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철통처럼 단단히 닫힌 사이로 술 냄새가 흘러나오는 문을 열어젖힌 건 네마냐와 하라드 두 사람이었다.
―끼이익.
그새 술 때문에 녹이 슬었을 리는 없었을 텐데. 유독 문이 열리면서 경첩의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니 네마냐도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아오, 냄새. 지금까지 마시고 있던 거야?”
“나도 머리가 울리긴 한다.”
서준이 환생하기 이전부터도 술을 좋아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몇 시간을 공기 속에서 묵혔다가 맡는 알코올 냄새는 최악이었다. 헛구역질하는 하라드를 토닥여 주며 네마냐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 없어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서 신음이 흘러나올 뿐이다. 어딘가 사람이 다쳐서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소위 대학 오티 행사 때 제 주량도 모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휩싸여 들이켠 술을 토해내는 신입생들의 비명에 가깝다.
‘내 참, 오티 준비위원회에 조교까지 했다고 별 쓸데없는 스킬이 다 있네.’
[새 스킬 발견]
[사람이 토해내는 냄새와 소리를 따라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스킬이 발견됐습니다. 필요한 기술을 개방하시려면…….]
어떤 작동 원리인지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옛 경험이 충분하다면 스킬로 개방할 수도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한들 토악질 냄새나 구분하는 요상한 스킬밖에 나올 데가 없지만. 네마냐는 자신마저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느끼며 창을 애써 무시했다.
“저기, 저거. 사령관이랑 키마라스인 것 같은데. 아직도 마주하고 앉아 있어, 세상에.”
“저쪽에 앉아 있는 두 사람 말이지?”
“으으, 물 좀…….”
웬 좀비 같은 몰골의 누군가가 기어와 발목을 잡았다. 놀란 두 사람은 부정 타기라도 했다는 듯 재빨리 발목을 털고 회당 깊숙한 곳 상이 깔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키마라스는 사령관 니키타스의 건너편에 다소곳이 앉은 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외투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오, 친구들 아닌가? 나를 찾아왔나? 내가 너무 늦게까지 있었던 건가.”
“멀쩡한데 의외로? 여기는 어쩌다가 온 거야?”
하라드가 조급하게 물어보자 이 사람 흉내 내는 성수는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이야기를 멈췄다. 그리곤 니키타스를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장군은 여전히 다른 제국 측 인사에 비하면 멀쩡했지만 언제라도 넘어갈 것처럼 기우뚱대고 있었다. 알코올에 완전히 지배당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으윽……. 아직 대작이 끝나지 않았다, 마법사! 얼른 다음 잔을 따라라! 이번엔 네 차례 아니더냐.”
“용케 아직도 그런 걸 기억하고 있군.”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키마라스는 주변의 병을 흔들어가며 아직 술이 남은 병을 찾아냈다. 그리곤 한잔 가득히 따라내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거의 30도는 됨직한 과실주인데 저렇게 가볍게……?
“큭, 이 독주를 그렇게…… 물처럼 마셔댄다고, 정말.”
“독하긴. 맛만 좋군.”
그 말이 정말이긴 한 모양인지 키마라스는 숫제 입술을 핥기까지 했다. 지켜보는 사람은 술에 취향이 없더라도 소름이 끼칠 광경이었다.
‘대작이니까 장군만 마신 건 아니었을 텐데, 덜 마셨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수 있는 건가? 성수가 되면 간도 미칠 듯 좋아지는 건가. 이래서 한국에서 그렇게나 짐승의 간에 그렇게…….’
정말 엉뚱한 헛소리의 연속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교수들의 쉴 틈 없는 술잔 공세에 간이 혹사를 당했던 서준 시절의 기억에 비춰 보면 정말 완벽한 대학원생의 자질이 아닐 수 없다. 주변에 널브러진 술병은 대충 보아도 서준이 질리도록 봐 왔던 큼지막한 병으로 3, 40개는 넘어 보였다.
“여기 인간이 은근히 자네들과 고향 하야스단을 우습게 보는 말을 계속하더군. 뭐, 생각이야 뻔해서 나를 도발하는 심산이었겠지만. 하필이면 술로 나를 꾀어내려고 해서 말이야.”
“이젠 키마이라 당신이 이런 월등한 주량을 선보였으니 제국이 정체를 몰라도 의심하겠는걸. 정말 멀쩡한 거야?”
네마냐가 다시 한번 되물으니 살짝 헛웃음을 흘리면서 이 폴리모프한 마법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관절 뼈마디마다 제각기 두둑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키마라스는 살짝 자세가 흔들리더니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 어딜. 우왁―!”
“조심!”
―와장창!
이미 정신이 나가 버려 사람 실루엣만 겨우 보이는지, 니키타스는 마지막 힘을 모아 따라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소모해 버리니 알코올에 완전히 잠식된 몸은 더 버티지 못한 채 고목처럼 쓰러져 버렸다.
“애송아. 그러니까 겨우 삼십 년 술 마셔서는 상대가 안 된다니까. 상대를 알고 까불어야지.”
