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고블린 군단이 소규모 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는 절망적인 보고. 연합군에 가담하지 못하거나 방치된 산지의 숱한 영지들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참 안 된 일이군요.”
“허, 그런 일이…….”
“악랄한 놈들.”
하지만 지금 이 회의장에 나와 있는, 혹은 영지가 충분히 안전한 대영주들은 팔자 좋은 말들만 꺼낼 뿐이었다. 악랄한 놈들이라는 적절한 책임 전가까지. 괜히 옛날 유행어가 떠오를 정도다.
‘정말 적절하군.’
살짝 심사가 비틀리는 광경이지만 네마냐도 굳이 대영주들을 지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고블린 군단의 병력이 압도적이고 강하다는 건 지금 와서 다시 되짚을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얘기다. 겁을 먹는 것도 당연하지. 서준 자신도 처음 환생했을 때 네마냐의 몸으로 고블린에게 얼마나 시달렸던가. 이럴 땐 남 탓보다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다.
‘게다가 언제까지고 키마라스로만 따라다니게 할 수도 없으니까. 합법적으로 다닐 면허를 받아 두는 것도 좋겠지.’
키마라스가 키메라로서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으려면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블린과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 상황이 왔으니, 이쪽도 있는 힘은 모조리 끌어낼 수 있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나자리안 경? 그대 생각에도 우리가 지금 섣불리 움직이는 건 불리하다고 생각하나? 적 선봉과 붙어봤으니 어느 정도 알 것 같은데.”
“당연합니다. 지금 우리가 병력을 섣불리 나눠 봐도 적은 기동력 위주로 우릴 지치게 하고 포위·섬멸을 시도할 겁니다. 아쇼트 왕자의 기사대의 비극은 결코 그들이 못나서 일어난 게 아닙니다.”
“그렇지. 고블린 전투력이 기사만큼은 아니어도 종자나 일반병은 상대가 안 되니까. 하물며 거기에 이야기대로 오그르가 그렇게 계책을 쓸 줄도 안다면…….”
제독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단순히 개인 전투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군요. 이렇게 발이 묶여서야 기껏 연합군을 모은 의미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이래저래 뭘 할 수도 없는 상황이군.”
누군가의 정확한 평가가 곁들여졌다. 물론 모두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고블린 문제를 무시하긴 연합군의 대의명분을 고려해 봐도 어렵다는 것이다.
“다르빌에서 적 본대의 진입을 막은 건 잘못된 건 아닙니다. 우리가 버티고 선 이 뒤쪽은 너른 들판은 물론, 곡창과 인구가 훨씬 많다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부턴 적 본대와 싸워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든지,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죠.”
엘레나의 이견에 어느 변경백 하나는 다른 방법을 덧붙였다. 네마냐 역시 열심히 대안을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묘수란 없다.
‘기책이란 건 역시나 소년만화에서나 나오는 개념이라, 이 말인가.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시스템>도 관심을 안 주네.’
일어선 그대로 네마냐는 잠시 손가락으로 탁상을 두드렸다. 숱한 영주와 제독, 성녀와 엘레나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어렵군, 어려워. <다른 방법>이란 게 말은 쉬워도 이렇게 조건이 제한되어 버리면 힘들지.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다는 게…….’
이런 진퇴양난의 문제에 쉽게 해결책을 척척 내놓는다면 그 대책은 잘못될 확률이 높다. 네마냐 자신조차 한 번에 고블린을 쓸어버릴 만한 대책을 내놓으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것이다.
“지금은 적을 어떻게 이기느냐보다는 어떻게 막아 낼 것이냐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다행히도 기동력은 우리가 부족해도 지켜내는 것만이라면 우리 중무장 병력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네마냐의 몸을 빌린 서준은 두려움에 빠진 영주들 앞에서 강한 독을 쓰기로 했다.
‘강한 독은 곧 극약이 될 수 있으니까. 암피에르 조약으론 금지되어 있어도 어떻게든 적당히 구워삶아서……. 아, 설득 스킬을 못 쓰는데.’
지난 십 년간 금기로 묶였던 키메라를 자신이 먼저 언급한다면 그건 특히나 충격을 주겠지. 그래도 별도리가 있나. 오늘 설득 3스킬을 쓰느라 모든 행동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설마 왕이 되기 위한 야심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영주들도 한번 넘어갔으면 그다음은 무난하게 설득될 테고.’
이미 사방을 쏘다니는 오그르들을 상대하려면 이 전설적인 수호자 성수가 아니면 소용도 없을 정도니까. 조금 망설인 끝에 네마냐가 입을 열었다. 시선은 한쪽 구석에 영문도 모른 채 얌전히 앉은 키마라스와 마주친 상태였다.
