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반갑군요. 내가 바로 국왕인 아버님을 대신해 군병을 거느리고 나온 아쇼트입니다. 머지않아 왕국을 물려받을 정식 후계자이죠.”
“호, 아쇼트 왕자님이 바로…….”
“동생아, 아버님께서 아직 몸 건강히 잘 계시는데 곧 나라를 물려받는다니? 누가 들으면 마치 네가 아버님 돌아가시기만 기다리는 거로 이해하겠구나.”
발빠른 견제구. 아쇼트는 잠깐 표정을 굳히고는 애써 니키타스와 악수를 나누었다. 총사령관은 유심히 젊은 왕자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곁으로 옮겼다.
“그럼 이쪽이 아니의 엘레나 공주 전하시겠군요. 거기에 지케르니아의 신성 기사단 단장이기도 하시고.”
“장군의 위명도 익히 들었습니다. 남쪽 사막지대에서 카이로 칼리프의 침공을 막아 낸 마라클레아 전투의 명성은 저도 들었답니다.”
“허허……. 하야스단에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군주께서 처음이십니다. 과연 전쟁에 해박하시다는 게 사실이군요.”
앞선 대화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적어도 엘레나가 전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니키타스는 놀란 기색을 지었다.
‘역시, 자신의 전문 영역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면 첫인상을 확고히 굳힐 수 있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은 네마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제국은 하야스단보다는 여성 정치가의 활약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여전히 군부와 군사작전에서 여성의 입지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저 흔한 전근대 국가다.
‘니키타스 역시 맏이지만 공주, 차남이지만 왕자를 전장에서 만나게 되면 당연히 저절로 후자에게 뜻이 기울 수 있지. 그걸 막으려면…….’
불리한 판 자체를 다시 이쪽으로 기울게 하려면 한 가지 방법이 필요했다. 장군이 아쇼트가 아니라 엘레나에게 더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것. 장군은 용병술과 작전, 전쟁과 국방에 깊이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엘레나 전하께서도 고블린 소탕전을 크고 작게 치르셨죠. 이번에 연합작전과 관련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꼭 해야죠. 당장에라도 했으면 합니다.”
“크흠.”
몹시 불편한 듯한 기침 소리에 두 사람은 묘한 표정으로 앳된 소년을 바라보았다. 기껏 용기를 내서 어그로를 끌어 봤지만 두 사람의 기운을 이길 순 없었다.
“보급이나 추가적인 증원군도 역시 필요할 겁니다. 이에 관해선 아국의 원로 영주인 펜자르크와 에살하톤의 상단이 협력해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차차 논의해 봅시다. 오늘은 우선 당장 움직이거나 얘기를 하기보다는 오는 길에 쌓인 여독을 풀어 보도록 하시죠. 괜찮으십니까?”
다시 서로를 빤하게 응시한 엘레나와 아쇼트.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지휘관은 몰라도 병사들은 먼길을 오느라 지쳤을 테니까요. 연합 작전이 처음이신 동생께선 어떠신지…….”
역시 엘레나다. 군인 경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라는 네마냐의 짧은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거기다 아쇼트의 상대적인 경험 없음까지 꼬집는 실력이라니. 얼굴이 살짝 붉어진 아쇼트는 입술을 앙다문 채 억지웃음을 지었다.
“두 분 말씀이 그러시니, 적어도 오늘은 쉬도록 하죠. 저도 잠시 물러가 쉬도록 하겠습니다.”
이내 어딘지 꽁한 표정의 소년 왕자는 하급 신관 한 명의 안내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엘레나는 떠나가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니키타스는 표정을 실룩이면서 그날의 만남을 끝낸다고 선언했다.
* * *
성국에서 제공해 준 회의장을 벗어난 바난드 대표단의 걸음이 재빨랐다. 아쇼트와 그 지지자들은 이미 엘레나 일행보다도 훨씬 빨리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간 듯 사방이 깨끗했다.
“오늘은 보기 좋게 제대로 한 방을 날려 줬어. 내가 속이 다 시원하더라.”
“전하께서 제대로 각오하신 모양입니다.”
하라드가 엘레나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건 사소한 서전일 뿐이지. 바가반드 경의 말대로 첫인상이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건 결론이야.”
“물론이지. 그래도 일단은 출발이 좋아. 제국군에 털린 정보는 없고, 오히려 저들이 사족을 못 쓸 전력을 구해 놨으니까.”
“사족이라…… 그게 뭐지?”
“정령입니다.”
곁에서 내내 침묵을 지켰던 하라드가 스무고개를 하려는 네마냐의 뜻을 단번에 침몰시켰다. 기운이 빠졌다는 듯 네마냐는 선선히 인정했다.
“정령사들은 난쟁이…….”
“쉿, 이제부턴 난쟁이라고 하면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그쪽 사람들은 소인족으로 부르는 게 공식 명칭이니까.”
“그래, 아무튼 그 소인족이기 때문에 인간과 협력하는 건 싫어하지 않았어?”