이십 대 중반 정도의 외모로 이 터무니없는 소릴 찍찍해대는 존재. 육백 년이나 전부터 이곳을 지켜왔고 제국의 술도 숱하게 마셔 봤다니 틀린 말은 아니다만. 맨발로 장군의 머리를 슬쩍 밟아 보인 뒤 키마라스는 몸을 돌렸다. 이제 좀 취기가 오른다며 연신 손부채질을 하는 채로 말이다.
“음, 이 정도 마시니까 취하긴 하는 모양이야.”
“그런 소리도 참 어처구니없는 것 알아요?”
하라드는 곁으로 다가가더니 부축하고 나섰다. 네마냐는 알코올 기운에 취기라도 돋는 것 같은 기분에 얼른 나가자고 손짓을 보냈다. 나머지 두 사람의 동의 아래 일행은 재빨리 회당을 나섰다. 오후 느지막한 볕이 내리쬐는 마당으로 나서자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듯했다.
“헉…… 이제 좀 살 것 같네.”
“바깥 공기가 이렇게 맑았구나? 그대들이 어째서 숨을 못 쉬겠다고 했는지 이제 알 것 같네. 숙취도 조금 있는 것 같고.”
‘그 말술을 마시고도 숙취가 조금이라…….’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네마냐는 거두절미하고 키마라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최근 자신들 주변을 암암리에 돌아다니는 의문의 인물들, 그리고 갑자기 키마라스에게 접근한 제국군 장교들의 의중까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키마라스는 문득 소매에서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우리 세계 바깥의 역사 이야기.’
네마냐 자신이 그간 인간 세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큰 틀에서 공부해 보라고 건네줬던 대마법사 오니아스의 책이다. 이야기를 몇 번 나눠 봐서 자신도 아는 것이지만 이 성수라는 희한한 존재는 스펀지처럼 지식을 습득하곤 했다. 심지어 저렇게 들고 다니면서까지 읽을 줄은 몰랐지만.
“책이 의외로 베고 자기에 편하더군. 대작하다가 잠깐잠깐 위험할 때 잘 썼어. 아, 물론 책은 이미 다 읽었으니 안심하고.”
“……그나마 다행이군. 혹시 제국군에서 그 책에 관해서 물어보진 않았어? 누가 줬냐고 묻는다거나, 아니면 책 내용이 어떻냐 같은 거 말이야.”
잠시 자신도 모르게 칼 손잡이에 손이 올라갔던 네마냐는 한숨과 함께 자세를 풀었다. 하라드도 그게 궁금한지 마찬가지로 키메라를 보았다. 성수는 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다.
“똑같은 건 아니지만 비슷한 질문을 했지. 뭐였더라, ‘책의 내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 질문이었지 아마.”
“어떻게 대답했어? 아니지, 나도 마찬가지로 물어보자. 책을 읽어 봤으니 부분적으로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생각했겠지. 지금의 우리가, 그리고 내가 고블린 군단을 상대하는 방식은 합당하다고 생각해?”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나눠 주었던 제7권은 그저 고블린으로 뭉뚱그려 분류되었던 복잡한, 헤아릴 수없이 많았던 원시 부족을 다룰 뿐이다. 언급되는 단서라고 해 봐야 부족해지는 자원과 추워지는 날씨를 둘러싸고 상업 도시를 중심으로 한 무역파와 빈민가를 중심으로 한 약탈파 사이에서 불거진 갈등뿐이다.
“무역파와 약탈파 사이에 생겼다는 갈등만 보고도 대략 지금 상황과 어떻게 이어지는진 알겠더군. 그대, 그러니까 영주가 다녀온 나코르잔의 오체시라는 부족이 바로 무역파겠지. 그리고 고블린 군단은…….”
“정확하게 짚었군.“
“정확해?”
키마라스의 물음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내 주변의 어지간한 인간들보단 나아. 세대가 켜켜이 쌓이면서 이상한 기억과 다른 경험이 뒤섞이면 저절로 원래의 정보와는 동떨어지기 마련이거든. 하물며 자신들이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은 고블린의 일 따위는.”
“그래서 제국군 사령관이란 사람이 나에게 책 감상을 물었던 건가?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제국 사람들은 고블린이란 그저 퇴치해야 할 적으로밖엔 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게 이른바 크고 강한 나라에서 나고 자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도시 촌놈들의 환상이거든. 세상에 선과 악이 넘어설 수 없는 골짜기를 두고 확실하게 구분된다는 생각 말이야.”
고블린 군단이라는 강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제국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건 직접 맞부딪쳐 본 자신부터도 인정한다. 그러니 하야스단의 자립 혹은 독립을 주장하는 마탑과 미크라야크 사람들과는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물론 제국과도 협조할 뿐, 그 이상 깊이 관여되는 것관 거리를 멀리한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탑파 독립론자들이나 제국 당국자로부터는 한결같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확히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얘기하자면 적어도 고블린, 아니 이제는 오르그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놈들의 위협이 가시기 전에는 제국의 보호 아래서 안전한 자치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거야.”
키마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네마냐의 말에서 간단하게 논지만 추렸다.
