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디에 사는 건데요?”
“어디냐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란히 짐을 꾸려 어깨에 멘 아일라가 무슨 소리냐는 듯 멍청하게 이쪽을 바라본다. 뭐지? 내가 엉뚱한 질문을 한 건가? 하지만 정령사 집단이나 대표를 만나야 한다면 어딘가 장소는 있을 게 아닌가.
“아니, 그러니까 아일라의 친구 정령사를 만나러 가려면 어디로 가긴 가야 할 것 아녜요?”
“아, 너는 그러고 보니 정령사를 딱히 만나 본 적도 없었겠구나.”
“네? 정령사도 어차피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 아니었어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정령사를 찾아가는 방법은 직접 찾아가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거든.”
알쏭달쏭한 아일라의 말에 네마냐는 이해는커녕 괜한 궁금증만 더 커졌다.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는 듯 아일라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아무리 지금 교착 상태라지만 전쟁 중이잖아. 그렇게 함부로 전장을 떠날 수는 없지.”
“그건…… 유리병? 포션인가요?”
아일라가 꺼내 든 것은 작은 약병이었다. 마법계에 영향이 큰 앙글리아 방언으로는 포션이라고 부른다. 이쪽이 현대 영어와 그나마 비슷해서 네마냐에겐 더 입에 익은 편이다.
“음, 일종의 포션은 맞겠지? 내가 말한 그 친구가 전해 준 거야.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도구거든.”
“연결해 준다고요?”
“그래. 정령사는 정령이 있어서 마나 자체는 쓸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것도 아냐. 그게 무엇일 것 같아?”
답이란 아주 간단했다. 마법 기초이론에서도 예시로 들고나오는 내용이니까. 마나의 흐름 자체를 정교하게 조직해서 복잡한 효과를 원하는 대로 일으키는 것이 마법의 가장 강력한 장점이다.
“정령은 원초적인 마나를 순수하고 강하게 이용하는 덴 편하지만, 인위적으로 마나를 배치하는 건 불가능하죠. 정령의 존재 자체인 마나의 질서를 부정하는 일이 되니까요.”
“공부 열심히 했네.”
네마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아일라는 유리병에 찰랑거리는 하얀 액체를 흔들었다.
“바로 그런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령사들이 매달린 게 약초학과 연금술이지. 자, 이제 그 결과물을 한번 보라고.”
말을 마친 아일라는 비싼 병일 텐데도 아낌없이 내던졌다. 대범한 거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지만 포션을 땅에 던져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네마냐는 기겁할 뿐이었다.
“아일라, 뭐 하는…….”
“자, 어때!”
―지이잉.
마나가 인위적으로 배치될 때 나는 울리는 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앞에는 문의 모습을 한 허상이 떠올랐다.
“이게…… 뭐죠? 이세계로 가는 문인가?”
“뭐? 푸흡, 소설 좀 그만 읽어. 이건 마나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성질이 있는 허브를 농축해서 만든 포탈 포션이라고 하지.”
“처음 들어 봤어요.”
“물론. 정령사들은 이 비밀이 누설되면 당장 또 다른 탄압이나 공격을 받을지 모르니까.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 뭐랄까 비밀 같은 거지.”
말을 마치더니 아일라는 네마냐의 팔을 꼭 잡은 채 문을 열었다. 문 모양처럼 생긴 구멍 안쪽으론 아주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시야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고. 어제 얘기해 줬던 내 친구, 정령사 소피를 소개하지.”
“소피. 소피란 분이군요.”
낯선 장소를 향해 네마냐는 어렵사리 발을 떼어 들어섰다. 누군가 그 장면을 지켜봤다면 대번에 불법 마법 혐의로 경비대에 고발해도 할 말이 없었겠지.
[마법성의 인가를 받지 않은 정령 소환, 사제 마법 약물의 사용은 위험성으로 인해 금지된다. 적발 시 제국 마법성이 외국 문제에도 개입할 수 있다.]
마법 윤리를 배우느라 들여다봤던 초심자용 교재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에 휩싸인 건 아니었지만 찝찝하긴 한지 네마냐는 연신 뒤를 돌아봤다.
“저 문은 안 닫아도 되겠어요?”
“우리가 돌아갈 때 써야지. 닫아 버리면 이동할 때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안 간다.”
“여기가 어딘데요? 가상의 공간인가요?”
