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곧바로 다르빌을 칠 듯 달려오던 고블린 군단이 갑자기 멈춰 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령사 모병의 문제로 모든 논쟁이 중단된 와중의 일이었다.
“고블린 놈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고?”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전령의 이야기에 니키타스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은 채 곱슬머리를 열심히 꼬았다. 갑작스러운 고블린들의 변화는 다른 모두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별동대를 다시 뿌리는 것 아닐까? 놈이 장기전으로 간다면 당분간은 전면전보단 유격전 쪽으로 갈 수 있겠지.”
“별동대를 보낸다고 굳이 다르빌에 대한 압박까지 멈출 이유는 없을 겁니다. 뭔가 좀 더 그럴듯한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가기크 신관은 성녀와 나란히 알현실 맨 안쪽에 앉은 장군을 향해 선 채로 발언을 남겼다.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고블린에 시달렸던 신관회로선 적이 갑자기 조용한 게 더 수상해 보인 모양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다만, 녀석들의 속마음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첩보를 좀 강화해 볼까요?”
한 참모가 조언하자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인간 첩자가 고블린들 사이에 잠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 우리가 하는 건 첩보가 아니라 척후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 정도로도 척후는 충분하고.”
“놈들의 생각을 짚기가 힘들군요. 혹시 본대가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간 건 아닐까요?”
성녀는 조심스럽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성기사단 간부 대표로 나온 슴바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본국 기사단과 제국군 척후대가 공동으로 적 진영 전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일까.”
성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다들 생각에 잠겨 침묵에 잠겨 들었다. 입이 간지러웠는지 우물거리던 니키타스는 자신이 보기에 마지막 가능성 하나를 언급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자면, 이런 얘기도 되겠지. 우리가 생각보다 기민하게 움직여서 고블린 놈들도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같은 것 말이야.”
“그건 전략적으로 최악 아닙니까? 기껏 대군을 몰아 나오더니 적이 만만치 않다고 중간에 멈춘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녀석들이 약탈에는 능해도 전쟁엔 문외한이란 얘기가 되겠지.”
오늘의 회의는 결국 여기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뭔가 새로운 정보나 확실한 돌파구가 있어야 머리를 굴려도 답안 후보군이라도 나오는 법이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나의 골칫거리만 안은 채 회의는 마쳐야 했다.
“우레이미야 대군장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른다. 다르빌 근교의 요새 몇 군데를 장악하고 있으니 우리도 움직이지 않을 순 없지.”
그런 소리를 하며 정예 중장보병대와 궁수를 선발해 다르빌로 들여보내라는 지시를 하는 니키타스였다. 하루 전보다 자신감은 훨씬 덜한 모습이었다.
“참, 네마냐 경.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 어제의 이야기를 마저 했으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그럼, 이리로.”
사람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골방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네마냐는 자신을 지켜보는 일행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흔들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다고 걱정하지 않을 사람들은 아니긴 했지만.
“자자, 우리도 이러지 말고 헤누크 경에게 가서 호위대를 선발해 보죠.”
“그러자. 미하일한테 대신 주문해 달라고 부탁한 원자재도 와 있으면 좋겠네.”
“키마라스 씨한테 부탁할까요? 날갯짓이면 금방일 텐데.”
하라드의 입을 강제로 막은 아일라는 두 사람의 손목을 틀어쥔 채 재빨리 복도로 나섰다.
―털썩.
“에휴. 역시 우리 선배들이 얘기한 대로 고블린들이란 알 수 없는 생물이라니까. 십 년 전 장군들이 어쩌다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지……. 이제야 좀 공감된다네.”
“고생 많으십니다.”
이미 꽤나 갈라진 간극을 보이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겉으로는 태연히 서로를 대했다. 장군은 고개를 저으면서 그나마 진심일 만한 소감을 꺼냈다.
“적어도 당신네 하야스단 사람들이 고블린 상대로 분투했다는 게 과장은 아니란 건 인정하겠네. 하마터면 놈들의 마도사들이 짜 놓은 화망에 그대로 걸려들 뻔했어.”
“그건 사실입니다. 총독부가 당시 극도의 혼란에 빠져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수긍의 고갯짓과 함께 니키타스는 본론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자…… 안 그래도 그런 여러 문제 때문에 정부와 한바탕하고 오는 길이네.”
“한바탕……이요?”
‘한바탕’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입씨름이 될 수도 있고, 흥청망청 놀았다는 뜻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한바탕이라면.’
