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쿠르르르…….
무거운 진동이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울려왔다. 엘레기스는 말할 것도 없고 훨씬 먼 곳에서도 진동을 느낄 정도였다.
“이상한 일이군. 갑자기 지진이라니. 게다가 이렇게 심각한 세기라고?”
아침 궁중의 한적한 복도를 밟는 환관은 연신 고개를 갸웃댔다. 왕성 흐라세카베르트, 아니 미크라야크 어디를 가더라도 이런 지진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제국과 고블린의 전쟁조차 이 산속 깊은 계곡에서는 남 이야기일 뿐이다.
“전하께서 놀라지나 않으셨을지 모르겠군. 아직 오침 시간이긴 한데.”
슬쩍 복도 옆으로 나 있는 유리창 밖을 내어보니 궁전 앞 광장의 물시계가 정오를 조금 지난 상태였다.
―스윽.
은을 도금하여 만들어진 기반 위에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문 두 짝. 마치 강박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석으로 빽빽하게 장식된 이 출입구는 소유주의 끝없는 편집증적인 집착욕을 보여 주는 듯했다.
‘포기할 수 없는 권좌의 욕망.’
끝내 지울 수 없는 생각을 흘리며 환관은 가볍게 헛기침을 냈다. 만약 군주 슴바트가 깨어 있다면 이 소리에 반응할 것이다. 보통 때라면 환관이 손잡이를 가볍게 두어 번 쳐서 깨웠을 것이다.
“왔느냐. 들어오너라.”
“역시…….”
큰 충격은 아니라지만 땅으로부터 울리는 낯선 느낌은 그 이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환관은 긴장된 호흡을 삼키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고급스럽게 만든 문이라 경첩의 끼익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깨어 계셨습니까?”
“이 진동. 무슨 일인지 확인했느냐?”
역시나 환관이 들어오자마자 정오 조금 전의 진동부터 물어오는 신경질적인 추궁. 신경이 바짝 당겨지는 것을 느끼며 환관이 미리 정리한 대로 대답했다.
“수도의 지사가 삼십 분 전에 정찰대를 편성해 내보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엘레기스 쪽에서 소리가 난 것으로 보입니다.”
“엘레기스라고?”
감히 환관이 눈을 들어 마주할 수 없겠지만 말투의 끝부분에 강한 의문과 무언가의 감정은 진하게 느껴졌다. 더욱 낮게 얼굴을 깔면서 환관은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을 애써 감췄다.
“그렇습니다.”
침대 끝에 앉아 있었던 슴바트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창가로 다가갔다. 오직 단어 하나만을 거듭 외워 댔다. 바난드의 가짜 왕이라는 하코브의 이름을 외워댔던 몇 년 전처럼.
“엘레기스라, 엘레기스. 난쟁이들에게서 달리 소식이 온 것이 있었나?”
“에…… 난쟁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종족이 우리나라에 있었는지. 거기다 엘레기스 인근이면 온통 산악이거나 삼림일 텐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 미친 사람인 듯 두서없이 아무 말이나 던지던 왕은 갑자기 돌벽에 머리를 몇 번 찧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전하, 왜 그러십니까!”
“지금 당장 기사단장을 불러, 그리고 너는 꺼져 빨리.”
정확히 세 번 머리를 찧은 군주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지껄였다. 그리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 머리맡으로 향했다. 그 움직임이 머리맡에 걸어 둔 검을 찾는 것임을 궁중 사람은 누구든 알고 있었다. 얼른 빠져나가야 했다. 예법은 형편없지만 환관은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대사를 외웠다.
“정확한 이야기가 나오면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부리나케 환관이 달려 나와 문을 닫자마자 무언가 날카로운 금속성 물체가 은제 문에 부서질 듯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환관은 낼 수 없는 소리를 속으로 욱여넣으며 복도 바깥으로 달아났다.
“누가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려는 건가. 바난드? 제국? 그것도 아니면 고블린이란 말인가? 어림도 없지, 개자식들.”
반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여전히 검을 쥔 슴바트는 침대에 다시 주저앉았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숨은 몰아쉬고 진땀을 흘렸다.
“누가 오든 상관없지. 이번엔 어찌 되어도 반드시 베어넘기고 내 걸 지켜낼 테다. 하코브 자식이건, 고블린이건 누구건.”
혼란스러운 슴바트의 검이 실내에 걸린 아름다운 휘장을 닥치는 대로 갈랐다. 자신의 정당한 몫을 더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결의였을까. 그에 대한 답은 오직 자신만이 내릴 수 있을 터였다.
* * *
엘레기스 도시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진 어느 계곡지대. 여전히 일대 지역은 사방을 알 수 없는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천연 풍경의 가운데, 비명과 인위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건 그 사이의 일이었다.
“바람 정령으로 먼지 바람을 일으켜요!”