“신성한 수호자인 키메라라면 그래도 오그르와 고블린 군단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곤 다시 이어지는 침묵. 시스템은 그사이에 알림을 하나 띄웠다.
[효과 진행 중]
[설득 제3스킬, 압도는 계속 효과를 발휘합니다. 확률은 약해지지만, 이미 설득된 대상은 당신의 이야기를 관심을 두고 들을 것입니다.]
천만다행인 일이다. 하루분 행동력을 모조리 써먹은 값은 한다는 안도감이 들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키메라라…….”
“원칙대로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암피에르 조약 본문에선 엄격히 금지하고야 있습니다만, 예외적인 사항에선 법률도 한결 무르는 게 맞을 테니까요.”
엘레나의 간접 지원. 별것 아닌 듯해도 엘레나의 지위를 생각하면 상당한 도움이 된다. 슴바트 건으로 서먹해졌다가 아쇼트 구출로 다시 어색한 침묵으로 돌아온 상태였기에 반가운 도움이었다.
“마침 잘됐군요. 기왕 성수를 만나러 가시겠다면 나하고 같이 갑시다.”
그런데 정작 예상치 못한 반응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마치 네마냐가 키메라와 놀러 가려는데 따라가는 듯한 가벼운 말투. 주변 영주들이 모두 그 소리에 놀랐다.
“……!”
“저런, 지랄…….”
반쯤 욕설을 뱉어 버린 니키타스야 성격이 충동적이니 그렇다 쳐도, 모임의 사람들 역시 충격에 촛불까지 흔들렸다. 앞선 네마냐의 발언과도 격이 다른 충격이었다.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했기에 이리도 놀라는가? 뒤편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이밀어 발언의 출처를 찾았다.
“성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 흉흉한 전시에 성녀까지 어딜 가신단 겁니까.”
“어허, 마나의 오염을 감시하고 방지하는 책임이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 하야스단은 우리 교단에 있는 걸 모릅니까? 당연히 그 수호자인 키메라도 내가 감당해야 할 소관이죠.”
그랬다. 성녀, 트라야브나. 회의 시작 때는 한껏 무거운 표정이던 그녀는 어느새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암피에르 조약에 관해서 제국과 여러분이 염려하는 바는 나도 익히 압니다. 사실 제국 정부가 나와 교단에 대해서도 시선이 좋지 않은 건 누구나 잘 알죠.”
“어, 어흠.”
제독 니키타스가 적당히 시선을 돌렸다. 특사 니콜라스가 대신 보낸 문관의 헛기침이 회의장에 울렸다. 성녀는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면서 마저 말을 이었다.
“제 전대 종정의 경우는 체포령을 피해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했었으니까요. 상호 불신과 오해를 해소한 지금에야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서 내가 오늘 나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라니요? 성하는 여차하면 마나 오염과 변질을 막을 세력의 수장입니다. 본인의 몸이 혼자의 것이 아니란 걸 인지하셔야죠.”
역시나 엘레나가 바로 따지고 들었다. 바난드 대표일 뿐만 아니라 성녀의 호위를 책임지는 기사단장으로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오해는 말길 바랍니다. 제국은 암피에르 평화 이후로는 마나 교단을 위협하거나 경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제가 보증하지요.”
참사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대놓고 보였지만 제독은 애써 무시하며 성녀에게 자기 뜻을 밝혔다. 이 장면만 봐도 제국군과 제국 정부 사이가 상당히 나쁘다는 건 확실했다.
‘제국 내부에 분열 기미가 심각하다는 건 알았지만 벌써 이 정도라……. 그러고 보니 원래대로면 한 십 년 정도는 지나야 내전이 일어났을 텐데, 이번 세계도 그러려나?’
이야기가 자연스레 제독과 성녀 사이로 넘어가자 네마냐도 자리에 앉았다. 아직 먼 제국의 내전보다는, 트라야브나가 키메라를 불러올 명분을 만들어 내는 게 더 중요했다.
“감사합니다, 제독. 저도 제국에 대해서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우릴 도와주러 이곳까지 오셨으니 저도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해야 할 일’로, 키메라에게 전장의 원조를 요청하는 걸 넣으셨단 뜻이군요.”
“하야크 왕국뿐 아니라 그 이전 고대 제국의 위기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더니 성녀는 눈을 들어 그간 좀처럼 본 적이 없는 키마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손을 들어 이름까지 호명하며 불렀다.
“키마라스 님?”
“에…… 설마 저를 부르셨습니까?”