제국 내부에서 군과 정부의 갈등이 심하다는 것은 기억 속에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게 일개 외국의 제후에까지 스스럼없이 노출될 정도라는 건 다른 문제다.
‘저런 심각한 갈등을 안고서도 나라를 유지해 갈 수 있다니, 지금 황제가 대단하긴 대단한 인물이지. 적이 된다면 두려울 정도로.’
일단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제국의 내적인 분열은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었다. 언젠가 시스템에서도 뜰 것으로 생각한 네마냐는 문제를 마음속 깊이 담아 둔 채 장군을 보았다.
“뭐, 이것저것 다툴 일이야 있었지. 한 가지 이야기해 줄 만한 건 정령사에 관한 건이라네.”
왔다. 드디어 어제 던진 미끼가 돌아온 것이다. 모든 기억을 가지고 판을 뒤엎을 힘을 가졌다 한들, 순전히 운명적으로 바뀌는 순간만은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네마냐는 성마른 침을 삼키며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쉽게도 제국 정부에선 논의 자체를 거부했네. 뭐라 할 말이 없군.”
“그렇습니까.”
애써 감정을 감추었다.
“고블린을 상대로 군부도 중요하지만 마법성의 힘을 꺾을 수 없다는 게 수상의 뜻이었지. 제길, 전쟁이 정치와 밀접하다지만 사소한 것까지 통제하려 든다니까.”
“안타깝군요.”
“내 말이!”
대충 맞장구를 쳐 주며 네마냐는 씁쓸한 감정을 다스렸다. 정령사를 제국군, 더 나아가 제국의 하야스단 정책을 바꾸는 카드로 세울 가장 좋은 기회였다.
‘절호의 기회였는데.’
제국군이 자랑하던 마법 부대를 마법성에 빼앗기며 드러난 취약점. 하야스단이 그걸 메워 실력을 보일 기회였다. 아쉬운 일이다. 네마냐는 애써 위로했다.
‘어차피 규제가 풀리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키우면 그만이지. 어차피 우리에겐 막강한 「배경」이 생겼으니까.’
복잡한 네마냐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키타스는 딴에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네. 일단 이 문제는 니콜라스 특사나 황제와 계속 이야기해서 수습책을 찾아보겠네. 혹시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 준비는 해 줄 수 있나?”
“준비, 말씀이로군요.”
니키타스와 네마냐는 묘한 표정을 주고받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인상이 좋지 않았고 이따금 갈등의 전선이 곳곳을 오갔다. 결국 언젠가는 길고 짧은 것을 대봐야 할지도 모를 상대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의외로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걸 느꼈지. 어디까지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사는 것일 뿐이니까. 이 사람은 자신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유도 모르게 계속 조급했던 마음도 좀 진정되었다. 그래, 제국이건 고블린이건 영원한 동맹이나 영원한 적일 수는 없다. 오크든 고블린이든 제국이든, 생존을 위해 이용하고 또 싸울 뿐이다.
“그러시다면 장군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도에서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려울 텐데.”
“쉬운 일만 덤볐으면 저는 진작에 하야스단을 떠났을 겁니다, 장군.”
“하하, 역시. 듣던 대로군. 평소엔 승부사 기질은 보여 주지 않더니 이런 데서 나왔어.”
“죽지 않으려면 뭐든 남들 하는 정도는 하라고 배웠습니다. 다른 곳이야 몰라도 우리 하야스단은 그렇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게 분명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네마냐의 표정.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료들과 감정을 나눌 때의 표정은 아니었다. 먹잇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을 때의 그것에 훨씬 가까웠으리라.
* * *
“네마냐, 뭐 해! 얼른 준비해야지.”
“아, 준비 벌써 끝났어요?”
아일라는 이른 아침부터 완전무장한 차림새로 네마냐의 방으로 찾아왔다. 내심 짚이는 점 때문에 하라드가 건네준 마법서를 뒤적거리던 참이었다.
“그럼. 고블린 새끼들이 언제까지라도 가만히 있을 줄 알고? 정령사들은 가뜩이나 혼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들이라 느긋하게 다니면 제때 모을 수 없을 거야.”
“하긴. 통제에 수십 년을 시달렸으면 서로 연락도 잘 하지 않는 건 당연하겠죠.”
제국을 시작으로 하야스단 제후들도 앞다투어 정령사 탄압을 시작한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왜 정령사가 탄압을 받았느냐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마법도 배우지 않고 마법 효과를 낸다며 고블린의 간첩이란 말도 안 되는 소문만 퍼져 나갔다.
