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자네, 술은 좋아하나?”
날씨가 차다며 자신의 천막으로 초대한 슴바트를 따라 두 사람은 덥석 들어왔다. 섣불리 거절했다간 오히려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아직까진 직접 보고 얘기한 경험보단 들은 소문이 영향을 미칠 때였다.
“술은 마실 줄 압니다. 좋은 술이 좋다는 건 알 정도는 됩니다.”
“그쪽, 그러니까 아일……라라고 했던가. 그대는 어떻나?”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긴 합니다.”
아일라의 대답에 슴바트는 공기가 터지는 듯한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퍽 마음에 들었는 모양이다.
“맘에 드는군. 내 특별히 귀한 손님을 위해 으뜸의 것을 대접하지.”
그리곤 군막 구석에 놓인 벽장에서 푸른색이 살짝 들어간 유리병을 꺼냈다. 기름을 먹여 놓은 천으로 병 입구가 꽉 막혀 있었다.
“음. 다행히 얼지는 않았군. 보온 마법을 다음부턴 준비를 해 놔야겠지만.”
―폭.
가벼운 소리와 함께 슴바트가 뚜껑을 제거하니 이내 향기로운 과일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위스키라도 갓 뜯은 것 같은 냄새군.’
위스키나 고급 증류주는 언감생심이었다. 여과도 되지 않아 불순물만 가득하고 도수는 낮은 이곳의 술을 마시고 나면 꼭 다음 날은 지독한 숙취에 시달렸다. 그러나 슴바트가 개봉한 술만큼은 그렇진 않을 것 같았다.
“이 동네는 안 그래도 옛날부터 추웠지. 그러니 몸을 데우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했었고. 술은 어찌 보면 당연한 답이었달까.”
“그러고 보니 옛날에 듣기론 산 안쪽의 사람은 술을 주전자에 살짝 데워 마신다곤 들었죠.”
역시나 아닌 척해도 술의 일이라곤 빠지는 데가 없다니까. 서준 역시 전생 이전엔 고급주는 아니지만 데운 정종이나 배갈 정도는 마셔 봤다. 속이 찌르르한 그걸 선배나 상사들이 왜 좋아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이젠 조금 알 것 같긴 하군.’
집 안에 있어도 찬 공기가 입안에 머물고 피가 식는 느낌에 시달리기를 수십 년. 그러다 보니 뱃속이 따뜻해지며 혈관을 흐르게 하는 그 기분이 굉장히 소중하단 걸 깨달았다. 특히 지금처럼 밖에서 들어와도 이가 딱딱 저절로 갈리는 추위에선 더더욱.
“하지만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으니까 그렇게까지 할 건 없겠지.”
“춥지…… 않으시다고요?”
살짝 굳은 혀를 움직이면서 네마냐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도 원한에 미쳐서 냉랭하게 살다가 그대로 냉혈한이라도 되었나 싶은 반응이었다. 괜히 아일라도 차디찬 공기에 작게 몸서리를 치며 옷을 여몄다.
“예년보다 춥기야 하지만 이 산골짜기의 나라는 원래 이 정도로 춥긴 했지. 하지만 손님들을 보니 오늘은 내가 맞춰야겠군.”
말을 마친 군주는 천막 중앙에 놓아둔 화로 위에 놓인 주전자로 다가섰다.
“받게. 우리 영지 비장의 특산품인 리노르시아 증류주라네. 이십 년씩 숙성해서 만들어 낸 걸작이지.”
“리노르시아…….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마냐는 슬쩍 술의 이름을 되짚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보여 주는 의지만큼은 분명했다.
‘리노르시아(Rhnorsiwa)’. 희한하게도 하야스단에 있었던 세 종족, 심지어 고블린까지 포함해도 쓰지 않는 단어다. 제국의 공용어에 속하는 고대어 디움(Dium)어의 단어였다. 의미는 「(본디 자신의 것인)몫을 회복하다」라는 동사였다.
‘대체 뜻을 밝히고 싶은 건지, 아니면 숨기고 싶은 건지 의아한 센스이긴 한데.’
디움어는 제국, 특히 하야스단이 있는 동북부 산악에선 사멸된 언어였다. 통치계층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
‘거기다 고급주라고 패키징까지 고급으로 만들어 놨지. 제국 통치 계층에게 대놓고 선전하는 건가.’
[인물 분석]
[당신은 슴바트 하야크의 의중을 일부 읽어냈습니다. 「인물분석」을 통해 인물평과 의중을 짚어내 더 좋은 판단을 꾀할 수 있습니다.]
[조건: 기초 능력 중 이해 18 이상]
네마냐는 재빨리 자신의 능력을 확인했다. 책을 두루 읽어 둔 덕분에 이해는 진작부터 고공 행진 중이었다.
