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뭐라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야?”
“워. 진정해. 아직 이야기의 첫 문장밖에 꺼내지 못했어. 먼저 듣고…….”
“안 그래도 패륜아 같은 동생 녀석 때문에 심사가 복잡한데 그 이야기까지 하고 싶진 않아. 미안해.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닌 것 같아.”
“엘레……!”
엘레나는 성큼성큼 성난 발걸음을 옮기더니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연이어 닫히는 요란한 문소리는 덤. 곁을 지키던 클로루스와 필로칼리스도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저…… 백작님. 깊은 생각 끝에 꺼내신 말씀이겠지만, 그건 아직 성급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야 넓게 볼 줄 아는 사람은 못 됩니다만…….”
“그런 제안이 있었으면 먼저 여기 주변 사람들한테 확인했었어야지. 아니, 그건 둘째 치더라도 얼마 전까지 가스파리얀이나 펜자르크와 싸웠잖아. 그 배후에 있다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덥석 받아들일 수가 있겠어? 가뜩이나 전대 왕실에서 그렇게 유혈이 낭자했다고 하는데.”
하라드까지 덩달아 네마냐의 제안이 급작스러웠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뭐라고 한참을 더 떠들 기세라 네마냐는 검지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조용히 하라고 당부했다.
“안 그래도 나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서로 피곤하게 만들지 말자. 나도 쉬운 생각으로 꺼낸 얘기는 아니니까.”
네마냐는 오랜만에 입맛이 쓴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로칼리스를 보면서 단순한 당부만 남겼다.
“당장은 연합군으로 묶여 있어서 괜찮다지만 무슨 장난을 칠지 몰라. 그러니 이 친구를 잘 아는 자네들이 엘레나와 함께하면 좋겠어.”
“염려 마시길. 무슨 직함을 앞에 달아 둔다고 해도 단장님은 우리 단장님이니까요.”
“목숨으로 지켜 보일 겁니다.”
네마냐는 고갤 천천히 끄덕였다. 하라드도 필요하면 따라나서기 위해 반쯤 일어섰다.
“그나마 맘에 드는 대답이군.”
“어디로 가는 거야, 방으로?”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선약으로 잡아 놓은 거라서. 두 사람은 좀 쉬다 와. 그리고 당분간 다른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는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고. 괜히 말 커지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네마냐는 방 밖으로 나섰다. 요란스러운 쾅 소리와 함께 닫혀 버린 문만 보아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건 확실했다.
“에휴……. 하필이면 손을 잡자는 제안이 다른 곳도 아니고 미크라야크한테서 온담.”
“다행히 어느 정도 적당히 화해만 하겠다는 수준이면 모르겠지만.”
“슴바트 군주를 믿냐, 넌? 왕세자 시절에 얼마나 반대파를 이단 종교의 마법사라고 죽여댔는데. 심지어 자기 지지자들도 속이곤 죽여서 전공으로 삼을 정도였잖아.”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키마라스가 손을 들고 어린 기사에게 물음을 건넸다.
“경, 당신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슴바트란 사람이 왕세자였던 시절을 기억하지? 내가 알기로 거의 십 년 이상은 된 것 같은데.”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기억이 있잖아요. 우리 부모님과 친척, 교관, 선배들의 기억.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의 기억을 전해 받죠, 그대로.”
웃음인지 슬픔인지 모를 묘한 표정이 정체 모를 마법사의 얼굴에 물들었다. 단지 단어 하나를 중얼거리며.
“기억이라, 기억…….”
“에휴. 어쨌든 오늘 일은 당분간 우리끼리만 알아 둡시다. 이의 없죠?”
그러겠다고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클로루스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성녀께서 이 이야기 들으면 의외로 좋게 반응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신관회는 원래 하야크가 재통일은 못 해도 단결하는 건 반기니까요.”
“야, 단장, 아니 전하의 의중이 가장 중요하지. 당사자가 싫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필로칼리스가 한마디를 뱉었지만 클로루스도 혀를 빼물면서 못마땅하단 표정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단장이자 차기 왕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단장님이 잘 결정하시겠지만 감정의 골만 살짝 넘을 수 있다면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잖아요.”
“너, 진짜…… 오늘은 우리도 좀 가서 쉬어야겠다. 너무 반가워서 둘 다 뭔가에라도 씐 모양이야.”
계속 중얼거리는 동생의 멱살을 잡은 채 필로칼리스는 하라드 일행에게 인사를 청했다. 입맛을 다시면서 하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가서 쉬도록 하죠. 그런데 네마냐 이 녀석, 갑자기 어디로 간 거람. 숙소로 갔나?”
“글쎄.”
젊은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키마라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딘가 시원치 않은 구석이 있어 하라드가 캐내듯 여러 번 물으니 키마라스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우리 영주께선 곧바로 성녀에게로 달려가신 건 아닐까 싶은데. 아까 안 그래도 엘레나 공주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이런 소릴 하더라고. ‘쇠뿔도 난 김에 뽑아야 한다던가.’ 대충 당장 해치워야 한다는 투였지 아마.”
