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결전, 망각의 늪 전투 (1)
제국군은 총사령관 니키타스의 지휘 아래 재빠르게 켈리도니온 지역을 벗어났다. 한참을 달린 제국 선봉대는 기병 4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진영 중앙을 이루는 보병 중심의 3만 병력은 그대로 발이 묶인 상태였다.
“이익! 우리도 최대한 속도를 높이자!”
그나마 중앙의 보병대 중심 진영도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후열에서 엄호하기로 한 제눌트 외 일대 지리에 익숙한 연합군 병력과 분단되어 버렸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놈들의 진영 앞에 도착해서 싸우고 있으면 자연스레 합류할 것이다! 우선 놈들의 발목을 잡아!”
누구보다도 조급한 마음에 최선두에 선 제독은 자신의 군마가 지치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계속 재촉했다. 병사들도 덩달아 다급해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내달리는 일행은 순식간에 최전선인 다르빌 본성은 물론, 아직 고블린에 함락되지 않은 마지막 망루까지 지나쳤다.
“제국군, 멈추시오! 여기서 북쪽으로 더 가면 안전지대 바깥입니다!”
“옳거니, 이제 목표에 다 왔구나. 거의 다 왔다, 얘들아! 조금만 힘내라!”
자신조차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제독은 도박 주사위라도 던진 듯 고삐를 놓지 못했다. 숨이 벅찬 말과 기병은 무언가를 발견할 때까지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음…… 저건!”
“정지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저곳은 고블린 진영이 근교에 있다는 아즈디샤트의 요새일 겁니다.”
“그래, 모두 정지하도록 해라.”
나팔 소리와 징 소리 등이 시끄럽게 울렸다. 병력이 일제히 정지하고 말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척후대를 불러서 이 근방 어디에 적의 숙영지가 있는지 찾도록.”
“예!”
“일단 그동안이라도 뒤따르는 병사들이 최대한 합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진영이 너무 길게 늘어져서 그게 조금 걱정입니다만…….”
“괜찮다. 그만큼 적 역시 우리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이동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테지. 최대한 빨리 적을 찾아낸 다음 곧바로 공격한다. 놈들에게 정신 차릴 틈도 주지 마라.”
―두두두!
수십 명의 척후기병들이 재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아즈디샤트의 외로운 성채 위에서 주민과 수비병들이 자신들에게 접근한 제국군을 내려다보았다.
“음, 이곳은 용케 살아남은 상태였군.”
성벽 곳곳이 그을리거나 깨져나간 지점은 있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불과 1년이 안 되는 사이에 이 정도로 방어를 강화하다니 고원 인간들에 대해 감탄한 제독이었다. 이내 말을 몰아 성채로 다가갔다.
“이봐, 그대들은 여전히 성국과 다르빌의 깃발을 신봉하는가? 신앙은?”
고블린 진영 한가운데에 전투의 흔적을 요란하게 남겨 놓았을 정도라면 어느 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들이 적어도 아군이 맞는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독의 물음은 바로 고블린과 구분되는 성국의 신앙, ‘마나교’를 아직 따르는지, 그걸 물은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대기상에 존재하는 마나의 흐름을 따르고, 그것을 도의로 믿소. 옳고 그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소.”
잠시 생각에 빠져 그 진술을 곱씹은 제독은 고개를 이내 끄덕였다.
“음……. 배신자는 아니군. 이봐! 이 근처에 고블린의 본진이 있는 것을 알고 왔다. 어디쯤인지 대략 짐작이라도 하는 게 있나?”
“고블린 군단의 본거지 말이오?”
“그래!”
이내 옷을 뒤집어쓴 누군가와 숙덕이며 이야기하던 대표자가 다시 다가와 무언가를 말해 주었다.
“…….”
“뭐라고?”
“저, 저쪽으로 가면 된다는 겁니다. 저 안쪽 늪지대로 가게 되면 그 너머로 고블린 군단의 숙영지가 있습니다!”
“늪지대?”
손을 들어 알겠다는 표시를 보낸 니키타스는 천천히 군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부관이 말을 몰아 다가오며 물었다.
“장군, 저들은 뭐라고 합니까?”
“흠, 놈들이 늪지대 너머에 진을 쳤다는군. 아마도 숲 깊숙이 진영을 둬서 유사시 대비를 한 모양이지.”
“깊은 숲속에, 그것도 늪지대 너머로 말입니까? 그걸 우리가 공격할 수나 있을까요?”
“힘들겠지.”
