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결전, 망각의 늪 전투 (4)
루프-루가 계곡의 입구에서 방어적인 자세로 주둔 중이던 타위비크와 엘프 연합군. 도합 만여 명이 조금 넘는 병력은 재빨리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이자! 시간이 없다!”
“다들 노새는 처음 몰겠지만 조심해서 천천히 따라와라!”
타위비크 보병대는 이동 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에 엘프군의 노새를 빌렸다. 물자 수송을 위한 노새였다. 어차피 이겨서 돌아오면 그만이었으니 아빌리스가 내린 결단이었다.
“고맙지만 전투물자를 전부 나를 수도 없다는 게 문제일 텐데……. 특히나 화살이.”
바쿠란은 최선두에서 말을 모는 아빌리스의 바로 뒤에 같이 앉아 있었다. 아빌리스는 중간중간 긴 머리가 새어 나와 날리는 투구를 쓴 채로 대수롭잖게 답했다.
“문제는 무슨.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놈들에겐 타격을 줄 수 있어. 그리고 어차피 놈들 숫자가 많아서 가져온 보급용 화살을 다 써도 다 죽일 수 없지.”
“그렇군. 놈들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4만, 5만은 될 테니까.”
“너희 보병대야말로 걱정이지. 노새 타고 가다가 적을 만나면 어쩌게? 갑자기 말에서 내린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텐데.”
타위비크 중보병의 명성은 막강한 보병 방진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연히 방진을 완성한 상태에서 적과 맞부딪쳐야 제 역할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지. 적을 발견한 뒤에 말에서 내리느라 방진을 짤 틈도 없겠지. 걱정하진 마. 우리 궁기병대만 믿으라고.”
“든든하네. 잘 부탁하지.”
우수한 궁기병대와 든든한 중보병대의 결합. 엘프족의 세 왕국 가운데 중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은 타위비크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우리를 잊으시면 곤란하지, 형님.”
“바쿠란, 네 녀석도 왔군. 이에바는 어쩌다 함께 온 거야? 아버지를 도와서 영지나 지키지.”
“아무리 영감님이 됐어도 우리 아버지가 영지도 못 지키겠어? 가서 최대한 연합을 도우라고 하더라고. 지분을 확보하라고.”
지분, 확보. 바쿠헨에겐 묘하게 와 닿는 느낌의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망상은 고이 접어 버렸다.
“말 좀 잘해 봐라. 무슨 말인가 했네. 연합에서 우리 영지 지분을 확보하란 말이잖아.”
“아, 엉, 그랬지.”
역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바쿠란의 표정에 고개를 젓는 바쿠헨. 그러나 동생의 얼굴에 묘한 빛이 스치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이윽고, 바쿠란과 이에바가 속도를 내어 앞으로 달렸다.
“이랴!”
“오랜만이군, 바쿠란.”
“오, 공주님. 건강하셨네. 바쿠헨 형만 만나 주더니 나한텐 얼굴도 안 보여 주기 있어?”
“말 모는 데 집중 안 하는 건 죄다, 죄.”
“풉…….”
역시나 특유의 그 서글서글함으로 그 딱딱하고 변함없던 아빌리스에게 이 정도 반응을 끌어내는 건 바쿠란의 특기였다. 처음엔 마법으로 독심술이라도 쓰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우리 동료, 네마냐 경이 그렇게 위기라던데. 상대가 고블린 본대인 건가?”
“아마 그럴 거다. 적 병력만 족히 4만은 넘어간다고 하니까.”
“세상에. 겨우 1만 1천인 이 병력으로 그런 놈들을 상대하러 간다는 거야?”
“우리가 조직력만 잘 유지하면 시간을 벌 정도론 충분히 싸울 수 있다. 어차피 이길 생각은 하지 않았어.”
더군다나 여기서 위험을 감수하고 적을 대거 없애 봤자다. 바쿠헨은 차마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적의 본거지, 그러니까 저 얼어붙은 산맥 어귀엔 여전히 이곳의 본대와 맞먹는 대규모 병력이 있을 터였다.
“아빌리스.”
