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대종정 트라야브나와의 면담이 끝난 뒤 네마냐는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온 방 앞에는 잠시 각자 할 일 때문에 흩어졌던 아일라부터 하라드, 키마라스 모두가 모여 있었다.
“이야, 이거 모두 모이기는 오랜만인데. 웬일이에요 다들?”
“왔어? 오늘도 고생 많았어. 그 슴바트에게서 그런 연락이 올 줄이야. 듣는 내가 머리칼이 쭈뼛 서더라.”
호들갑 떠는 아일라와 나머지 일행은 네마냐가 문을 열어 주자 아주 익숙하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성도에 여정을 푼 이래로 네마냐의 방은 사실상 바가반드 영지의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덕분에 개인사랄 것도 없이 일행이 벌컥벌컥 문을 열어젖히는 실정이었지만.
“아일라도 그 사람은 무서운가 봐요? 그동안 사람을 두려워한 적은 없었는데.”
네마냐가 반쯤 농담으로 건넨 이야기에 아일라는 몸서리가 쳐진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눈빛! 말도 말라고. 지금까지 종족을 불문하고 수많은 생명체를 봐 왔어도 그렇게 죽어 있는 눈깔은 처음이었다니까.”
흥분한 나머지 속어가 마음대로 튀어나오는 아일라의 말에 네마냐는 허허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하라드는 결코 가볍게 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녀석이 나지막하게 물어왔다.
“괜찮겠어? 제국군이 무려 정령사 부대 영입을 묵인한다는데. 그래도 슴바트까지 가능한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해.”
“이봐, 슴바트가 무섭다곤 해도 지금은 일개 대영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금 협조한다고 그 사람이 왕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라니까?”
똑같은 소리를 또 해야 할 지경인데 심지어 그런다고 해도 설득이 먹힌다는 보장이 없다. 키마라스는 대충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 눈치로 키득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지. 한 번 불신하기 시작한 상대를 다시 신뢰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 어려운 걸 강요하기보단 다른 방법으로 유인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다른 방법이라…….”
그러고 보니 미크라야크는 중부 산맥의 교통로 중앙에 위치한 곳이다. 중부 산맥. 중부 산맥의 입구.
‘뭔가 내가 잊어버린 점이 있었나? 뭔가 입맛이 개운하지 않은데.’
회귀 이전의 기억은 대부분 네마냐가 나고 자란 바가반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운 좋게도 초대형 마정석 광산인 사가타가 그곳에 있던 건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마정석 광산.”
“응?”
역시나 광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천생 장인인 아일라가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네마냐는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 토막을 더듬으며 중요한 힌트가 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번에 미크라야크 방문했을 때 문득 「탐지」로 확인했었어요. 뭔가 마정석 중에서도 특수한 파동이 느껴져서.”
“흠……. 기존의 달리 대가 없는 신뢰 기반 임시 동맹이 아니라 대가를 바탕으로 한…… 확실히 처음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
“뭐, 그것도 일단 이쪽 사람들을 어떻게든 협상 테이블에 앉도록 만든 다음의 얘기죠.”
재빠른 손놀림으로 네마냐는 돌바닥에 박혀 있는 남색의 마정석을 슬쩍 건드렸다. 아주 조용하게 작동이 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소리가 흘렀다.
“아, 이게 예전에 다르빌에서 설치했던 그 바닥 난방인가 하는 거구나. 제대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
다르빌 방문 당시 임시 숙소에서 비슷한 장치를 겪었던 하라드는 돌바닥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이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하……. 따뜻한 돌이란 게 이렇게 좋은 건 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생 열일곱 해를 헛살았어.”
“바닥 난방이라고?”
다르빌 방문 당시엔 영지에서 광산과 제조소 감독으로 남아 있던 아일라에게 키마라스도 궁금하다는 듯 다가왔다. 머지않아 네 사람 모두 후끈하게 열이 오르는 바닥에 들러붙었지만.
“흐……. 녹는다 녹아. 대장간에서 느끼는 풀무불과는 완전히 다른 포근한 느낌, 좋다.”
“족히 천 년은 산 것 같은데 아까 소년 마법사가 한 말 그대로군. 천 년을 허투루 산 느낌이 들어 억울할 정도야.”
“맘만 같아선 이걸 가져다 연구실 쪽방 하나에 두고 거기서 쉬고 싶네. 아, 하지만 비용이 역시 문제려나.”
일단 마정석이 들어가면 비용이 무지하게 들어간다는 게 이들의 걱정거리다. 마정석이 노다지처럼 튀어나오는 바가반드도 아직 중간 단계가 매끄럽지 않아 가공 마정석은 무척 비쌌다. 하지만 네마냐는 선뜻 고개를 저었다.
“비싼 종류의 대단한 마정석까지도 필요 없어. 이거 보여? 이건 원래는 팔 수도 없다고 내다 버리는 비호환 D등급 남정석이야.”
