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배짱도 좋아. 하지만 너무 나를 우습게 봤어!”
―쿠르르릉!
멋대로 진영을 파고든 네마냐에게 화가 난 모양이다. 거대한 불의 기운이 전면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단순히 불로 공을 빚어 쏘는 정도가 아니라 불길이 끝없이 몰려온 것이다.
“큭!”
네마냐는 페넬로파의 경고를 들으면서 동시에 실드를 펼쳤다. 운동신경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최선의 반응이었다. 그런데도 강렬한 불길에 보호구가 녹아내리고 살갗이 불타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제법이네?”
“큿. 차라리 욕을 해라, 임마.”
하마터면 불길에 휩싸여 뒤로 날아갈 뻔했던 네마냐는 애써 욕을 참으며 능청을 부렸다. 페넬로파는 콧방귀를 뀌며 지팡이를 고쳐잡았다.
“조급해진 모양인데. 마치 뭐라도 기다리는 것처럼 내 뒤쪽을 흘깃 훔쳐보고 말이야.”
“그렇게 보였나? 고작 수백 명의 고블린이나 용병에게 당할 정령사의 성채는 아닌데.”
“글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느긋하게 해석할 순 없겠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지.”
태연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네마냐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 전 받아냈던 페넬로파의 화력 마법을 생각해 보면 순수한 마나량과 마법 연산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제 2서클과 3서클 경계선인 내 실드가 돌파당할 정도면 녀석은 4서클 상급은 되려나.’
순수하게 마법 실력으로만 대결할 때 작용하는 요소는 마법 연산의 실력, 사용자의 체내 마나, 즉 ‘그릇(Ayyeion)’의 자질, 집중력 등 다양한 것이 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서클의 차이, 즉 ‘그릇’이 되는 ‘심장’에 어느 정도의 마나량을 담아낼 수 있느냐다.
‘만약 녀석이 정말 작정하고 마법으로만 덤벼도 버티기 어렵겠어.’
설상가상으로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할 성정석마저 후방 정령사 진영에 사용해 버린 뒤. 회복을 바랄 수 없다면 주변 환경에서라도 마나를 흡수할 수밖에 없다.
“뭐 해? 이쯤 되면 제대로 공격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하는 역할은 너를 견제해서 병력이 도시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하하…… 그럴듯한 생각이네. 하지만 설마 엄연한 정적인 미크라야크의 왕이 오길 기다릴 줄이야. 그런 희망은 깨끗이 없애 줄게.”
[에네곤 가이아]
[Eneyon Gaia]
말을 마치자마자 페넬로파는 땅에 지팡이를 꽂았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여러 갈래로 땅이 갈라졌다. 육중한 진동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압박감에 질끈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붙들었다.
‘놓치면 끝이야!’
[카스트라, 에피 호마]
[Kastra, epi Xoma]
서둘러 자세를 낮춘 다음,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땅속 깊이 꽂았다. 주변에서 눈에 띄는 것이라곤 온통 흙과 바위뿐이니 그 힘을 빌리는 것만이 해답이었다. 흙의 마나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네마냐의 앞을 가로막았다.
―쾅!
끝없이 이쪽을 향해 달려들던 에너지는 토사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히자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거대한 마나의 소용돌이는 그대로 몰아치는 바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널려있던 바위와 돌멩이가 삽시간에 허공에 떠올라 근처를 강타했다.
“사, 살려 줘!”
“모두 물러나, 이곳을 벗어나라!”
“고블린, 마법 조심!”
인간은 물론 고블린도 단단한 돌멩이에 맞아 무사할 방법은 없다. 휘몰아치는 돌덩이 폭풍에 다들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네마냐는 물론 흙의 마나 덕분에 폭발 여파에선 무사했다. 하지만 땅과 실드를 따라 전해지는 파동의 충격만은 막을 수 없었다.
“……젠장할. 퉷!”
