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1월 22일, 켈리도니온 동문.
“오, 파동이 느껴집니다. 후폭풍에 준비하세요, 모두! 워프가 진행됩니다!”
마법사가 한 손으론 모자를 붙들고 다른 손으론 지팡이를 땅에 꽂아 버텼다. 그 꼴을 본 성루와 성벽 위의 다른 병사들도 제각기 성벽을 붙들거나 바짝 엎드렸다.
―쿠궁.
한 차례 요란한 진동이 몸속 깊숙이 장기를 울리고 지나갔다. 고대 소인족 마법 시설에 익숙지 못한 병사들은 이내 새벽에 먹어치운 아침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어휴……. 얼른 정리할 건 정리하고 문을 열어라. 동맹군이 그새 도착했으니 말이지.”
“소인족 정령사 부대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요, 대장님.”
“야, 너 스물세 살밖에 안 된 거 신전 문서고 뒤지면 다 나온다? 어디 나이만 두 배인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릴 하고 있어. 뭐, 장관이긴 하겠지. 모습을 감춘 지 수백 년 만에 갑자기 소인족의 군대가 단체 행동을 했으니까.”
“아마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도 놀랄 겁니다.”
“가만히 있는 영감님들 놀리지 마라.”
수문장과 병사가 시시한 농담 따먹기나 주고받는 와중, 도시 바깥쪽의 워프 시설은 아직도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아니, 저게 지금 정상인 건가? 아직도 시야 확보가 안 되는 걸. 야, 전방! 뭐가 보이냐?”
“확인이 안 됩니다!”
“그럼 그렇지, 이 망할 마법사놈들.”
살짝 걱정이 드는지 수문장이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보통은 마법사에게 믿고 맡기는 법이지만, 지케른 성국의 사람들은 신관회의 영향으로 마법사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이, 이보슈. 법사 양반!”
“…….”
그러나 신관회에서 특별히 엄중한 신원 조회를 거쳐 초빙한 마법사는 잠자코 정면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수문장은 살짝 더 약이 오른 듯 거칠게 성루 앞으로 나갔다.
“사람 말 좀 들으시지? 이거 정령사 부대가 얼마나 중요한 전력인데 이렇게 위험하게 해도 되는 거요?”
“고대의 마법 장치가 그렇게 만만하다고 생각하다니. 시작부터 글러 먹었군.”
“뭐야?”
마법사들은 보통 지케르니아의 땅에서 주눅 들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마법은, 특히 신성한 백색 마나로 굳게 삼중의 결계를 갖춘 켈리도니온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대기 중에 신성 마나의 비중이 너무 높아, 이를테면 불이나 바람을 만들어 내도 그 위력이 반감되기 마련이었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라곤 해도 직접 마법을 만든다고 자부하지 않나. 그런 마법사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수백 명 단위로 공간 이동 마법을 하는 게 우스워 보이나? 심지어 내 마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수백 년 전에 사용이 중지된 소인족의 마법 시설을?”
“뭔가 잘못되지 않고서야, 어째서 사람은 안 보이는 건가! 먼지구름밖에 없지 않은가!”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시게. 내가 이 워프 이동 시설 사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사람이 너무 많아 마법이 흔들릴 뿐이니까.”
마법사는 또 그대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고블린 침공으로 미크라야크와 성국을 잇는 도로가 끊겼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러면 주요 인원만 워프로 이동하고 나머진 산을 넘어서라도 오면 될 것 아닌가.
‘가뜩이나 얼떨결에 물려받은 정령술로 편히 먹고 사는 게으름뱅이들 뒤치다꺼리나 하라니 속이 상하는데. 이런 거렁뱅이까지.’
자신이 그런 불만 사항에도 불구하고 이 불만족스러운 직장에 머무르는 이유는 한 가지다. 거절하기엔 신관회가 너무 많은 돈을 약속해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태생적으로 마법을 천시하는 야만인의 땅에서 일할 리가 있나!
“자, 이제 그 의심에 찬 눈을 거두고 저 아래를 보라고. 정령사 부대가 죽어서 도착했는지 어떤지.”