“인간이든 소인족이든 어차피 조건이 변하면 태도도 변하는 법이지. 고블린이 대놓고 본거지까지 치고 들어오니 마음을 바꿨어.”
“뭐,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중요한 건 그거지. 예전 검은 던전 사태 이후로 육백 년 만에 다시 세력과 종족을 초월해서 모여들고 있어.”
육백 년의 시간을 거스르는 수호성수의 말에 현장의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육백 년 전의 검은 마나는 섣부른 마법사와 전사를 집어삼키며 땅을 더럽혔다. 지금보다도 훨씬 강한 왕국과 제국마저 거의 삼켰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검은 마나를 장난감처럼 부리는 수상한 단체가 제멋대로 놀아나고 있음에도 이쪽은 아직 정체조차 파악조차 못 하고 있다. 엘레나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드디어 이 위기가 제대로 인식되는걸. 단순히 도시 몇 개, 나라 하나가 망하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말이지.”
“검은 마나는 적어도 현상적인 특징이라도 있었지, 이제는 그것마저도 누군지 아직도 모르는 적의 도구에 불과하지. 나도 답답해.”
네마냐 역시 회귀로 다른 사람보단 현실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지금부턴 경험이나 역사의 영역이 아니었다. 회귀 전의 실패해 버린 세계는 그 위험이 뭔지 알기도 전에 패배해 버렸으니까.
“말 그대로 지금부터가 정말이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는 순간이란 거군.”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 신나 보이는 키마라스의 한마디를 끝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단장님! 돌아오셨습니까!”
“기사단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단장 경호기사인 소년 두 명이 복도 끝에서부터 경망스레 달려오는 소리에도 분위기가 들뜨지 않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네마냐는 무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아직 초안만 잡아 둔 생각이 하나 있긴 한데, 한번 들어 보지 않겠어요, 다들?”
* * *
“제길, 그 망할 것이 감히 나를 모욕해?”
거칠게 탁상에 손을 내리꽂는 왕자의 호통에 기껏 올려 두었던 물잔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신들은 곤혹스러운 손짓으로 왕자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차피 정공법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걸 공주 역시 잘 알기 때문입니다. 도발에 말려드실 것 없으십니다, 저하.”
“그게 무슨 소용이야? 장군 앞에서 내가 군사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애송이란 소리나 듣고 사람 좋게 허허 웃으라 이 말인가?”
어차피 좋게 달래 보아야 당장 쓰린 속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경력이 적은 젊은 귀족 자제들은 함께 분노하는 시늉을 하거나 쩔쩔매며 달래려 했다. 그게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아는 짬이 찬 가신들은 적당히 말문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어떻게든 저것의 버릇을 고쳐 놔야지, 안 되겠어. 아버님이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멋대로 왕위를 뺏으려 들지 않나. 이젠 아예 눈이 뒤집힌 모양이야. 저열한 수까지 쓰고 있으니.”
“어차피 가장 중요한 본토에선 여전히 우리의 세력이 앞서고 있지 않습니까. 별 소득도 없을 고블린 전장에서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침묵을 지키던 가신단 중에서 제눌트 장군이 점잖게 지금 상황이 불리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제눌트는 영지 없는 남작으로 카르시 영주의 지휘관이다. 원정군의 선임 장교로 믿고 파견될 정도로 자질을 인정받는 군인이었다.
“무리는 개뿔……. 자의든 억지로든 전쟁에 일단 가담하게 되면 전공에서 엘레나를 압도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국의 승인받아서 자리를 받겠어.”
“그럴 필요까진 없으십니다. 적당히 우리 병력과 장교단으로 할 수 있는 역할까지만 행사해도 제국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합니다. 왕위를 확실히 굳힐 방법은 엘레나를 지지하는 지지파의 힘을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뭔데?”
멋지고 쿨한 대답을 원하는 왕자에겐 불행하게도, 제눌트 장군은 우직한 바보일 뿐이었다. 남작은 그렇지만 다시 자신의 계획을 외웠다.
“전방에 나온 우리가 적당히 위신을 챙기는 사이, 후방의 펜자르크 백작이 엘레나와 바누라트 지지파를 패배시키거나 고립하게 해야 합니다.”
“저희가 보기에도 자연스레 그렇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피해도 적고 모양새도 좋으리라 봅니다.”
제눌트가 대놓고 무시당하는 것을 지나칠 수 없던 다른 하급 가신들이 마지못해 나섰다. 그러나 이내 아쇼트가 잔을 날리면서 의지는 금세 끊겼다.
“오…… 그러니까, 당신들 말대로면 나는 어차피 바지사장이니 펜자르크가 떠먹여 주는 대로 얌전히 왕이나 되라, 이 말이군?”
“제 말의 뜻을 정확하게…….”
“닥쳐.”
아주 낮고 짙게 깔린 목소리였다. 평소 중저음보다는 높은 미성에 가깝다고 호불호가 많이 갈리던 아쇼트의 목소리랑은 딴판이었다.