“됐어. 괜히 말하지 마. 사기만 떨어져. 지금은 놈들을 틀어막고 아군을 구할 생각이나 하자고. 힘 빼지 말고.”
그 말은 바쿠헨 자신이 내린 정확한 답과 같았다. 결론적으로 연합군 본대의 대패로 말미암아 냉정한 판단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
‘그렇군. 잠시 뜻하지 않은 대승리는 있었지만 우리 순수 군사력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지. 키메라가 없었다면…….’
데브락, 그 어마무시한 덩치와 파괴적인 힘을 기억했다. 오그르 하나에 창병이 여럿이 들러붙어도 힘을 쓰지 못하던 상황도. 다른 변수의 개입 없이 인간만 투입하려면 대체 얼마의 희생을 내야 이길 수 있을까?
“이대로라면 이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큰 피해는 면할 수 없을 텐데, 걱정이야. 분명히 오그르 삼대장 중에 아직 1인자는 남아 있을 텐데…….”
“삼대장 걱정을 왜 하고 있어. 어차피 그 주변의 오그르 부대도 뚫지 못할 텐데.”
“켁, 너무하구만!”
바쿠헨과 아빌리스가 허물을 벗고, 비장한 이야기를 농담처럼 주고받은 참이었다.
“공주님, 소영주님! 적입니다!”
저 멀리, 남쪽으로 적정의 관찰을 위해 보냈던 척후가 돌아왔다. 그것도 긴급한 부름과 함께.
“적입니다, 아주 엄청나게 많은 적이요!”
“예상했어. 놈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나?”
침착하게 고삐를 잡은 채로 아빌리스가 물으니 전령이 과연 그렇다고 답했다. 왠지 이 녀석이 더 빨리 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미 멀미가 돌던 바쿠헨은 조금 바짝 허리를 잡았다.
“미안하군. 멀미가 조금 생겨서.”
“……멀리 산을 보고 있어, 그럼. 좀 나아질지도 모르니까. 빨리 가도록 하지.”
“으응.”
어쩐지 사촌격 되는 이종족의 귓전이 붉게 물든 것이, 이 녀석도 여간 힘든 게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이 드는 공자님이었다.
“이 앞을 어디라고 하지?”
“글쎄…….”
예전 같았으면 불쑥 잘 대답했겠지만 어느새 접어든 이 어두운 잿빛 숲에는 곳곳으로 물이 들어와 고여 있었다. 이런 늪지대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래, 이런 잿빛 늪지대라면 망각의 늪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면 되겠군.”
“망각의 늪……. 뭐, 뜻은 좋군.”
그렇게 고삐를 고쳐잡는 엘프군의 대장 공주. 과연 이 늪이 전사자들의 기억을 품은 채 잠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늪 자체를 기억에서 지워 버리길 원하는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을 노릇이다.
“자! 이제 보병대는 방진을 짜자. 대신 우리 궁기병대가 놈들에게 제대로 된 매운 화살 맛을 보여 주도록 할까!”
“좋습니다!”
안 그래도 고블린 군단 때문에 이 먼 길을 와야 한다는 것 자체에도 분노한 상태였던 엘프군. 이제 분기탱천한 저 화살을 거대한 몸뚱이로도 막아 낼 수 있는지, 시험에 오를 예정이었다.
* * *
―슝!
―슈슝!
―퍼퍽!
“끄에엑!”
“아프다, 아파!”
“방패를 써, 이 머저리들아!”
엘프군의 화살은 무척이나 따가웠다. 워낙 제련기술이 뛰어나 예리한 화살을 만드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뜨뜨! 으아!”
“불화살이다, 불화살이야! 얼른 물을!”
“여깄다, 여기! 으아악!”
곳곳에서 불에 몸 절반이 타오르거나 얼어붙는 병사들마저 속출하고 있었다. 괜히 타는 불을 끄려고 물을 부으면 폭발하여 주변 병사들까지 휩쓸어 가고, 얼음을 녹이려 들면 부러져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놈들에게 이렇게나 무서운 화살이 있단 말이냐!”
분노한 족장의 호령. 위대한 오그르 지도자를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는 오그르 근위대가 철통같이 둘러쌌다. 오그르 지휘관 하나가 급히 다가와 보고했다.