“응?”
생각지도 못한 지목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아일라와 하라드까지 놀란 모양이었다. 점잖게 앉아 냉수나 들이켜던 우리의 수호자께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적잖이 당황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래요, 키마라스. 이번에 경도 동행했으면 좋겠군요. 에데시온의 그 펠기세스가 수제자로 보냈다면 우리 신성한 수호자를 만날 때 도움이 되겠죠.”
“제가 도움이 될까 그게 걱정입니다.”
젊은 수재 마법사가 타지에서 왔단 소식 정도는 영주들도 알고 있었다. 이래저래 흘낏 쳐다보는 눈길과 관심에 떨떠름한 키마라스는 적잖이 불편한 모양이다. 재밌긴 하지만 괜히 자극을 줬다가 광분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끊는 게 나았다. 키메라는 성수라곤 해도 사람과는 다르다. 드래곤과 같은 ‘몬스터’에 가깝다.
‘지혜로워서 억누를 수 있다지만 들끓는 감정은 제어하기 어려우니까.’
한번 분노하거나 감정에 휩쓸린 성수는 드래곤에 필적하는 파괴력을 발휘한다. 그걸 몇 번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던 네마냐는 곧장 일어섰다.
“그럼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퇴장해도 되겠습니까?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굳이 그럴 것 있나요? 저도 갈 준비는 끝났으니 같이 가죠.”
“끝났다고요?”
로맨스 시대물에서 나올 법한 거대한 치마와 불편한 코르셋과 같은 건 이 세계에 없긴 해. 그래도 여전히 상당히 늘어진 치마와 옷의 모양새는 도저히 당장 키메라를 찾아가고 실전을 각오해야 할 자세가 아니었다. 네마냐의 의아한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성녀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저도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책임을 결코 가볍게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자, 이렇게!”
“어머, 뭐 하는 짓입니까!”
“어이쿠!”
영주와 하인은 물론 예상조차 못 한 성직자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자리에 우뚝 선 성녀가 팔꿈치에 찬 칼을 꺼내더니 치마를 베어 버리고, 이내 겉에 걸친 옷까지 뜯어 버렸다. 염색되지 않은 누런 색의 아마포 로브가 드러났다.
‘정말 괴짜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데까지 괴짜일 필요는 없을 텐데…….’
하여간 전쟁통에도 심심할 틈이라곤 전혀 없는 하야스단의 당황스러운 일상이었다.
* * *
“제정신입니까, 그게 무슨 짓입니까?”
“아이고, 알아들었다니까요. 이래저래 이야기가 길어질까 봐 홧김에 저지른 거예요. 그리고 안에 옷도 다 걸치고 있었잖아요, 숙부!”
아무렇지 않은 대종정의 옹골찬 대답에 지케르니아 신관회의 풍기 담당을 겸하는 가기크 대신관은 제 머리를 감쌌다.
“세상에, 아무리 그런 일이 있어도 위엄으로 다스려야지…… 충동적으로 입고 있던 치마를 베는 신관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답니까!”
“알잖아요. 전임 성자 안도라스처럼 이리저리 제후들에게 끌려다닐 생각은 없다고. 그 사람이 날 선택한 이유부터가 대찬 성정 때문이었는데.”
시종들이 정성스레 묶어 준 긴 머리를 풀어헤친 성녀는 볼멘소리로 불만을 내질렀다. 가기크는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이런 말도 안 되는 난리 통이라면 에스텔라,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그 머저리 같던 변경 고블린들이 언제 이렇게 전문 군대가 되어 인간을 위협하다니…….”
신관이 되기 이전의 이름인 에스텔라라며 친근하게 조카를 부르는 숙부 가기크. 변경 고블린은 불과 5~6년 전, 처음으로 군단이 고향 산지를 뛰쳐나오기 이전에 부르던 이름이다.
“한데, 키메라를 정말 네가 만나서 요청할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다른 몬스터보단 쉽다고 해도 성수 역시 말이 아니라 의식만 가지고 대화를 해야 하니.”
“그 정도 훈련은 받았는걸요. 다만 상대방이 인간에 적대감을 가졌거나, 뭔가 불만이 있다면 어렵겠지만요. 일단 그럴 걱정은 없어요.”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있어요, 그런 게.”
“허허, 참. 요즘 아이들이란.”
가기크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에스텔라, 아니 성녀 트라야브나는 자신의 근처에 있었던 키메라의 존재를 알아챘단 걸.
* * *
“하, 이게 얼마 만에 맡아 보는 바깥 공기람!”
“엘레나 경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확답을 받아놨으니 편안하게 가시면 될 겁니다.”
