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인간 군대의 기동력이 제한되는 겨울 하야스단 전쟁의 특성. 그 눈밭은 인간 군대의 움직임을 마비시키고 시야 확보, 판단력, 신체적 건강을 앗아간다. 저지대 국가들은 농사가 끝나는 겨울철이 본격적인 전쟁 시즌이지만 이쪽 고원의 인간들은 가을과 초봄만 전쟁을 치러왔다.
“우―!”
괴상한 소리와 함께 휘몰아치는 눈발 사이로 수상한 움직임이 드러났다. 인간이라면 눈조차 뜨기 힘들어 집안에 틀어박힐 날씨였다. 하지만 브레락(Vrerag)에게 800기의 픽스 정예기병을 내준 우레이미야는 걱정 따윈 한 점도 남겨 두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 오그르(Ogre) 종자의 힘은 더욱 빛을 발하지.」
단지 그 한마디와 함께 직접 선봉장이 드는 도끼를 주었을 뿐이다. 브레락은 금빛의 뱀이 자루를 굽이굽이 감아 생동감 넘치는 도낏자루를 굳게 붙잡은 채 호령했다.
“가자, 이놈들아! 허약한 인간 놈들이 처박혀 있으니 우리가 찾아가 줘야지!”
―우하하!
뒤따르는 정예 고블린 기병대가 괴상한 목소리로 연이어 환호성을 터뜨렸다. 사방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타고 그 소리는 퍼져 나갔다. 이들이 찾아온 곳은 대범하게도 인간 영주들의 연합군이 위치한 곳, 켈리도니온이었다.
“성 밖에 있는 것들은 모두 불태우고 약탈해도 좋다! 놈들의 신경을 박박 긁어라!”
“쿠흐흐……. 약탈, 방화, 파괴!”
그동안 잡병들도 인간들을 잡아 죽이다 보니 단어 몇 개를 외운 모양이다. 몇 개의 단어를 외쳐대며 오그르와 고블린이 뒤섞인 병사들은 허리춤에서 기름을 묻혀 놓은 몽둥이를 꺼내 각자 불을 붙였다. 만 명의 병사를 거느린다는 오그르 만호장 세 명 중 하나인 브레락은 한껏 가슴을 부풀리며 크게 외쳤다.
“태워 버려! 인간 놈들이 나오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들어라!”
* * *
켈리도니온의 성벽 위.
연합군이라고 고블린 군단의 움직임을 모를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자신들을 도발하려고 대놓고 움직이는 부대였으니.
“우리를 대놓고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는 듯한 움직임이군.”
“아주 얕은 수작 아니겠습니까. 공성전이야 저놈들이 결계 때문에라도 감히 할 수 없을 테고, 야전으로 우리 군을 희생시키거나 보급을 말려 죽이는 것뿐이니.”
니키타스가 픽스 기병대의 목적을 단번에 해석하고 엘레나는 다시 구체적으로 군단의 도발이 ‘조급해서’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역시 기사단으로 뼈가 굵으신 게 확실하군. 내 생각도 정확히 같소. 지금 상황에서 우리 군이 겨우 천 명도 안 되는 적을 상대하느라 힘을 뺄 이유도 없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요.”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쓴웃음을 나누었다. 주변의 영주들도 대략 어떤 의미의 쓴웃음인지 알았다. 적이 도주할 시 추격할 만한 병력이 없는 것이다.
―화르륵!
건물만 남아 있던 몇 군데의 민가와 마을회관이 불타는 소리가 성벽 위까지 들려왔다. 네마냐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니키 제독이 이내 다가오더니 질문을 하나 던졌다.
“확실히 바가반드 경이 말씀했던 슴바트의 경보병 전력이 이때야말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중보병 전력이나 기병은 저들을 쫓아갈 수 없으니 말입니다.”
“무리하게 쫓아가면 철위기사단의 꼴만 다시 재현할 뿐이죠. 저들이 기동력과 마도술로 우릴 상대하니 우리도 똑같이, 험지 기동과 마법으로 상대해야 합니다.”
미크라야크의 경보병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무장을 최대한 가볍게 걸친다는 의미의 경(輕). 하지만 무장을 희생한 대신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소모되지 않는 체력, 그리고 마법 검술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는 이능력까지.
“슴바트의 군단이 필요하다고 경께서 강변하던 데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 상황이 이래서야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군.”
