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다들 오랜만이죠? 인사해요.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황금손의 후예.”
“설마 아일라 님인가요, 이분이?”
“역시나. 소인족 사이에선 유명인사라니까.”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키가 작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아일라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런 놀라울 정도의 관심은 그로서도 어색한 것이었다.
“어, 아…… 음. 반가워요.”
세상에 이렇게나 어색하고 민망해하는 아일라의 인사말이라니. 아마도 우리가 지금 먼 엘레기스까지 온 걸 모를 하라드나 미하일이 제일 신나서 떠들어댈 일화일 것이다.
‘인간들과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구나, 아일라. 동포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건 익숙하지 못한 걸까.’
쑥스러워하는 아일라라니. 피식하는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헌데, 저분은 누구신지…….”
“보통의 인간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같이 들어오신 겁니까?”
그러나 웃음짓는 소리에 네마냐를 돌아본 소인족 정령사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난쟁이, 아니 이들의 공식 명칭인 소인족은 하야스단의 옛 주인이었다.
‘천 년 전 마지막 소인족 고왕(High King)이 인간에게 양위했을 때는 이렇게 관계가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리석은 의문이다. 한 자손인 인간들끼리도 채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갈등이 벌어지는 게 인간의 도리다. 그게 특별히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니고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너무 경계하지는 마세요. 바가반드의 영주. 다들 한 번쯤 들어 보셨죠? 그 우레이미야의 음모를 곳곳에서 분쇄했다는 그 소문요.”
“바가반드? 다르빌의 그 영웅?”
영웅이라. 그 소문이 퍼지고 퍼지다 못해 지하세계에 묻힌 이들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민망해서 일부러 요즘엔 다르빌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처럼 적대적일 수 있는 상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보라니 다행이지.’
명성이라는 게 드디어 제 역할을 하는 것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남자 하나가 몇 발짝 다가오더니 별안간 손을 덥석 잡았다.
“이야, 다르빌의 소영웅을 직접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불 정령에 특화된…….”
“저랑도 악수 좀 해주시죠, 각하.”
“편하게 말씀하세요, 하하.”
경계를 푼 몇 명의 정령사가 다가와 선뜻 손을 내밀었다. 소인족이 인간을 두려워하는 이상으로 고블린을 원수로 본다는 말은 정확했다.
“프뉴마케르트에 오신 걸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영주님. 제국법에 따라 엄격하게 금지된 정령사의 성채까지 찾아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제국법은 제국에나 쓰라고 하죠. 여러분이 하야스단의 맏이고 우리는 둘째나 셋째 정도 될 겁니다.”
소피 아슬라니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정령사는 도시의 입구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곳이 전설에 돌던 지하도시로군요. 설마 현실에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전설이란 건 다들 어느 정도 근거가 있고 그 증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졌을 뿐이랍니다. 그 실체는 그저 피난민의 난민촌일 뿐이죠.”
소피는 중간중간 돌로 막힌 막다른 곳으로 인도했다.
“입구가 막혀 있는데요?”
“걱정할 것 없어. 정령사에게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으니까. 지켜봐.”
아일라의 말대로였다. 소피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육중해서 장정 네 사람이 밀어도 꿈쩍 않을 바위가 천천히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원인은 네마냐 자신도 알 것 같았다. 마나의 파동이 아주 미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탐지]
네마냐는 본능과도 같이 반자동적으로 탐지를 발동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소피로부터 마나가 회오리치듯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마법과는 다르군. 인위적이고 마나가 방출되거나 조직되는 게 아니라 산들바람이라도 불 듯이 편안한 모습이지. 그렇다는 건…….’
정령의 흔적이었다. 하라드가 일찍이 바람의 정령을 불러냈을 때 느꼈던 그대로의 감각이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하라드의 프네우마는 다른 사람도 분명히 형태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랄까.
“그런데 정령도 형태가 있을 텐데 저한텐 보이지 않네요.”
“마법사가 쓰는 것만 보신 모양이군요. 정령사도 원래는 드러내놓고 쓸 수 있었을 때는 그랬답니다.”