주변을 휘휘 둘러보지만 어떤 곳인지조차 단서를 알 수 없었다. 온 천지 사방이 나무로 빽빽하게 뒤덮여 낮인지 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여기? 듣고 놀라지나 말아. 어디냐면…….”
“네?”
아일라가 소곤거리며 알려 준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네마냐 자신이 아는 한 자신의 귀에 들린 지명이라면 다르빌에서 거의 80km 이상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엘레기스 동쪽의 협곡지대라고요?”
이름을 다시 되짚었다. 그 이름은 거의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선 특히나 아예 전생의 생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럼 정령사들은 하야크의 옛 왕세자인 현 미크라야크 군주에게 의탁한 거였군요.”
“그래. 제국에 가장 반항적이면서 외부에 가장 폐쇄적인 영주. 슴바트 군주야말로 제국의 탄압과 고블린의 추적을 피할 그늘이었지.”
“그런 일이…….”
사건의 규모가 무시무시한 정도로 커지자 네마냐는 조심스럽게 나직한 소감을 전했다. 아일라는 무슨 느낌인지 이해가 간다며 실소를 지었다.
“웃긴 일이야. 뿌리를 헤쳐 올라가면 결국 마나를 어떻게 쓸 것이냐의 관점 차이에 불과할 뿐인데. 서로 죽이니 살리니 하고.”
정령술은 하야크 지방의 전통적인 마나 활용법이다. 동방의 유목민이 창안한 동방형 마법은 천연 마나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곤 그 마나를 집중시킨 불안정한 상태를 폭발시켜 활용했다.
“정령사들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긴 했지만, 미크라야크라.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네요.”
“하긴 지금도 제국에서 가장 힘이 강한 게 마법성이라지? 쉽지 않을 것 같긴 했어.”
“그렇지만 제게 소개를 하기로 하셨네요. 소피라는 친구분 역시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 같은데.”
이제 아일라와 일한 지도 어언 한 해가 다 되어 간다. 그러나 아일라 스스로 자신이 정령사와 지인이라거나 소피라는 친구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었다.
“난쟁이는 난쟁이들만의 끈끈한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지. 그만큼 너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내 생각도 있는 거고.”
문득 그런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아일라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 내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이제 됐으니까 얼른 들어가자. 녀석의 집은 분명 여기 근처에 있다고 했으니까.”
그리곤 성큼성큼 수풀을 넘어 계곡 근처로 넘어간 아일라는 두 손을 모아 입에 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소피 이 녀석! 얼른 나와! 늦게 나온 시간 만큼만 맞을 줄 알아!”
“아일라. 아무리 친구래도 그건 좀…….”
하지만 도발 효과 하나만큼은 분명하리란 건 틀림없는 이야기였다. 아일라의 소리가 깊디깊은 계곡을 타고 사방팔방 메아리쳐 흘러갔다.
“아일라. 정말 그 사람이 여기 사는 건 맞아요? 도저히 사람 살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순간에도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주변 환경은 강물이 흘러간다. 근처 여울에선 가끔 짐승들이 목이나 축이러 오는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런 것 같아? 정령사들도 그만큼이나 사람 걱정하지 않을 곳을 찾아야 했지. 하지만 생각보다 여기가 무시무시하단 걸 알게 될 거야.”
―삐걱!
갑자기 경첩의 쇳조각이 지르는 비명이 두 사람의 대화를 뚫고 들어왔다.
“우왓!”
하필이면 출입문 중 하나가 네마냐 발밑에서 열릴 줄이야. 깜짝 놀라 나동그라지는 와중에 아일라는 천연덕스럽게 구멍을 찌푸린 눈길로 들여다본다.
“으아, 뭐가 이렇게 무거워?”
“너…… 소피 맞지? 소피 아슬라니아?”
“내 이름을 어떻게. 설마 아일라? 아일라 하스페다?”
“여기에 있는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언제 찌푸렸냐는 듯 순식간에 화색이 된 아일라. 억센 팔로 거의 끄집어내듯 누군가를 지하 통로에서 끌어냈다.
“아야야. 천천히 해. 어디 안 가니까. 팔 떨어지는 줄 알았네.”
“엄살 부리긴.”
“근데 어쩐 일이야? 슴바트 대공 꼴 보기 싫다고 십 년 전에 뛰쳐나가곤 잘 오지도 않더니.”
그렇게 지하를 벗어나 지상의 빛에 익숙해진 누더기 입은 사람은 마침내 이쪽을 발견했다. 네마냐는 슬쩍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혼혈이 많이 진행된 아일라와 달리 소피라는 사람은 조금 더 소인족 혈통 본류에 가까운 모양이다. 아일라에 비해 키가 꽤 작았다.
