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5천 명의 병력과 오백여 기의 기사를 대동한 엘레나의 바난드 왕국군이 성도 근처에 다다른 것이 1월 20일의 일이었다. 불과 일주일 동안 온갖 일이 일어난 셈이었다.
“하. 이제 성도 근처까지 다 왔나?”
“말씀하신 대로 이 고갯길만 넘어가면 성도 켈리도니온입니다.”
마침 표지석에는 이곳이 예바니아(yevania)라며 길손을 환영하는 글이 쓰여 있다. 예바니아란 지금처럼 제국에 반쯤 침식되기 이전 하야크 왕국 시절에 지금의 켈리도니온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전방에 누군가 다른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전방에?”
경호를 위해 몇 발자국 앞서 진행하던 보초의 보고. 엘레나는 말채찍만을 든 채 앞으로 나섰다. 지금처럼 군대를 이끌고 다닐 때 군대 지휘관은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어느 정도 검 없이도 검기를 뿜어내는 오러 마스터는 되어야 부릴 수 있는 강짜랄까.
“아, 익히 아는 녀석들이야. 괜찮아.”
엘레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렀다.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뒤로 물러섰다.
“네마냐!”
동생의 쿠데타 진압에 나선 이후로 좀처럼 웃는 표정을 짓지 않았던 엘레나가 모처럼 활기차게 꺼낸 이름이었다. 웃는 낯에 누가 침을 뱉느냐는 속담은 하야스단에도 있다. 하지만 엘레나의 경우는 좀 달랐다.
[동생의 자리를 빼앗아서 기어코 가문의 유산을 집 밖으로 가져가겠단 소리 아닌가.]
[기왕 일이 터져 버렸다면 깔끔하게 물러서면 되는 것 아닌가? 아무렴 일이 이렇게 나라를 두 쪽 내지 않고도 훌륭하게 끝날 텐데.]
그야말로 복장이 터지는 소리였다. 이들에게야 나라를 누가 다스리건 문제가 없으면 그만이란 말인가? 오히려 지긋지긋하게 전쟁에 시달렸던 백성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전에 자신의 사업과 재산을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가진 것 많은 자들’이었다. 자신들의 것을 지킬 수 있다면 백성들에게 절실한 ‘평화’ 따위는 얼마든 내버릴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 몸서리를 치며 엘레나는 애써 머릿속을 정리했다.
“전하,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고삐를 잡은 채 멈춰선 세 사람이 네마냐의 선창에 따라 안장 위에서 인사를 올렸다. 엘레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받았다.
“바난드의 일이 여간 복잡해서 원래 계획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 대신 연합군을 수습해 주느라 바가반드 경의 고생이 많다고 들었는데.”
“워낙 제 기능을 못 하던 동맹군이니까요. 말썽이 많은 것도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두 번은 하기 싫은 일이네요.”
“수고 많았어요. 내가 조정에 보고해서 제대로 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의례적인 대화는 금세 끝났다. 잠시 엘레나는 신관회에 도착을 알리면서 입성 허락을 구하는 전령을 보냈다. 밤낮없이 달려온 병사들에게 잠시 쉬도록 하고 네 사람은 사적인 관계로 돌아갔다. 한 차례 떠들썩한 소개와 지난 며칠간 켈리도니온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겨우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여러 가지 일을 겪었구나. 나도 조금이라도 빨리 와서 모험을 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요즘엔 전하께서도 성녀처럼 이상한 취미를 수집하는 꿈이 생기셨나 본데?”
“하아, 말도 마. 아니에서 그동안 정치 일선에 개입하지 않았던 게 다 아버지랑 숙부 덕분이었다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라니까? 그 정도로 사람들이 관심도 없고 툭하면 불평불만이나 늘어놓는다는 건 미처 몰랐지.”
뒤늦게나마 정치판이란 게 어디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지 경험하고 있는 공주 전하의 불만 어린 의견에 바가반드의 가신들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흙탕물에 젖을 것을 각오하고 뛰어든 정치는 큰 뜻과는 다르게 아주 사소한 오염으로 젖어 들어가는 가랑비와도 같았다. 처음 알고 나면 허탈해지고, 가면 갈수록 마찬가지로 진흙탕을 구르거나 역겨워하며 떠날 수밖엔 없을 것이다.
“정치가 그저 자기 주머니에 돈 채우는 용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사람들이 많으니까. 괜히 흔들리지 말고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야지.”
“뽐내는 거 봐. 몇 개월 선배라고 이러기 있어?”
“허험, 선배한테 무슨 말버릇인가, 후배님.”
우스꽝스러운 굵은 목소리를 내는 네마냐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피식하며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따라서 웃은 네마냐는 슬쩍 헛기침하곤 바난드의 전후 처리를 물어보기로 했다. 급하게 다르빌과 켈리도니온으로 달려가느라 미처 살피지 못했던 게 안타까운 점이었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바난드의 사정은 좀 어땠어? 아쇼트 왕자 측이 순순히 협상대로 따른 모양인데 그게 좀 의외였어.”