네마냐가 톡톡, 아까 온열 마법을 틀었던 마정석을 건드리며 꺼낸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호환에 D등급, 심지어 남정석이라니. 거기 있는 마나를 쓸 수나 있는 거야? 물론 너라면 비호환이라도 얼마든 가능하겠지만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텐데.”
“등급이 낮다고 마나가 적고, 따라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는 건 잘못된 인식이에요. 게다가 비호환 마정석에 관해선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되어 있죠.”
일찍이 마정석을 분류할 때 마나를 이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호환과 비호환을 나누었다. 문제는 이 둘은 마나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지 양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나가 우리가 쓰는 마법 에너지로 충분히 나오지 않을 때 에너지는 대부분 열에너지로 바뀝니다. 그래서 마정석 성능을 볼 때 많이들 같은 마법을 구현할 때 「발열」이 얼마나 적게 나는지를 보죠. 그렇지?”
“그렇지. 나야 주로 아티펙트를 구입하는 입장이라 자세히는 몰라도 그렇게 고르라는 얘긴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오히려 실생활에선 발열이 많이 나는 저성능 마정석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 소리로군.”
그리고 네마냐가 처음에 언급했던 미크라야크의 광산들이 바로 이런 특수한 케이스일 가능성이 높았다. 엘레기스의 정령사 성채를 방문했을 때 광산에서 발견한 마정석이 그런 특이한 파장을 가졌으니까.
[소피님, 이거…… 비호환 마정석 아닌가요?]
[아, 아일라한테도 얘기해 줬더니 놀라더군요. 하지만 소인족 정령사는 정령의 친화력을 이용해서 비호환 마정석을 사용할 수 있죠.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건 비호환형이 대부분이라…….]
광산에서 채굴 중인 마정석 원석은 대부분이 비호환형인 것과 관련해 소피와 이야기를 나누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광산을 채굴하면 최소 절반 이상의 채굴량은 저등급 마정석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무언가 새로운 상품과 시장의 개척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처럼 완전한 불신으로 서로를 대하는 암피에르와 미크라야크의 대립에서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음……. 꽤 타당한 생각이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이유로 못 쓴다고 해서 그 힘 자체가 없다고 할 순 없을 테니까.”
“어쩌면 머지않아 생활상에도 큰 변화를 겪을 듯한 느낌이네. 기대되는걸?”
슴바트-엘레나 화해 분기로 진행된 퀘스트에도 일종의 알림이 떴다. 제목만 보아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그 작은 미션의 이름은 「작은 고추가 몹시 핫하다」였다.
‘작명 센스하곤…….’
그나저나 한창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 다들 테이블의 차가 식어 버렸다. 예전 같으면 안타까워할 일이건만 모두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궁둥이가 뜨듯하면 사람이 너그러워지지. 이렇게 하면 그 예민한 하야스단 사람들도 조금쯤은 뭉그러지지 않을까, 그런 뜬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근데 여러분은 갑자기 단체로 왜 찾아온 거죠, 이 시간에? 내일 성녀께서 소집한 연합군 회의 열리기 전에 잠깐 보면 될 텐데.”
“아차……. 너무 따뜻해서 홀라당 잊어먹고 있었네. 할 말이 있었어.”
아예 뺨까지 바닥에 비벼대며 황홀한 표정을 짓던 하라드가 손뼉을 치며 일어나 앉았다.
“형, 형은 그 특이한 체질에 관해서 뭔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 조금 갑작스럽지만―.”
“체질에 관해서? 진짜 갑작스럽네.”
“속성을 가리지도 않고, 심지어 자연마나와도 극한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지. 거기다 한 번 소진되면 회복이 오래 걸리는 그릇의 마나도 금방금방 복구되고.”
“어…… 물론 고민은 했지. 하지만 너도 얘기했듯이 언제나 예외적인 경우는 있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하라드 자신조차 그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가능성이 0이란 건 애초에 없다. 하지만 보통 수십 분의 일 이하로 떨어진다는 건 현실적이지 않단 소리다.
“그게 그나마 설명 가능한 논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동안 쭉 생각해봤어. 분명히 훨씬 간명하고 더 설득력 강한 설명이 가능할 거라고.”
그러더니 하라드는 키마라스를 흘긋 바라본다. 이 내심을 알 수 없는 수호성수는 고개를 끄덕하더니 품에서 책을 꺼내든다. 저 책은…….
“저번에 네가 줬던 그 철학서잖아? 「마나해석론」. 열불나게 어렵던데.”
“그런 소리하는 거 보니 읽긴 읽었구나. 어디까지 봤어? 저번엔 거의 못 읽었던데.”
“그 미창조 에너지 어쩌고 하는 것의 연구사 개요까진 읽었지. 진짜 보면서 머리털 뽑고 싶었던 책은 처음이야.”
얼마나 어려웠던지 벌써 전장으로 나오면서 책을 펴지 않은 지가 보름이 넘었는데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 현대에 있을 때도 이렇게 철학을 많이 본 적이 없었다.
“책이 온통 마나를 통한 진리의 탐구, 초월을 통한 인간의 심성 극복 같은 소리로 가득 찼지. 읽으면서 토할 뻔했다.”
