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찬 바람이 두 달 내내 큰 눈과 함께 쏟아지는 하야스단의 겨울도 언제나 계속되지는 않는다. 잠깐의 소강 상태와 함께 조금 따뜻한 볕이 다시 언덕배기의 영지들을 찾아왔다. 누구보다도 변화를 빠르게 눈치챈 새들이 지저귄다.
―짹짹!
물론 그런다고 이미 사람 허리만큼 쌓여 버린 대설을 녹일 수준은 되지 않겠지만. 산야를 배회하는 빈민이 불을 때면 얼어 죽지는 않는다는 정도의 의미다.
“오늘 배급분은 그동안의 분량보다 1할 정도 줄이겠어. 그래도 날이 좀 따뜻하니까. 대신 오늘 아직 남아 있는 월동용 담요를 모두에게 나눠 주도록 해.”
미하일이 미리 받아 둔 영주의 지시사항을 메모지를 살펴보며 읊었다. 서기관들은 대꾸 한마디 없이 꿩의 깃대로 만든 펜을 놀리느라 바빴다. 모두 네마냐 취임 당시부터 복잡한 업무를 받아 전달하는 중간관리직으로 훈련받은 인력이었다.
“자작님, 연료용 아마포를 더 나눠 달라는 제7지구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 지역이 광산으로 향하는 계곡 입구라 찬 기운이 더 강하긴 합니다만.”
“하메네라, 지금 중앙 창고에 아마포가 얼마나 있지? 확인 좀 해 봐.”
이름이 불린 하급 서기관은 눈을 찡그리며 빽빽한 글자들 사이를 춤추듯 훑어 내려갔다.
“아, 찾았습니다. 사흘 전 조사 갱신 결과 35만 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전체 2만 가구에 일주일 한 번, 열다섯 필을 주니까 3주 분량 하면 딱 5만 필 정도 남겠네.”
일주일에 영지 전체에서 소모되는 아마포의 양은 대략 30만 필. 실로 엄청난 양이다. 최근 아마 농사는 대풍년인데 의류 산업에서 면과 모의 비중이 커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상단에서 보내온 연락으론 가격이 조금 인상은 되겠지만 생각보다도 안정적이라더군요.”
“다행이지. 당신들만큼이나 나도 걱정이었다고. 거의 운명을 걸고 도박하는 셈이라.”
아마포를 연료로 쓰겠다는 발상이 턱이 빠질 정도로 창의적인 건 아니었다. 연기와 그을음이 나지 않는 고급 재료라는 인식이 있어 군용 신호에 쓰거나 고급 연료로 사용해 왔을 뿐.
‘하지만 아마의 가격이 폭락할 거라곤 누구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아마가 의류용 작물 중에선 저렴한 편이라지만 마구잡이로 태워 없애는 난방용으론 값이 비쌌다. 당연히 제한적인, 이때까지의 연료 용도는 의류 제작용에 비해 미미한 비중이었다. 설마하니 날이 추워지면서 의류 산업이 변화하고 아마포 산업까지 침체할 줄이야. 아무리 캐물어도 이유조차 알려 주지 않던 네마냐 녀석은 이런 것도 짐작했던 걸까. 미하일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됐군. 딱 3주 뒤면 상단이 도착할 거야. 그때까진 버틸 순 있겠어. 이번엔 특별히 웃돈을 주고 제국의 아마 농장에서 60만 필을 긁어올 예정이니까.”
“60만 필이나 말입니까?”
“하긴, 영지 시설물의 난방에도 많이 쓰는 재료이기도 하니 어쩔 순 없겠군요. 그래도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당연하다. 경비가 이미 배정된 연료 배급분은 훌쩍 넘어, 임시로 영지 관리경비에서 끌어다 쓰는 중이었다.
“돌려막기는 오래 갈 수 없지. 네마냐 녀석이 좋은 방법을 찾아오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우선 이번 주는 좀 따뜻한 모양이니까 보급을 조금 줄이고, 7지구 마을로 대신 공급을 늘리도록.”
“알겠습니다.”
하메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하는 동안 미하일은 이미 어떻게 해야 공공시설물의 소비량을 줄여 5만 필로 버틸 수 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달칵.
“여, 수고들 많네.”
“어, 아, 아일라 님 오십니까?”
서기관 몇이 인사를 건넸다. 특히나 공장과 가공 마정석 수출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무척 다정하게 맞을 정도였다. 덕분에 회의는 순식간에 파장 분위기로 바뀌었다.
“흐, 어쩔 수 없군. 회의는 여기까지만 해야겠어. 모두들 얘기한 대로 당분간 날이 좀 풀려도 긴장을 풀지 말고 자원 수급 상태는 항상 파악해 두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서기관들도 내내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사절인지 기분 좋게 대답하고 일어났다. 역시나 네마냐가 자신을 여기에 꽂아둔 건 싫은 소리를 잘하니 그걸 하라는 뜻인 게 분명했다.
