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타다닥!
계단을 급하게 내려서는 소피의 등 뒤로 바위로 된 문이 급하게 닫혔다. 우수수 머리 위로 흙먼지가 떨어졌지만 신경 쓸 만한 게 아니었다.
“괜찮겠어, 소피?”
아일라는 일단 머릴 대충 털어주며 친구의 얼굴을 들여보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안전을 의심한 적이 없었던 지도자의 얼굴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괘, 괜찮겠지? 다들 피해가 크면 안 되는데.”
“정신 차려! 너까지 흔들리면 어떡해.”
아일라는 가볍게 친구의 뺨을 때렸다. 두 명의 등뒤로는 어느새 거대한 바위 문이 다시 닫혀 가고 있었다. 흙먼지가 여전하지만 저 건너편으로 정령사들이 모이는 모습이 보였다.
‘네마냐가…… 적어도 벌어 주는 시간에 부응하는 건 내가 할 임무겠지.’
여전히 반쯤 의지를 잃은 소피의 양팔을 굳게 붙잡으며 또박또박, 신중하게 물었다.
“지금 우리는 당장 전서구가 있는 방으로 가야 해. 네가 거기로 안내해야 하고.”
“어서 가십시오, 지도자님! 저희가 숨이 붙은 한 도시 입구를 지킬 테니 염려 마시고, 어서!”
“봤지?”
“어, 응…….”
아일라는 급하게 한 손은 소피의 손목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이 한참을 더 두 사람을 지하로 이끌었다.
“계, 계속 내려가면 돼. 여덟 번째 지하층에서 이쪽으로 쭉 들어가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층마다 사이에 지나야 할 계단이 워낙 많았다. 지하도시 자체가 커다란 광산이었으니 실제 건물에 비해 각 층의 높이는 상상을 초월한 덕분이었다.
“헉헉……. 조금만 더 내려가서 쉬더라도 쉬자. 괜찮겠어?”
“으, 응.”
세 개 층의 계단을 쉼 없이 뛰어 내려왔다. 족히 층마다 삼백 개는 족히 됨직한 작은 계단들이었다. 소인족의 신체에 맞추느라 가뜩이나 계단이 더 많았다. 헉헉거리며 가쁜 숨은 폐부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허억허억…….”
“아직이야, 조금 더 가자!”
―쿠르르릉!
동굴 밖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축은 흔들렸고, 벽면에 설치된 촛불이나 등잔들이 멋대로 떨어지거나 엎어졌다.
‘제길. 놈들은 아예 도시 자체를 부숴 버릴 속셈이라도 되는 건가. 이 유서 깊은 광산 도시를.’
지금 무너지는 도시가 자신이 알고 있던 옛 고향 도시인지 확신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로 손을 짚고 어느 구간에서 몸을 숙여야 부딪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떠올랐다.
“휴……. 여기서 잠깐 쉬자.”
“하아하아…….”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소피가 복숭아처럼 붉게 달아오른 뺨과 함께 헐떡였다. 이렇게 보자면 소인족 왕국의 마지막 후손이라고 해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적당하게 책임질 일이라고는 해도, 이런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맡겨 버리다니!’
생각이 이에 미치고서야 아일라는 그녀가 여전히 숨이 가쁜 것을 알아차렸다. 다행히 그는 어떤 포션을 꺼내어 들이마셨다. 아일라가 등을 두드려주자 점차 호흡도 안정되었다.
―쿠르릉!
“조심!”
“꺅!”
다시 격렬한 진동과 함께 몸이 거세게 떨렸다. 그리곤 무언가 머리 위쪽으로 떨어지는 직감이 전해졌다. 아일라는 생각할 것도 없이 친구를 안고 구르듯 계단을 뛰어내렸다.
―퍽!
무언가 커다랗게 깨지는 소리와 함께 계단 곳곳에 심각한 손상이 생겨났다. 계단을 비추던 촛불 하나도 마저 꺼져 버렸다. 어두컴컴한 층계 사이로 아이와 여자들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약자들은 도시 안에 그대로 남았어?”
“어차피 도시 출입구는 하나뿐이라 나갈 수가 없어. 대신 가장 튼튼한 지하 3층 회당 쪽에 출입구를 막고 숨어 있게 했어.”
“하…… 그래.”
딱 자신이 서 있는 곳과 머지않았다. 노약자들이 방치되었을까 했던 두려움은 괜한 것이었다.
“허, 당황해서 험한 꼴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도시 수장의 역할을 하기는 했네, 녀석?”
“할 수 있는 일만큼은 했지. 정작 방위대를 조직해서 지휘하는 일은 실패했지만.”