“군장! 엘프입니다!”
“엘프. 그래, 엘프의 화살이었군. 어쩐지 생김새부터가 요망하다 싶었다.”
지휘관이 바친 화살을 집은 우레이미야는 나뭇가지라도 꺾듯, 그 단단한 화살을 부러뜨렸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음성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오늘 여기서 엘프들에게도 계시가 무엇인지, 진정한 대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어라!”
―와아!
우레이미야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고블린 무리의 함성이 가득 지상과 하늘을 메웠다. 무려 군단의 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3만여 군단의 위세였다.
“진영 정면과 측면으로 거리를 띄워 고블린 1개 대대씩을 둘러 엄호하라!”
“고블린!”
이름은 고블린 군단이라고 했지만, 적자생존의 원칙이 강하게 적용되는 우레이미야의 사회에서 불변하는 건 없다. 고블린들은 오그르의 안전을 위해 진영 가장자리에 1개 대대, 500명씩 배치되어 주위를 둘러쌌다.
“고블린들이 화살을 받아내는 동안, 너희 오그르들은 그 목숨값을 다해라! 전진!”
―우, 우!
이제 군단은 완전히 고블린, 오그르의 두 분류로 나뉘어 고블린은 상당한 푸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일에선 오그르가 고블린 대신 투입되었다.
“대열을 흩트리지 말고, 계속 나란히 전진해라! 놈들 궁기병은 대단히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전진!”
“쏴, 더 열심히 쏴!”
지기라도 할세라 엘프 궁기병들도 열심히 매서운 화살을 날렸다. 어지간한 고블린들은 한 대라도 맞으면 죽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그르를 쓰러뜨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고블린을 겨냥하지 말고, 오그르를 쏴, 저 덩치를 쏘란 말이다! 특히 투구가 화려한 놈들 위주로!”
“쏴!”
흔들림 없이 일정한 리듬으로 전진하는 오그르 창병대. 움찔하며 목이 쉬도록 쏘라고 지시하는 엘프 간부의 지시에 다시금 활이 울었다.
“끼엑!”
“흐읍!”
오그르들에게 속성 마나가 실린 화살이 재차 날아들었다. 어지간한 장력의 활로는 쏠 수조차 없을 무거운 화살인지라 자체 파괴력도 만만치 않았다. 애써 신음을 참는 오그르들은 단순 화살 이상의 피해를 참아야 했다. 두어 마리는 이따금 쓰러지기까지 했다.
“젠장할. 도대체 화살을 몇 발이나 맞아야 쓰러지는 거야?”
“인당 이백오십 발은 가져온 것 같은데. 이걸로는 다섯 마리밖에 못 잡겠네.”
놀라움과 불만의 감정이 궁기병대에 내려앉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오그르들은 방패와 갑주도 제법 훌륭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와!”
“죽여, 엘프!”
“으앗, 어느새!”
한참 오그르를 공격하려니, 그들을 엄호하는 고블린들이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었다. 수풀에서 달려드는 고블린들에 엘프들도 순간 얼어붙어 대응하지 못했다.
―서걱!
“큭!”
“공주님!”
피가 묻어난 칼을 털며 아빌리스가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신속한 통제가 생명인 궁기병 부대엔 꼭 알맞은 명령이었다.
“오그르에게만 시선을 집중하지 말고 제대로 주변 경계해, 정신 차려!”
“네, 넵! 감사합니다!”
궁기병들의 임무는 전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적에게 소소한 피해를 주고 끊임없이 신경을 자극하고 집중을 흐트러트리는 것이다. 그러면 주력이 되는 병력으로 유리한 기회를 노릴 수 있을 터였다.
“자, 모두들 후방 타위비크군 쪽으로 천천히 물러나면서 좌우로 놈들을 끌어들여라! 언덕 위로!”
“놈들이 물러난다, 추격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우레이미야는 그대로 온 힘을 다해 적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소리를 들은 페넬로파는 잠시 망사를 걷고 경고를 남겼다.
“무리하게 파고드는 건 좋지 않아, 대오를 맞추면서 마저 전진하는 게 좋아. 더군다나 타위비크 군이…….”