“제길. 한 번만 더 불손하게 얘기하면 신관회에 보고하겠어.”
“퍽이나. 행여나 그럴 생각이거든 든든한 빽이라도 데려와야 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성루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시설이 위치한 성벽 바깥쪽은 건조하게 마른 흙이 바람에 날려 제대로 보이는 것 하나가 없었다. 혀를 차며 마법사가 손을 들려는 찰나.
[실프]
여러 가지 목소리로 바람 정령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연이어 좌우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론 일어나기 어려운, 마치 손바닥으로 먼지를 헤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것 봐라. 내가 책임지고 무사하게 도착시킨다고 했지? 역시 소인족 마법이 원시적이긴 해도 내구성은 괜찮다니까. 어디까지나 이 몸이 직접 보완했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마법사는 그러면서도 내심 안도하면서 보험용으로 쳐 두었던 결계를 해제했다. 자신의 실력에 의심을 둘 이유는 없다지만 만에 하나란 건 자신 같은 위대한 마법사에게도 가차 없이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쳇. 잘 도착했군. 다음엔 언젠가 제대로 경을 치를 날이 있을 거다. 그때까진 목을 씻고 기다려 두라고.”
“네 목부터 씻어 둬야지.”
“흥.”
“또 시작이네, 저 사람들. 왜 맨날 실없이 싸우는 건지.”
“싸우다 보니 잔정은 생겼는데 자각하지 못하거나 인정을 하기 싫거나, 둘 중 하나지 뭐.”
티격태격하는 것 같아도 일은 알아서 잘 처리하는 두 사람. 그 광경을 보는 병사들이 내린 결단은 간단하게도 그들이 츤데레라는 것이다.
* * *
“휴. 이곳이 켈리도니온이군요, 왕녀님. 공기가 무척 상쾌하고 맑습니다. 마치 우리 조상이 살았던 곳 같습니다.”
정령사 부대의 수석대장인 아작시오가 숨을 연신 깊이 들이켜며 말을 건넸다. 중부 산맥의 제후들이 입는 모피털옷을 걸친 소피는 끄덕이면서 자신도 숨을 들이쉬었다.
“맞아요. 원래 켈리도니온, 그러니까 옛 우리말로 이에바니아는 우리 종족과 인간들이 합심해서 만들었던 도시이니까요. 우리가 타고 온 워프 시설도 고대 대왕 중 한 명이 선물한 거고.”
“그래서 마나를 신성하게 여기다 못해 아예 교단을 만든 것이었군요.”
고대 소인족에 관한 많은 정보는 오랜 전란과 소인족의 약화와 함께 사라졌다. 먼 후손인 아슬라니아 세대의 소인족들조차 곳곳에 흩어져 지낼 뿐이라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조상들이 어떤 이유로든 마나를 신성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건 분명했다.
“다행이죠. 적어도 켈리도니온은 그걸 잊지 않고 지금도 우리를 환대하는 편이라는 게. 우리가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자리안 경과 약속한 것도 있고.”
“바가반드 백작 말씀이시군요. 안 그래도 떠나기 직전에 거의 반나절 말씀을 나누셨던데 무슨 약속을 하신 겁니까?”
“수상한 음모에 관한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아작시오. 아니면 내가 아직 믿기지 않던가요?”
“아니요, 아니요. 그럴 일이야, 감히 어찌 한 번이라도 머릿속에 떠올렸겠습니까. 그저 노파심에 드려 본 말씀입니다.”
아작시오 대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하게 자신의 태도를 해명했다. 물론 아슬라니아에겐 아작시오를 곤란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다. 손을 내저으면서 그는 애써 분위기를 풀었다.
“알아요. 아무리 우릴 위해 도시를 지켜 줬다곤 해도 인간에 대한 불신을 다 풀진 못하겠죠. 탓하진 않아요. 그리고 나 역시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딸 생각은 없고.”
“충분히 타당한 판단을 내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공녀님.”