다른 영주들이 찬성 내지는 마지못해 묵인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침묵을 지켰던 니키타스. 이 완고한 제국군 대표가 마침내 뜻을 꺾었다. 행동력을 모두 소모해 버렸지만 네마냐는 확실한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어려운 결정에 감사합니다.”
“감사는 천만의 말씀이지. 슴바트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감수해야 할 게 많은 지금 상황에선 내가 감사하고 싶군.”
입김을 불며 제국군 장군은 네마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처음과 달리 살짝 목소리 크기를 낮추었다.
“말은 그렇다지만 먼저 황제 폐하와 이 문제에 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소. 해서 역시나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소만. 그리고 그 김에 일전에 이야기 나눴던 ‘보조금’도 결판을 짓고자 하오.”
이른바 제국군과 성국군의 무장, 보급을 바가반드 생산기지에 위탁하고 대신 그 보상을 보조금으로 대신한다는 계약이었다. 여기서 뭐 달리 덧붙이거나 이의를 제기할 일은 없었다. 황제가 승인하지 않으면 모든 게 불가능하니까.
‘우리 일을 최종 승인하는 게 여기는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황제와 제국 정부라니. 그건 그것대로 말이 안 되지만 우선은 승인을 받는 게 우선이지.’
그래도 이전의 니콜라스 특사 때처럼 제국군 최고 책임자를 통해 일을 처리할 수 있단 건 대단한 특혜다. 일개 왕국의 작은 영주가 이렇게까지 대등한 대화 파트너가 되는 일 자체가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다.
“장군! 성하! 두 분 모두 무슨 뜬구름 잡는 생각이신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 밖에서 흉적이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광경을 내버려 두실 작정입니까?”
뜬금없는 기사의 절절한 외침……이라기엔 다소의 조급함이 느껴지는 이 대사.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의문을 담아 시선을 돌렸다.
“아쇼트 왕자.”
“여기 계신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시대, 어떤 전공을 했든 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졸업할 때 어떤 맹세를 했습니까?”
“명예와 권위와 특권을 오직 내 고장과 영민과 주군을 위해 쓰겠노라, 하고 외우죠.”
기사 교육을 마친 지 몇 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기사 하나가 대표로 대답했다. 칼집에 손을 올린 아쇼트가 비장하게 그 맹세를 받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을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나가서 쓸어버려야 합니다.”
“적과 싸운다는 게 반드시 보일 때마다 맞붙으러 나가야 한다는 게 아니야, 아쇼트. 적과 싸우되 가능하다면 이기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기사의 덕목이야.”
엘레나가 나름 차분하게 타일렀다. 물론 그게 정론이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겉멋만 든 기사들은 격투와 전투로 적을 압도하는 멋짐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 누님도 그러고 보면 결국 영락없는 천생 여자시라니까.”
“무슨 소리지, 그건?”
한껏 차가워진 엘레나의 물음이 비수처럼 날아갔다. 사실 물음이 아니라 추궁에 가까웠지만. 눈빛이 제법 매서워지기는 마찬가지인 아쇼트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소한 유격전이 있을 때는 온 사방을 들쑤시며 고블린을 때려잡지 않았습니까. 그게 지금 기사단장이자 국왕 대리를 자처하는 본인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고. 그런데 정작 전면전이 되니 갑자기 신중해져서 ‘확실히 이길 때까지’ 보류한다고? 대체 무엇을 위한 기사들이고, 전략이죠?”
“네까짓 게 마음대로 뇌까리라고 한 일이 아닌 데 말이지. 여기에까지 집안 분쟁을 가져오려는 거냐?”
“워, 워. 진정하세요.”
엘레나도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며 고압적인 대사를 뱉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자 네마냐가 서둘러 제지하고 나섰다.
“나가서 싸우든 버티고 수성하든 적과 싸우는 건 마찬가지니까. 적을 코앞에 두고 분열하는 건 최악의 전술입니다.”
다른 영주들을 대상으로 연극이라도 하듯 중재자의 모습을 연출하는 네마냐의 손짓. 이미 슴바트와의 군사적 제휴에 대해 설득된 영주들은 다시금 자신의 목소리를 인상적으로 듣게 될 것이었다. 이건 네마냐 자신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엘레나를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이다. 엘레나 자신도 한편에 치우친 세력이 아니라 바난드의 안정을 좇는 당당한 군주로 여겨질 터이므로. 네마냐는 묘한 미소와 함께 아쇼트를 본다.
