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겉으로 보기엔 허망할 정도로 어떤 인위적인 물체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인간의 발자취라곤 수천 년간 한 번도 없이 웃자란 수풀과 늪지대, 폭포와 들녘까지.
“취익-! 이런 곳에 인간들이 있을 리가 없다! 마법사가 뭔가 잘못 안 것 아니냐!”
“감히 탑주님께 망발을.”
―퍽.
“끼엑! 무슨 짓이냐!”
“냄새나니까 입 닥치라고.”
“인간 따위가…….”
검은 복면을 두른 사내가 살짝 정강이를 걷어차자 고블린이 위협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내 역시 질세라 눈을 마주 댔다.
“그만해라. 한 번만 더 싸우면 둘 다 저 아래 흐르는 강물에 던져 버릴 테니까. 작전을 앞두고 분열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진 알겠지?”
“타, 탑주님.”
“그릉…….”
마법병은 자신도 모르게 마나를 끌어올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벌써 구의 형태를 갖추며 빛을 내는 중이던 마나는 다시 흩어졌다. 그 기운에 반응을 보이던 고블린은 ‘탑주’라고 불리는 여자에게 여전히 이를 드러내 보였다.
“건방지긴. 기세는 좋지만 내게 드러내는 건 삼가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블린 병사의 뇌수가 붉은 꽃의 수많은 꽃술처럼 피어났다. 고깃덩이가 사방에 튀고 마법병의 가슴팍에도 녹색 핏자국이 튀었다. 기겁한 병사는 바닥으로 신음을 흘렸다.
“쓸데없는 싸움에 계속 끼어들었다간 너희들도 이렇게 될 수 있다. 적어도 연합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은 말썽 없이 맡은 일에만 집중해라. 괜한 도발에 말리지나 말고.”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탑주님!”
“쯧.”
혀를 차면서 검은 망사로 된 천이 드리운 탑주는 그 자리를 떠났다. 한겨울의 차가운 날씨에 모락모락 더운 김을 피어내는 악취가 피어나는 걸 더 볼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화를 잘 참으시는군요, 탑주. 예전 같았으면 부대 하나를 증발시키셨을 텐데.”
“언제 얘기야? 적어도 이젠 그렇게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고.”
이지적으로 차가운 얼굴을 거칠 것 없이 드러낸 보좌관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고블린의 대장과 아예 숙식을 같이할 정도로 지내셨으니 성장했으리라 생각은 했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아가씨로 모시던 저는 기분이 묘하달까요.”
“지나간 시대는 잊어버려. 아직도 매달리고 있는 놈들을 쓸어버려야 할 상황에 우리까지 그러고 있을 순 없잖아?”
“그래서 옛 시대의 잔재인 정령사의 소굴을 찾아오신 거겠죠. 그것도 하나씩 없애는 게 아니라 머리부터 찾아 자르시겠다고.”
고블린과 용병이 동원된 별동대가 막상 도착한 곳은 황당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계곡이었다. 맑은 물이 흘러가고 제멋대로 자라난 덤불과 나무가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헌데…… 이런 곳에 정말 정령사의 보루가 남아 있다는 겁니까? 정령사는커녕 마을조차 보이지 않는데…….”
“정령의 기운은 느껴져.”
검은 망사 천으로 덮여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는 탑주가 슬쩍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운을 느끼는 모양이다.
“훼손되지 않은 깊은 자연은 정령계와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아마도…….”
“마나교에서도 하던 소리네. 그 정령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난쟁이들이면 반드시 여기로 찾아왔겠지. 확실해, 여기가 그 성채겠지.”
“하지만 이래서야 어디가 출입구인지도 모를 텐데요.”
푸념하는 부관이 뭐라고 하든 말든 탑주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툭 떨어뜨렸다. 얇은 쇠사슬을 얽어 만든 금속제 줄 끝에는 세밀하게 글자가 각인된 황금판과 그 가운데 삽입된 마정석 조각이 있었다.
―위잉.
손으로부터 마나가 미끄러지듯 자연스레 줄을 타고 수정석으로 흘러 들어갔다. 지켜보던 부관은 자신도 모르게 이 광경에 혀를 찼다.
[탐지]
보통의 인간들에게 탐지란 단순히 어떤 존재의 유무나 위치를 파악하는 용도였다. 특수 기술로 연계하더라도 농부나 광부들이 농작물이나 원석의 순도를 파악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정석의 마나를 공명시켜 마정석에서 분출한 마나를 탐지한다는 건가.’
신박하긴 하지만 지금까진 거의 필요가 없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발명될 일이 없는 기술이었겠지만.