“세상에, 무슨 이야기인지도 듣지 않고요?”
“그동안 판단하고 결정하시는 걸 익히 보아 왔지 않습니까. 그러니 원로들도 진작에 ‘아슬라니아의 시대가 왔다’라고 선언하고 퇴임한 것이겠죠.”
「(누구)의 시대가 왔다!」
한때는 수십 권의 책으로 수백 년 동안 차곡차곡 작성되었던 소인족 대관식 전례서. 이제는 한 줌 재로도 남지 않은 그 책에서 유일하게 소인족의 기억에 남은 문장이다.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는 것을 축하하는 표현인 것이다.
“뭐, 이제는 의미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믿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 정도는 해야겠군요.”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말단 정령사들은 멀미와 구역질을 참으며 먼지를 걷어냈다. 아마도 켈리도니온의 워프 시설 입구를 열어준 마법사가 쳤을 결계도 해제되었다. 드디어 신원이 확인되고 성문을 열리자 환영 일행이 나왔다.
“맨 앞에 선 늙은 신관이 대표인 모양입니다.”
“가기크 신관이겠지. 네마냐 경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부종정 겸 신관회의 사법 기능을 장악하고 있다고.”
“실세로군요. 그런 사람을 우리에게 보낸다니. 우리 병력은 지금 삼백 명 정도 아닙니까?”
현 상황의 위급함을 판단한다면 응당 프뉴마케르트의 인구 오천 명이 전부 옮겨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 대이동은 마법으로도 감추기 쉽지 않다. 물자도 넉넉지 않은 성국이 감당할 수 있을지도 문제고.
“제국의 눈치도 있지만 어쨌든 태부족한 마법 전력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니까. 적어도 차별적인 인식은 없는 성국으로선 제대로 된 기회를 잡기로 한 거겠죠.”
두 사람이 소곤거리며 앞으로 나서니 가기크 신관도 한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전면의 절반에까지 드리우는 깨끗한 흰색의 망토를 잡은 노인이 정중하고도 절도 있게 몸을 숙였다.
“소인족 왕통의 계승자를 뵙습니다. 지케르니아의 신관회를 대표하여 대신관 가기크가 영접하길 원합니다.”
“불가피하게 왕래는 끊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소인족은 지케르니아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마지막 후손인 소피 아슬라니아, 가기크 신관의 환영을 받아 반갑게 생각합니다.”
켈리도니온 동문의 수문장과 아작시오가 연이어 각자 가진 신임장과 국서를 교환했다. 교환 절차가 끝나고 신분이 확인되자 수문장이 가기크에게 신호를 보냈다.
“좋습니다. 이것으로 신분은 확인되었습니다. 당장은 미크라야크의 슴바트 전하의 명의로 신분이 보장될 겁니다. 차후 대종정 성하와 얘기를 마치면 독자적인 신분이 보장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독자 신분까지 보장받을 줄은 몰랐군요. 한 가지 여쭙자면, 그건 동맹군으로서의 대우인가요?”
소피 공녀의 이야기에 가기크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소상하고 복잡한 건에 대해선 괘념치 마시길. 바가반드 경께서 이미 적절하게 조처하셨고 성녀께서도 제국군과 곧 협의를 진행하실 겁니다.”
“이곳에 오면서도 제 사람들이 그렇게 걱정하던 부분인데 잘되었네요.”
가기크는 잠시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들이 머리 하나 아래로 늘어섰다.
“성하를 언제 만나시겠습니까? 내일이나 모레 뵈시는 건 어떠실지…….”
“아무래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기엔 바가반드 경이 적합할 듯하니, 같이 만날 시간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안 되나요?”
“아, 네마냐 백작 말씀이군요. 저도 오늘이 참 좋을 것 같다 생각은 했습니다만…….”
잠깐 눈을 굴리며 셈을 하던 가기크는 다시 웃음을 찾아 화답했다.
“제가 일정을 맞추어 직접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안 그래도 그 두 분이 여러 이야기로 조금 피곤하셔서 말입니다”
“격론이 있었군요. 한창 바쁠 때긴 하죠.”