“그런…… 괜찮을까요? 전하가 어지간히 화가 난 게 아닌 모양인데. 성녀 예하께 알린다고 해도 말이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성녀와 전하 두 분이야 막역한 친구니까 도움을 청할 수도 있겠지. 내키진 않아도 도움이 된다면, 설득이라도 해 볼 수 있지 않겠어?”
역시 대인관계는 쉽지 않다. 그건 아무리 마법학 수석 출신을 자부하는 하라드 본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진리였다. 그러고 보니 마침 그 비슷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키메라 씨.”
“궁금한 게 아직 더 남았나?”
“아, 인간관계 얘기는 아니고요. 네마냐 형 관련해서 좀 확인할 게 필요해서 말이죠. 마법적인 특징과 관련해서.”
“특징이라니? 마나라면 인간들은 대부분 동일하지 않나? 나자리안이 약간 특이하긴 하다지만 그 정도로 다른가?”
궁정 마법사의 발언을 네마냐가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라도 되는 존재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키메라와 같은 성수들은 어차피 생명이 가진 마나를 한 가지로 보지 그 종류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니 네마냐의 마나에 무슨 특징이 있다고 해도 분간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
“인간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지만요.”
“그럼 뭔데?”
“그러니까…… 기존 주류 마법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원리가 체현되고 있어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 친화성이라던가, 소수의 상성에 전속되는 게 아니라 모든 상성에 통달한다거나 하는.”
“그게 그 마법학이라는 인간들 학문에 비추어 보면 다른 모양이군. 그게 대수란 건가?”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마법사들은 십중팔구 분노를 터뜨렸을 것이다. 지난 수백 년간의 상식을 무시하는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마나를 2차적으로 해석하는 인간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마나와 함께하는 성수다. 그렇기에 하라드는 차분하게 이어 갔다.
“예. 아주 오래전의 선배인 인간 마법사들은 마법 아니, 마나의 기원을 탐구해 왔어요. 그리고 그들은 암흑 에너지 또는 공허 에너지라는 아주 특별한 마나가 있으리라고 가정했죠.”
“공허…… 에너지?”
키마라스도 복잡한 마법학 이야기가 나오자 마냥 심드렁하던 태도를 조금 고쳤다. 하라드가 조심스레 마법학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마나의 성질과 원리를 규명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동감은 가지 않아도 귀담아들을 만한 이유는 있어 보였다.
“예. 어쩌면 우리 영주님은 그 공허 마나를 전설적인 대현자 알레시아 이래 처음으로 사용한 분일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차근히 생각으로만 담아 두었던,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다행히도 네마냐와 깊은 인연을 가지게 된 키메라가 그 상대였으니 하라드는 굳게 맘을 다지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이게 어떤 여파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선 자신 역시 정확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 * *
“어서 와요, 바가반드 경. 언제 볼 수 있을까 했더니 꽤 기다리게 했군요.”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이 있어도 먼저 찾아뵐 수 있어야 했는데.”
“이걸 받아치지도 않네? 괜히 나만 민망해지게. 됐으니 얼른 앉으세요. 바쁜 사람이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고맙습니다.”
트라야브나의 권유에 의자에 앉은 네마냐는 성녀와 간단한 대화를 시작했다.
“같이 오신 일행들은 잘 지내고 계시겠죠? 맘 같아선 더 좋은 숙소를 드리겠지만 제국 대표와 형평성을 맞춰야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충분히 훌륭한 숙소를 주셨습니다. 이와 빈대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게 최고의 방이죠.”
‘까짓거 추위에 난방 안 되는 건 가지고 다니는 화염 아티펙트로 대충 때우면 되니까’라고 대충 대답하는 네마냐였다.
“소피 아슬라니아 공녀로부터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정령사 문제에서 해답에 바짝 다가섰더군요. 영지의 보조병으로 고용할 생각인가요?”
“우선은 일반적인 마법 용병단 면허를 부여해서 제국법을 우회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이 부분은 니키타스 제독과도 얘기했습니다.”
“그들의 보급과 무장도 벌써 진행하겠군요.”
“저와 함께 이곳에 왔던 소인족 혼혈인 동료를 기억하시나요?”
“그럼요. 아일라 씨 같은 호걸을 잊을 리가요.”
“아일라가 마침 그들과 동포이기도 하니 자청해서 그들의 보급을 맡기로 했습니다.”
이야기가 좀 무르익으며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자 네마냐 앞에 곧바로 접시가 놓였다. 따끈따끈하게 갓 구워 낸 듯한 빵 한 조각이 올라가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네마냐가 시스템의 퀘스트대로 진행할지 고민을 하는 사이, 트라야브나가 말문을 열었다.
“연합군이 언제나 도착할까 초조한 마음뿐이었답니다. 복잡한 심사를 달래려고 주방에서 밀을 좀 훔쳐다 빵 만들기를 독학했죠. 여러분이 다들 모이니 이젠 제빵도 완벽하네요.”
“더 빨리 와서 손에 밀가루도 묻히지 않게 해 드려야 했는데 말이죠. 그래도 길지 않은 시간에 제빵까지 익히시다니 역시 대단하시네요. 종정 선출에 학창시절 성적도 들어간다고는 들었습니다만.”
