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결전, 망각의 늪 전투 (2)
“지금 당장 아즈디샤드 북쪽으로 병력을 보내 줘! 제국군이 수공에 당한 것 같아, 얼른!”
“아, 알겠어! 조금만 버티고 있어.”
다급한 말과 함께 꺼진 통신구를 하라드가 옷깃으로 덮어 감추었다. 네마냐는 미처 끝나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키메라의 등덜미에서 뛰어내렸다.
[조심해라, 친구. 주변에 당장 고블린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만.]
“조심할게.”
미끄러지듯 뛰어내린 네마냐의 두 다리는 이내 허벅지까지 차오른 깊은 물에 빠졌다. 첨벙 소리에 순간 네마냐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나마 물이 너무 깊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이봐, 생존자 없나? 누구라도 살아 있으면 소리를 내라!”
고래고래 사방을 향해 소리를 외치는 네마냐. 하지만 소리는 물에 흡수라도 되는 듯 잘 퍼지지 않았다. 흡사 예전에 겪은, 방음 처리된 녹음실에라도 들어간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흡수되는 것 같은데. 하라드!”
“어, 왜…… 으악!!”
차가운 물에 뛰어든 하라드가 움찔거리며 급하게 대답하려다 깜짝 놀랐다. 숲속에 가득한 잿빛 물이라 위에서 볼 땐 몰랐는데, 둥둥 떠다니는 시체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실프! 실프를 좀 소환해 줘. 소리를 넓게 퍼뜨려서 생존자를 찾아야겠어.”
“어, 어…… 기다려 봐.”
급히 눈을 감은 하라드는 실프를 소환했다. 힘을 끌어모은 키메라 역시 소리를 널리 퍼뜨려 주겠다고 했다.
“좋아…….”
배에 힘을 잔뜩 모은 네마냐는 마나를 실었다. 그리고 곧장 기술 목록을 불러왔다.
‘지금 당장 필요한 기술은 아니지만 그만큼 사방에 혹시라도 있을 생존자가 힘을 낼 수 있도록 보태는 기술이라면 쓰는 게 좋겠지.’
[사자후]
[1단계. 병사들의 모든 신체 능력이 +1만큼 증가합니다. 공격 시 피해 1% 가산, 방어 시 피해 1% 감산합니다. 지속 시간 1시간. 재충전 2시간 필요.]
사자후를 고르고 눈을 꾹 감았다. 모든 힘을 끌어모아 입으로 보냈다.
“생존자는 지금 당장 일어나 답하라! 곧 아군 구원군이 온다! 모두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소리 자체도 작정하고 낸 만큼 웅장하고 크게 울렸다. 실프와 키메라의 도움으로 큰 소리는 먼 곳으로 울려 저 멀리 숲속과 산골짜기를 따라 울렸다.
―일어나라
―……어나라
―……라
그렇게 메아리를 탄 자신의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것을 들으며, 한동안 네마냐와 일행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머물렀다.
―첨벙!
“뭔가 느껴지는 기운이라도 있어, 영주님?”
“아니. 혹시 모르니까 성녀님은 계속 키메라 위에 두도록 하자.”
“그러지.”
그렇지 않아도 위험을 느낀 성녀는 통신구로 열심히, 후방에 구원을 요청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해 주고 계시니깐.”
“그래. 우리는 좀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자. 너무 차가워서 힘은 들겠지만.”
“이가 시리네, 진짜.”
“조금 더 찾다가 안 될 것 같으면 근처 뭍에 가서 후방 병력을 기다리자.”
그렇게 두 사람은 차가운 물 속을 대략 십여 분 동안 뒤졌다. 하지만 어디서도 사자후에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허무할 정도의 침묵이었다.
“젠장……. 제발 지랄만 하지 말라고 했더니 정말 난장판을 만들었군.”
아직도 선명하게 흘러나오는 비속어는 네마냐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였다. 그때였다.
“그으…… 쿨럭!”
“……!”