[기초 능력]
[체력 14]
[근력 13]
[민첩 14]
[이해 18]
[판단 15]
지력 분야의 스킬 중에서도 인물 분석은 네마냐 자신도 기대했던 부분이었다. 사용 제한도 없고 중간중간 생각하는 데도 바로 적용할 수 있다. 결정을 내리는 데 지대한 도움이 될 것이다. 두어 달 전에 목록에서 확인한 이 스킬을 개방하느라 모든 수치 투자가 지력 쪽으로 들어갔었다.
‘아까울 건 없지. 지력이 그만큼 개선되면 마법술도 향상되고 무엇보다 살아남을 판단을 내리기엔 좋아지니까.’
주어진 상황과 기존의 지식을 연결해서 새로운 선택지를 여는 것이 이해다. 반면 판단은 그 모든 선택지 중에서도 최선의 결론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 둘의 영역은 달랐다. 겉보기에 좋은 선택지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건 저번 삶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 주요 인물의 성향, 내 목표를 버무려서 최대한 상황에 맞는 선택지를 골라야지. 그러려면 이해, 판단 둘 다 못해도 20까지는 올려야 할 테고.’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던 네마냐의 볼에 따뜻한 감각이 전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코앞에 하얀색의 비단옷이 외풍에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피곤한 모양이군. 받게. 조금 마시다 보면 정신이 들게야.”
“감사합니다.”
생각이 좀 길어진 모양이었다. 뜨끈하게 데워져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잔을 받았다. 열기를 받아 향긋한 과일 향은 더 진하게 피어올랐다. 가까이에서 맡으니 아찔할 정도로.
―홀짝.
한 모금을 들이켜 입안에서 돌리다 내려보냈다. 속이 따스해지면서 정신이 번쩍 뜨였다. 첫맛은 향신료를 넣었는지 꽤 강한 향이었다. 그 다음엔 목으로 넘어가면서 포도와 시큼한 과일류의 향이 코를 통해 올라왔다.
“좋군요.”
“아일라라고 했지. 어떤가?”
“아주 맘에 듭니다.”
한 잔에 벌써 기분이 좋아진 기색이 역력한 아일라의 대답이 들렸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슴바트는 주전자를 화로에 올려둔 뒤 자신의 잔을 들었다. 책상 앞으로 다가가 살짝 기댄 채로, 하얀 비단 옷차림의 슴바트는 홀짝이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제 이야길 좀 할 수 있겠군. 오늘은 내내 너무 바빴고, 귀찮게 하는 놈들도 많았어.”
“오늘은 특히 그러셨겠군요.”
정신이 없다고 하소연하면서도 그 순간까지 슴바트는 물건을 정렬하고 쌓인 먼지를 훔쳤다. 차례대로 줄지어 선 서류철과 술잔, 필기도구를 보며 네마냐와 아일라는 숨막힌 듯 침을 삼켰다.
“내가 노이로제가 있거든. 내 것을 빼앗기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말이야. 그런 일이 생길 기색이 생기면 과도하게 예민해지지.”
“마음이 편치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의외군. 찬탈자 하코브의 봉신이라는 사람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줄이야.”
“파벌과 정견의 문제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불과 3분 전, 술을 따라 주며 농지거리까지 건네던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정말 재빠른 감정 변화였다.
‘심리 불안. 어쩌면 슴바트에 대한 무시무시한 괴담은 저런 모습에서 연유한 것일지도.’
개인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려고 시도한 현대 문물에 영향을 받은 서준의 기억이 활발히 작용했다. 그 덕분에 그저 끔찍한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슴바트가 외려 가련해 보였다.
‘고달픈 사람은 이래저래 살기 어렵다니까.’
네마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를 슴바트는 한동안 술을 홀짝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재밌군.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어 준 사람은 많지 않았지.”
“감사합니다.”
답은 선뜻 내놨다. 그러나 슬쩍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바난드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썩 안정되지 않았다는 게 걸렸다. 친슴바트 계열로 반란을 획책한 가스파리얀을 쫓아낸 게 자신이지 않은가.
‘혹시 잘못해서 엘레나에게 짐이 되는 일을 벌여선 안 되겠지.’
적당하게 이야기만 나누고 이 대화는 앞으로 쓸데없는 갈등을 줄이는 참고용으로만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네마냐였다.
“아마 내가 부담스러울 테지.”
“지체가 높아서 그런 것이지,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전하.”
“아냐. 나도 이해하네. 어쨌거나 우린 세부적으론 입장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언젠가는 잔혹한 싸움을 싸워야 할지도. 대신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싶군.”