‘이 자식……. 돌아오면 본때를 보여 줘야지.’
깃펜을 잉크병에 담그고 미하일도 입구에서 대기 중인 아일라에게 다가갔다.
“웬일이래요? 한동안 전선을 계속 지키실 줄 알았더니만 별일이네.”
“생각보다 판이 많이 커져서 말이야. 보호장구나 무기를 추가로 생산해야겠어.”
“벌써요? 하긴 기왕 준비해 놓은 것도 예비 물자조차 하나도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갸웃거리면서도 ‘그런가 보다’ 수긍하는 미하일을 보며 아일라도 소상한 사정을 일러 주었다.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바난드나 신성기사단 무장도 우리가 판매하는 식으로 공급할 것 같아서.”
“왕국과 성국까지요?”
미하일이 놀란 눈치였다. 물론 아일라의 손길이 더해진 마정석 합금으로 만든 물건이라면 최소한 이 고원 안에선 최고의 물건이랄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영지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 네마냐와 내 영업력도 좀 봐줄 만하지? 족히 금화 만 개의 가치가 있는 사업이라고.”
“세상에, 뭐라고요?”
절로 자신의 청력을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다. 금화가 무려 1만 개. 이제 간신히 일 년 수입으로 금화 1천 개를 향해 가는 소영지로선 어마어마한 수입이 아닐 수 없다. 이건 심지어 상단에서 마정석 가공단지에 투자차 밀어 넣었던 금액에 비교해도 두 배나 된다.
“……그래서, 전쟁이 한창인데도 후방 영지까지 오신 거였군. 명목이야 식량이나 보급물자를 가지러 오셨다지만.”
“그런 셈이지. 여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겠지만 2개 대대 1천 명분씩 만들어 보려고. 마정석 아티팩트와 물품 생산도 그대로 유지하고.”
아일라의 이 이야기를 그대로 실행하려면 추가적인 산업 투자가 필요했다. 공장을 세우고 노동자를 추가 모집하고, 재료를…….
“어휴, 그거 당장 우리 예산으로는 포화예요. 거기다 에살하톤 측에 더 돈을 얻어내는 것도 무리고. 지금 우리가 그쪽에 달아 둔 돈만 금화 8천 전은 될걸요.”
“걱정할 것 없어. 곧 막대한 보조금이 들어올 테니까 그걸로 충당하면 돼.”
자신만만한 아일라의 발언에 묻어나는 자신감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의 소심함 때문일까. 하지만 뒤이어 덧붙은 부연 설명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는 걸 보여 줬다.
“연합군은 동맹군이 다 모이지 않아서 무장이라도 강화하자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어. 가장 가까이서 대규모 무장을 동원할 만한 공업 능력이라면 우리뿐이니까.”
마정석 공장까지 모조리 전환하면 한 주에 2천 명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 전근대 산업 수준인 이 세계, 그리고 하야스단의 후진적인 사회수준. 그렇다면 남는 후보는 오직 바가반드뿐이다.
“그럼 보조금을 준다는 게…….”
“제국 총독부에 긴급 타전해서 보조금으로 금화 3만 개를 받아오기로 했어. 이번에 정령부대를 구출해 적절하게 편입시킨 보상이기도 하고. 또…….”
“또?”
잠시 음흉하게 변한 아일라의 표정에 미하일은 다시 어리둥절했다.
“아까 잠깐 들어 보니 연료비가 만만치 않게 문제라지?”
“아, 예. 맞아요. 아마포로 난방을 하는 게 나무를 보존해서 농업을 지키는 데도 도움 되고, 값도 너무 비싸지도 않고 좋죠. 하지만 이제 사방 영지에서 다들 우릴 따라 하기 시작해서…….”
굳이 필요 이상인 60만 필의 아마포를 싹쓸이하듯 구매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러 대영지까지 끼어들면 가격도 올라갈 테고, 차라리 남는 걸 파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 지지리 궁상을 떨지 않게 해 주자고 우리 영주가 얘기했어. 어디서 또 신박한 방법을 가져왔더라.”
“뭔데요 그게?”
“귀 좀 줘 봐.”
반신반의의 표정으로 재무관 자작은 귀를 내밀었다. 아일라가 귓전에서 속닥거린 이야기는 무척이나 어지럽고 경악할 만한 이야기였다.
“이제부터 마정석으로 난방을 할 거야.”
* * *
“슴바트까지 거대한 연합의 말단에 두어 전선에 함께하도록 합시다. 승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겁니다.”
아일라를 떠나보내고 연합군 수뇌 회의에 참석한 네마냐가 성녀를 앞세워 터뜨린 폭탄선언. 정령사 부대의 참전에 조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던 회의장은 금세 무거워졌다. 그리고 쏟아지는 질문과 항의.