살짝 난감한 가기크를 배려한 소피가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자신들 소인족의 동선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뜻일지도 몰랐다. 공개적으로 다니기에 정령사 집단은 위험한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숙소로 안내해 드리죠. 따라오시길.”
“부탁하죠. 아작시오, 통솔 부탁해요.”
“예. 자, 다들 출발이다!”
그렇게 족히 수백 년간 산속에 머물던 정령사 부대는 다시 무대에 등장하였다.
* * *
“그건 나 혼자 결정해 밀어붙일 문제는 아니에요. 좋은 얘기지만 미안하군요, 나자리안 경.”
트라야브나가 확실하지 않은 문장을 늘어놓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정말 슴바트의 세력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십니까?”
“무시하는 이야긴 아닙니다. 철위기사단은 진작에 전멸했어도 어쨌든 구왕국 시절의 정예 기사들이 중심이 된 미크라야크의 세력은 결코 가볍지 않죠.”
슴바트에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 답답하기로는 성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역시 암피에르 연합의 현 전력으론 한계가 있단 걸 잘 아는 처지였다.
“바가반드 경도 알겠지만, 이쪽 고원은 겨울이 못해도 4월까지 갑니다. 주요 고갯길은 5월이나 되어야 녹고 올해 같은 경우라면 6월까지도 통행이 어려울 수 있어요.”
주요 영지들 사이로 이동할 수 있는 통행로의 차단. 앞으로도 족히 사오 개월은 다른 외부 영지와 중부산맥 제후들의 합류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고블린도 이런 연합군의 약점을 알기에 다른 약점을 노리는 걸지도 모른다.
“성녀께서도 제후들 사이에 퍼져 있는 불신을 염려하시는 것 같군요.”
네마냐는 불과 반년 만에 영주로서의 생활에 잘 적응한 편이긴 하다. 하지만 원래 영주와 귀족사회 사이에 퍼져 있는 소문이나 루머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다.
‘폭정을 했다곤 하지만 정작 기록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고 배제를 하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 테지.’
엘레나가 슴바트의 아주 가벼운 협조 제안을 듣고 몹시 불편해지는 걸 보며 이상했던 네마냐였다. 만약 반대라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어쨌든 바난드 왕실은 슴바트를 쓰러뜨리고 승리하지 않았던가.
‘승자의 여유를 느낄 수가 없었지.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귀족사회의 비밀이 숨어 있는 게 틀림없어. 그걸 알아야 「설득」을 열어서라도 개입을 할 수 있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퀘스트가 하나 떴다. 살짝 피곤한 시늉을 내면서 눈을 감아 확인했다. 그런데 이번엔 퀘스트의 상태도 조금 달랐다.
[숨은 분기점]
[구하야크 왕국의 붕괴는 소수의 권력자와 집권층을 제외하면 여전히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이를테면 왕국 마지막 왕의 이름조차 삭제되고 아직 집권조차 하지 못한 왕자가 폭정을 휘둘렀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폭정의 근거조차 제대로 제시된 적이 없습니다. 어째서 연합군의 구성원이 슴바트의 제안조차 꺼리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면 미크라야크와의 협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거 완전 첩보전을 하라는 얘기인데. 얼마나 보상을 주려고 이런 초특급 임무를…….’
거기에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지 TMI가 줄을 잇듯 계속 이어졌다. 질리는 기분이 들면서도 네마냐는 잠자코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연합군 내부의 신뢰를 강화하기 위해 슴바트와 적대 관계를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중부산맥의 험지 전투에 유용할 정예 경보병 부대를 이용할 수 없게 됩니다.]
[분기 1. 슴바트-엘레나 협조. 정예 경보병 부대의 활용으로 고블린 별동대의 약탈과 각종 기습 작전이 상당히 방지됨. 암피에르 동맹 측 제후들과의 관계가 크게 하락. 이후 반년 뒤에 원래대로 회복됨.]