“질서 있는 자치를 하자, 이거군. 하지만 독립파와 제국군 처지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이라 생각하겠지.”
“성립이 정말 불가능할까? 아예 제삼자인 당신들이 보기엔.”
먼저 답을 한 것은 하라드였다.
“주변의 입장이 어떻든 상관없어. 나는 형님이 모래강변에서 처음 들려주었던 대침략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해. 다들 입방아만 요란하게 찧었어도 우리는 이미 분명한 결론을 위해 움직였지. 흔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결의가 굳건한 하라드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하는 네마냐였다. 그 옆에서 키마라스는 한층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두 강경파의 사이에서 입장을 지켜나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굳이 내가 한때 친구였던 오니아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만.”
하야스단에 몇 명 배출되지도 못한 6서클 대마법사 중 한 사람이 오니아스다. 하지만 오늘날 그 행적이나 저술, 심지어 존재 자체도 모르는 지역민이 대부분이다. 인간들 사이의 불화도 중재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종족을 넘어서는 거대한 생각과 운동이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이 위대한 ‘스승’은 그렇게, 고블린과 인간 그 어디의 기억에서도 지워졌지.
“그래도 이제는 사정이 다르지. 내가 보기엔 많이 달라졌으니까.”
“어떤 점에서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거지?”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려니 하면서 사람이나 고블린을 움직일 순 없어. 당사자에게 내키지 않은 일을 하게 하려면 분명한 위협이나 이익을 제시해야겠지. 그리고 아주 적절하게도 그대가 그걸 가져왔고.”
“기후 한랭화와 고블린의 영원한 침략.”
마지막으로 세계가 위협에 처한 뒤 수백 년 만에 다시 하산한 성수가 내린 평가였다. 그만큼 치열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하야스단 현장의 사람이 볼 수 없는 폭넓은 이해였다. 그 소릴 듣자니 네마냐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이 마냥 헛발질만은 아니었단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간 오그르에 맞서는 종족 간 대연합을 추진하면서, 그 확신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매 순간, 선택의 순간마다 의심이 들었던 건 사실이지. 그때마다 이렇게 스스로도 남에게서도 확인을 받으며 다짐해 왔던 게 몇 번인지…….’
마탑에서의 수상한 움직임은 물론이고 곳곳에서 견제는 집요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라도 더는 돌이켜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네마냐는 키마라스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야, 이렇게 완벽하게 이해한 동료를 첩자들 사이에 놔두고 있었다니. 까딱했으면 내가 제국에 당할 뻔했는데?”
“멍청하게도 제국 인간들은 제국의 고농도 증류주를 먹이면 내가 취해서 나불나불 다 알려 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하지만 혹시라도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아무렴 내가 하야스단 점령하려는 무뢰배들한테 정보를 줄 리가 있나.”
거침없는 무뢰배 소리에 나머지 두 사람은 실소를 흘렸다. 말 그대로였다. 종족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 연대를 꾀한다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자신들의 앞마당이자 삶의 터전인 하야스단을 지켜내는 수단이었으니까.
“근데 그거 진짜 독하지 않아요? 예전에 만찬 때 한 모금 마셨다가 머리 깨지는 줄 알았는데. 숙취는 없다지만요.”
“좋은 술은 좋은 안주와 먹어야 진가가 드러나지.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내가 직접 같이 먹을 만한 안주를 대접해 줄게. 나중에 엘레나도 합류하거든-”
술의 신인 디오게네스의 현신인 듯한 이 성수, 아니 마법사를 양쪽에서 들춰 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슬슬 마무리되려는 순간. 키마라스는 ‘엘레나’ 세 글자에 반응을 보이며 잊어먹은 기억을 꺼냈다.
“참, 그러고 보니 우리 네마냐 영주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이야기하자면 길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대가 이야기해 주어서 떠올랐다. 바난드의 엘레나 공주가 군대를 거느리고 지척에 와 있다더군. 아마 오늘 중으론 도착할 거야. 미세하게 익숙한 파동이 느껴지는 걸 봐선, 마나교의 축복을 받은 왕손이 근처에 있는 건 맞는데.”
“엘레나가! 드디어 왔구나.”
정령사 부대의 합류 소식과 함께 연합군에겐 연이은 낭보가 될 소식이었다. 그리고 다른 어느 제후보다도 든든한 동지가 왔다는 뜻이니 제국과 부담스럽게 대치해야 할 네마냐에게는 소식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다음, 키마라스가 갸웃거리며 꺼낸 이야기는 아직 긴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다시 확인해 주었다.
“그런데 이 기운……. 한 명은 아니로군. 왕손의 혈통이 두 명에게서 느껴지니까 말이야.”
“아쇼트도 왔겠구나.”
하라드의 확인과도 같은 한마디. 바난드 내전을 중지하는 이벤트 트리를 탔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다시금 견제 속에서 구를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뜻이겠지.
“좀 푹 쉬었다 이거지. 어디 다시 한번 굴러 볼까.”
든든히 숨을 들이쉰 네마냐는 의외로 덤덤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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