소피의 이야기는 어딘가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정령사가 비밀스럽게 정령을 사용하도록 연습해야 했던 이유, 그것이야 뻔했다.
“다 듣지 않아도 안타까운 일이군요. 지하도시를 만들게 된 이유와 같을 테니.”
“후후……. 인간에게서 그 정도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언젠지 기억이 안 날 정도네요. 그래도 이젠 이 지하도시가 훨씬 익숙하죠. 강력한 장점도 있고.”
“장점?”
네마냐가 되묻자 소피는 입을 가린 채 슬쩍 웃었다. 아일라는 나중에 자세하게 얘기해 주겠다며 우선 길부터 재촉했다.
―저벅저벅.
바위로 단단하게 봉쇄된 도시의 입구는 연달아 다섯 곳을 지나야 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입구는 마나와 정령으로도 문을 열 수 없어 오직 안쪽에서 열어 주어야만 하는 기계 장치였다.
“암호! 가장 깊은 곳에.”
“……마나의 비밀이.”
“어서 오십시오, 소피 님.”
―쿠르르르릉!
인사말과 함께 육중한 바윗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나자 황소 몇 마리가 낑낑대며 돌리고 있는 거대한 축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 철쇄와 도르래 등을 활용해 최후의 장벽을 만든 느낌이었다.
“어지간한 요새보다도 튼튼하네요. 고블린이 쳐들어온다 해도 찾는 것조차 어렵겠어요.”
“그럼요. 도시의 최종 출입구는 이곳 한 곳뿐이고, 사백팔십 곳이나 되는 외부 출입구는 적절하게 위장되어 있으니까요.”
처음 들어온 입구에서 네 개의 문을 지나는 동안에도 통로는 좁았고, 높이는 인간의 키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섯 번째 대문을 통과하자, 잘 정비된 지하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프뉴마케르트군요. 수많은 방에 넓은 공간…… 뭣보다 빛과 물이 이렇게 흔하다니.”
“마정석 때문이야. 깊은 협곡에 도시를 지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거든.”
아일라는 자신의 집안인 하스페다가 어째서 황금손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내력까지 아우르는 긴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바가반드 영주의 방을 확인해 봤습니다만, 쥐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통신구에선 다시 무어라 나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보통의 하야스단 말도, 제국의 방언도 아닌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방을 확인해 보기엔 성국의 기사들이 철통같이 순찰을 하는 중이라…… 네, 넵.”
이 주변은 오직 성국의 귀빈이나 고관들이 필요할 때 숙박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순찰 병력 외에는 그리 눈치 볼 것도 없었다. 복도를 걷는 기사는 누가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닌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잠깐 이곳 기사들에게 물어보니 상황이 소강돼고 나서 어디론가 떠났다고 하더군요. 대충 사정을 아는 듯한 녀석들은 제법 멀리 떠났으리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도통 올 일이 없어 보이는 통로의 한쪽 끝. 조금 안심한 모양으로 한숨을 내쉰 갑주 차림의 사내는 후드를 걷고 한숨을 쉬었다.
“조만간 무슨 방법을 써서든 방안에 침투해 볼 기회를 찾겠습니다. 네, 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대군주께선 어쩌다 갑자기 작전을 중단하신 겁니까.”
빠르고 카랑카랑하게 감각을 자극하는 목소리. 흠칫하며 그 목소리로 튀어나오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의문의 기사.
“그런……. 정말 미크라야크부터 공격하실 생각이란 겁니까.”
다시 무어라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극비사항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에 혼쭐을 낸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당분간 이쪽 전선은 대치 상태가 되겠군요. 저들도 조금 긴장을 풀 겁니다. 특히 제국군의 경우 군단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더군요.”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의문의 기사는 모든 보고와 지시 수령을 마치고 통신을 종료했다.
“통신 종료.”
―위이잉.
제법 상당한 시간 동안 작동하느라 발열을 내고 있던 장치가 멈추고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정석을 통해 끊임없이 장치로 집중되던 마나는 서서히 노란 빛의 발광을 멈추고 풀리는 소리를 냈다.