“네, 안녕하세요. 네마냐라고 합니다.”
“네마냐 나자리안. 얼마 전에 바가반드에 새 영주가 들어섰단 소식은 들었지? 아무리 사회 부적응자여도 그 정도는 알 것 아니야.”
‘정말 친하지 않으면 건네지도 못할 농담이군. 사회 부적응자라니.’
아일라의 가끔 급발진하는 언어 구사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줄 알았더니, 아일라가 자제한 덕인 모양이다. 친구와의 대화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한참 지난 이야기를 떠들더니 정령사로 자신을 소개한 소피가 다시 이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래, 바가반드 영주라면 몇 번이고 들어 봤죠. 이곳 사람들 중에 지난번 고블린 습격을 피해 이쪽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거든요.”
“사람들 중에요?”
다시 한번 되물었다. 주변에 온통 원시 그대로의 자연림인데 어떻게……. 그러자 소피가 손뼉을 치면서 화색을 보였다.
“참, 여긴 처음 오셔서 모르시겠구나. 제대로 보여 드려야지.”
“괜찮겠어? 보통 때 인간이라면 질색하던 너희 정령사들일 텐데.”
“이분이라면 괜찮을 거야. 안 그래도 나코르잔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을 정도라 우리도 낯설지 않고.”
“나코르잔이요?”
직접 그곳에 다녀오곤 오랜만에 듣는 신기한 소식에 저절로 반응이 튀어 나갔다.
“나코르잔, 아니 이제는 오크 자유국이라고 해야 하나. 그곳과 인간이 함께 손을 잡고 고블린 군단에 맞서도록 도와주셨다죠.”
“그렇지. 거기다가 지금 인간 중에선 누구보다도 진정성 있게 고블린과 싸우는 데 집중하는 사람이라고.”
평소에는 활동에 대한 평가를 거의 내리지 않던 아일라가 열심히 그간의 활동을 열거하려 들었다. 정령사 소피는 손을 들어 그런 아일라를 가로막았다.
“알아. 네가 아는 소식은 우리도 거의 안다고 생각하면 돼. 우리는 어찌 됐건 고블린이야말로 진정한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고블린의 진정한 적이라면 우린 친구가 되는 거지. 그렇지 않을까요, 영주님?”
확신에 찬 표정으로 네마냐도 화답해 주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제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일라 씨의 친구면 제게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니까요.”
“제법 너스레 있는 영주님이시네. 보통 귀족들이라고 하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양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외적 존재지, 예외적인.”
아일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소피.
“하긴. 그러니까 너 같은 유목민이나 다름없는 녀석이 계약에 바짝 묶이길 자청하는 거겠지.”
그리곤 다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마냐 영주, 다소 뜬금없이 만나긴 했지만 우리 도시를 방문해 줘서 고마워요.”
“도시……. 정령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인가요?”
“그렇답니다. 있을 수 없는 도시. 하지만 분명히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쩌면 앞으로도 존재할 망각 속의 도시랍니다.”
“너무 놀라지는 말아. 들어가자마자 본론부터 들고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피가 다시 열어 놓은 나무판자 속 구멍으로 향했다. 좁다란 계단이 끝도 없이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이곳을 정령의 도시라고 하지. 정확하게는 프네우마의 성채, 프뉴마케르트. 그동안 고지대의 인간들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던 곳.”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게 저겠군요.”
“뭐, 반드시 인간 중 첫 번째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하고 호의적인 손님 중 첫 번째라는 건 확실하지.”
어딘가 뼈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우선은 지나쳤다. 엘레기스. 바가반드에선 정반대 방향으로 머나먼 곳이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땅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일라의 내력에 대해서도 좀 더 들어 볼 수 있으려나.’
계단을 얼마나 걸어 내려갔을까. 서서히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느낄 찰나였다. 아주 깨알같이 작은 빛이 계단 아래로부터 자신을 향해 올라오는 것을 느낀 것은.
―파아아!
익숙한 마나의 거동. 그러나 그 움직임에는 인위적인 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직 스스로 날것 그대로의 자연 마나가 자유의지에 따라 노니는 그 박동감.
‘정령의 보루, 프뉴마케르트에 도착.’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파동 감지만으로도 능히 느낄 만한 거대한 존재감. 그 존재감이 네마냐를 자신들의 품으로 받아들였다.
- 126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