“왕자님. 절절하신 심정이야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다. 여기 모이신 니키 제독이나 다른 소영주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들 자신들의 영민과 영지 때문에 급한 마음인데요.”
“…….”
어처구니없는 분노의 눈빛을 담아 지긋이 쳐다보는 아쇼트. 그러나 켈리도니온과 이곳의 영주들 사이에서 네마냐를 공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일만 되니 오히려 원수 같은 누이를 돕는 일이 되는 걸 본인도 잘 알겠지.
“……실례하겠소. 가자.”
“왕자님……. 휴.”
아쇼트는 자기 논리의 한계를 깨달은 모양이다. 낯빛에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몸을 돌려 성루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도 이대로 숙소에라도 돌아가서 물건이라도 집어 던지겠지. 잠시 복잡한 눈치로 왕자와 우리를 번갈아 보던 제눌트 남작도 왕자를 따라갔다.
‘어리석은 왕자.’
네마냐의 반응은 차라리 가엾다는 쪽에 가까웠다. 차라리 애송이 왕자 녀석이 하는 말이 기백에서라도 나왔다면 평가라도 후하게 쳐 줬을 것이다.
‘기백은커녕…… 샌님 같은 녀석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고 군대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생각인가.’
적군은 800명뿐이라지만 모두 험지 기동력이 충실한 기병대다. 활과 투창도 쏠 줄 안다. 이쪽 중보병, 중기병으로 열심히 쫓아가 봤자 추격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철위 기사단처럼 거꾸로 병력이 포위되어 궤멸당할 수도 있다.
‘기동력 제한을 받지 않는 기병 전력이라면 설사 숫자가 부족해도 우리를 포위 섬멸하긴 충분할 거야.’
그런 고로 아쇼트의 말대로 나가 싸우는 건 아무 이득이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다행히도 이미 성 밖에선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물자도 철수시켜 놨죠. 적에게 유리한 상황을 없애 놔서 우리가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대종정의 신성한 지팡이를 짚은 트라야브나가 성 아래를 굽어보며 남긴 말이었다. 그랬다. 이미 청야전술도 펼쳐 둔 상태였으니 텅 빈 성 아랫마을에 불을 질러 봐야 무슨 소용인가?
“아직 어린 마음에 든 치기겠죠. 우리는 얼른 연락을 취하고 흔들리지 않는 방어태세만 취하면 됩니다.”
“자, 그러면 애초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 빼면 완벽하겠군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트라야브나의 물음. 의미는 확실했다.
“다르빌은 당분간 괜찮습니다. 고블린 군단이 넘기에는 최근 강화된 다르빌은 쉽지 않습니다. 결계 시스템도 넣어서 마도술을 잘못 쓰면 자신들만 피해를 입겠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끝내 걱정을 버리지 못하는 트라야브나를 향해 안심하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염려 마시죠. 지금으로선 놈들이 농촌을 파괴해서 다르빌로의 보급을 차단하는 게 가장 문제겠지만, 별동대는 우리가 파괴했으니까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합군의 기사 전력이 중심이 된 순찰대는 지케르니아의 외부 영지에서 고블린 습격대와 싸우고 있었다. 적어도 이 위태로운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면 다르빌은 무사할 것이다.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제가 상단과 영지에 따로 연락을 넣어 다르빌로 비상시 수상 보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것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지만…… 그래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기 가득한 눈망울로 성녀가 올려다본다. 반쯤 기울어진 성녀의 지팡이와 손을 붙잡아 바로잡아 주었다.
“그래 줄 수 있냐니, 무슨 말씀입니까. 성하.”
은혜를 입히는 데는 궁색할 이유가 전혀 없지. 이 모든 게 결국은 다시 돌아올 테니까. 적어도 이렇게 사방에 공개되는 경우엔 말이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있어야 잇몸도 추위를 느끼지 않습니다. 지케르니아가 버티고 있으므로 여러 영지 역시 마나 신앙에 힘입어 버티는 겁니다. 부담을 느끼지 마십시오.”
