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이곳이 이 지하도시의 생존을 책임지는 곳이죠. 마나 농장이죠.”
그저 아일라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소피는 생각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이 도시 공동체의 수장이란 건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농장이라니. 이 빛은 분명 황마정석으로 방출한 빛의 마나가 느껴지네요. 맞나요?”
“정확하군요. 괜히 바가반드 영지를 마정석으로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의 설명에 의하면 아직도 하야스단 땅속에 있는 자원은 고갈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껏 캐낸 양보다 훨씬 많은 채굴량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 프뉴마케르트가 바로 그 대형 광맥 중 하나였죠. 지금까지 봤던 복도나 시설 기억하시죠? 모두 광물을 파내고 남은 구멍이었답니다.”
“아, 그래서 그렇게 쓸모없을 정도로 높이가 컸군요.”
“우리 소인족 조상들이 남겨 놓은 폐광을 후손들이 피난처로 사용하다니, 묘한 운명이죠. 하지만 고블린이 떠오를 걸 몰랐다는 점에서 볼 때 한 번 더 묘한 점이 보인답니다.”
고블린 침공이 처음 시작되던 삼십 년 전, 하야스단의 소인족들이 살던 곳은 오늘날 고블린들이 틀어쥔 북부 영지들이었다.
‘만약 핍박을 피해 정령의 보루로 들어오지 못했다면 정령사는 아예 찾지도 못했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네마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이렇게 농사를 지어 온 겁니까? 외부와의 교류도 차단한 채?”
“정확해요. 오천 명의 도시 주민을 먹여 살릴 식량의 절반 정도를 이런 시설 몇 군데로 충당할 수 있죠.”
“대단하군요. 제국의 탄압 때문이라지만 다른 종족이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제국에도 일찍이 지하도시는 있었다지만.”
“그들의 지하도시는 잠깐 몸을 피하는 용도였죠. 주기적으로 식량과 자원을 반입해야 하니 자급자족도 불가능하고.”
그러더니 소피는 이쪽과 눈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더 정확하게는 제국의 탄압보다도 고블린의 추적을 막기 위해서지만요.”
“고블린이 정령사에 눈독을 들였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나 어째서? 대외적으론 정령사의 존재 자체가 극비사항일 텐데요.”
정령사 집단이 연합군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건 태부족한 마법사 전력을 메꾸는 용도만은 아니었다. 고블린과 인간 사이엔 지난 세기에 들어와 교류가 줄어든 상태였다. 이미 옛 영광을 잃고 인간 사회에 숨어든 소인 종족의 정령사 집단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극비가 아니라 원래대로라면 고블린이 우리의 존재를 알 이유 자체가 없었겠죠. 하지만 놈들이 우리 존재를 알고 있는 건 확실하죠.”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요?”
“고블린들이 최근 정령사 공동체가 관리하는 광산을 습격하는 빈도가 늘고 있어요. 다른 마정석 광산도 물론 크게 늘었다지만 우리 광산들은 좀 숨겨져 있거든요.”
인간들 사이에서도 숨겨져 있는 정령사를 마치 추적하는 듯한 움직임. 그런 수상쩍은 움직임은 네마냐도 일찍이 알고 있는 종류다.
“설마 놈들이 이 지하도시까지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아일라가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며 으스스한 표정을 지었다. 공동체의 간부 중 한 사람이 웃으면서 괜한 걱정이라고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광산이야 그렇다 치지만, 지하도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이곳엔 사람이 오가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말을 하다 중간에 끊은 그가 이쪽을 슬쩍 돌아다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인간을 안에 들인 일이 없었으니까요. 적어도 도시가 만들어지고 지난 삼십 년 동안 발을 들인 인간이라면 영주님 한 분뿐입니다.”
“보안에 대한 자신감은 확실하군요.”
아일라의 말에는 어쩐지 뼈가 실려 있었다. 그리곤 소피와 의미심장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소피는 멋쩍은 표정으로 해명에 나섰다.
“오만하다거나 방심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 그래도 우리가 제국이나 고블린에게 요주의 대상이란 건 잘 알고 있어. 방금 당신들이 들어오면서 봤던 겹겹의 안전장치도 그 때문이었고.”
“하지만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않아? 일단 누군가 알고 있다면 새나갈 수 있단 건데.”