숲속이라고 하면 수천이 넘어가는 제국군을 무작정 투입하기엔 길이 좁은 게 분명했다. 게다가 늪이라니. 기병 위주인 선봉대로는 피해를 감수하고 넘어야 할 판이었다.
“놈들이 당황했을 때 재빨리 건넌다면 승산이 없지는 않지. 하지만 놈들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보고 움직여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아, 마침 척후대가 돌아오는군요. 들어보시죠.”
급하게 사방에서 돌아온 척후대가 사령관 등에게 전한 이야기는 성채의 주민들이 알려 준 것과 일치했다.
“그렇단 말이지. 놈들이 그렇게 완벽한 장소에 진지를 차릴 줄도 알고…… 놈들이 대단한 거냐, 아니면 누군가 그들을 가르친 거냐?”
“물론 배신자 인간들이 가르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싸우는 일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본능이 있다고도 하니.”
“쯧, 그래 봐야 야만인일 뿐. 우리는 압도적인 조직력과 조화로 적을 무너뜨린다.”
“물론입니다!”
다짐하듯 완승을 기원한 제독은 다른 전령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른 방면에선 뭔가 특이한 것을 발견한 사람 없는가? 최대한 놈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으면 좋을 오솔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뭐지?”
쭈뼛쭈뼛하며 전령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그를 바라보던 제독은 어딘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고블린과 오그르 부대로 보이는 놈들이 그 진지로 추정되는 숲으로부터 북방으로 벗어나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북방으로 이동한다고?”
“저도 보았습니다.”
“너도?”
제독은 잠시 생각하더니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광경을 보았다는 전령들 넷을 불러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조합한 제독은 모종의 결론을 얻어냈다.
“놈들이 진영을 이탈하고 있다. 놈들이 아직 우리 접근 소식을 알았을 리는 없으니 달아나는 것도 아닐 테지. 그렇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제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두 가지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무엇입니까?”
“첫째는 놈들이 우리를 늪지대에 발목이 잡히게 한 뒤 타위비크 쪽 우리 연합군을 노리는 것이지. 이러면 우린 차례차례 격파당할 테지.”
“그럼 지금 당장 놈들을 뒤쫓아야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바로…….”
“아니, 쉽게 움직여선 안 된다. 이런 험한 지형에서 함부로 결정을 내리는 건 대패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역시나 정치적인 이유로 뜻에 맞지 않는 결정을 내려야 했을지라도, 제국의 명장은 명장이었다. 니키타스는 어째서 고블린이 계속 자신에게 자신들을 진압할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주는 것인지를 의심했다.
“놈들이…… 우릴 유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늪지대를 건너면 매복한 놈들이 우릴 습격하겠지.”
기병으로 늪지대를 빠르게 돌파하는 건 무리수다. 설사 보병대가 오더라도 다리를 놓느라 시일을 보내는 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우회하는 도로는 어찌 되나? 이곳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도로가 있었을 텐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저번에 지리학회로부터 받아 놓은 지도가 있습니다.”
부관은 고이 접어놓은 양피지를 펼쳐 도로를 살펴보았다.
“음……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약 20km 정도 우회하면 됩니다. 대신 여러 갈래 길로 나눠 진군해야 합니다. 길이 여럿 있는 대신 좁아서 일시에 3만 병력이 지나가긴 어렵습니다.”
“……좋군. 거기서부터 우린 빠르게 북진해서 놈들의 후방을 파고들면 고블린 놈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올 수밖에 없겠지.”
아군을 유인하려는 적을 역이용하여 오히려 북쪽으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방법. 자신감이 있지 않은 이상에는 시도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놈들에게 결전을 강요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붙기만 하면 놈들에겐 큰 출혈을 입힐 자신이 있습니다!”
제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정상적으로 전쟁을 진행 중이었다면 우레이미야 족장에게 경각심을 주는 정도로 물러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무조건 한 번은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사 크게 이기더라도 손해는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엔 없겠으나…….’
생각만 하면 답답하지만, 전쟁을 최소한 애초의 목표대로 하야스단의 안전보장을 받고 끝내려면 다른 수가 없다. 이걸 실패하면 황제조차 정치적인 타격을 입는 건 물론, 군부는 혹독한 보복에 직면할 터였다.
질끈.
눈을 딱 감고, 니키타스는 결심을 굳혔다.
“모두 굳게 고삐를 잡고 따라라. 이 한 번의 싸움에 우리와 이 땅의 많은 운명이 가려지리라!”