들끓고 메스껍고 어지러운 느낌이 머리에 가득했다. 입가에서 모래가 씹히는 듯 찝찔하고 진득한 무엇인가가 느껴져 곧장 뱉어냈다. 모래와 선혈이 엉켜 있었다. 이런 느낌은 딱 어릴 때 머리를 잘못 부딪쳐 겪었던 가벼운 뇌진탕의 그것이다. 직접 맞지도 않고 충격파만 전해졌는데도 불구하고 파급력이 컸다.
“어라, 살아남았네? 토벽 실드를 쳐도 통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뭘 모르고 그런 줄 알았지.”
“내가…… 이래 보여도 마나의 사랑을 받거든. 역시 마나교를 믿기를 잘했지.”
조금 힘은 들지만 꼬박꼬박 말대답을 했다. 같은 속성을 가진 마법끼리의 충돌. 그렇게 되면 방어자가 무조건 불리하다. 서로 같은 파동을 공유하기 때문에 충격이 어느 정도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순 없었다. 주변에 물이나 불, 나무조차 전혀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땅속에 스며든 물을 이용하려고 해도 한도 끝도 없이 메말라 있었다.
‘마나 친화력이 높아서 공조를 계속 돌리고 있어서 망정이었지.’
허리춤엔 여분으로 챙기고 다니던 마나 공조 장치가 있었다. 주변 마나와 동기화해서 조금이라도 마나를 끌어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덕분에 흙 계열 공격 마법의 피해를 덜 수 있었다. 완전하진 않아도 네마냐를 흙의 마나가 동료로 판단해 충격이 덜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썼는진 모르겠군. 하지만 상관없어. 다들, 상대방으로 달려들어 쓸어버려! 적마정석 전량 개방하고 던전을 소환해!”
“기다렸습니다!”
“멈춰!”
네마냐가 검기를 뿜어내어 길을 막으려 했지만 페넬로파는 재빨리 지팡이를 뻗어 가로막았다.
“너는 나를 상대해 줘야지, 안 그래?”
“내가 알던 그 페넬로파가 맞긴 한 거야? 어쩌다 이렇게 잔혹해진 거야. 내가 싫어서라면 나를 치면 되는 거 아닌가?”
“이건 공적인 문제거든, 엄연히. 너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감정은 부차적이지.”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네. 너를 확실히 물리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란 걸.”
“드디어 영웅님이 각성한 거야? 기쁘네.”
“장난칠 생각은 없어.”
그 와중에도 네마냐의 시선은 자꾸 측후방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검붉은 마나가 피어올랐다. 정령사들도 침착하게 대응에 나선 모양이지만 근접전을 맡을 병사들이 부족한 게 문제였다.
“어쩔 수 없나.”
작게 읊조렸다. 대화로 시간을 버는 사이 네마냐는 녀석을 제압하거나 최소한 팽팽하게 상황을 굳힐 방법을 생각했다.
‘마나의 양으로 제압할 수는 없고 내가 녀석보다 주문의 종류나 술식의 복잡함으로 상대할 수도 없지. 아, 제길.’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 게임 같았으면 진작에 밸런스 설정을 이따위로 하느냐며 무수한 항의의 게시글 폭탄을 받았을 것이다. 네마냐에게 떠오르는 건 한 가지 방법뿐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자 자잘한 마정석 파편과 조각이 여럿 잡혔다.
“치졸해도 이기는 게 먼저지, 알 바냐!”
한 움큼 손아귀에 틀어쥔 마정석 조각을 페넬로파를 향해 흩뿌리며, 네마냐는 순간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에만키피아, 프로스 마기카.]
[Emancipia, pros Magika.]
자잘한 마정석 조각들을 향해 네마냐 자신의 그릇에 남아 있던 에너지가 쏘아져 나갔다. 가뜩이나 부족한 마나를 엉뚱한 데 쓰는 모습을 보면 기함할 마법사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멍청하긴.”
그렇게 생각하기론 페넬로파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선 다시 인간의 마나와 마정석에 함유된 자연 마나가 호환이 불가능한 게 정석적인 이론이다. 그러니 당연히 네마냐처럼 사용해 봤자 대부분 돌멩이를 앞으로 날려 보내는 위력에 불과하다.