깊은 덤불과 나무가 켜켜이 가린 어두운 공간 사이로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첨벙대며 다가간 네마냐는 덤불을 칼로 베어냈다. 바위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공간이 유일하게 물에 젖지 않은 채 드러나 있었다.
“당신은…… 니키타스 제독?”
“으…… 고블린인가?”
피를 잔뜩 뒤집어쓴 탓에 인간인지도 알기 어려운 생명체. 상태가 심상치 않단 걸 눈치챈 네마냐는 재빨리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제독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코를 확인했다.
“……휴, 다행히 살릴 순 있겠군. 살아난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여분의 목걸이로 마련해 둔 백수정의 마개를 입으로 깨물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깨끗한 백색 마나의 기운이 쏟아졌다. 인사불성이던 장군에게로 그 치료의 힘은 그대로 흘러 들어갔다.
“으으……. 당신은 적이 아니군.”
“당연하지. 내가 고블린이었으면 바로 당신 목을 베어갔을 테니까. 끙차!”
네마냐는 힘을 내어 제독을 일으켜 부축했다. 다른 쪽에선 하라드가 용케도 살아남은 병사 일부와 만난 모양이었다. 뭐, 목소리로 보아하니 살아남았다기보단 도망친 거겠다만.
‘위기의 순간에 도망칠 결심을 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
그렇게 타위비크의 대승리로부터 정확히 스물세 시간 뒤. 네마냐와 하라드, 성녀의 삼인방은 연합군의 철저한 대패를 확인한 첫 번째 목격자가 되었다.
* * *
―두두두!
제국군에게선 연락을 주기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제눌트는 본능적으로 이상을 느끼고 서둘러 전방으로 내달렸다.
“아니, 이건!”
“이 북쪽으론 온통 진창과 수렁이 됐습니다. 더 움직이기 곤란합니다.”
“설마, 선봉 부대가 수공에 휩쓸린 건가.”
제눌트와 호위기사들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군마들이 위기를 느끼고 멈췄다. 한동안 계속 먼 곳을 보았지만 풀숲엔 가득 들어찬 물만 찰랑거릴 뿐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고요함, 비슷한 느낌을 제눌트도 얼마 전 느낀 적이 있었다.
“이럴 수가, 어서 선발대의 행적을 찾아라! 모두 흩어져서 찾아봐!”
“안 됩니다. 지금 어딘가에 고블린 놈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윽…….”
고블린 매복군 이야기에 움찔하는 제눌트. 하지만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악문 장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도록 했다.
“좌우로 나뉘어서 멀찍이 아직 잠기지 않은 오솔길을 통해 우회하자. 분명 근처에 제독의 본대나 탈영병이 있을 것이다.”
“예!”
“아니야! 함부로 흩어지면 안 돼!”
갑자기 허공에서 들리는 소리에 제눌트와 기사들은 황급히 고개를 들곤 깜짝 놀랐다. 갑자기 완전히 해를 가려버리는 그림자가 일행을 완전히 덮었기 때문이다.
“바, 바가반드 경, 무사했소?”
“당신도 있었군, 제눌트. 어떻게 된 거지?”
키메라는 연이어 날갯짓을 멈추고 바닥으로 내렸다. 발치에 매달려 있던 네마냐는 피에 잔뜩 젖은 누군가를 어깨동무하며 내렸다.
“우리는 후발대로 후방의 보병들을 엄호하며 따를 예정이었네. 그런데 어느 순간 선발대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너무 거리가 멀어졌지.”
“제독이 너무 휘말렸어, 젠장. 조속한 종전을 요구하는 입장과 야전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휘말렸으니 이 꼴이 났지.”
네마냐의 부름에 기사 하나가 달려가 확인했다. 제국 출신인 그 기사는 이 피투성이 부상자가 제독임을 알고 급히 후방으로 옮겼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겁니까?”
“타위비크에서 승리하고 재빨리 주변 영지를 더럽히던 고블린을 처리하고 있었지. 그러다 엘레나한테서 온 연락을 받았고.”
“그래…….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것 같은데 어떤가? 생존자는 좀 많이 구했나?”