“암피에르 동맹이 누굴 견제하고 막으려고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발언 아닌가!”
“당장 사죄하시오!”
여기저기서 책상을 치며 제국, 펜자르크, 마탑 세력을 가리지 않고 항의가 빗발쳤다. 그나마 엘레나가 미리 손을 들어 자중하게 한 바난드 진영의 제후와 가신들도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역시나, 반응이 가관이로군. 예상은 했지만.’
어차피 논리로 돌파할 생각은 진작 접어 두었다. 지하철에서 소란을 벌이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까닭 없이 시비를 걸 만한 사람들과 시시비비를 가릴 여유는 없다. 설복해야 할 사람이거나 존중할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진지하게 논리로 접근한다는 것이 네마냐, 아니 이서준 때부터의 원칙이었다.
“반감이 많으시다니 제가 하나를 묻겠습니다. 이 거대한 눈밭 가운데 우리는 묻혀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헤치고 다닐 고블린과 픽스 기병대는 사방팔방 뒤집고 다니겠죠.”
사람들이 권력 싸움에 매진하느라 여념이 없어 잊어버렸던 고블린 문제를 다시 짚었다. 어찌어찌 군대가 모였지만 이걸로 고블린 문제가 해결됐을 리는 없다. 여기 모인 제후들도 악당이거나 좀 판단이 모자를 수는 있어도 바보는 아니니,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픽스들은 우리가 여기 눈밭을 피해 모인 사이에 눈 속에서 얼마든 유격전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럴 때 쓸모 있는 슴바트의 경보병이 필요할 겁니다.”
“놈이 이번 기회를 빌미로 삼아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진영의 분열을 꾀한다면? 모든 피해가 고원 전체에 미치는데 바가반드 경께서 책임을 지실 생각인가?”
“아쇼트 왕자…….”
니키타스 제독 앞에서 엘레나와 자신에게 제대로 코가 눌렸던 아쇼트. 이번엔 그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네마냐는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갔다. 전체의 반발을 끌어내려는 듯 강경한 어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엘레나와 트라야브나만 속이 상했다.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 이렇게 제국군에 유수의 제후와 군사가 모였는데도 두려워한다니 슴바트 공이 머지않아 다시 하야크 왕이 되는 건 시간문제겠군요. 이렇게나 자신들이 능력이 없다고 반증을 하니 말입니다.”
“뭐라고?”
“정정하시오, 그게 무슨 망발인가!”
마구스타나와 바슈니크 등 몇 군데의 군소 제후들이 격앙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뒤에서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아쇼트와 분노한 가신들, 무심하게 모든 인물을 지켜보는 니키타스까지.
“……바가반드 백작이 하야스단에서 나고 자란 애국자이고 패기가 넘치는 건 알겠어. 미크라야크의 경보병이 유격전에서 고블린을 압도할 유일한 전력인 것도 동의하고. 그러나 미크라야크의 자칭 왕은 주민을 선동해 권력을 유지하고, 무고한 귀족들을 죽여댔지. 거기다 제국에 멋대로 위협을 가하기까지.”
“그래서 동의할 수 없다, 그런 뜻입니까?”
“우리가 능력이 모자란다는 모욕이 사실이라곤 생각하지 않네. 다만 슴바트가 우리가 품기엔 너무 위험한 사람일 뿐이지. 그의 단순한 호의와 고블린에 대한 두려움에서 이번 제안이 왔다고 해도 우리가 믿을 순 없어.”
굳게 입을 다물었던 제국 제독이 무겁게 이의를 제기하니 주변 사람들도 옳소, 옳소 하며 찬동했다. 그때까지 최소한의 의리를 지켜 침묵을 지켰던 엘레나에게 아쇼트가 물었다.
“누님도 입이 있으면 의견을 내시죠. 왜, 전쟁영웅이신데 눈앞의 고블린 군단은 두려운 모양이군요?”
“네마냐. 지금 나온 반발에 이의 제기의 여지가 있습니까?”
엘레나의 단호한 물음. 네마냐는 안심하라는 따스한 표정을 돌려주었다. 엘레나의 동공에는 의혹의 파문이 일렁거렸다. 잠시 시선을 마주친 끝에 네마냐는 트라야브나와 마주 보았다. 대종정은 미리 얘기해 둔 대로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이제, 시간이 됐군.’
숨을 한번 삼키고, 네마냐는 마침내 스킬트리를 열었다. 화술 스킬 중에선 2단계의 설득 스킬이 열려 있었다. 아래론 총 세 칸까지 있었지만 마지막 한 칸은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먼저 「옭아매는 말빨러」 칭호를 골라 놨다. 판단, 이해 두 능력치에 따라 설득 확률을 높여 주는 칭호였다.