―와!
―죽음을!
총사령관이 직접 칼을 뽑고 외치는 소리에 감동하여 함께 외치지 않을 병사는 없었다. 그리고 제독 이하 수천 명의 기병은 동쪽의 오솔길을 향하여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펄럭!
“조금 더 빨리, 빨리 가자!”
“왜 그렇게 재촉이야. 위험하니 꽉 붙어 형!”
“그래요. 설마 제국군이 그렇게 함부로 움직이진 않았을 겁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차라리 제가 틀렸길 바라지만 어쨌든 최대한 빨리 가야 해요. 만에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네마냐의 다급한 마음에 응하기라도 하듯 점점 거대한 날개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에 반비례하듯 키메라의 몸은 균형이 흔들리고 바람도 거세졌다.
“윽!”
“마법사! 조심해요.”
“감사합니다.”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보려다 난기류에 키메라가 휘청이니 하라드도 흔들렸다.
“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다르빌 상공이 나타날 거야. 아마 그 조금 더 앞엔 아즈디샤트 마을이 나오겠지.”
“아즈디샤트, 다르빌 시장이 나름 공을 들여 요새화했던 마을이죠. 어쩌면 그 근처에서 니키타스 제독을 만날 수 있겠네요.”
“장군도 여러 전선에서 싸웠을 테니까 더 이상 전진하는 건 위험천만하다는 것도 알긴 알겠죠. 다만…….”
네마냐도 두 사람의 이야기에 동의하는 듯 입을 열었지만 결말은 달랐다. 두 사람과는 알고 있는 정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맞아. 어차피 엘레나 공주가 얘기해 준 건 다 똑같이 들었는데 뭐 다른 일이라도 있어?”
“그건……. 일단 확실해지면 이야기할게.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서.”
지금으로선 괜히 이야기하기 싫었다. 마음이 조여오기 때문에, 혹은 징크스처럼 부정을 탈까 괜한 마음에라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속을 파고드는 불길한 징조는 너무나 선명하게 한 가지 결론을 향하고 있었다.
[타위비크 영지를 지나쳐 무작정 남하하고 있는 대규모의 고블린-오그르 혼성 부대]
[후방에서의 대규모 교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고블린 본대]
그리고,
[긴급 타전으로 엘레나에게서 전해진, ‘제국군, 도로를 타고 후방기동하여 유인하는 적 군단을 궤멸할 것’이라는 메시지]
‘함정이야!’
강렬한 본능이 네마냐의 머릿속을 웅웅 울리고 있었다. 고블린이 이렇게 허술하게 움직이거나 대놓고 움직임을 보여 줄 리는 없었다.
“어…… 그러니까, 응?”
헛되이 다시 지도를 부여잡고 지상을 내려다보던 하라드가 허공에 머리칼을 날리며 의문을 뱉었다.
“왜 그래?”
네마냐가 되묻자, 하라드는 몇 번이고 지도를 들여다본 뒤 눈을 비비며 오히려 네마냐에게 물었다.
“원래 이 아래쪽은 도로가 있어야 하는데? 이쪽에 대규모 습지가 있었나? 아니면 이 지도가 정확하지 않나?”
“뭐?”
“뭐라구요? 습지요?”
성녀와 네마냐도 하라드의 시선을 따라 지도와 지상의 모습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저건……. 제국군이 북상해서 고블린을 유인한다던 그 도로인데?”
“맙소사…… 저긴 강보다 위에 있는 곳인데 어떻게 저렇게 된 거죠? 마법사, 나자리안 경,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명목상 이곳의 통치자이기도 한 트라야브나마저 당황할 정도였다. 그렇다는 건, 이 지역에서 멀쩡한 도로가 침수될 일은 없다는 얘기다.
[늪 한가운데서 역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나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 아마도 이건 대량 죽음의 느낌이 나는군…….]
“이런, 젠장!”
키메라의 이야기에 그동안 참고 있었던 허탈함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네마냐는 재빨리 내려가 달라 부탁했다.
“어서 빨리 내려가 줘! 적어도 생존자라도 있으면 구출해야 하니까.”
[꽉 잡아라.]
그리고 마치 벼랑에라도 떨어지듯 허공에서 키메라는 지표면으로 내리꽂았다. 탑승객 세 명의 비명과 함께 잿빛 흙탕물로 얼룩진 작은 분지는 그 피비린내 나는 운명을 드러냈다.
- 지도로 이어집니다 -
- 15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