제눌트의 물음에 네마냐는 힘없이 고갤 저었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물에 잔뜩 젖은 채 반쯤 죽다 살아난 전사들일 줄줄이 하라드의 인도 아래 따라오고 있었다.
“쓰러지면 안 돼요, 참아요!”
“으……. 고맙습니다.”
성녀는 틈틈이 부상이 심한 사람들을 즉석에서 치료하며 뒤따랐다.
“총 생환한 사람은 200명 정도. 부상자 160명에 멀쩡한 사람은 채 오십 명도 안 되고.”
“말도 안 돼! 기병으로 제독을 따라간 병사만 4천이 넘을 텐데. 그리고 뒤이어 합류한 보병도 거의 2천은 될 테고.”
“저 너머를 아직 못 봤지?”
네마냐는 자신의 뒤편으로 시야를 가리고 있는 관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곤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끔찍한 광경이니까. 6천 명이 몰살당한 장면은 평생 잊을 수가 없는 재앙이지.”
“맙소사, 그럴…….”
“말리지 않았어? 아니…… 말려도 어쩔 수 없었겠지. 정말 엿 같군.”
제눌트의 탓을 할 것도 없었다. 모든 돌아가는 상황이 통제 가능한 영역 밖에 있었으니 누구의 탓을 하랴. 그보다 시급한 것은 아직도 이 지옥을 향해 걸어오는 제국군 보병대를 막는 것뿐이었다.
“오는 길에는 아직 고블린 매복대가 없었지?”
“어, 아, 네 그렇습니다.”
자연스럽게 명령조가 된 네마냐의 말에 제눌트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네마냐는 잠시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고민에 빠졌다.
‘어떡한담. 생존자를 좀 더 찾으려면 여기 머물러야 할 텐데, 만약 고블린이 다시 남하한다고 하면…….’
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네마냐는 손뼉을 쳤다. 해결책 하나가 비로소 머릿속에 떠올랐다. 곧바로 하라드에게 다가가 통신구를 받아왔다.
“무슨…… 일이오, 바가반드 경?”
“지금 우리가 생존자를 구출해야 할 텐데 고블린을 이대로 여기서 상대할 수는 없어. 특히나 핵심 기병대를 몽땅 잃은 상태에선.”
“그럼 어떻게…… 포기할 생각이신가?”
“물론, 그렇게 해서도 안 되겠지. 제국군을 여기서 팽개치고 떠나면 아마도 제국은 아예 군대를 철수시킬지도 모르니까.”
고블린 전쟁의 중요한 축이 여기서 지레 빠지게 할 수는 없다. 뭐, 이미 제국 내부에선 철병론이 부각하고 있었기에 니키타스가 더 서둘렀다는 걸 모를 네마냐는 아니지만.
“그래서, 불러야죠.”
“뭐를?”
“이럴 때 쓰라고 연합군이 있는 거니까.”
그리곤 통신구를 열어젖힌 바가반드의 백작은 동시에 두 곳의 통신구와 연결을 개방했다.
“아, 미리 기다리고 계셨군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아…… 별 이야기를, 지직…….”
“통신 상태가 별로입니다만.”
잠시 지직거리던 한쪽의 연결은 곧 정상화됐다. 뭐라 투덜거리던 중년의 남자는 털가죽 옷을 어깨쯤에 걸친 채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 보아하니 엘프 중왕국과 타위비크 영지와도 연결한 모양이군. 정말 사정이 그렇게나 급한 건가?”
“좀……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단 사정이 급해서 연합군 대표로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리게 됐습니다.”
“무사한 거야, 네마냐? 갑자기 엘레나 전하께 연락이 와서 놀랐다고.”
다급해 보이는 바쿠헨의 물음에 정작 멀쩡한 네마냐는 머쓱하게 그렇다고 답했다. 바쿠헨의 옆에는 아빌리스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침착하게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지금 고블린 놈들이 수공으로 제국군에게 큰 피해를 줬습니다. 선발 기병대가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했습니다.”
“…….”
