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5년 전]
“자, 우리가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었지?”
“이제 2장부터 나갈 차례입니다, 선생님.”
펠기세스 교수의 말에 손을 번쩍 든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 이게 언제 일이었지. 그래, 졸업반이던 6학년 두 번째 학기의 일이었다.
“아, 그랬지. 그럼 2장 도입부를 간략하게 읽어 볼까. 하라드, 자네가 한번 읽어 보게.”
“예, 선생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하라드를 세미나에 함께한 후배들이 빤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어차피 그저 세미나에 참석했을 뿐 후배들 수업과는 상관이 없는 자신이지만, 이런 관심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어깨에 드리운 책임감은 커져만 가곤 했다.
[일반적인 마나학자라면 단언할 수 있다. 미창조된 에너지는 과학적이고 분석적으로 발생한 개념이 아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강대한 마법 에너지 혹은 그 힘을 보유했던 자들의 기록을 최대한 사실에 맞추려던 원시 마나 역학 연구자들의 임기응변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든 진리가 그렇듯, 두 사실 사이의 골짜기를 메우는 가짜 다리는 어느 정도 현실적인 법이다.]
“거기까지. 고맙네. 자네들,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했나?”
“…….”
“그…….”
침묵이 가라앉은 가운데 범생이처럼 생긴 학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교수는 이 주제로 저학년생이 발표하는 게 무척 신기한지 바로 불러세웠다.
“틀려도 상관없네. 편히 말해 봐. 아, 기왕 손을 들었으니 미창조 에너지론의 기초 개념부터 설명할 수 있겠나?”
“이 세계의 본질, 그러니까 에토스(Ethos)가 형성될 때 에너지의 많은 부분이 창조에 사용되지 않고 남았다는 이론 아닙니까?”
펠기세스는 아주 가늘게 찢어져 동공이 보일 듯 말 듯한 눈매로 그윽한 웃음을 지었다.
“맞네. 그럼 아까 여기 하라드 군이 읽은 구절은 어떤 의미로 와닿았나?”
“음, 그건…… 결국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란 소리 아니겠습니까? 고대의 대현인이나 알레시아(Alessia) 같은 대마법사에 대해 와전된 전설을 억지로 해석하려다 실수한 거죠.”
잠시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스승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처음엔 제법 그럴듯하게 말을 잇던 학생도 점점 말이 흐려졌다.
“답하느라 고생했네. 충분히 좋은 결론이지. 저학년 과정에선 가장 훌륭해. 우린 여기서 한 가지 타당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든다고 해도 명확한 근거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보류해야 한다는 것이지.”
저학년 학생 대상이라 그런지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내용만 다루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미 고학년 강독 세미나를 들었던 하라드는 펠기세스 선생의 묘한 웃음을 보았다. 그 웃음의 의미가 훤하게 보였다. 몇 개의 주석과 문장을 간추려보면 「마나해석론」의 진정한 의미가 나온다.
[그러나 숱한 기록들이 똑같은 현상을 언급하는 사례는 우연이나 왜곡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마나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다만 특수한 경우 상식을 벗어나는 마나가 관찰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최근 학자들 합의로 추가된 660번 주석을 짚으며, 펠기세스가 말했던 결론이 떠오른다.
“최신판에서 마나해석론에 미창조 에너지설을 다시 공인하기로 했네. 연구야 이제 시작인 단계겠지만, 더는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거든.”
“정말…… 불명의 에너지가 마나로 전환되는 매커니즘이 있다는 말입니까?”
저학년에 배우는 학문과 달리 고학년부터는 자기 분야의 연구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 가끔 학설이 뒤집혀 곤혹스러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의 것은 단순히 대학원생 몇 명의 논문이 뒤집히는 정도의 사안이 아니다.
‘공허 에너지’ 혹은 ‘암흑 에너지’로 명명된 이 정체불명의 에너지는, 어떤 원리에 따라 사용자에게 지치지 않는 무한한 마나의 샘을 제공한다. 여전히 세계 에너지의 대부분은 사용되지 않은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남아 있을 거란 추측이 맞다면 말이다.
* * *
“그래서 하라드 네 말은…… 내가 바로 그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로부터 마나를 받고 있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맞아. 아직 이론도 가설 단계일뿐더러 형이 정말 그 힘을 받았는지도 의문이지만.”
네마냐는 일단 가벼운 콧방귀와 함께 편한 자세를 했다. 바닥이 따뜻해서 이미 진작에 좌식으로 바꿔 버린지 오래인 방이었다. 애써 덥힌 뒤 따라 놓은 차가 차갑게 식어 버린 게 눈에 들어왔다.
“차가 식어 버렸잖아, 아깝게.”
혀를 차고는 방을 데우던 마정석을 잠시 떼어 찻잔 하나씩을 데웠다.
“암흑 에너지로부터 마나를 얻은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가정한 증거가 뭐냐면, 바로 극한의 친화성이야. 마정석 종류와 마나의 속성을 가리지 않는 것 말이야.”