“그러니까 맘대로 펼쳐 보라고 하는 것이다. 난 적의 방진을 뚫어 보고 싶거든.”
“정말, 못 말린다니까.”
하지만 페넬로파도 말릴 생각은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피식 비웃음을 짓고는 망사를 다시 내리고 평소대로 돌아갔다.
“맘껏 날뛰어봐. 우리 마법사와 마도사 고블린들이 힘껏 보조해 줄 테니.”
“든든하군.”
목에 줄을 걸어 둔 파이프의 연기를 힘껏 들이마신 우레이미야는 픽스에서 뛰어내렸다.
“자, 이것들아, 가자! 오그르의 첫째 대장, 우레이미야가 나가신다!”
* * *
―퍼퍽!
―히히힝!
말과 엘프, 창과 사람이 몇 쌍씩이고 할 것 없이 날아갔다. 연이어 허공을 가르는 도끼가 매서웠다.
“이, 이 괴물 놈!”
“우하하, 맘껏 떠들어라!”
애써 무기를 들어 막으려고 하는 용감한 병사도 있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상대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휘둘러대는 거대 오그르였다.
“족장이 선봉이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이 뒤에 있는 게 말이 되나!”
“안 된다!”
우레이미야는 워낙 덩치가 큰 녀석답게 사방에서 누구나 그의 날뜀을 볼 수 있었다. 휘두르는 녹색 빛의 도끼에선 연신 흉흉한 기운이 쏟아졌다.
“으아악!”
“살려 줘!”
동강 나 버린 부상병이 급히 후송되지만 어떤 치료법을 써도 도통 먹히질 않았다. 급하게 이 보고까지 올라오자 전투가 한창 중임에도 바쿠란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놈들도 만만치 않게 강한 힘을 가진 모양인데. 어렵겠어.”
“맞아. 저기 저놈. 녹색이라기보단, 정확하겐 검녹색 오라가 나오는 도끼를 휘두르지. 저놈 말이야.”
그것이 우레이미야인 것을 알 리가 없는 타위비크의 두 공자는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보병 방진은 역시나 잘 버티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고블린 군단 역시 머리를 잘 쓰고 있었다.
“모두 방패를 세워! 귀갑을 펼쳐라!”
“엘프군이 화살을 쏜다, 닫아!”
고블린에 발목이 잡힌 병사들만 제외한 나머지는 재빠르게 자신의 방패로 하늘과 측면, 전면을 가렸다.
―퍼퍼퍽!
―끄으윽!
수많은 신음성과 함께 생명체 수십이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그와 함께 보병대의 압박은 잠시 해소되었다. 하지만.
“더 덤벼라, 이 졸개들아!”
―뻑!
더 성난 오그르의 전사는 닥치는 대로 적을 베어 넘겼다. 그 힘찬 휘두름에 강철로 만든 방패조차 두 조각이 나고 그대로 병사는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제길! 바쿠란, 마법으로 원호는 안 되겠냐?”
“이미 하고 있어!”
바쿠헨이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자, 이미 그쪽도 격전 중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바쿠란은 적의 복잡하고 강력한 대규모 마법식을 해체하는 중이었다.
“저 새끼는 진작부터 눈독을 들이곤 있는데, 조금이라도 내가 움직이면 저 검은 마탑주가 그대로 병력을 날려 버릴 거야!”
“제길, 제대로 물리다니.”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놈들이 우왕좌왕 궁기병에 몰려 좌우로 넓게 흩어져야 했다. 그리고 최대한 시간을 끈 궁기병대가 천천히 물러나면 이들이 휴식하는 사이, 보병대가 방진으로 버텨 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머리가 굴러가는 놈인 걸 모른 우리 죄지.”
“조심하십시오, 공자님!”
이에바는 이제 바쿠란의 앞으로까지 달려오는 고블린 병사를 베기 시작했다. 방진의 상당수는 이미 무너졌고 마법사들 중에도 이미 부상을 입어 후송된 경우가 속출하고 있었다.
“대열을 유지해!”
“유지는 시키겠습니다만, 사기가 요동칩니다. 이대로라면…….”