“아, 응. 우리도 그랬지. 물론 놈들을 적당히 낚기 위해서 파르티즈(Partiz) 영지를 일부러 포기하지 않겠다고 싸움을 일으킨 건 우리였지만 말이야.”
이전에 바누라트 길마의 소개로 들었던 내용이 알림창의 형태로 펼쳐졌다. 잠시 눈을 감는 사이에 곁눈질하며 놓친 정보를 보충했다. 파르티즈 영지는 반란을 일으킨 서부 영주들 사이에 있는 요충지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진절머리를 냈다던 사람들의 불만이 나왔던 거였군.”
“그래. 사방이 불안해지는데 그깟 영지 하나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궁정 가신들이 난리였지.”
“현 국왕께서 멀쩡히 계신데도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는 건가, 참.”
염량세태라고. 권세가 없어지기라도 할 참이면 문간을 드나들던 발길이 끊어진다고 했다. 국왕과 함께 일해 왔다는 가신들이 그 정도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마 파르티즈 영주가 충성파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정도의 위인이란 거지. 선뜻 우리 제안을 받아 줘서 더 고마웠기도 하고.”
“제안……. 악명을 지고 가겠단 거군. 거기 영주의 성함이 어떻게 되지?”
“파르지아 3세. 거기에 터전을 잡고 대대로 충성해 왔던 군인 가문이었어. 기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졸병부터 시작해 전통을 쌓아 올린 용사의 가문이랄까.”
“듣기만 해도 무게감이 장난 아닌걸?”
“기대해도 좋아. 혹시나 모를 제국과의 교전을 대비해서 피난처로 조성한 요새거든. 우리가 만반의 준비를 갖출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야.”
만반의 준비. 그건 고블린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언젠가 찾아올 아쇼트, 그리고 펜자르크에 대한 이야기다. 저들이 자신들의 등 뒤에 있는 눈엣가시 같은 파르티즈를 공격할 시간은 곧 찾아올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두앵 씨의 상단과 거래를 틀 수 있었던 건 천만다행이지. 강 상류가 펜자르크 영지를 지나는 데도 무역은 유지할 수 있는 게 어디겠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병력도 제법 많이 끌고 온 게, 에살하톤 상단의 수송 함대 덕분이기도 하겠지.”
“이라크시스 강 항행료를 향후 십 년 동안 면제한다는 꽤 비싸지만 확실한 조건으로 비밀 동맹을 맺었지. 누구처럼 아직 눈으로 보지도 못한 광물을 판 건 아니니까.”
“하하……. 확 거래 중개 틀어 준 걸 취소해 버리고 싶게 만드시는 말씀이시네.”
두 사람은 일견 살벌해 보이는 농담을 주고받고는 웃었다. 오가는 단어에 살짝 긴장했던 하라드는 한숨을 쉬면서 땀을 닦았다.
“아직은 모든 게 시작 단계니까 믿고 봐야지. 파르지아 영주와는 나중에 따로 얼굴을 볼 자리를 만들어 줄게.”
“나야 고맙지.”
씨익 웃은 이 전장의 동료이자 군주께서는 시선을 네마냐의 곁으로 옮겼다.
“마법사께서 위험하고 정치 논리 범벅인 전장까지 나오셨군. 치열한 하야스단의 생활엔 좀 익숙해졌나요?”
“하하, 뭐 그럭저럭할 만합니다. 역사서에 나오는 위인들은 아닌 것 같고 악인과 범인들의 엎치락뒤치락은 묘한 재미가 있긴 하지만요.”
위인은 없고 악인의 범인의 어수룩한 대립이 보기 좋다라. 네마냐는 잠자코 억세게 머리 하나는 작은 마법사의 머리를 세게 헝클어댔다. 어지럽혀진 것이라면 책장에서 신발 한 켤레까지 집착하는 녀석이다.
“크아악, 무슨 짓이야?”
“감히 나를 악인으로 묘사한 벌이지. 싸게 먹혔다고 생각해라. 간지럼으로 갔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까.”
“이상하군.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을 악인보다는 평범한 사람으로 대입할 텐데.”
키마라스의 질문에 네마냐는 선뜻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지만 내가 해 왔던 일들이 워낙 고약해서 말이지. 도움 안 되는 사람은 적당히 골탕 먹이고 우리 편에겐 뭐라도 남겨 주고…… 에잇!”
한껏 머리칼을 뒤엎어놓은 끝에 네마냐는 가벼운 꿀밤으로 마무리했다. 민망한 자기 평가를 내리게 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싸게 먹혔다.
“뭐야, 자기 잘났다는 소리네.”
“못나진 않았지.”
하라드는 차마 그것까진 반박을 못 하겠는 듯 작게 투덜거림을 이어 갈 뿐이었다. 네마냐는 다시 힘을 주어 강조했다.