“어떻습니까? 녀석의 존재가 보입니까?”
“조용히. 집중 안 되니까.”
“넵.”
조용히 째려보거나 말거나 보좌는 머리 뒤에 깍지를 끼우고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마나가 마정석을 진동시키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을까. 탑주는 살짝 움찔하더니 바로 아티팩트를 거둬들였다. 에너지는 가장 약한 축이지만 먼 곳까지 공명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자색 마정석을 활용한 도구였다.
“있어. 적어도 최근에 지나갔군.”
“그럼 그게 정말이었군요. 인간 연합군 사이에서 정령사 동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첩보 말입니다.”
“생각보단 인간 연합군도 빨리 정신을 차리는 느낌이지. 뭐,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늦은 건 돌이킬 수 없지만.”
그리곤 손을 꺼내어 앞쪽으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뒤쪽으로 쓸어넘기는 탑주였다.
“남아 있는 마나의 자취로 보면…… 저쪽이로군. 저쪽을 날려 버려.”
“찾는 게 아니라 날려 버립니까?”
“우리가 여기 노크하고 문 좀 열어 달라고 구걸하려고 온 줄 알아? 날려 버리고 빨리 도시 입구나 찾으라고 해. 자.”
마탑주는 아공간에서 소환해 낸 무엇인가를 다발로 던지듯 건넸다.
“어이쿠…… 우앗, 적마정석 덩어리들 아닙니까? 이걸 이만큼이나 쓰라굽쇼? 잘못했다간 우리까지 날아갑니다.”
“저쪽이 허튼수작을 쓰지 못하게 하려면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지. 그리고 안전하게 터지도록 설정하는 게 필로, 네 전문이잖아.”
“아, 네네. 높은 분들이란…….”
“이곳 정부에겐 끄나풀을 통해 채굴권을 사서 발파한다고 미리 연락했으니까 한동안 문제없을 거야.”
한숨을 내쉰 필로란 이름의 부관은 마정석 뭉치를 한 아름 안아 든 채 어느 장소로 향했다. 그저 풀숲과 나무뿌리만이 뒤엉켜 있는 장소는 탑주의 손가락만이 가리키면서 의미가 생겨났을 뿐이다.
“이런 곳에 사람이나 정령사가 살고 있었다니, 거참. 괜히 기분 이상하다니까.”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필로는 누구보다도 빠른 손놀림으로 재빨리 적색의 수정을 중앙에 쌓았다. 곧이어 옆에서 주워 온 나뭇가지로 그 주변에 둥글게 주문을 쓰고 마법진을 그렸다.
“역시 눈앞에 닥치고 나니까 훨씬 잘하네. 앞으로도 이 방법을 써야겠는데? 너는 최전선에서 구르는 게 최고인 것 같다.”
“엄한 말씀 하지도 마시죠. 아가씨를 모시는 것이 아닐 성싶으면 그냥 도망갈 겁니다.”
“풋.”
“진짜예요.”
필로는 몇 번 짧은 문답이 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작업을 마친 모양이다. 손과 무릎을 털며 일어난 부관은 기지개와 함께 하품하며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했다.
“이제 만약을 대비해서 보호막 마법을 준비해 주시죠, 탑주님. 아마 그동안 보셨을 마나 폭주 중에선 가장 강력한 놈을 보실 테니까요.”
누구랄 새도 없이 두 사람은 적마정석을 쌓아 둔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기운에 자연스레 반응하는 위험천만한 에너지 폭탄들은 벌써 스멀스멀 수상한 낌새를 내보내고 있었다.
―스윽.
굳이 지팡이까지 필요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탑주는 지팡이를 발 앞쪽 땅에 꽂은 채 마나를 흘려보내 투명한 방어막을 형성했다.
“됐어. 이제 날려 버려.”
“예이~ 이제 갑니다!”
필로가 방출해낸 에너지가 마치 창날처럼 날카롭게 마정석 더미에 날아들었다.
―꽈꽝-!
엄청난 압력이 사방의 모든 생명체를 압도했다. 지하의 혹시 모를 방벽과 저항을 없애기 위함이라지만 별동대조차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발력이었다.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 참았다.
“흡!”
“다치진 않을 테니까 모두 숨 쉬어! 균형을 잃으면 크게 다친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 축적되었던 자연의 둔덕은 단숨에 흙먼지가 되어 공중에 휘날렸다. 거센 바람은 아무리 실드라고 해도 막을 수 없지만 적어도 직접 토사나 바위에 깔릴 일은 없었다.
―쿠구구궁!