―펑!
설마 그렇게 마정석에 네마냐의 마나가 유입되며 폭발을 일으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네마냐 정도의 자연마나 친화력은 모든 상식을 깨뜨릴 만한 수준의 예외적 존재였다.
[아마 형 수준의 친화력을 비교해볼 만한 사람이면 600년 전의 아카데미아 연구실장을 지냈던 알레시아(Alessia) 정도일걸.]
구체적인 내용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고, 중요한 건 세계를 발칵 놀라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친화력이라는 것이었다.
‘싸움의 향방을 바꾸는 데는 꼭 수치적인 요소만 있는 건 아니니까. 방심을 일으켜 틈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지.’
―퍼펑!
작은 파편 하나가 흘러 들어간 마나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작은 마정석부터 크기순으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연쇄 폭발. 네마냐가 밀어붙인 힘에 따라 그 폭발의 충격파는 그대로 페넬로파의 자리를 덮쳤다.
“헉!”
헛바람을 집어삼킨 페넬로파도 즉시 전신의 마나를 끌어올리며 전면부에 실드를 형성했다.
[카스트라.]
[Kastra.]
마나의 기운을 활용한 공격이었다면 충분히 대부분을 피할 수 있는 실드였다. 하지만 여전히 네마냐가 어떤 체질을 가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이상, 그 대비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콰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로 마법사는 한참을 구르듯 떠밀렸다. 커다란 적마정석이 박힌 완드까지 네마냐의 남은 마나가 모두 실린 힘을 견뎌내지 못했다. 이미 위쪽 절반을 포함해서 산산이 가루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그렇지 않았다면 페넬로파가 가루가 되어 버렸겠지만.
“후욱…….”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어질어질한 머리에 구역질이 마려운데 마나도 소진해서 무기력했다. 주변에 널린 암석계 마나가 재빨리 비어 있는 자신의 ‘그릇’으로 밀려와서 그나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흐…… 제, 제법이었어.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거지? 기상천외하군.”
“지키려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방식을 찾게 되지. 느긋하게 남의 것을 파괴하거나 빼앗으려고 들면 쉽지 않겠지만.”
“여유로운 게 보긴 좋네…… 쿨럭!”
페넬로파는 격렬하게 기침하는 입을 가리더니 천천히 손을 떼었다. 얼룩지고 끈적이는 핏덩이가 흘러내렸다.
“이제 그만하자. 적어도 모른 척 돌아가도 되는 것 아닌가?”
“……내가 끝내야 할 일이야.”
어리석은 건지 네마냐가 모르는 것이 있는지 몰라도 단단히 부아가 돋았다.
“뼈를 깎고 피를 토해 가면서 기껏해야 고블린, 아니 이제는 오르그라고 하나? 그놈들 좋은 일 시켜 주는 게 ‘할 일’이냐? 한때 영주의 자제로 호의호식하던 사람이 할 생각이고?”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벽이랑 대화하는 것도 이제 지겹다.”
거의 바짝 엎드린 채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주고받은 페넬로파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카이오스여……. 혼돈의 수렁을 다스리는 자는 나의 호소를 들어라. 나와의 계약을 지켜 광기의 어둠이 땅 위에…….]
주문을 읊는 소리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졌다. 카이오스(Kayios). 자세히는 몰라도 마법을 배운 사람은 소위 흑마법에서 검은 던전의 주관자를 부르는 이 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미친!”
재빨리 네마냐는 신성 마나를 끌어 올리려 했다. ‘그릇’에 남아있는 신성력은 다만 자신의 몸 하나를 보호하고 회복시킬 분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페넬로파에게서 느껴지는 순수한 ‘검은 마나’는 느낌만으로도 너무 위협적이었다.
[만약에, 지금처럼 불완전한 검은 던전이 아니라…… 정말 완벽한 것이 나타나면 어떡하지. 혹시 알고 있는 대책이 있어?]
주마등처럼 그 순간 뇌리에 스친 건 성국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검은 마나 훈련을 했을 때의 일화였다. 그때 분명히 네마냐 자신이 하라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대답은 분명하게 그려졌다.