통신구 너머에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슴바트는 헛기침과 함께 존재감을 드러냈다.
“흠, 거 참 안 된 일이군.”
“사상자는 얼마나 되지? 적의 병력은?”
아빌리스가 오랜 침묵을 뚫고 꺼낸 질문은 꽤나 날카로운 현실적인 문제였다. 잠시 망설이던 네마냐는 솔직한 숫자를 발표했다.
“사망자는 대략 기병, 보병을 합쳐 6천이 조금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저와 제장들이 지휘하는 병력은 보병 중심으로 2만이 좀 넘습니다만, 적 고블린은 머릿수만 4만은 될 테니…….”
“거기다 우리 엘프군이 중간에 마주쳤던 막대한 고블린 지원군도 있었지.”
“그걸 걱정하고 있죠.”
암담한 이야기였다. 그나마 이렇게 되었으니 정치적 부담이나 명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다행인지야 모르겠지만. 나중에 내놓을 대가를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프군.’
그래선지 조금 전부터 연신 헛기침을 해대며 은근 존재감을 드러내는 슴바트는 일부러 모른 척하는 중이었다.
“그래, 그럼 나자리안 백작이 생각하는 건 우리가 적 고블린의 이목을 끌어주길 바라는 거겠지, 그렇지?”
“우리 군이 아군 생존자와 유해를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게끔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놈들이 지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기병대가 덮쳐오면 막기 어려울 겁니다.”
이제야 간신히 늪지대 외곽에 도착하는 보병대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소수의 살아남은 패잔병과 처참한 총사령관의 모습까지 더해지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잠시 침묵이 이어진 끝에 통신구에서 두 세력의 응답이 순서를 두고 전해졌다.
“좋아. 타위비크와 엘프 중왕국 군대는 이 길로 계곡을 나가겠어. 놈들의 퇴로를 막는 곳이니까 녀석들도 회군할 수밖에 없겠지.”
“타위비크 군 5천 명과 엘프 병력 1만을 더하면 고블린 군단도 전력으로 맞서야 할걸.”
타위비크 군은 숫자는 많진 않아도 하나하나가 기사에 맞먹는 유지비를 들인 중보병 중심. 엘프는 역시나 엘프답게 궁수, 특히 기마궁술로도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종족이었다.
“고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 4만, 어쩌면 5만도 훌쩍 넘을 고블린을 정면에서 싸운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나서 주겠다는 것이니, 이쪽 대표인 네마냐로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폼은 좀 쟀지만 나 역시 동포와 이웃이 죽어가는 건 원하진 않지. 우리 경보병을 동원해서 적의 측면과 사방을 공격하도록 하겠네.”
“미크라야크에서도…… 감사합니다!”
비록 꿍꿍이는 있을지라도 지금으로선 험지에서 빛을 발한다는 미크라야크의 경보병대 역시 절실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슴바트는 섬뜩한 단서를 남겼다.
“하하…… 나 역시 연합의 일원인데 뭐. 대신 나중에 대가는 제대로 받도록 하지.”
“……어찌 되었든 하야스단 사람들은 슴바트 전하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겁니다.”
“음.”
“그런데, 네마냐.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생존자와 사망자 유해 수습을 지휘할 건가?”
바쿠헨의 질문. 네마냐라면 마치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듯한 태도였다. 잠시 영상구 속 그를 바라본 네마냐는 씩 웃음을 지었다. 실제 만나서 알고 지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니. 곧 입을 열어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그럴 리가. 이대로 우리에게 승리했다는 결과를 넘겨줄 순 없지. 전투의 패배는 있을 수 있지만 전쟁의 패배는, 적어도 우리 고향에선 멸망과 같은 말이거든.”
그게 한국이든 하야스단이든 간에 말이지. 네마냐는 굳세게 다시 한번 주먹을 쥐었다.
“원래 목적은 아니었지만, 오늘 고블린과 다시 결전을 벌여야겠어. 그래야만 이 전쟁이 끝나더라도 우리가 다시 뭉칠 수 있을 거야.”
아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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