「설득, 1단계」
[논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뜻을 꺾고 당신의 의지를 관철합니다. 행동력 1을 소모하며 당신의 논지에 사람들이 반대 논리를 대지 못하도록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1단계.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람과 대화 중이라면 유효한 기술. 그러나 문제는 지금 네마냐가 선 이 자리는 ‘이성적인 토론장’이 아니다. 권력의 유불리에 따라 원래 주장도 손바닥 엎듯 뒤집는 모리배들의 싸움터.
‘1단계를 해 봤자 어차피 동의하진 않을 거야. 내가 설사 슴바트의 마정석 공급책과 난방 대책을 꺼내도 말이지. 그러면…….’
다음은 2단계 기술이었다.
[2단계는 당신의 주장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논지에 관심을 가지고 당신에게 기울어지게 합니다. 행동력 2를 소모합니다. 당신에 적대적인 사람을 설득하는 건 아닙니다.]
역시 그다지 지금 네마냐에게 필요한 건 아니다. 그렇다는 건 역시나.
‘이 비활성화된 3단계를 어찌한다. 딱히 이걸 여는 퀘스트도 없었는데. 씁.’
답은 오직 스킬을 열 수 있는 기술 능력치. 예전에 추가 퀘스트 보상으로 받아 놓은 것 중에 금속 가공에 투자하고 남은 3만큼이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남겨 뒀다. 문제는 이 3단계 설득을 여는 데 3의 능력치를 몽땅 밀어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지금 투자를 해야 할 때란 거겠지. 아낄 때가 아냐.’
처음엔 전투가 위기로 몰렸을 때 전투 기술이나 마법 관련 스킬을 찍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선 유리하게 싸우도록 판을 짜는 게 먼저란 생각이 절실했다.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설득 - 제3스킬, 「위압」]
[반대자들의 의지를 꺾고,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바로 당신의 편으로 돌아섭니다. 하루분의 모든 행동치를 소모하며 지능과 관련한 능력치에 하루 동안 부정적 효과가 부여됩니다.]
‘역시 강한 약은 독이라더니. 스킬까지 개방했으니 여기서 주저할 것도 없겠지.’
네마냐는 바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 시스템이라 이름 붙인 무엇인가가 단순히 게임이나 기상천외한 무언가가 아니었다고 했다. 암흑 에너지가 서준 자신의 기억과 지식으로 빚어낸 가상세계라니. 그걸 생각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냈다. 눈을 번쩍 뜬 네마냐.
“저는 설득할 수 없는 논리는 설득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보단 어째서 슴바트의 요청을 받아들여도 탈이 없을지, 무엇으로 신뢰를 담보할 수 있을지 그것을 말하겠습니다.”
―두근.
심장의 박동이 새삼스럽지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에 이상한 파문이 전해졌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네마냐 자신만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어, 어서 말해 보세요.”
“음.”
트라야브나와 니키타스 제독이 가까스로 입을 떼 얘기해 보라고 권했다. 네마냐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폭탄을 투하했다. 자신의 마지막 터전마저 압도적인 침략에 휩싸일 것을 우려한 슴바트의 파격적인 결정 덕분에 훨씬 위력적일 폭탄이었다.
“슴바트 공으로부터 철저한 계약 관계와 불가침 조약을 지키겠다는 증거로 막대한 마정석을 받기로 했습니다.”
막대한 재정적 희생을 의미하는 마정석 무료 공여. 물론 난방기술에 대해서 네마냐는 입 한 번 열지 않았지만, 단순 아티팩트 원료로만 보아도 막대한 보답이긴 하다.
“아울러 아무 조건 없이 동맹 전선에 협조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냈습니다. 신관을 보내어 그 맹세의 최종 추인만 하십시오. 여러분의 그 쓸데없는 불안감이 얼마나 쓸모가 없었는지 알게 될 테니.”
확신에 찬 네마냐의 발언은 무시무시한 힘이 흘러나가는 느낌과 함께 사방을 강타했다.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애써 시선을 외면하기도 했다. 불안한 듯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엔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흠.”
“에헴…….”
“…….”
엘레나도 어딘가 생각이 깊은 모양이었다. 바난드의 분열된 두 가신단도 서로 의견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그 완고하던 고집쟁이들도 반은 무너졌단 증거였다. 그 아쇼트조차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쐐기를 박을 때였다.
“슴바트가 두렵습니까? 다시 한번 하야크 왕좌의 철창이 여러분의 발치 앞에 떨어질 것을 피하실 겁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움직이세요. 슴바트의 경보병을 길들여 고블린 전투의 대열 앞에 함께 서세요.”
탁자에 양손을 짚으며 네마냐는 좌중을 한 사람씩 훑었다. 사람들의 동공은 누구랄 것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움직일 것을 강권하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굶주린 자가 두드리세요. 문은 그냥 열리는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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