“이런 험난한 시대에 선량함으로 살아가는 건 개인은 몰라도 영주나 통치자에겐 사치지.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비뚤어진 현실주의긴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글자가 마냥 도덕적인 건 아닌 건 확실하지. 당장 방금 우리가 얘기한 파르티즈 건만 해도 충성심 높은 제후를 적에게 미끼로 던져 주는 걸 보지 않았어?”
“이기면 돼. 이길 수만 있다면 파르지아 경도 납득하겠지. 바누라트 숙부 말씀대로 놈들이 파르티즈 미끼에 낚일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거기까지 이야기하더니 엘레나는 그건 그렇게 대수로운 문제는 아니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키마라스의 얼굴을 문득 본 네마냐는 ‘왕손’이 두 명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야크 초대 왕과 계약한 이래로 키메라는 자신이 축복한 직계 혈통을 느낄 수 있댔지. 그런데 그 왕손이 두 명이란 건…….’
굳이 캐물을 것도 없이 이야기는 다시 엘레나의 이야기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큰일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만 여기에 온 건 아니야. 불청객이 하나 따라왔거든.”
“아쇼트가 왔겠지.”
“알고 있었어?”
엘레나의 이야기에 네마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키마라스를 가리켰다. 키메라의 존재를 역시 서신으로 전해 들었던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모를 수가 없었겠네. 맞아. 내가 출발한다고 했더니 자신도 바난드의 대표니 빠질 수 없다고 출병했어.”
“병력은?”
“우리의 절반 정도. 하지만 정작 우리 군 내부에서 은근히 아쇼트를 추종하는 자도 적지 않아. 방심하면 안 돼.”
기사대를 이야기하는 얘기는 아니다. 왕국군의 핵심 전력인 기사 500명은 대대로 충성파인 파드 경의 통제 아래 있었다. 비록 단장은 후방에서 본토를 지키는 중이지만, 기사들 역시 국왕과 공주에 대한 충성은 확고했다.
“그나마 제국군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동안에는 억지로나마 신중하게 굴 거야. 질서가 유지되는 사이에 우리 군이 최대한 공적을 세워야겠지.”
군사적인 위업. 그것은 마치 게임에서 미션을 완수하면서 쌓이는 명성과도 같은 것이다. 국내 정치에서 통치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자질이 있음을 이해시킬 수 있는 하나의 능력치라고 하면 좀 설명이 되려나.
‘거기다 외부의 적을 상대로 내부인을 단일 지휘권 아래 모을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지. 물론 여기선 아쇼트 그 새끼가 훼방꾼이지만.’
하지만 아쇼트만 있어서는 엘레나나 자신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펜자르크는 바누라트나 파드 단장이 남은 후방 경계를 위해 남을 수밖에 없겠지. 대신 누군가를 보좌역으로 보내기야 했겠지만 급이 안 되는 건 분명하다.
“펜자르크는 아마 파르티즈나 길드 마스터 때문에라도 오지 못했을 테지. 그럼 아쇼트의 보좌역은 누가 온 거야? 왕자라지만 실제로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조차 없잖아.”
“아쇼트 지지파 귀족들이 서로 하겠다고 나서서 결국 서로 충돌하지 않게 자제들을 뽑아 보좌단을 만들었어. 총 열 명이던가?”
“개판이군. 자기들 이익 균형을 맞추려고 전장에 경험도 없는 애들을, 그것도 떼로 내보냈다는 거군. 총사령관을 보좌하려면 경험 많은 한두 사람 정도가 최선일 텐데.”
“이번 전쟁이 그 정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지. 오죽하면 고블린을 쓸데없이 자극하거나 과장한 거라고 떠드는 유언비어가 돌겠어.”
바흐람의 정보 보고를 통해 그런 유언비어가 돈다는 소문은 네마냐도 익히 들어 알았다. 평화롭게 아쇼트 왕자의 몸값을 높여 나가던 상황을 단번에 뒤집은 게 고블린 정국 아닌가. 당연히 네마냐 자신이나 엘레나가 별것도 아닌 문제를 키웠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그래도 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해가면서 뻗대야지. 서두르지 않았으면 다르빌이 보급도 못 받고 포위될 뻔했는데.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자기들 스스로 헛짓하는 건 상관없지 않아? 그 덕분에 우리가 전공을 세울 가능성은 커질 텐데.”
아쇼트가 거느린 군사는 보병 2,500에 기사 50명이었다. 연합군 전력으로 따져보아도 무시하지 못할 전력이다. 아니, 공헌은 바라지 않더라도 엘레나와 자신을 쓸데없이 견제하기엔 충분한 병력이지.
“전쟁은 이기고 봐야지, 우선은. 그런 점으로 보면 아쇼트의 병력이 괜히 방해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야. 엘레나가 왜 걱정스러워하는지 알겠어.”
“휴……. 이제 온다.”
엘레나의 말대로였다. 저 멀리 뒤쪽에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마냐의 시선도 그렇게 한동안 잠자코 아쇼트의 의기양양한 행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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