순망치한. 크, 이걸 어떻게 생각하고 즉석에서 써 먹었을까. 순간적으로 좀 멋졌다는 자뻑으로 인해 네마냐의 입꼬리는 올라가려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다행히 주변 제후들도 처음 들어 보는 멋진 말에만 집중하며 문구를 외우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우리가 저놈들에게 휘둘릴 이유는 더는 없는 셈이겠군. 이제부턴 저걸 우리 앞에 펼쳐놓고 무슨 속셈인지, 족장 우레이미야의 의중을 헤아리는 게 우리의 임무다.”
손뼉을 치며 감동을 주는 장면에 끝을 낸 무정한 니키타스 제독의 결론. 네마냐는 엘레나와 시선을 교환하곤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흐라세카베르드의 슴바트에게 얼른 공문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음. 답이 올 때까지 우린 부대 편제를 끝내고 정찰을 쉼 없이 돌립시다.”
“옳은 말씀이오.”
“그렇게 합시다.”
영주와 각급 지휘관들의 찬성 발언과 박수로 연합군 회의가 끝날 순간이었다. 성 밖에서 갑자기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단순히 함성 그 자체가 놀랍다기보단, 그 소리를 내는 주인공이 문제였다.
“이 간악한 고블린 놈들아!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사단이 나가니 도망가지 말고 앞에 나서라!”
“왕자님을 따르라, 기사단이여!”
무려 아쇼트 왕자와 제눌트 남작을 비롯한 휘하 수십 명의 기사대와 백여 명의 무장 종자였다. 아쇼트 이 자식이 자기 말이 먹히지 않았다고 토라진 나머지 자기가 문을 열고 나간 것이었다.
“저…… 미친!”
바깥을 본 사람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뱉는 자연스러운 반응. 네마냐도 차마 죽기까지를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 아연실색한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엘레나였을 것이다.
“당장 기사대를 모아! 저들을 구해 와야 한다!”
“예? 하지만 이미 출전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내 곁을 지키던 필로칼리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엘레나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뿌리치는 단장의 힘을 이겨낼 순 없었다.
“저들을 저대로 죽게 내버려 둘 작정이냐? 얼른 준비해!”
“진정해, 엘레나. 휘하의 우수한 제눌트 남작이 따라갔으니 괜찮을 거야. 저쪽 기사대도 절대 적진 않으니…….”
“조금 전에 분명히 당신의 입으로 고작 800기의 적이지만 이런 험한 지형에선 당해내기 어렵다고 만류하지 않았던가?”
당신. 엘레나에겐 처음으로 들어 보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그 정도로 절박함이 느껴지는 상태일까. 그래, 혈육을 막상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게 당하고서도. 더군다나 네마냐 본인도 지금 이렇게 멀쩡한 전력과 주요 인물이 날아가는 건 원하지 않았다.
‘펜자르크에게 성스러운 전쟁의 첫 희생자를 냈다는, 그런 엄청난 명예를 줘선 안 되지.’
첫 전투와 명예는 어찌 되었든 자신들이 쟁취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 네마냐는 머릴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엘레나와 성녀, 제독에게 출전을 통보했다.
“하지만 지금 단장께선 안 됩니다. 왕국의 차기 후계자이시기도 하고.”
“네마냐?”
엘레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휘장과 망토를 벗으며 네마냐는 재빨리 갑옷만을 남겼다. 그리곤 조금 떨어진 망루 곁에 선 헤누크를 향해 외쳤다.
“헤누크, 우리가 아쇼트 왕자를 쫓을 거야. 기사대를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바가반드의 기사대장이 성벽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엘레나가 다시 네마냐를 불렀지만 그저 무뚝뚝하게 답을 남길 뿐이다.
“당황하고 격정에 휩쓸린 사람은 전장에 나서면 안 돼. 내가 직접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고.”
갑옷과 사슬 장갑을 묶는 끈을 더 단단히 죄면서 네마냐는 엘레나에게 다짐을 남겨 주었다.
“반드시, 무사히 네 동생을 데려올 테니까. 오늘은 삼갈까 했지만 바가반드라는 불멸의 영예는 한층 더 빛나게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네마냐는 지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성문 앞으론 바가반드의 기사들이 이미 모여들고 있었다.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염려 마십쇼, 단장. 바가반드 경이라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기사 필로칼리스, 클로루스도 재빨리 곁을 떠나갔다. 뒤늦게 자신이 네마냐를 사지로 내몬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엘레나를 덮쳐 왔다. 그렇게 누구 하나 편한 마음이 아닌 채로, 난데없는 추격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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