‘정말 어처구니없지만, 위기의 시대에 약자로 찍혀 버린 사람들에겐 드문 일도 아니지,’
씁쓸하게 얼마간의 비슷한 기억들이 스쳤다. 그런 가짜 뉴스들이 횡행할 수 있었던 건 그게 이익이 되는 자들이 있어서였다. 거기다 제대로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영지도 없었고.
‘하지만 이제부턴 꽤나 달라질 수밖에 없지. 제국군이 정령사 문제가 공통된 이익이 아니란 걸 알게 됐으니까. 마법성과 군부가 싸운다면 그 틈에서 우린 홀로 움직일 수 있겠지.’
제국급 국가가 흔히 쓰는 이이제이, 혹은 분열시키고 지배하라(Divide and Rule). 네마냐는 오히려 그것을 거꾸로 제국의 복잡한 국내 정치 속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미 벌어져 있던 제국 세력 내부의 알력이 그 자극을 충실히 받아들였다.
“얼른 준비해서 가자고. 지금 가면 내 친구도 소개해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친구분이요?”
“그래. 그 외톨이. 불만에 종일 떠들어대는 정령사 무리 중에선 가장 사람답게 사는 녀석이거든. 네가 필요로 하는 얘기라면 그나마 들을 수 있을 거야.”
아일라도 그다지 대인관계가 능숙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러니 서로 오해가 쌓이다 못해 아니의 시장에서 블랙리스트까지 올랐을 지경이었다. 어디 다른 가게에 납품할 기회도 없으니 고용주에게 더 휘둘리기도 했고.
“그런데 아일라 씨가 놀랄 정도로 대인관계가 서툴다니. 대체 어느 정도 사람들인지 짐작이 안 가네요. 그 친구분도 설마…….”
“말했잖아. 소인족, 그러니까 소위 난쟁이족도 인간에게 오랜 원한이 있는 데다 정령사들은 특히 오지게도 탄압을 받았으니까.”
“끙…… 그렇긴 하지만요.”
안 그래도 다들 동료라고는 있어도 각기 미쳐 있는 분야가 달랐다. 각자가 자기 일에 몰두해 있을 때는 이야기도 나누질 않았다. 집사장 헬레나가 ‘과몰입’이라며 걱정할 정도였다.
‘안 그래도 매니아 집합소나 다름없는 집단이 이젠 어떻게 돌아갈지도 모르겠군.’
네마냐는 그래도 몸을 일으켰다. 고블린은 어차피 전방에 우뚝 멈춰선 채로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녀석들이 뭘 원하는지는 어차피 앉아서 기다려 봐야 알기 어렵겠지.
“좋습니다. 어차피 앉아서 기다려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움직이면서 이래저래 정보도 조사해 보죠. 안 그래도 조만간 바흐람의 보고도 받아 봐야 해서.”
“겸사겸사 잘됐네! 얼른 가자!”
아일라는 손바닥을 쫙 편 손으로 네마냐의 등을 가볍게 후려쳤다. 하지만 온갖 노동으로 단련된 장인의 손길은 무척 매웠다.
“큭, 아일라는 살짝 때려도 맞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니까요, 앗 따가워.”
“허약하긴. 이번 전쟁 끝나거든 부지런히 대장간으로 출근하라고. 이런 손길은 얼마든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성장시켜 주지.”
살짝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운을 느낀 네마냐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무사히 끝나면야, 하하……. 우선은 정령사 건부터 해결하죠! 자, 얼른 나가 보세요. 저도 옷 갈아입을 테니까.”
아일라를 다독여서 밖으로 내보낸 네마냐. 한바탕 분위기에 휩쓸려 원래 하던 생각은 증발한 지 오래였다.
“휴, 얼른 준비하자. 이건…… 나중에 다시 천천히 봐야겠어. 몇 번은 읽어야 이해가 될 것 같으니.”
마법서 두루마리를 그대로 펼쳐 놓은 채 네마냐는 고이 개어둔 옷가지를 향해 옮겨갔다. 책의 펼쳐진 부분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고대 글자가 끝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중 한 군데, 줄이 쳐져 있는 곳엔 네마냐 자신이 아닌 하라드의 필체로 작게 메모가 되어 있었다.
[공허 에너지 이론의 가능성 – 불가능한 마나 친화성과 비상식적인 마법은 어쩌면 여기서 기원한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일은 시작 단계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계의 질서는 아직 진정한 도전에 직면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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