“흙의 정령사는 어디 없습니까? 전방에 고블린 병사들이 밀려오고 있어!”
폭발에 휘말려 날아갔다가 정신을 차린 정령사들 역시 피를 흘리면서도 급히 달려왔다.
“코마, 부탁한다.”
“우리 코마들을 지휘할 수 있게 중급 정령 소환 가능한 분, 소환 좀 해 주세요!”
[나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친구를 부르노라. 우리 조상이 계약을 각인한 대로, 나를 도와 함께 설 자는 흙의 힘을 빌어 나타나라!]
하급 정령은 한 번 계약하면 언제나 소환할 수 있다. 그러나 중급부터는 계약 유지에 마나 소모가 크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소환해서 계약하는 게 보통이었다.
‘오, 저게 정령 소환의 방식이구나. 교재에서도 언급이 없길래 못 볼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모습이긴 한데 어쩐지 풍겨오는 마나의 생동감은 익숙했다. 하라드가 프네마를 처음 소환했을 때는 키메라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대로 분석하기론 지금이 처음인 셈.
‘어쩐지…… 음?’
무언가 직감이 느껴지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시스템이 언제나 그렇듯 화려한 UI를 뽐내며 주변을 둘러쌌다. 그래, 이 기운…….
‘정령계의 기운과 통하고 있어.’
―파밧.
[의아한 공통점]
[사용자 환경 시스템^^[email protected] 어쩐 이유에선지 정령 소환은 비슷한 마나 파장이 느껴진다. @*#&$*(! 어떤 이유에서 그런 걸까. 뭔가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것일까.]
[*&@$) 발견 진척 1/#&@]
마치 컴퓨터를 쓰다 운영체제가 깨져서 나오는 블루스크린처럼 메시지의 이곳저곳이 깨져 있었다.
‘발견……이라.’
바깥의 상황이 급한 와중이라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지만 네마냐는 어쩐지 그간 이상하게 여겨온 의문이 떠올랐다.
‘만약 이 세계의 존재라면 어째서 내가 아는 개념과 단어를 당당하게 알 수 있는 건지. 아니라면 대체 정체가…….’
그러나 그때 귓전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비명에 네마냐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중요한 의문이다.
‘그렇지만 당장 내가 살아남으려면 이곳에서의 일이 우선이지.’
급하게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소피의 마나에 반응한 정령사들이 속속 이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도시의 정문인 거대 바위를 등 뒤에 둔 최후의 수비대였다.
―탁.
―휘이잉!
무언가 물체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고 돌연하게 돌풍이 이쪽으로 덮쳐 왔다. 바람의 정령을 부리던 정령사들이 돌풍을 다스리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크악!”
“쿨럭쿨럭…….”
어떤 이유인지 오히려 피를 토하며 언뜻 보기에도 중상을 입은 정령사들이 속출했다. 네마냐만큼이나 자신들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상인 모양이었다.
“이게 대체…….”
“어째서 마나가 멋대로 폭주하는 거지?”
“안 돼! 정령, 정령이 폭발한다!”
―펑, 퍼펑!
잠깐이라도 버텨 주길 바라면서 무너진 정면에 배치시켰던 토벽이 스스로 폭발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흙먼지가 시야를 어지럽히고 찬 바람이 뺨을 거칠게 스쳤다.
“다시 불러올 수 없어요? 중급 정령은 어때요?”
“만약 아까 전의 그 이상한 수법에 당했다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아니요, 해 보겠습니다. 이 방법이라면…….”
“큰일 난다니까!”
벌떼같이 달려드는 정령사들. 한숨이 나왔다. 역시 네마냐도 같은 생각이었다. 분명히 이 정령사들을 나자빠지게 만든 강력한 일격은 보통의 고블린이나 하급 용병의 실력이 아니었다.
“적마정석 때문이야. 아마 여러분도 마나 흡수와 폭발은 경험해 본 적이 없겠지.”
“적마정석.”
“놈들이 그동안 이런 전력으로 곳곳에서 도발을 걸어왔던 겁니까? 그렇다면 동포들이 당했다는 공격도…….”
애써 눈길을 외면했다. 정령사가 마나의 부담도 없이 마법사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해 봤자다. 전문 마법사의 재능으로도 겨우 상대할 적마정석의 마나 운용법을 알아채는 것도 힘들 것이다.
“여기선 그나마 경험 있는 사람이 맞서는 게 최선일 겁니다. 상대는 그간 봐 온 자 중엔 손꼽힐 실력의 마법사가 있는 것 같으니.”
이름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마법사가 누구일지는 강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생각대로 이 익숙한 마나의 소유자가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라면…….
‘내가 직접 맞서야겠지. 어차피 제한적인 정령 마법이라면 검은 마나에 맞설 순 없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 봤자야.’