[지금까지 나온 해법은 오직 하나야. 그리고 그것은…….]
[마나 공조화, 대적용]
[Natuio Magika, Barangiron.]
불균일한 마나의 수준을 맞춰 버리도록 특정 공간과 물질을 주변 자연환경에 맞춰 위장하는 마나 공조 마법. 생각해 보면 오히려 지금 마나를 잔뜩 써 버린 페넬로파 근처로 외부 마나를 불러들이는 방법일 수 있다.
“이걸로 확실히 끝장을 내주지.”
하지만 마나 공조 마법이 오직 대상의 곁과 그 주변으로만 설정 가능한 건 아니었다. 네마냐가 나직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린 건 바로 그걸 확신해서 꺼낸 소리였다.
―슈우우우!
풍선에서 바람이라도 빠지는 듯한 소리가 두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울렸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나가 직접 보이진 않으니 고블린 별동대는 불안해하며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크윽!”
눈에 보이는 유일한 결과는 페넬로파가 다시 격렬하게 구토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토해낼 피도 없는 것인지 괴로워하기만 할 뿐이었다. 부하로 보이는 복면 마법사가 두어 명이 황급하게 달려들어 부축하려 했다.
“허억…… 놔! 허튼짓 말고 너희가 가진 마정석부터 당장 내놔!”
복면 마법사들의 손을 뿌리친 페넬로파는 기어코 손을 땅에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정석 몇 개를 받아든 녀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줄곧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만, 그만하라니까! 안 보여? 너희가 어쨌든 여길 뚫지 못한다고!”
네마냐가 활짝 펼쳐서 보도록 주의를 끈 후방. 근접전 병력은 태부족하고 정령사만으로 고블린과 마법 용병까지 막진 못하리란 계산으로 동원된 별동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뒤편으론 단단한 도시의 석조문이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마나를 차단한다면 내가 마나를 끌어낼 테다!”
그리고 이어지는 귀를 찢어놓을 듯한 괴성을 울부짖었다. 평범한 일반 마법을 위해 준비해둔 마정석이 시커멓게 물들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치솟았다.
[카이오스, 렉시스.]
[Kayios, Rekshis.]
무슨 종류의 주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본능과 직감이 모든 채널을 통해 절실히 호소하고 있었다. 시야 너머의 하늘로 산만한 규모의 어둠을 가득 뿌리는 저 기운이라면…… 네마냐는 생각할 것도 없이 뒤돌아서 손을 뻗었다.
[카스트리아, 카스트레온, 카스트레온톤.]
[Kastreia, Kastraion, Kastraionton.]
마법은 그 명령을 반복할수록 효율은 떨어져도 중첩해서 강화되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위급한 상황에선 가릴 것이 없었다. 다만 지금처럼 자신의 ‘그릇’에서 마나가 말라붙어 가고 있는 상황만 아니라면 최적이었으리라.
“쿨럭!”
밭은기침과 격한 떨림, 그리고 따뜻한 무엇인가가 속으로부터 솟구쳤다. 그러나 전방 정령사 무리 정면으로 거대한 삼중의 실드가 펼쳐졌다.
“얼른 각자 정령으로 실드를 도와!”
눈치 빠른 정령사들을 시작으로 재빨리 온갖 물의 벽, 불의 벽, 흙의 벽이 실드 앞뒤로 형성됐다. 물론 네마냐가 달려서 통과한 지점 뒤편부터 순차적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령사나 고블린이나 경악에 사로잡혔다.
“어, 어둠이야!”
“완전한 던전이다, 취익! 피해라!”
무시무시한 속도로 따라잡혔는지 어느새 귓전으로 바람의 우는 소리마저 들렸다. 시야의 양쪽 끝으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자꾸만 보였다. 네마냐는 눈을 질끈 감고 풀리려는 다리를 붙잡아 한껏 몸을 내던졌다. 불과 몇 미터 밖까지 가까워진 성정석 과부하 영역으로. 그리고 피범벅인 입에서 나온 마지막 명령이 대미를 장식했다.