“펜자르크가 나는 젖혀 두고 대전략을 정한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미크라야크에 꼭꼭 숨은 전 주군과 비밀리에 연락한다는 것도?”
“얼마 전에 단순한 유언비어라고 백작께서 직접 밝히지 않으셨습니까. 엄벌하겠다고…….”
아쇼트는 코웃음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주변에 늘어섰던 자제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새로 주워섬길 핑곗거리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과일나무의 뿌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가지에 열린 열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제눌트는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라가 망하는 망조가 적전 분열이라더니, 여지없이 자신들이 그 꼴이지 않은가.
“괜찮을 겁니다. 전하. 저희 아버지들께 단단히 말씀드려서 전하께서 더 확실하게 힘을 휘두르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펜자르크 백작의 성정이 거칠긴 하지만 아무렴 폐위당한 슴바트와 교분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분명히 엘레나 측의 더러운 작업입니다.”
“이렇게 된 것, 기회를 보아 바가반드의 그 애송이를 쳐서 본때를 보여 주시죠. 그놈이 자연스레 흘러가던 일을 모조리 망친 주범이니…….”
‘모리배들 같으니. 너희들이 누구랑 결탁하는지 소문이 파다하거늘. 거기다 우리 힘으로 바가반드를 치자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바가반드와 전쟁을 벌이는 순간 에살하톤 상단은 서부 영주들과의 거래를 중단할 것이다. 거기다 빠르게 늘어나는 바가반드 군은 물론, 그 영주의 무시무시한 마법에 대한 소문은 듣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저놈들이 왕을 무용지물로 만들자고 일부러 펜자르크가 슴바트를 끌어들이는 걸 모른 척하지. 이미 사방 이웃 나라에 모든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제눌트 남작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각 영지의 실무를 담당하는 기사들과 봉토 없는 가신들은 비록 왕실에 대한 충성은 형식적이라곤 해도 펜자르크 백작이 새롭게 빚을 바난드에 대해선 그래서 걱정이 많았다.
“내일 내가 다시 니키타스 제독을 만나기로 했으니 그 이후에 우리 거취에 관해서도 얘기하지. 수고 많았으니 모두 돌아가서 쉬도록.”
“감사합니다, 전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아쇼트는 거칠게 휘장을 걷고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어렵사리 유지되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자제들은 위장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하고 싶은 소릴 되는대로 떠들었다.
“어휴, 왕자면 뭐 해. 어차피 귀족들이 옹립해 줘야 왕이 될까 말까인데. 자기 처지를 알면 적당히 맞춰 주면 되지 않나?”
“심지어 자기 입지도 잘 알고 있잖아. 바지사장이라니, 푸핫!”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가 봐. 자기 누이는 여자라는 것만 빼면 군인 자질이나 통치 경력도 훨씬 낫구만.”
“야, 그러니까 귀족 회의에서 절대 엘레나 그것에게 왕위를 주면 안 된다고 결정한 거지. 지금 국왕도 얼마나 귀찮게 구는데. 거기다 성기사단까지 지낸 왕이라니, 맙소사!”
저희끼리 불경한 내용을 떠드는 자제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영지를 가진 제후들의 후계자다. 가신단 중에선 마지 못해 장단을 맞추거나 남모래 한숨을 삭일 뿐이었다.
“우리는 이만 가도록 하죠, 남작.”
“아, 그래야지. 저희도 그만 가서 군마에 꼴도 좀 먹여야겠습니다. 이 사람들도 본국으로 정기 보고를 올려야지요.”
“어, 그래. 오늘 수고 많았어, 제눌트 경. 거 말도 안 듣는 애송이한테 충심을 담아 조언하는 게 눈물 나더라고, 크크…….”
“…….”
눈썹 끝이 살짝 미동했지만 용케 제눌트는 음울한 제 표정을 지켰다. 반응을 좀처럼 하지 않으니 성미 급한 자제들은 금방 흥미를 잃은 모양이다. 그들 중 가장 강한 세력인 케시번 변경백의 맏이인 르반(Ruvan)이 손사래를 치며 나가라고 했다.
“……후. 답답하군. 서부 영지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을 저울질하는 것도 못 할 짓인데.”
남작은 피부를 파고드는 강추위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몇 걸음을 군막 밖으로 옮기고 보니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광장에 불빛이 보였다. 엘레나 공주의 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고블린 하나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계승자들끼리의 내전에 영지의 정치적 분쟁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런 장군의 어두운 시야에서는 어떤 상태창이나 시스템이 보일 리 없었다. 마치 불안한 미래만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펼쳐질 뿐이었다.
“올바른 길을 가겠다는 신념 하나로 삼십 년을 장군으로 지냈건만.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군. 아니면 이 위기가 그 올바른 길을 열어 주는 새 계기가 되는 걸지도.”
저 멀리 펄럭이는 바가반드의 산양 깃발을 보면서 잠시 제눌트는 걱정거리 없이 기사도에 열중하던 자신의 젊었을 적 기억에 빠져들었다. 이 강추위에서 그 정도 사치는 훈훈하게 가져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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