[분기 2. 슴바트 적대화 노선. 암피에르 연합군의 내부 결속이 강화되어 고블린 상대의 전투 효율이 증가. 보급선 위협 우려, 취약한 지역이 노출될 가능성.]
분기점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선택에 따른 결과까지 읽어내렸다. 이 문제를 여기까지 파헤쳐서 얻어낸 것은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갈림길이었다.
“저도 부정은 하지 않겠어요, 일단. 슴바트와의 협력을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성녀조차 슴바트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단 걸 헤아려 주셨으면 좋겠군요.”
“저도 당장 슴바트와 동맹이라도 맺자는 건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머지않아 결론을 지어야 한다면 미리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뜻인즉, 논의를 공개적인 장으로 끌어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각계각층의 반발이야 당연한 상수로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아닌 성녀가 먼저 운을 띄운다면 적어도 이야기를 듣게는 만들 수 있겠지. 중립적이고 공평한 이미지만큼은 누구든 인정하니까.’
일단 길을 뚫는 게 먼저다. 길이 뚫리는 곳에 방법이 있다. 그것이 살길이라는 건 몇 번의 죽을 고생과 죽은 경험으로 직감하고 있다. 성녀 역시 일단 그런 제안이 왔단 걸 밝힐 뿐이니,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진 않을 것이다.
“옳으신 말씀이군요. 때가 오기 전에는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피해서는 안 되겠죠.”
트라야브나도 다행히 그 정도의 결단을 내릴 줄은 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오케이……. 한 고비는 넘겼고.’
행동력을 살펴보니 다행히도 컨디션이 좋아 꽉 차 있었다. 두 번 정도의 고급 설득 스킬을 써도 될 상황이다. 그러면 이번 문제를 잘 해결해서 성녀에게 빚을 안길 수도 있겠지.
“그러면 성하께도 부담이 되지 않도록 조만간 제가 직접 앞에 나서겠습니다. 물론 그전까지 조금 생각할 여유는 필요하겠습니다만…….”
안색이 내내 흙빛으로 흐려졌던 트라야브나가 손뼉을 치고 다행이라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나서 줘서 미리 고맙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나타나 준 네마냐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쨌을까, 정말 생각하기 싫어지네요.”
“별말씀을……. 그러고 보니 정령사 부대가 새벽에 워프 시설을 이용해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곧 수도에 도착하겠군요.”
마침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시종 하나가 들어와 성녀에게 무언가를 속닥였다.
“때를 잘 맞췄네요. 흐름이 좋은 사람에겐 운도 맞춰 준다더니, 오늘의 네마냐 경에게도 마나의 축복이 있을 겁니다.”
“아, 벌써 소식이 도착한 겁니까?”
트라야브나는 일어나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손을 내밀면서 말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쉬도록 할까요? 오늘도 고생이 많았습니다. 제가 기도를 좀 드리죠.”
“아, 그렇게 해 주시면…….”
딱히 차원을 넘나들었던 자신에게 마나교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건 아니지만, 네마냐는 차분하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붙잡은 트라야브나는 작은 목소리로 이치에 따라 힘을 얻어 전진할 수 있게 해 달라며 짧은 기도를 읊었다. 맞잡은 손으로 신성 마나가 흘러나왔다.
‘역시. 신성 마나가 주입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야. 아무리 핫바지 같아도 대신관은 대신관이란 거지.’
신성 마나가 속성 마법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지만 집중력 향상과 번뇌를 제거하는 효과는 탁월하다. 네마냐는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만끽하며 이윽고 어떤 분기를 골랐다.
[한 번 선택한 루트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 루트로 계속합니까?]
[선택 완료]
창은 사라졌고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개인 보상으로 미리 얼마인가의 능력치 보상이 주어졌다. 대충 살펴보니 무려 다섯 스텟이나 찍을 수 있는 분량이다.
‘자……. 그럼 이제 다시 한번 언변을 빛내 볼 차례다, 네마냐.’
그렇게 엄숙한 대신관의 기도를 받으면서, 바가반드의 백작은 온갖 수단과 절차를 가리지 않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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