없나.’
어쩔 수 없는 일에는 매달리지 않는 것도 네마냐의 장점 중 하나였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네마냐는 성기사단장의 귓전에 대고 작게 조언을 속삭여 주었다.
“그냥 평범하게 기뻐한다는 표정만 지어, 그럼. 사람들도 기뻐서 대충 잘 받아들일 테니까. 아름다우신 얼굴로 정작 지금 굉장히 어색하십니다, 공주님.”
“너, 넛!”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악, 붉어진 엘레나가 흘겨보았다. 물론 표정이 싫다는 것보단 당황스럽다는 데 가까웠지만.
“하하, 적어도 그렇게라도 살아 있는 표정을 지어 주면 저야 기쁘죠. 그럼 먼저 갑니다, 이럇!”
네마냐는 그렇게 주인공이 될 바난드의 성기사를 남겨 두고 먼저 말을 달려 거리를 벌렸다.
“하야스단의 재건자, 나자리안 경 만세!”
“마나의 흐름이 함께하길!”
각처의 피난민과 부상을 입은 병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답례를 보내는 건 단순히 일반적인 개선식을 치르는 것관 또 다른 기쁨이었다. 적어도 이들은 전쟁의 후방에서 불편과 고립, 물가 상승에 고생한 사람들보다도 한결 더, 일선에서 고생해 왔던 사람들이기에 더욱이.
“모두 고생했습니다!”
“물론 영주님께서 크게 고생하셨죠. 고블린 족장한테 달려드실 때는 저희 기사들이 얼마나 경악했는지 아십니까?”
헤누크가 가까이 오더니 힐문하는 투로 덕담을 건네왔다. 영지의 기사단장이면 또한 영주의 신변을 책임지는 호위대장 역을 겸임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로선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저와 약속해 주십시오. 앞으로 그런 위험천만한 일은 다시는 하지 않으시겠다고.”
“알고 있어. 이번엔 정말 급해서 어쩔 수 없었으니까. 만약에 ‘저분’께서 무사하지 않았다면 대체 이번 개선식을 이렇게 기쁘게라도 할 수 있었겠어?”
그렇게 네마냐가 턱짓을 하는 곳으로 헤누크는 슬쩍 눈길을 주더니 탁,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번엔 정말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저도 알겠습니다. 그만큼 영주님께서 잘 알아서 하실 일이죠. 하지만 나자리안 백작께선 자유 기사나 홀로 다니는 용병 영웅이 아닙니다. 영지의 주민들이 이제나저제나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으니까요.”
“그런 책임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 당신도 참! 굳이 나서서 위험을 자초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하하!”
네마냐는 살짝 뜨끔한 속내를 들키기라도 할까 봐 애써 헤누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앞으로도 얼마든 위험한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이 좋은 날에 입씨름 같은 걸 할 필요는 없겠지. 우선은 좋은 게 좋은 거란 마음으로.’
헤누크는 그런 네마냐의 입버릇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터라 여전히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평소 말투로 보면, 자초하지 않는다는 건 그래야 할 일이 생기면 응당 하고야 말겠다는 얘기일 텐데.’
뭐,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고블린 군단은 실제 전과가 어떻고 전황이 어떻든 일시적으로 고원 입구로 다시 철수했으니까.
“자, 헤누크 당신도 얼른 사람들의 환호에 답례해 주라고. 이런 날에 보여 주는 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잖아?”
“크흠…….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말씀하시죠. 우선은 개선부터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그리곤 얼굴 정중앙에 험상궂은 흉터가 인상 깊은 이 무뚝뚝한 장군은 번쩍 손을 들어 보이며 환호하는 군중에게 화답했다.
“와!”
이 개선식에 직접이든 간접적으로든 참석한 마법사나 신관들은 재빨리 자신들의 연락망을 통해 이 소식을 동료와 본거지로 전달했다.
[바난드 군, 제국군 생존자를 구출하며 적 군단의 별동대 5천 명을 섬멸하다!]
[적 군단의 대장 고블린이 전사 내지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확인!]
[인간 연합군, 혈전 끝에 고블린에 처음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다! 전황을 우위로!]
이 소식이 전해지는 곳마다 하야스단 고원 곳곳의 인간 거주지에선 기쁨의 탄성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건 네마냐나 제눌트가 이야기했듯이 앞으로의 전쟁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기대했던 개선식 효과였다.
“이제야 전쟁의 종지부를 우리 손으로 찍을 기회가 온 거지. 시원스럽게.”
주민들이 날리는 꽃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기운에, 네마냐는 잠시 달려왔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옷깃을 풀었다. 오늘만은 잠시 자신을 풀어도 나쁘지 않을 하루였다.
- 164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