“흠흠! 뭐, 당연히 이 거대한 교단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대종정이 기본적으로 똑똑한 건 당연하죠. 현명한 행동까지 하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어째서 현명하시지 않겠습니까. 한랭화 현상이나 고블린에 대해서 일찍이 저와 같은 결론을 내리실 정도 아닙니까.”
입을 가리고 살짝 웃은 성녀는 아부를 잘하시네요, 라며 점잖게 물리쳤다.
“진정한 현인이라면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치를 적절하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죠. 그 기준으로 따지자면 나야 뜨내기 수준에 불과한 거고.”
“너무 무거운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몰아붙이는 것도 좋은 건 아닙니다. 인간은 각기 다른 그릇이 있는 법이고 각자의 쓰임새가 있는 거죠. 사람이 천 명이면 삶의 방식도 일천 가지니까요.”
그러면서 네마냐는 손가락으로 빵 귀퉁이를 살짝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스트와 버터 혹은 마가린이나 설탕이 담뿍 들어간, 그 익숙한 빵 맛은 물론 따를 수 없다.
“구수한 맛이 일품이네요. 이 정도면 축성해서 매주 기도회에 내놓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렇게 고객을 모아서 나중에 은퇴하면 관저 앞에 빵집이라도 차려야죠. 이거 마음 졸여서 신관을 얼마나 하겠어요.”
“후후……. 먼 훗날의 이야기로 하시죠. 지금은 성녀께서 계시지 않으면 무척 곤란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말에 유심히 백작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트라야브나는 무언가 있다는 걸 직감했다.
“드디어 제 도움이 필요해진 모양이군요. 기쁘긴 한데 표정이 좀 어둡군요.”
“사람들이 적잖이 부담을 느낄 만한 이야기라서 저도 좀 버겁군요. 안 그래도 엘레나에게 운을 띄워 봤다가 귀신같이 퇴짜를 맞았죠.”
멋쩍게 머리를 만지는 네마냐를 보며 트라야브나는 대충 느낌이 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왕가의 대타협>이란 미션을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퀘스트 내용대로라면…… 슴바트와 최소한 신사협정이라도 맺게 하면 미크라야크가 자동 참전을 하게 된다니까. 전력이 반 토막 난 지금 바난드로는 절대 혼자 싸워선 안 되지.’
그리고 이 상태에서 엘레나를 조금이라도 설득할 가능성은 오랜 친구인 성녀에게 있었다. 이걸 염두에 두어 미리 알현을 신청해 둔 것이다. 잠깐잠깐 퀘스트 창을 훑으며 네마냐는 트라야브나의 이야기에도 집중했다. 집중하느라 진땀이 맺힐 정도였다.
“아, 하긴. 정령사 보루를 지키는 전투에 그쪽 병력이 참전했다고 했죠. 정령사 부대의 출입을 슴바트 왕이 평소에 금지해 왔던 걸 생각해 보면……. 슴바트가 뭔가 제안한 거네요.”
“역시 대단한 추리 실력이십니다.”
“정령사 구조까지만 듣고선 몰랐는데 엘레나 얘길 들으니까 바로 느낌이 왔거든요. 휴.”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살짝 맥이 빠진 성녀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현 바난드 왕실도 하야크 왕가의 일원이란 건 알고 계실 테죠. 바난드의 하코브 전하와 미크라야크의 슴바트 전하는 이복형제이시고.”
“이복형제야 남남이나 다름없죠. 한 어머니에서 나와도 서로 원수나 다름없는 남매도 있는데.”
“훗, 그렇긴 해요.”
두 사람은 마주 쓴웃음을 지었다. 하코브 왕에겐 여러 자녀가 있지만 모두 왕국이 세워지기도 전에 작고한 왕비의 소생이었다. 하물며 한 명의 모후를 기억하는 엘레나와 아쇼트조차 원수지간이 되지 않았나.
‘비정한 권력투쟁의 세계에서 이복형제면 서로 죽이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겠어.’
그렇게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나니 속은 조금 편해졌다. 세상이 살짝 작게 느껴졌다. 그래, 어차피 한 발짝 어긋나면 남이고 원수가 되는 이치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원수 관계라고 해도 잠깐 삐끗해서 동맹이나 적어도 협조하는 사이는 될 수 있지. 결론을 내린 네마냐는 마침내 움직였다.
“그래서 성녀께 부탁을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잠시만이라도 좋습니다. 엘레나와 저쪽 슴바트 두 분 전하가 일시 협조할 수 있도록 알선해 주십시오.”
이것 역시 쉽지 않은 길인 건 안다. 하지만 앞뒤와 양옆 모두를 적으로 둘러싼 채로 운명을 건 한판 싸움을 벌일 순 없는 노릇이니까. 성녀의 대답은 어쩌면 그간의 퀘스트와 달리 다른 인물이 성패를 가를 분수령이었다. 트라야브나가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저는 마나가 요동치는 이치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마치 NPC처럼 상투적으로 나오는 대사. 하지만 뒤에 어떤 대사가 붙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살짝 긴장한 네마냐는 몸까지 기울이며 성녀의 입술 움직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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