“후…… 진땀 뺐군. 역시나, 이래서 중간에 간을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니까.”
기사는 통신구를 허리의 벨트에 끼운 뒤 망토를 펼쳐 비밀스럽게 덮었다. 기사들 가운데 마법을 배워 마법사 면허를 딴 사람들도 있다지만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주요 요인들이 머무는 숙소에 통신구를 반입했다니 대번에 의심을 하겠지. 뭐, 나라면 크게 문제까지 되진 않겠지만.”
기사는 자신의 팔꿈치에 댄 갑주의 문양을 살펴보았다. 아주 새까만 색의 몸통과 아주 작게, 그러나 색의 배치 덕분에 눈에 띄는 흰색 뿔. 검은 염소였다. 마나의 원천 중 하나인 아라가트 산의 영물이랄까.
“거기, 누구십니까? 왜 이 구역을 배회하고 있습니까?”
“이런.”
곧 순찰하던 병사 하나가 기사를 붙잡고 나섰다. 살짝 움찔한 기사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뒤로 돌았다.
“성내의 길이 복잡하군! 여기가 출입 금지 구역인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대종정 예하의 명에 따라 이 구역은 성국의 일급 귀빈에게만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통행은…….”
“아, 미안하네. 일단 나도 숙소를 받으러 온 사람이긴 한데.”
그러면서 기사는 팔꿈치의 문장과 그 손에 든 위임장을 들어 보였다.
“아! 암피에르에서 오신 대표의 수행원인가 보군요. 하지만 제가 아는 것으론 기사님의 숙소는 이 건물이 아닙니다.”
“아아. 그럼 혹시 미안하지만 숙소를 알려 줄 수 있을까>”
“그럼요. 따라오시죠.”
성녀 지정 일급 귀빈이라. 정작 암피에르 방위동맹 조약의 당사자 중 하나인 마탑조차 받지 못한 대우다.
‘고블린이 그쪽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설마하니 그걸 거슬려 했다니.’
최근 제국의 내부 통신망에서 ‘정령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건 극비사항이었다. 물론 비밀이란 건 새어 나가라고 있다는 농담도 있지만 말이지.
‘고블린이 의외로 이곳저곳 깊은 곳에 암약하는 모양이로구나. 놈들이 지난 십 년을 그냥 보낸 게 아니었어. 정령사 논의가 나오자마자 그걸 알아차리고 대비한다니.’
병사를 뒤따라 걷는 발걸음 소리가 온통 흰 대리석으로만 이루어진 회랑에 울렸다. 그 박자에 맞추며 마법사의 생각은 끝이 없었다.
“이야, 그래도 사절께서 이번에 좀 소강상태일 때 오셔서 다행입니다.”
“뭐, 그렇지요.”
병사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기사는 상투적으로 받아넘겼다. 하지만 병사는 이야기를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그래도 최근 정령사를 전쟁에 투입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시끄러웠거든요.”
“결국엔 투입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 난 것 아니었던가?”
정령사는 결국 전선에 뛰어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피해의식이 큰 이 소인족 후손들은 협조를 꺼렸다. 제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은 정령사의 힘이 마법사 집단에 해가 된다며 징집을 꺼릴 것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바가반드 백작께서 스스로 최소한 정령사 집단과 연락을 이어 보겠다고 제안했거든요.”
“바가반드?”
기사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병사는 그렇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최근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은 것도 그것과 관련되었을지 모른다더군요. 아, 그래도 이건 가능한 외교나 군사 쪽 관련자 외에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 딴엔 정보 보안을 신경 쓴 모양이지만, 이미 보안의 구멍은 상부에서부터 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블린의 대군장이 뜬금없이 정령사를 처리하러 간다고 할 수 있을까.
“방에 가는 대로 마탑주께도 연락을 드려야겠군. 안 되겠어.”
앞서가는 병사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기사였다. 이중간첩을 자처하는 그 자신도 아직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심각한 판이 벌어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정령사 부대를 사이에 두고.」
정확히 이 이름으로 된 임무가 아무런 언질도, 힌트도 없이 네마냐에게 도착한 건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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