“아직 어린 애에게 넘기곤 뒷짐이나 지고 있던 영감들 탓이지. 그게 왜 네 탓이야. 일어나.”
계단을 구르며 곳곳이 까이고 긁힌 아일라는 역시나 비슷하게 생채기를 입은 친구를 일으켰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우연히 굴러서 계단을 내려온 게 유용했지. 저쪽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거지?”
“맞아. 그리고…… 저 안쪽엔 우리 조상들의 보물들도 묻혀 있지. 너희 가문의 가보……도 포함해서.”
그녀의 이야기에 아일라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떠올리더니 이내 지워 버렸다. 그리곤 소피를 한층 더 재촉했다.
“어서 가자.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상층에선 우리 편이 간신히 적을 막고 있을 거야. 얼른 전서구를 가지고 가서 우리도 합류하자.”
“아, 아! 그래야지.”
다행히도 소피 역시 더는 다른 소리를 하지 않고 길을 열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양철로 된 문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로처럼 작은 방과 방이 연달아 있었다.
“이쪽이야. 이쪽으로 쭉 가면 물자 창고와 전서구 보호실이 있어.”
“얼른 가자. 머리맡 도시가 언제 또 무너질지 몰라. 희생을 헛되이 하면 안 돼.”
두 사람은 다시 어두운 복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간간이 들리는 충격음과 그로 인해 쏟아지는 먼지는 지하 깊숙이 전해지는 충격파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 * *
“좀 하는데.”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깊은 의미가 담겼다. 여러 첩보나 소문으로 알곤 있었지만 네마냐의 움직임은 페넬로파에게도 놀라웠다.
“네가 없는 사이에 몇 가지 달라진 게 있었거든. 괜히 목숨 던지려고 달려든 건 아니라고 했지?”
“그런 것 같아. 시험 삼아 던져봤지만 마나를 우연찮게 얻었다더니 정말이었어.”
“의외인걸? 칭찬을 다하고.”
“진심이야. 그러니 나도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만.”
“어이…… 진심이냐? 우리가 굳이 싸울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는데. 설마 아직도 그 파혼 건으로 뚱한 건 아니지?”
반쯤 농담조의 이야기에 녀석도 피식 웃었다. 네마냐 자신 역시 갑작스러운 파혼 이야기에 민망한 듯이 머리를 긁었다.
“이제 그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아, 역시. 너라면 금방 그 민망한 문제도 헤아려 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이해해 주니 고맙네.”
아마도 자기 아버지나 다른 경로를 통해 우리의 정략혼 계약에 대한 추악한 이야기를 알아봤겠지. 용케 상처받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별 걸 고마워하긴. 어차피 망해가는 세상, 시한부인 세계에서 그런 사소한 일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지…… 아니, 아니지. 지금 뭐라고?”
난데없는 이야기였다. 마치 종말론 부르짖는 사이비 신도의 이야기가 익숙한 지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경험이라. 몇 년 만에 연락이 온 친구에게서 별안간 보험 권유라느니 돈을 빌려 달란 황당무계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썩 마뜩잖은 경험이다.
“너도 그저 웃어 넘어가겠지. 세계의 멸망이라는 이야기가 와닿지 않겠지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건 또. 설마 냉각화 현상으로 인간도 아니고 세계가 멸망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정확하게 현대의 용법대로라면 한랭화 현상. 온난화의 정확히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이미 겨울철이긴 하지만 과거와 달리 훨씬 추운 기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과 접점이 많은 농민과 특히 마법사만 해도 뭔가 변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변화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세계의 많은 것을 바꿔 버릴 거란 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세계의 기온이 낮아지다 못해 한겨울철엔 얼어붙을 정도가 되는 날이 오는 건 아직 한참 남은 이야기다.
“후후…….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궁금한 모양이지? 나 역시 네가 했다는 이야기가 무척 다르면서도 신기했으니까.”
“다르다?”
마침 그대로 전투가 계속되면 검은 마나가 풀려날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네마냐는 내심 궁금한 점도 있었기 때문에 대화의 물꼬를 계속 이어 갔다.
“네가 얘기하는 건 마법이나 마나를 부정하는 학자들의 이야기 같았어. 마나의 원리가 아닌 이유를 제시하는 것 말이야. 정작 너는 마법 계열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재능이 있었는데.”
“내가 마법학에 종사한다고 모든 세상 원인이 마나로만 설명되는 건 아니지.”
“틀린 말은 아니네.”