저 멀리 어딘가로 바위가 한참 아래 계곡에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산 경사면을 건드리면서 산사태마저 일어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폭발 소리는 빠르게 잦아들고 요동치던 마나도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무기를 들어! 주변에서 누구도 감시를 벗어나지 못하게 이 주위를 포위한다!”
“하!”
“기다리던 명령입니다!”
억지로 무료함을 참으며 버티고 있던 고블린과 마법병들은 반색을 하며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슴바트가 끼어들지 못하겠지.”
“하지만 이미 막대한 돈이 흘러 들어간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질 텐데 괜찮을까요.”
금화 삼백 개. 슴바트가 완전무장한 근위대 하나를 더 만들 수 있는 큰돈이었다. 당연히 접수는 끄나풀을 통해 쉽게 끝냈지만 돈 냄새를 맡은 슴바트의 관료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걱정하지 마. 슴바트가 개입할 수 있을 몇 시간 뒤에는 이미 이 도시는 잿더미가 된 뒤가 될 테니까.”
“탑주님의 친구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정말 동료까지 데리고 있다면, 이거 생각보다 어려울지도 모르겠는데요. 상대는 마나의 제한도 거의 없는 정령사 본진이니까.”
“우리에겐 그 모든 난관을 뚫어 버릴 수 있는 결정적인 무기가 있지. 이미 작전이 시작됐다면 그걸 충분히 믿어 주라고.”
그런 말을 하면서도 검은 망사 천은 거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어느 한 곳을 주시했다. 유독 강렬하게 마나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곳. 흉흉한 기운이 저마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이 나왔다.
“저기다. 곧 만나게 되겠어.”
말 위에 여전히 홀로 올라탄 채로 여자의 손은 고삐를 한층 더 굳게 휘어잡았다.
* * *
―콜록콜록콜록!
―우웨에엑, 우웩!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미로같이 얽혀 있던 수많은 도시 출구들이 개미굴이 무너지듯 와르르 사라졌다. 대신 거대한 공동이 만들어지며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 그대로 드러났다.
“맙소사, 이건 대체 무슨……!”
“놈들에게 이런 거대한 파괴 마법을 쓸 실력이 있었던 건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꺼냈지만 네마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반경 킬로미터 단위의 지표면을 날려 버릴 수 있는 폭발 마법은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몇 시간에 걸쳐 주변 마나를 집중해야 쓸까 말까다.
“폭발 마법은 아니고 아티팩트를 쓴 모양이야, 쿨럭!”
상당한 부상을 입었는지 뺨으로 피 두 줄기가 흘러내리는 소피의 말이었다. 주변의 정령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건강을 염려했다.
“소피님!”
“왕녀님, 괜찮습니까!”
왕녀. 정령사로서의 자질만큼이나 소피가 정령사들의 성지이자 본거지인 이곳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 소인족 일곱 왕실의 마지막 후손이란 이유였다.
“내 걱정은 말고, 얼른 물러납시다.”
“우리 정령을 동원한다면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고블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혀를 차면서 네마냐는 왕녀의 부상에 이성을 잃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녀석들은 단순히 고블린 도적 떼가 아닙니다. 어쩌면 인간의 고급마법사가 합류했을 지도 모르고, 이미 적마정석을 가지고 검은 던전을 만들고 있단 말입니다.”
검은 던전. 그 이야기는 인간들 사이에서 주로 공포심을 자아내는 데 쓰였지만 소인족 역시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모든 마나를 먹어치우고 모든 마나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혼돈의 마나. 깨끗한 자연의 마나엔 혼돈이 없다고 믿는 소인족들은 순식간에 사기를 잃었다.
“검은 마나가 설마 돌아왔다는 말인가? 고블린에 의해서?”
“그러니 이미 알고 계신 소피 왕녀께서는 별 이의 없이 물러나기로 하신 겁니다.”
“이런, 제길.”
“그러나 이미 검은 마나가 있다면 바위문 뒤로 피하더라도 시간을 버는 것뿐일 겁니다!”
검은 마나 이야기에 패닉에 빠진 여성 하나가 재차 부르짖었다. 네마냐는 애써 그 이야길 무시하며 소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슴바트 왕에게 연락할 방법은 있습니까?”
“통신구……. 통신구가 있긴 하지만 마나가 급격히 뒤틀려서 모르겠어.”
“비둘기, 전서구는 없어? 비상용으로 한두 마리 정도는 준비해 두라고 하지 않았어?”
아일라가 정신 차리라며 혼란에 총기를 잃은 소피의 뺨을 가볍게 쳤다. 홍조와 함께 살짝 옆으로 돌아간 소피 왕녀는 과호흡증처럼 숨을 헐떡이며 눈빛이 돌아왔다.