물론 진정한 내심이 실린 독후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 그러니까 서준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결을 속으로만 음미할 뿐.
‘그걸 기억하는 나도 레전드지 진짜.’
결론적으로 하라드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건네줬든 상관없다. 글자를 그대로 읽고 외우는 것으로 시험은 칠 수 있겠지만 온전히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하라드는 의외라며 놀란 눈치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걸 그만큼이나 이해를 했다고……. 역시나 스스로 터득을 하고 있으면 이해도 달라지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을 이해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잖아? 이것만 봐도 대강 이해는 가는군.”
이제 보니 용건은 하라드와 키마라스 두 명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둘 옆에서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아일라는 궁금해서 따라온 거겠지.
“하. 뭔지 어려운 말로 하지 말고 내가 이해하기 쉽게 얘기해 봐. 특히 옛날 제국어나 철학 용어 같은 건 쓰지 말고.”
아마 이 빌어먹을 「마나해석론」을 그나마 이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던 건 단독으로 18을 찍는 이해력 덕분이겠지. 그래도 아예 알지 못하는 고문법과 사변적인 철학은 밥맛이었다.
“좋아요, 좋아. 그럼 거두절미하고. 뭐, 이미 거두절미는 아니지만 본론만 말해 보자고.”
하라드는 양 팔꿈치를 세운 채 턱을 괴고 네마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건 생각보다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도, 아니면 세계의 운명을 바꿀 지도 모를 이야기야. 자, 형은 이 책에서 미창조 에너지가 무엇인지 봤지?”
“잊을 리가 있나. 세계의 모든 에너지와 재료가 되는 물질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사용되지 않은 채 남은 신비의 에너지잖아.”
“맞아. 졸지 않고 잘 읽으셨네요.”
물론 자다 졸아 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개념 정의만 다섯 번은 봤다는 건 비밀이었다. 어쨌든 멋쩍은 네마냐가 고개를 끄덕이니 하라드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한마디를 꺼냈다.
“아무래도 말이야……. 그, 오해하지는 말고 잘 들어. 형이 마나를 쓰는 그 힘의 근원이 공허의 에너지인 모양이야.”
“하?”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이에 아일라가 대표해서 의아함이 가득한 대사를 날렸다. 공허의 에너지? 그러니까 그 미창조 에너지라는 마나 철학의 수수께끼인지 허수아비인지 같은 헛소리 말인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린지는 모르겠다만. 아직 분석은커녕 감지조차 못한 존재 아니야?”
“하아―. 그래서 지금껏 얘기하지 않고 조금씩 이것저것 검토해본 거지. 여기 키메라 씨도 많이 도와줬고.”
“어지간한 마법사랑은 다른 점에서부터 하나씩 짚어 나가는 게 시작이지. 이를테면 주변 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 쓰느냐의 여부 같은 것.”
“공기 중의 마나라…….”
“마법을 연달아 써도 딱히 부담을 느낀 적은 없었지? 그릇의 마나가 소진된 느낌은?”
그런 적은 잘 없었다. 그리엘크 같은 무시무시한 놈을 상대할 때는 부족함을 느꼈지만. 네마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그런 적은 없었지.”
“보통 마법을 쓰려면 ‘그릇’의 마나로 최초 원소를 소환하고 공기 중 마나를 끌어다 규모를 확대하게 돼. 몇 번 반복하면 주변 공기의 마나 농도가 확연하게 떨어지지.”
따라서 그릇과 주변 공기의 마나를 생각하면서 싸워야 한다. 마나가 고갈되면 마법사 자신의 생명은 물론 동료들도 위험해진다. 고위 마법사들처럼 정교하게 에너지 절약 방식이 고안된 세련되고 복잡한 주문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절약식이 없는 마법을 연달아 써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 그게 수상한 점이다?”
“물론 하나만 가지고 결론을 내린 건 아냐. 그나마 결정적인 근거가 있었지.”
눈빛을 빛내며 궁정 마법사는 네마냐의 속이라도 뚫어볼 것처럼 바라보았다. 설마 시스템이라든가 그런 걸 알아낸 건 아니겠지? 입단속은 철저히 한 편이었지만 혹시나 자신도 모를 새에 이상한 말을 흘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마냐는 바짝 마른 입을 적셨다.
“솔직하게 말해 줘, 영주님. 지금 우리를 보고 있는 그 시선 말고 혹시 다른 기현상은 목격한 적 없어? 뭔가 숫자라든가 문장이 쓰여 있는 판때기 같은 것 말이야.”
“콜록콜록…… 너, 뭐라고?”
막 물을 넘기려던 네마냐가 거센 사레를 뱉어내며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라드나 키마라스의 시선에는 장난스러운 빛이 담겨 있지 않았다.
‘설마, 이 시스템이 공허 에너지가 만들어 낸 일종의 마법이라고? 정말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당황스러운 생각 속에 삐― 하는 이명이 들려오며 네마냐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환생 전부터 회귀한 직후까지의 모든 기억을 되짚으려는 듯이.
- 14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