페넬로파. 오랜만에 다시 외워 보는 이름이었다. 다른 엄한 사람을 보내서 다치게 하느니 자신이 처음부터 나서는 게 맞을 것이다.
‘대체 어째서 놈들과 손을 잡았는지부터 추궁할 게 너무나 많겠지.’
생각을 정리한 네마냐는 열의를 불태우며 다시 정령을 불러들이려는 중급 정령사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에루……에루아입니다. 소인족의 단어인데, ‘조화’를 뜻하죠.”
뜬금없는 질문에 고참 정령사는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살짝 얼어붙었다. 피식 웃으며 바가반드 백작은 토닥였다.
“조화라……. 조화라는 건 맞는 것끼리 붙이는 거죠. 그러니 저 검은 마나는 내게 맡겨요. 대신 나머지 내 엄호를 부탁 좀 하자고.”
“괜찮겠습니까? 검은 마나는 지금껏…….”
“걱정 말아요. 여기서 승부를 볼 것도 아니고, 내 목숨 소중한 건 내가 너무 잘 알거든.”
말을 마치자 정령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고쳤다. 네마냐가 정면으로 나서고 양쪽으로 늘어선 사람들이 정령을 각자 소환하기 시작했다. 흙먼지와 군데군데 세워진 토벽이 밀려나는 느낌이 점점 가까워졌다.
“준비―!”
외침이 허공에 울리는 그 순간. 전면에 보이는 마지막 토벽이 마침내 뭉개졌다. 희미하게 보이는 시야 너머로 다수의 고블린 소리와 인간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바람 좀.”
“바람.”
속삭이는 이야기가 몇 번 전달되고 하급 바람의 정령이 먼지를 조금 걷어냈다. 그동안 입구를 최대한 가리는 역할은 충분히 수행했으니 이젠 걷어낼 차례였다.
바람 한 줄기가 싸늘하게 찝찔한 먼지바람을 몰아냈다. 연신 따갑던 눈이나 모래가 씹히던 입가도 조금 깔끔해진 게 느껴졌다.
“…….”
“…….”
잠시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조용하게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로는 당황한 눈으로, 적의에 찬 눈으로 또 때로는.
‘할 말이 입을 여는 걸 막을 정도로 많은 모양이군. 너나 나나.’
잠시 반년 만에 맞닥뜨린 친구의 눈을 바라보았다. 검은 천을 늘어뜨려 거의 보이진 않지만 익숙한 실루엣과 손을 불안하게 꼭 맞잡은 것까지 영락없는 페넬로파였다.
“오랜만이야. 바난드에서 볼 때는 제법 귀공자의 인상이더니 이젠 완전 용병조합의 우두머리 정도는 되는 것 같군.”
“칭찬 고마운데. 하지만 네 명성보단 아닌 것 같아. 심지어 고블린들 사이에 있어도 너의 활약상이 속속들이 들어올 정도니까.”
몇 개월 만에 나눠 보는 대화였나. 무척이나 메마른 감정이 느껴지지만 그런데도 반가운 것은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무턱대고 올라오는 반가움을 억누르며 네마냐는 한참을 묵혀둔 질문을 꺼내 들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가 어째서 고블린과 함께하는 거지?”
“역시 그것부터 물어볼 줄 알았지. 너만큼은 그래도 다짜고짜 정죄해서 달려들진 않겠다고 기대는 했었지만.”
“그 기대에 부응했으니 다행이지.”
이런 대화가 잠시라도 이어지면 다행이었다. 전서구를 가지러 내려간 소피와 아일라 일행이 찾을 시간을 벌어주는 게 핵심이었다. 페넬로파가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일지야 미지수지만 만약 지금까지 본 용병 자객들을 능가한다면…….
‘기껏해야 시간 벌이나 하고 문 뒤로 후퇴해야겠지. 미크라야크의 군대가 오는 게 정답이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미치광이 손길이라도 바랄 지경이라니.’
모르겠다. 거기까지 미칠 파급을 생각하자면 골치만 아프다. 적어도 고블린에 맞설 수 있다면 편집증적 미치광이로 소문난 슴바트라도 손을 잡지 못할 건 없다.
“그럼, 대화 좀 진하게 해 볼까? 세계의 미래와 우리들의 험난한 앞날에 대해서.”
“하하……. 농담도.”
애써 웃어 보았지만 이미 페넬로파의 손에서는 검붉은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네마냐는 목에 걸었던 백색 수정을 떼어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백수정이 과부하됩니다! 무리한 마나 주입으로 내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진행합니까?]
[Yes]
미하일이 잠시 선보였던 성정석 과부하로 최대한 다치는 사람 없이 시간을 벌어 볼 속셈이었다.
‘귀중한 전력 손실 없이 반드시 돌아가자. 더는 놈들에게 유리한 길을 뺏기지 않겠어.’
나름 굳센 결의에서, 자신의 회복 수단마저 포기하면서 내린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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