“누구. 슴바트 군주? 에이, 그 사람은 우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제국과 고블린에 원한이 깊은 사람인걸.”
“글쎄요. 제가 보기로는 제국보다도 믿음이 안 가는데…… 어쩔 수 없는 편견일까요.”
제국이 고블린과 손잡고 하야스단의 내전에 개입하면서 어그로는 몽땅 제국에 쏠렸다. 이건 돌이킬 수 없는 피해의식 중 하나다.
‘그렇다고 슴바트의 어그로까지 없었던 게 되는 건 아니니까.’
제국이 자신을 배반하고 고원을 석권하자 슴바트는 거침없이 고블린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 동맹은 제국군을 격파하며 고원의 절반을 장악할 뻔했다. 고블린이 원래대로 슴바트를 공격하면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을 뿐.
“그 시절 책은 대부분 출판금지나 회수를 당했을 텐데 용케도 읽으셨군.”
“부모님이나 경험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죠.”
책에 대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으니 적당히 대화의 결말을 흐렸다. 시스템이 하야스단의 역사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보 제약이란 건 의미가 없다. 물론 그런 정보를 시스템이라고 자신이 부르는 존재가 준다는 건 무언가 미션이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적어도 지금까진 놈들이 모르는 건 확실하군요. 게다가 미크라야크의 영지 깊숙이 있는 곳엔 고블린들도 들어오기 쉽지 않을 테니까.”
네마냐는 한발을 내디뎌 농장을 환하게 밝히는 중인 마정석으로 손을 뻗었다. 노란빛을 환하게 내는 황정석. 오랜 연구 결과 마공학자들은 이 노란 마정석의 빛이 태양의 그것과 유사하단 것을 알아냈다. 식물을 생장하게 돕고 사람에게 따뜻한 기운을 보내는 그 빛 말이다.
“조심하세요. 아마 아시겠지만 체내의 마나에 닿으면 복잡하게 설계된 마나 장치가 고장 날 수 있어서요.”
“그럴 걱정은 할 필요도 없어, 소피. 저 녀석은 특이하게 마정석의 마나로부터 거부를 당하지 않더라고.”
“인간이 그게 가능하다고? 정령사도 아니고?”
“그러니까 말이지. 나중에 사태가 정리되면 정령술이나 좀 익히게 할까 생각이야.”
“고블린을 막아 냈다더니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은……. 대체 그걸 어떻게 하신 거죠?”
“하하, 그 원리를 알았으면 벌써 대 고블린용 마법무기라도 만들어 드렸을 겁니다.”
마정석 장치를 만지려는 모습에 걱정이 가득한 소피의 제지. 네마냐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렸다. 아일라의 말대로 자신이 만진다고 체내 마나에 격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진 않겠지만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손을 거두는 네마냐에게 다가온 소피가 이제 소개는 대충 끝났다고 알렸다.
“지하도시라고 해 봐야 평범한 신전이나 주택가, 상점, 목욕탕 같은 건물이 지하에 구축된 정도죠.”
“그럼 광산을 좀 봐도 될까요? 지금도 채굴 중이라고 아까 들은 것 같은데.”
“물론이죠. 바가반드의 그 사라타 광산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요. 설마하니 그 폐광에 조상들이 특별히 남겨 둔 비밀이 있을진 몰랐지만.”
역시나 이들에게는 사라타 광산이 보통 의미로 와닿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직접 그곳을 살펴볼 수 있게 안내하죠. 알파급의 순수 마정석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광산일 테니.”
“말씀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뛰는데요?”
소피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지하도시의 맨 아래층에 있는 마정석 광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입구 쪽의 한 시설에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정령을 이용한 듯 채굴된 원석이 물로 깨끗이 씻겨지고 잘게 쪼개지는 중이었다.
“보다시피 우리가 인력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이런 식으로 정령을 최대한 활용하곤 있어요. 그나마 마정석으로 마법 무기를 조합해서 수출하고 있으니까 버티고 있긴 합니다만.”
“저 정도로 정령을 동원하려면 그래도 정령사가 적지 않겠는데.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
소피는 굳이 아일라의 말에 얼굴을 붉히거나 부정하려 들진 않았다.
“맞아. 마나량의 제한에 거의 매이지 않는 정령사라곤 해도 정령 소환 자체는 한계가 있죠. 정령 그 자체가 정령사의 마나에 응해 자연마나가 모인 결과물이니까.”