“흐음. 어째서 그렇지? 근거는?”
“왜냐면 무속성, 유속성의 모든 마나가 분화되기 이전의 원천이기 때문이지. 어떤 분류나 형태도 갖추지 않고 오히려 모든 그 변화형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지.”
“그래.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는데…….”
키마라스나 하라드 모두 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일라는 도통 모르겠다며 다시 재촉했다.
“간단해요. 우리가 네마냐 형이 뭔가 특이한 걸 본 게 아니냐고 물었던 그걸 얘기하는 거죠. 형이 정말 그걸 본 게 맞는 거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네가 원하는 게 맞는지는 몰라도 뭔가 특이한 널빤지 같은 데 글씨나 숫자 같은 게 적혀 있는 화면을 보거든.”
“정말……!”
“육백 년 만에 어째 산을 내려가고 싶더라니, 결국 이런 운명 때문인 것 같군.”
그 이야기에 벌떡 몸을 일으킨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마리의 성수는 갑자기 네마냐를 향해 넙죽 엎드렸다.
“마나의 화신을 뵙습니다.”
“아니. 뭐, 뭐 하는 거야 둘 다?”
처음엔 단순히 놀리거나 깜짝 놀라게 하려는 수작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자못 진지한 두 사람의 태도를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나 남에게 절을 받는 건 몹시 어색한 네마냐는 두 사람을 억지로 일으켰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부터 해 봐. 마나의 화신이니 하는 소리가 대체 뭐야?”
“휴……. 이론 이야기로는 날밤을 새워도 끝이 없겠지. 간단하게 말할게. 정령술의 기원 알지? 이건 아일라 씨를 위해서도 괜찮을 것 같네요.”
키마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도 된다고 얘기했다.
“정령술. 육백 년 전쯤인가 하야스단에 처음으로 전해졌던 기술이잖아. 마나역학을 학문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소인족을 위한 전용 기술.”
“맞아. 사실 처음으로 정령술, 정확히는 정령이라는 프네우마(Pneuma)라는 존재를 만난 건 알레시아스야.”
“알레시아스면…… 그 고대의 수수께끼라는 비운의 대마법사? 그런데 정령계는 애초부터 있었다가 그때 처음 연결된 것 아니었어?”
“좀 들어 봐. 지금부터가 본론이니까.”
다시 일어나 차려놓은 소반 앞에 다가간 하라드가 재빨리 차를 뱃속에 밀어 넣었다.
“전 아카데미아 연구위원회에서 백 년 전에 처음으로 공기의 최상급 정령을 접촉했거든. 수십 년 동안 설득한 끝에 정령계와 정령술 기원 연구에 협조를 얻었지.”
이어지는 하라드의 이야기는 신기한 것투성이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아카데미아의 이름으로 모인 대마법사 대표들은 공기의 최상급 정령인 바실리아 스토이카(Basilia Stoika), 즉 ‘공기의 왕’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접했다.
[정령의 기원?]
[그래. 확실하게 남진 않아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령계 기원의 이야기는 있지 않은가?]
펠기세스의 물음에 공기의 왕은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의아하단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최상위 정령이 뭐라고 답했는데?”
“아주 재밌는 말이었어.”
[정령은 특정한 인간의 마나와 반응하여 그 요청에 응한 원초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뭐라더라…… 대충 500년 전쯤에 ‘지킨다’라는 대마법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지. 어느 날 갑자기 마나 연결이 끊어졌을 때는 사라진 뒤였다더군.]
“지키는 자. 여러 개가 있다지만, 아마도…….”
제국과 하야스단의 사람들은 ‘지키는 자’라는 이름을 쓰는 것을 즐겼다. 덕분에 수많은 파생형이 있다. 하지만 헷갈릴 이유가 없었다.
“오백 년, ‘지킨다’는 이름, 대마법사, 갑자기 실종되었다. 이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은 형 생각대로 알레시아스, 그 사람뿐이니까.”
“정령계와 정령술이 한 개인의 창작이었다…… 정말 황당할 정도의 소리로군.”
그러니까, 실은 마나를 활용한 마법과 같은 기술이라 생각했던 정령술과 정령계는 사실 특수한 아일라는 자신들의 조상이 발견했다는 정령술의 기원에 황당한 표정이었다. 키마라스도 그럴 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마라스, 당신의 전대 키메라가 살아 있을 때 뭐 들은 것 없었어?”
“예전에 말했잖아. 내가 아직 알에 있을 때 전대 키메라는 던전과 싸우다 휘말려 죽었다고. 대신 알에서 깨어났을 때 어떤 기묘한 파장을 느끼긴 했지. 내가 아는 마나가 아닌 뭐랄까, 좀 더 아늑하고 아련한 기억이라고 할까?”
“무척이나 비학문적인 표현이군.”