가벼운 고급 마정석 소재의 갑옷을 두른 성녀가 기지개를 켜자 호위로 따라온 헤누크가 바로 덧붙여 설명했다.
“엘레나의 일 처리는 믿을 만해요. 오지랖이 좀 넓어서 방해가 될 때는 있어도.”
“푸흡……!”
차마 웃어선 안 되는 일이지만 뭐 어떤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고, 주변엔 다 내 동료 아니면 성녀뿐이니까. 이해한다며 트라야브나도 피식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나저나, 이제는 그만 나한테도 위장을 풀어도 되지 않을까? 엘레나에게도 어느 정도 자백을 받아 놨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굳이 키마라스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던 조금 전 광경이 떠올랐다. 네마냐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슬쩍 질문을 돌리며 의중을 확인했다. 답답해진 트라야브나가 기어코 돌직구를 던졌다.
“아이참, 내가 성녀인데 정말 키메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네마냐?”
짐짓 의뭉을 떨어 보지만 이미 확실했다. 트라야브나는 이미 누가 키메라인지를 알고 있다. 하긴, 위장용 이름으로 지었다던 키마라스 자체도 제국어식 표기인 키마이라를 슬쩍 고친 수준이었을 뿐이니. 이러면 자세를 고치는 게 최선이다.
“하하, 이거 참 멋쩍게 되었군요. 신관 제일인자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으니. 하지만 가능하다면 이해해 주십사 말씀드립니다.”
“…….”
“영주 네마냐에겐 문제가 없다네, 대신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복잡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성녀의 눈이 뒤로 향했다. 그간 침묵을 지켰던 키마라스였다.
“그는 나의 친구고, 나는 그의 친구지. 내가 설사 그를 도와준다면 강제력에 의하거나 음모에 속아 넘어간 건 아니야. 순수하게 내가 움직이고 싶어 움직였지.”
“당신…… 휴, 어찌 됐든 중요한 건 내가 알아차렸다는 거고, 당신께선 우리 인간들을 도울 생각이 있다는 거겠지. 맞죠?”
마치 원래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인 양 빠르게 태도를 바꾸는 성녀.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하게 대신관을 대하는 성수.
“당신이 달려왔더라도 나는 똑같이 답을 했겠지. ‘우리들’이 저 산 위에 둥지를 틀었을 때…….”
산, 그러니까 성산 마시스를 향해 키마라스는 손을 뻗쳤다. 제스처가 아주 자연스러운 게 누가 봐도 영락없는 인간의 그것이었다.
“맹세한 것이거든. 평생을 허공에 유랑하는 우리가 모든 생명과 힘으로 당신들에게 축복과 안위를 제공하기로 계약했으니까. 알레시아스와 함께 말이지.”
알레시아스. 또다시 나오는 그 이름. 암흑 에너지와 키메라의 존재도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걸까. 그리고…….
‘거기다 우리들이라. 하여튼 이놈의 세계도, 아랫 사람들의 생활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니까.’
아직도 당면한 문제와는 별 관련 없을 궁금증이 너무나 치솟았다. 그래도 우선은 개인적 호기심보단 해야 할 일이 자신들을 기다린다.
“자, 궁금증이 조금이라도 풀리셨으면…… 죄송하지만 이제 움직여도 될까요. 키메라님의 말씀대로 고지대 인간들에게 도움이 절실한 순간이라.”
“……그래. 그게 내 돌직구 감성에도 훨씬 말이 되고. 안에서 늙은이들과 앉아 있는 것도 사양이고 말이지.”
황금으로 도금한 장갑을 걸친 대신관의 손이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네마냐는 열성적인 새 알바생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적극성은 마음에 드는군요. 그럼…….”
―펄럭!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키메라의 그림자가 지상에 길게 늘어졌다. 이따금 지상을 순찰 중인 기사들이 날아다니는 거대한 몬스터의 정체를 알아보고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세상이 조그맣네. 이렇게 하잘것없는 것에 왜 그리들…….”
“뭐, 나름대로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을 사랑하는 애정의 표현이겠죠. 그게 순애일 수도 있고, 포기하지 못하는 욕심일 수도 있어서 문제지.”
“아니, 형! 성녀 앞에서 무슨 천박한……!”
참다못한 하라드가 태클을 거는 소리도 허공의 요란한 바람 소리에 묻혔다. 그렇게나 빠른 속도로 이들은 고블린이 휩쓸고 간 폐허, 혹은 철수 작전으로 텅 빈 황무지를 날았다.
―중부산맥의 타위비크로!
- 14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