네마냐는 자신의 판단이 역시 옳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슴바트는 광기에 미쳐 피에 목마른 살인마는 아니었다. 물론 중간중간 멈칫할 때의 표정은 무언가 터져 나올 것처럼 보였지만, 적어도 자제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역시 3D 인물은 2D 인물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복잡하다니까.’
살짝 입술이 말랐지만 침을 묻힐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은 이 상대는 그 속에 오히려 어떤 거대한 야심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만약 잘못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지금까지 네마냐 자신이 구축한 기반이 흔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상대는 아무리 악역이라고 해도 옛 대왕의 적통 후계자지. 나는 명성을 쌓았지만 백작 급에도 맞지 않는 작은 영지의 영주고.’
무엇보다도 이 상황에서 간신히 결성한 대고블린 동맹군을 미크라야크와 갈등이 생기게 둘 순 없다. 그건 고블린만 좋아할 일이니까. 네마냐는 침을 다시 삼키며 슴바트를 올려다본다.
“대고블린 동맹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지금 말입니까?”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네.”
얼음장과도 같은 미소와 함께 군주는 별 모양의 성호를 그었다. 마나교의 가장 지엄한 맹세법, 만약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자연의 마나로 산산이 부서져도 감수하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나는 지금껏 고블린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어. 자네가 그런 문제를 설파하고 다닌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시큰둥했지.”
잔을 마저 비운 슴바트는 책상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팔짱 낀 채로 좌우를 왕복해 걸었다.
“암피에르 동맹은 나의 소유를 빼앗아 간 불구대천의 원수, 제국의 허수아비…… 망할…… 허상의…….”
이야기를 잘 끌어가나 싶던 군주는 갑자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마구 중얼대기 시작했다. 다시 감정에 휩쓸리는 모양이었다. 네마냐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잠자코 슴바트의 분위기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상대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곧 슴바트의 이야기는 다시 이성을 찾았다.
“……하지만 고블린이야말로 인간과 난쟁이, 아니 소인족과 장이족 모두의 대적이란 걸 모를 리도 없지.”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가만히 있지 못하던 슴바트. 그래도 마침내 중요한 단락에 이른 듯 자리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니 자네가 가교를 놓아 줬으면 좋겠는데, 우리와 연합군 사이의.”
“미크라야크와 암피에르 동맹군 사이에 그런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십니까?”
솔직한 돌직구였다. 어느 정도 대화와 힌트로 인물 분석을 끌어내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겠지. 슴바트는 잠시 숨을 들이켜면서 이쪽을 바라보더니 선뜻 대답했다.
“원래라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원래 인간사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네. 왜 그런 줄 아나?”
“「인간의 행동은 불완전하고 마음이란 변화무쌍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 하야크 연대기 중 하나의 책장에서 본 것 같군요.”
“그대가 말한 문장의 뒤엔 이런 내용도 있지. 「그 눈은 진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좋은 것을 찾으며 그것을 기꺼워한다.」”
이전의 적대관계를 일부, 아니면 바꾸는 척 시늉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네마냐가 변화의 가능성을 물었다면 슴바트는 어느 정도 위장의 뜻이 있음도 내비쳤던 것이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셔도 괜찮습니까? 저는 전하의 가신이 아니고 오히려 바난드에서도 하코브 국왕의 공주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상관없네. 언젠가는 내 실력으로도 정정당당히 맞붙으면 그만이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고블린 대군이 평화 조약도 무시하고 내 땅에까지 발을 들여놓는 상황이니까.”
이거 참. 동맹도 아니고 묘한 긴장 속에서의 협조 관계라는 것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흥미로운 인물이었지만 그만큼 네마냐의 미래 계획은 복잡해질 것이다.
“물론 공짜로 도움만 받겠다는 건 아니지. 자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먼저 내가 선의로 대가 없이 제공하지. 내가 손이 닿는 거라면.”
하지만 복잡해지는 미래 계획에도 불구하고 네마냐가 선뜻 응하지 않을 수 없는 대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고블린을 이기기 위한 최선의 카드. 정령사 부대의 모병과 동원. 애초에 여기에 몰래 왔었던 이유도 미크라야크에 협조를 요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띠링.
퀘스트가 발행되었을 때와 달리 끝맺음 소리를 내는 이 알림. 어떤 퀘스트 하나가 완료 직전의 분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소리였다. 네마냐는 결심을 굳혔다.
“좋습니다. 제 조건을 들어주시면 대신 미크라야크와 암피에르 사이에 평화의 가교를 놓아 보겠습니다.”
반쯤 비어 버린 잔에서 과일의 향은 빠르게 식어 갔다. 하지만 이미 강한 추위마저 가려 버리는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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