“미크라야크 군이 움직인다더니, 이거 허풍 아니야? 하다못해 바난드의 군대라도 제때 도착했어야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버티지 못할 줄은 그 누구도 계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타위비크의 뜻하지 않은 대승으로 미처 헤아리지 못한 자신들의 탓인 것을.
“크오오오!”
“놈들을 밀어붙여! 늪지대로 밀어붙여라!”
“픽스 기마대, 좌우 설산으로 진입해서 놈들을 따라서 늪까지 들어가라!”
―두두두!
“놈들 기마대가 움직인다!”
“전방, 전방! 놈들이 힘으로 밀어붙인다! 버텨야 해! 이쪽 뒤는 늪지대야!”
아우성이었다. 정신없는 사이에 어느덧 부대는 좌측을 더 거세게 몰아붙인 고블린 본대에 몰려 있었다. 그 덕분에 퇴로가 될 후방은 사라지고 등 뒤로는 이 우울한 잿빛 늪지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면 돌파합시다, 소공자님! 이대로 적이 원하는 대로 포위당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이에바가 점점 호위대와 함께 전방으로 나서 적을 틀어막으며 꺼낸 최후의 선택지였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포위망을 돌파하는 선택지. 바쿠헨은 점점 힘겨워하는 바쿠란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방법은 없는 것 같군…….”
그리고 이내 손을 들었다.
“모두, 내 주변으로 모여라! 이대로 일점을 돌파해서 포위망을 벗…….”
사실상 또 한 번의 대패가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
―부우우!
“나팔 소리.”
고블린들의 것이 내는 그 음정 불안하고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갈한 장인이 물소의 뿔을 가공해 그럴듯한 소리를 내는 악기였다.
“누구야, 어디서 나는 소리지?”
“아빌리스의 신호인가?”
“아니. 엘프족의 나팔은 아니야. 이건…….”
남쪽에서 나는 소리. 전장에서 뼈가 굵은 바쿠헨은 알 수 있었다. 남쪽에서 나는 이 나팔 소리라고 한다면, 그건…….
“왔구나!”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순간의 판단이었다. 안도감과 함께 고블린들이 일시에 혼란에 빠진 장면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부우우!
힘차게 울리는 나팔. 물에 잠겨 버린 동쪽의 옛 도로였던 늪지대는 버렸다. 서쪽의 좁은 산길을 멀찍이 돌아온 바난드의 군사들은 잔뜩 벼르던 무기를 붙잡았다.
“요란하게도 잘 부네.”
“감사합니다!”
네마냐의 칭찬을 받은 나팔병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더니 곧 돌아갔다. 웃음기를 빠르게 날려 버린 바가반드의 백작은 곧 검을 들고 언덕 아래를 바라보는 공주에게 다가갔다.
“엘레나. 준비는 끝난 모양이지.”
“음. 드디어 이런 날이 오네. 감개무량하게.”
“바라던 바지. 그동안 허섭스레기만 잡느라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뿌리를 때려잡자고.”
그리곤 하늘 위를 들여보았다. 날개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리는 거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 키메라?”
별 대답 없이 키메라는 한참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 싸움은 쉽지 않겠어.’
그러나 바로 그런 일전을 이들은 바라왔었다. 심지어 네마냐는 인생을 회귀하면서까지.
“자, 출발하지. 바가반드군은 준비가 다 되었답니다, 전하.”
“바가반드뿐만이 아니지. 온 바난드, 온 성국, 온 고원이 한마음으로 달려가야지.”
굳은 다짐의 표정을 끄덕이며 교환한 두 사람. 이어 우렁찬 기합과 함께 칼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아래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네마냐의 사자후가 다시 한번 지친 병사들의 피로를 덜고, 능력을 높였다.
[우리 형제와 이웃을 죽인 놈들이다. 손에 사정을 두지 말고 보람차게 싸우자! 우리 고향의 운명이 이 싸움에 걸렸다! 마나의 수호자 키메라가 우리를 굽어본다!]
그렇게 바가반드 군 3천 명을 포함한 1만 명의 바난드 군은 키메라의 수호 아래 언덕 아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16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