“모두 엎드려!”
그리곤 찾아온 정적. 모두의 귀에서 청력을 앗아간 폭발은 어둠의 마나와 신성 마나, 온갖 정령의 벽과 실드마저 뒤섞인 채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쿠구구궁-!
제때 엎드리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생사람 목숨이 증발할 현장이었다. 눈을 뜨지도, 소릴 듣지도 못하는 완전한 단절의 감각 속에서 네마냐는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 모른다. 느껴지기론 마치 몇 시간이라도 지난 것 같다. 하지만 먼지를 뚫고 전해지는 햇볕의 따스함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았다는 현실감을 전해 주었다.
“크윽. 다들, 다들 괜찮아요?”
네마냐는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면서 주변에 있었을 정령사들을 찾아 더듬거렸다. 누군가의 머리칼이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니다.”
“쿨럭쿨럭!”
“오우야……. 진짜 평생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다신 겪고 싶지 않은.”
“하하하.”
판단의 범주를 넘어서는 재앙에 임하면 사람은 차라리 웃는다고 했던가. 조선인이 활짝 웃으면 그건 정말 위험한 것이라고 기록했다는 옛 서양인의 일기 생각이 났다. 네마냐는 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이 폐부를 통해 흘려보냈다.
“하하하…….”
물론 주변 사람들도 현실감 없는 웃음을 따라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잠시 등을 기댄 채로 사람들은 웃었다.
“정말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군요.”
이 말을 꺼낸 것은 그동안 줄곧 대고블린 전쟁 참전에 회의적이었던 한 소인족 원로였다.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인가 싶다. 네마냐는 씨익 웃으며 부서질 듯한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이건 시작일 뿐이니까요. 다행히도 이번엔 우리가 이긴 것 같습니다만.”
“예?”
“그게 무슨?”
뒤쳐질세라 일어선 사람들은 모두 비틀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페넬로파를 보며 경악했다. 그러나 네마냐는 이미 그 뒤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 아니 대마법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있었다.
“싸움은 강한 사람이 이긴다지만, 전쟁은 이기는 사람이 강한 거니까. 시운을 올라탔으면 우리는 충분한 겁니다.”
네마냐가 바라본 지평선 끝에서 깃발과 거대한 먼지 바람 그리고 그림자들이 일어섰다. 그 그림자는 구름과 같은 군마와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사방에 울리는 나팔 소리.
부우-
부우우-
기병들에게 돌격을 준비시키는 하야스단의 전통적인 전쟁 나팔 소리다. 예상보다 빠르긴 했지만 어쨌든 전서구는 성공적이었다. 뒤에서 네마냐를 부축하며 품을 파고든 사람의 존재로 보아 성공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수고 많았다.”
담담한 목소리. 잘 버텨 왔는데도 네마냐는 순간 울컥할 뻔했다. 코를 닦는 시늉으로 애써 감추며 바가반드 영주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본 아일라는 제법 먼지와 땀이 범벅되어 자신 못지않게 엉망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품위는 더 당당하고…… 무엇보다 허리춤에 차고 나온 물건이 예사롭지 않았다.
“덕분에 뼈는 추렸네요. 대장인님.”
무언가 성장했구나. 시선을 전방의 미크라야크 기병대에 고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네마냐. 어깨를 더 단단히 붙든 아일라는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뜬금없는 대답을 남겼다.
“조상의 땅과 동포의 목숨을 보전해 주어서 대신 고맙다고 얘기하지. 지금은 없는 소인족의 왕을 대신해서.”
“저도 포함해서요.”
왼편에서 슬쩍 모습을 드러낸 소피 아슬라니아도 덧붙였다. 이번 작전은 정말 위험했지만, 그래도 성공한 것이다. 아픈 건 여전하지만 입꼬리는 멋대로 아픔을 거부하고 뺨까지 치고 올라간다.
“새로운 동맹을 환영합니다. 고생을 함께 했으니 적어도 죽기 전까진 더없이 돈독하겠죠.”
그것은 바람이랄까. 아니, 희망 사항보다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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