“그런 건 너희들 아카데미아의 인간들이 할 일이지. 나는 마나를 자연스럽게 내쉬는 공기, 따갑게 내리쬐는 볕처럼 내 일부로 받아들이니까.”
어차피 결론이 날 턱이 없는 싸움이었다. 네마냐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주의를 돌렸다.
“자…… 그럼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만큼만 얘기해 볼게. 어차피 잘 아는 여러분이 떠들어 봐야 서로 싸움밖에 안 나겠지.”
한창 고블린의 습격과 그에 맞설 동료·세력을 모으느라, 방해꾼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차에 갑자기 세계의 비밀까지 얽히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래도 어쩌면 뭔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르지.
“결론은 그거잖아. 정령계를 만들어내고 정령마법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암흑 에너지가 내 힘의 원천이라는 것. 그리고 그 덕에 방대한 마나, 속성을 타지 않는 특성, 마정석과의 미친 친화성이 생긴단 거고.”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니 이 시스템이란 것의 정체도 슬슬 느낌이 왔다.
“그럼, 내가 이 시스템이라고 이름 붙인 이상한 녀석은 그 암흑 마나란 거로 만든 건가?”
“정말 암흑 마나가 맞다면 그럴 거야. 하지만 보고된 사례는 허공의 양피지나 목간 같은 존재를 얘기하던데……. 형은 좀 많이 다르긴 하네. 유리창 같은 그런, 게시판 같은 거라니.”
아니…… 게시판 형식이 맞긴 한데. 네가 아는 그 담벼락에 붙이는 그게 아니라서 그렇지.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뻐끔거리며 네마냐는 찻잔을 말끔히 비웠다. 당장 고블린을 상대로 정치질을 해야 할 판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 비밀이긴 하다. 그래도 속은 조금 후련했다. 적어도 자신의 환생-회귀라는 희한한 경험의 탓이라도 할 만한 대상을 찾은 셈이니.
―띠링.
「(NEW) 비밀을 향한 첫발」
역시 축하한다는 말도 없이 이놈의 시스템은 또 엄한 미션을 내놓을 뿐이었다. 그래, 어디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 보자고. 지금은…… 일단 때가 아니지만.
“후.”
깊은 한숨과 함께 한껏 기지개를 켰다. 고작 삼십 분이나 이야기했던가? 마치 서른 시간 정도 직장 상사와 면담한 듯 피로함과 몽롱함이 느껴졌다.
“일단, 여러분한테 미리 얘기는 해 둘게. 당분간 이 문제는 우리끼리만 묻어 두고 나중에 제대로 조사할 수 있을 때 진행하자. 나도 이대로 어설프게 파헤치거나 묻는 건 싫거든.”
그 말에 세 사람 모두 수긍했다.
“알았어. 우리 입 무거운 거 잘 알잖아? 당장 여기 있는 성수의 존재가 들키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역시, 당장의 문제는 고블린이겠지. 그리고 그놈의 슴바트 문제까지. 아까 소피와 이야기해 봤는데 어느새 너와 성녀까지 세 명이 중재하는 구도로 짜인다는 게 사실이야?”
안 그래도 이야기할 참이었는데 아일라의 관심이 마침 그쪽으로 옮겨 간 뒤였다. 자연스럽게 주제가 넘어간 걸 다행으로 여기며 네마냐는 그렇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아까, 미크라야크 마정석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에 했잖아요? 그걸 양측이 최소한의 신뢰할 수 있는 촉매제로 삼을 겁니다. 있지도 않은 믿음보다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관계를 만들어야죠.”
이야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세 사람이 훨씬 진지하게 듣는 기분이 드는 건 괜한 게 아니겠지? 슬쩍 창을 확인하지만 「설득」 같은 스킬을 쓴 상태도 아니었다.
“뭐야, 방금 분명 우리 말고 딴 데 봤지? 거기에 글자 같은 게 또 뜬 거야? 뭐라고?”
“내가 그 얘긴 나중에 따로 하자고 했지? 씁, 어쨌든 내일 열릴 연합군 회의가 분수령이 될 겁니다. 어떻게든지 거기서 연합 쪽으로 결론을 내야 해요.”
“우리의 생존과 승리를 위해서.”
“살아남아서 바난드로 돌아갔을 때를 위해서도 말이지. 내전을 치를 때 배후에 적을 두고 싸울 순 없지 않겠어?”
이렇게 처음 켈리도니온으로 달려온 뒤 차근차근 준비했던 계획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자신의 생각대로만 상황을 움직일 수 없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예측하지 못했던 암흑 에너지의 비밀까지. 당장은 아니지만 큰 도움은 될 수 있겠지.’
모르고 얼렁뚱땅 쓰는 것과 알고 제대로 쓰는 차이는 엄청나게 마련이니까. 조금 전만 해도, 쳐다만 봐도 화병 걸리게 하는 제후들을 만날 걱정이 가득했었다. 그러나, 이제 네마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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