기후가 어떤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 이 세계에서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신분부터가 엘리트 마법사인 페넬로파도 이해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는 너는 어째서 그런 사이비 종말론 같은 이야길 하고 다니고 있는 거지? 원래는 너도 독실한 마나교 신자 아니었어? 자연으로의 마나로 회귀하면 인간도, 세계도 돌아온다는.”
“그랬지. 지금도 자연계로의 회복은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
그런 말을 하던 녀석은 곧 얼음장처럼 차갑게 표정이 변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우레이미야가 보여 준 미래는 확실했어. 인간이 자립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철저하게 부수어 새로운 질서를 짜는 것만이…….”
“그게 무슨 소리야? 새 질서를 짜자고 고블린 편에 붙어서 인간을 도륙하려 들다니.”
“도륙하다니? 적어도 내가 들어온 뒤로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너도 설마 풍문만 믿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외면하지 마. 나샤와와 중부산맥 일대의 학살을 모른 척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고블린들이 다르빌 바깥에서 벌이고 있는 짓은?”
그러나 녀석은 네마냐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불신하는 사이니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야. 더군다나 저것들의 손을 먼저 끊고 절박하게 만든 건 인간들 아니었어?”
“미친 소리.”
“그럴 줄 알았어. 근데 그래놓곤 내 집안을 잘도 파멸로 몰아갔더라. 네가 지켜내겠다던 하야스단의 안에는 우리는 없었던 거지?”
“하아.”
시간은 충분히 벌 만한 주제긴 했지만 심사는 복잡했다. 가스파리얀을 제거하면서도 마음이 편한 적은 없었다. 백작 본인이야 자기 죽음을 자초했을 뿐이지만 그를 따른 하인과 시녀, 어린 자녀도 죽어 나갔다.
“입맛이 쓰군. 적어도 내가 일정 책임이 있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책임은 적어도 부정할 생각은 없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외면하진 않을 거야.”
네마냐는 고개 하나 돌리지 않고 마주 보았다. 별다른 표정이 담기지 않은 페넬로파도 여전히 마주하고 있었다. 고블린과 복면을 한 마법 용병들은 정령사와 이따금 공격을 주고받았지만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킥, 킥! 뭐 하는 거냐 마법사! 얼른 명령해라!”
“탑주님, 어서 지시를!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바가반드 백작도 처리합니까?”
“……네놈들 실력으론 할 수 없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부하들을 말린 페넬로파는 빠르게 명령을 수정했다.
“네마냐는 내가 상대할 거야. 중요한 건 정령사 전력을 없애 버리는 거다. 그건 너희들 정도도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맡겨 주십쇼.”
드디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알아들은 고블린들은 신난다는 듯 마구잡이로 들썩였다. 그동안은 슬쩍 들고만 있던 지팡이를 내리꽂으며 페넬로파는 지시를 내렸다. 지팡이 끝에 꽂힌 마정석에서 강렬한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마법병이 검은 던전을 먼저 사방에 뿌리고 고블린이 그 사이로 난입한다.”
“와!”
“공격-!”
지팡이가 이쪽을 향해 내리꽂듯 끝을 드러냈다. 고블린과 용병들은 백여 미터 바깥으로부터 달려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눌려 버린 정령사들은 일부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지기까지 했다. 네마냐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크게 호령했다.
“정령들을 동원해서 최대한 적이 다가오는 걸 막아요. 부상당한 사람들은 곧바로 도시 안으로 후송해서 치료하고.”
“직접 맞서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시작부터 검은 마나를 터뜨릴 테니까 정령조차도 휩쓸리면 답이 없을 것이다.
“정령이 대거 흡수당하면 이 주변 마나가 증발해 버릴 수도 있어. 허투루 쓰지 않도록 해요. 일단 검은 마나가 여기 안쪽까지 오지는 못하게 할 테니까.”
“어떻게 그게…….”
―휙!
네마냐는 목걸이에 매달린 수정을 끊어내 정면부로 던졌다. 끊어내는 순간 막대한 마나를 불어넣은 건 물론이었다.
―펑!
[성정석 과부화]
[신성한 백색 마나가 담긴 성정석을 과부화시킵니다. 과부화가 일어난 지역에 일괄 급속 자연 치유, 검은 마나를 차단 효과를 부여합니다.]
“자, 이제 갑시다. 아슬라나 공녀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 봐야지.”
예상했던 대로의 안내창이 나오자 네마냐는 미련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왼손엔 소피의 정령사 지휘봉, 오른손에는 아일라가 만들어 준 마나검까지.
―후우.
깊은 숨결을 들이켜며 네마냐는 페넬로파의 병력이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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