“도시와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정령사 보루의 힘 대부분이 사용된다는 거군요. 일정 공간 안에선 일정량의 마나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넘어설 수 없는 법칙이니까.”
1,500명이나 되는 정령사 집단이 고블린에게서 살아남은 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그간 제국의 압박을 받느라 틀어박힌 정령사 집단의 실상도 처참했다.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는 B급 마정석을 캐고 있다지만 그게 실제 정령사 전력의 강화로 이어지진 못하는 것이다.
“아마 고블린 전쟁에 우리 집단이 참여하길 바라셨을 텐데, 실망이 크시겠네요.”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차를 우려낸 소피의 첫마디였다. 살짝 쇠 비린내가 찻잔에서 진동했다. 광산을 다녀온 탓이라 애써 치부한 네마냐는 소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존재 자체가 무사하다니 그것만으로 다행이죠. 빠른 시일 안에 정령사들도 전선에 합류해 주었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아까 아일라가 대충 얘기는 해 주었답니다. 제국 내부에서 이견은 있어도 반정령사 규제를 거둘 생각은 없다고.”
“대신 제국군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끌어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말씀드려도 될까요?”
제국군 이야기에 그간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던 정령사 간부들은 슬쩍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소피도 살짝 입가를 실룩였다. 거리끼는 모양이지만 잠시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일단 들어 봅시다. 제국의 이야기 자체를 들어야 한다는 게 짜증은 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벌어진 균열은 아직도 분명했다.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건 당장은 눈앞의 고블린 문제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매개로 묶어 줄 수 있는 게 바로…….
‘나의 역할이겠지.’
총사령관 니케타스가 독자적인 권한으로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영역, 정령사 집단의 비공식적 참전.
‘유용한 마법사 전력이 절대 부족한 암피에르 동맹군에겐 절대 없어선 안 될 전력이지. 어떻게든 부정적인 입장을 선회시켜야 할 텐데 소피 씨는 괜찮아 보인다지만 나머지가…….’
아니나 다를까 니케타스의 제안을 확인한 소피가 썩 밝지는 못한 표정으로 꺼낸 이야기는 분명했다.
“그 정도면 적어도 제국군 수장이 어떻게 우릴 배려하는지는 알겠어요. 적어도 그간 멸절이니 교화라느니 떠들던 마법원 사람들보단 훨씬 더 교양이 있군요.”
“그럼 제안을…….”
“물론 상대가 양식이 있어서 마음이 내킨다고 제안을 받아들일 수만은 없죠. 안타깝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겠네요.”
“소피 경? 고블린에 대한 원한이야말로 소인족이 살아남아 움직이게 하는 감정 아닙니까?”
“맞아요. 놈들이 우리 고향을 불사르고 조상의 땅을 더럽힌다는 걸 잊어 본 소인족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기회만 닿는다면 맨몸에 도끼 한 자루라도 끼고 나가겠죠. 허나.”
소피는 손을 들어 자신의 좌우에 늘어선 사람들을 가리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이들 모두 실은 이곳 지하도시 하나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처지죠. 네마냐 경께서도 영지를 마정석 하나로 일으켜 세우셨지만, 사실 그러기 위해서도 여러 「운」이 필요하죠.”
운.
네마냐 자신에게도 만약 사전에 정한 계획대로 광산 임대나 국왕과의 면담이 성사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성국의 군대가 제때 바가반드로 진입하지 않았다면? 보에몽의 상단이 헌신적으로 자금과 자원을 조달해 주지 않았다면?
‘정작 땅만 받았을 뿐이지, 지원조차 없었을 테고. 슴바트 군주도 정말 자신이 위협이라도 받았다간 서슴없이 내버리겠지. 이곳도 정말 아슬아슬하군.’
이곳에서 거두는 마정석은 채굴량은 상당해도 품질은 다소 낮았다. 원석으로도 비싼 알파급과 달리 베타급 마정석 원석은 가공하기 전에는 그 이하 등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처럼 깨트리기 어려운 표피 속에 많은 마나가 들어가 있으니 베타급은 실제 가치보다 가격이 높지 않아. 가공 비용이 알파급에 비해 많이 드는 탓이지.]
아일라가 앞서 움직이면서 살짝 귀띔해 준 내용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한데.’