“마……맞아. 폭발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잘 찾아보면 될 거야. 지하 문서고와 내 집무실 사이에 있는 작은 공동…….”
“그럼 가자, 여기 있다간 큰일 나겠어. 너도!”
아일라는 손을 붙잡고 흙먼지 구덩이 사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정령사들은 연이어 흙과 물, 바람의 하급 프시키들을 불러내어 흙바람을 뚫고 들어오는 고블린의 창을 막아 내며 길을 뚫었다.
“왕녀님의 가시는 길을 지켜!”
“부탁합시다, 바가반드 경!”
“우와아아!”
한눈에 봐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녹슨 도끼 한 자루에 의지해 시간을 벌려 달려가는 소인족들도 속출했다.
‘분명히 이 정도 고위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탑주…… 페넬로파가 직접 온 건가.’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소피가 보낸 중급 정령을 통해 복면을 쓴 인간들이 다수 접근했다는 걸 알아냈다. 만약 페넬로파가 그 수장이라고 한다면, 그간 일어났던 여러 사건에 대한 추측이 하나의 결론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겠어.”
회귀한 이래로 여러 의문이 쌓여 있다지만 지나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페넬로파의 행동에 대해서만큼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번엔 직접 추궁을 해서라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일라, 소피 씨. 먼저 지하로 가서 전서구를 찾으세요. 저는 이곳에서 흩어진 정령사들을 수습해서 도시 입구로 적들이 오지 못하게 시간을 벌어 볼 테니까.”
“그런, 그건 위험해요. 저들에겐 바가반드 경도 이미 중요한 적일 텐데.”
“그래. 게다가 네가 유독 자청하고 나설 때는 뭔가 말려야겠다는 생각밖엔 안 드는걸.”
하지만 지금도 걷히지 않는 흙먼지 안개 밖에선 치열한 함성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고, 벌써 절정으로 치달을 기세였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돌덩이에 불과한 도시의 입구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망신거리가 될 게 뻔했다. 누구보다 잘 아는 소피가 기꺼이 지팡이를 건넸다.
“……믿고 지휘권을 넘겨드리죠. 이 지팡이엔 제 힘이 실려 있으니 이걸로 호령하시면 모두 알아듣고 따를 겁니다.”
“믿어 주어 고맙네요.”
“안전하다고 믿고 골방에 틀어박히면 될 줄 알았죠. 불과 삼십 분 전만 해도.”
“무사히 사태가 끝나면 다른 결론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무궁무진하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누고, 소피는 아일라의 손에 이끌려 도시 입구를 향해 사라졌다. 혼란의 전장 한가운데 남겨진 네마냐는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폭발의 혼란에서 간신히 벗어난 정령사들과 도시 안쪽에서 급히 지원을 나온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이고 있었다.
“휴……. 바가반드 때보다도 훨씬 개판이군.”
그나마 다행인 건 정령사끼리는 자연 마나의 기운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피의 지팡이를 든 채로 네마냐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자연 마나……. 저번에 흡수한 게 있으니 물의 마나를 쓰면 되겠지. 물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난전 와중에 시스템을 보기 위한 건 아니었다. 물의 기운에 잠자코 집중하자 순식간에 체내의 마나와 뒤엉키며 물의 파동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으음…….”
낯선 느낌에 묘한 신음을 흘렸다. 아픈 건 아니지만 마치 이 순간 물 속에서 자기 자신이 물이라도 된 것같은 해방감이 전해졌다. 정령을 소환하기 직전, 정령계와 인간이 동일시되는 일종의 ‘공조화’ 현상이었다.
[의식이 있는 정령사들은 모두 명령을 들어라. 소피 왕녀께서 곧 돌아오신다. 그때까지 도시 입구로 가는 길은 우리가 최대한 저지한다!]
이의제기도, 불복종의 여지도 없었다. 정령계를 통한 즉각적인 의사 전달. 드러누운 채 고통을 호소하던 이들도, 먼지 구덩이 속에서 멍하니 허공을 보던 이들도 벌떡 일어섰다.
“전투 준비―! 정령을 모두 소환한다!”
시간 낭비조차 없이 빠르게 정비되는 정령사들의 움직임에 깊은 인상을 받는 네마냐였다. 어째서 고블린들이 연합군의 움직임에 만사를 제치고 정령사 추적에 나섰는지, 그 절박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에 놈들을 저지해서 우리가 앞서나갈 초석을 마련하자고.”
혼잣말로 마무리하며 네마냐는 양손에 마나를 힘차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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