만약 베타급 마정석을 가공해서 공급하는 시설만 충분히 갖춰도 이곳의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도시가 자립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정령사의 성채는 그 자원으로 막 전쟁 모드를 켜고 있는 하야스단에 큰 도움이 될 터.
“필요하다면 저라도 적극적으로 돕고는 싶은데, 아시겠지만 이곳의 영주가…….”
“알아요. 슴바트 왕이 있는 한은 제안을 할 이유도, 제안하더라도 승낙이 날 리도 없죠. 바로 그 때문에라도 이곳 사람들이 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달까.”
“휴…….”
어깨를 펴면서 한숨을 쉬었다. 설사 슴바트 왕이 미쳤다고 갑자기 허락한다 해도 바가반드 영지 역시 지금 이상으로 지출을 할 여력은 없었다. 미하일이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그 정도는 네마냐 자신도 잘 안다. 가장 완고해 보이는 난쟁이, 아니 소인족 영감 두 명은 거침없이 아픈 곳을 찔렀다.
“정령사 규제도 풀리지 않았고, 지원 물자나 보조금이 지급되는 것도 아니란 거군요. 그럼 대체 우리가 이 전쟁에 끼어들 이유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하야크 왕국이 무너질 때 이용당했던 것처럼 또 놈들 손에 놀아나는 겁니다.”
소피 곁의 이름 모를 정령사들도 제각기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을 짓거나 작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소피는 난처한 표정과 함께 짧은 답을 남겼다.
“미안해요. 어쩌면 이번에는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초빙했는데 정작 또 제자리로 남겠군요.”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인정할 수밖엔 없군요. 고블린과의 싸움이 어떻게 돌아갈지 이제 그게 걱정입니다만…….”
“저희도 이게 진심은 아니라는 건 알아 주세요. 대신 용병 형식으로 조금이나마 정령사를 파견하도록 하죠.”
그나마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의 위로였다. 여기까지 고생해서 온 것치곤 보잘것없는 보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리고 알림도 그걸 뒷받침하는 모양이다.
[아쉬운 결과?]
[정령사 성채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 은둔에 빠져든 집단을 움직이기엔 제반 여건이 너무 좋지 않다는 것만을 확인했다. 이들이 움직일 수 있으려면 더 확실한 유인책을 주거나 임박한 위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째 제목이 물음표로 끝나는 거지? 이게 임무 끝이라면 미션 완료로만 나와야 할 텐데.’
그 의문을 풀 수 있을 시간은 곧 다가오고 있었다. 급하게 누군가 회의장 문을 두드리며 모든 제반 여건이 변했음을 알렸기 때문이다.
“아슬라니아 님, 수문장의 연락입니다! 도시 근처에서 수상한 마나의 변동이 감지됩니다. 보초를 세웠던 정령도 갑자기 날뛰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 산골짜기에 그게 무슨 소리야?”
“마나의 변동…… 이건 설마?”
아일라가 소인족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그 단어를 짚어냈다. 네마냐는 그 시선을 받아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낭패를 겪어 봤던 자신들에겐 익숙한 느낌이었다.
“우리의 결의를 시험하러, 그분들이 왔군요.”
그리고 찌르르 하는 느낌과 함께 가슴 속으로 어쩐지 모를 낯익은 마나의 파동이 전해졌다. 익숙한 느낌과 이 의미를 모를 슬픔의 감정까지…….
“어쩐지, 오늘은 뭔가 중대한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당장 비상사태를 알리고, 가용인원 전부 정문으로 모이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정령사들은 재빨리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 이상 갈고 닦아온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이 잰걸음으로 도시 상층을 향하는 걸 지켜보며 네마냐 역시 아일라를 툭툭 치고 말을 건넸다.
“우리도 따라가죠.”
“괜찮겠어? 전투 준비는 따로 하지 않았는데. 예비용 물자도 없어.”
“제 진정한 힘은 순수한 마나력 자체란 걸 알잖아요? 언제는 넉넉하게 싸우기라도 했나요.”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도 고블린과의 싸움은 어렵게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는 이곳에서 무언가 얻을 것을 좀 더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못 얻더라도 고블린 족장이 원하는 걸 내줄 순 없죠. 놈들에게도 낭패를 느끼게 해 주죠.”
그 시초를 알 수 없을 까마득한 원시림과 계곡에 묻혀 있던 정령사의 성채. 바로 이곳에서 제2 전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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