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촛불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로 만찬장의 허공이 채워졌다. 사람들은 입장과 신분을 막론하고 서로를 가만히 지켜볼 뿐, 탐색전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격 떨어지는군.’
한쪽에는 하야스단의 정신적인 지도자……이지만 번번이 제국의 정책과 부딪쳐 탄압받았던 신관회 수장. 다른 한쪽은 명목은 백작이라지만 어지간한 남작령만 한 영지나 다스리는 일개 제후였다.
―딱, 딱.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느슨한 태도로 니키타스는 빈 접시 옆 탁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대관절 내가 선발대로 데려온 병력의 절반도 안 되는 녀석들 아닌가. 무슨 평등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라니.’
하야스단은 니키타스 자신, 아니 장교단 모두에게 있어 ‘다스려야 할 땅’ 내지는 한 발 나아가 ‘점령해야 할 땅’이다.
‘이렇게 후환을 남겨서 나대는 걸 보느니 십 년 전에 어떻게든 고블린과 함께 밀어 버렸어야 했는데. 그놈의 내전이…….’
하야크 왕국을 계략으로 몰락시키고 빈 땅을 차지하려던 결정적인 순간의 내전이라니! 십 년 내내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지경이다. 너무 갈아댔는지 이젠 위아래 어금니가 닿기만 해도 찌릿할 정도였다. 턱을 받치고 있던 손가락 끝으로 어금니 부분을 슬슬 만지작댔다.
“솔직한 감정으로 전하자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제국 장교단이 선의를 가지고 우리를 대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확신하지 못하신다니요?”
무슨 이야기인지는 이미 너무나 잘 아는 니키타스지만 의뭉스럽다는 듯 뭉갰다. 트라야브나 성녀 역시 고단수답게 작업용 미소를 품으며 거침없이 이야길 열었다.
“왜긴, 왜겠어요. 지난 십 년 동안 여러분들이 우리 고유의 가치와 주민을 존중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또 내전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전대 종정을 체포하려고 이곳 성도에 무단으로 병력을 파견했던 일…….”
“관계를 참 어렵게 하시는군요, 신임 대신관께서는. 양쪽 모두 오해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건 마법성의 조치라는 걸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녀는 웃음을 만면 가득 띄웠다.
“아. 그러면 제국군은 사실 황제와 마법성 두 곳의 지휘를 받는 게로군요. 좋은 사실 잘 알았습니다.”
“새 대신관은 어떤 분인가 궁금했는데 비꼬길 잘하는 분이란 건 저도 잘 알겠습니다.”
‘뭐 하는 거야, 이 사람들.’
네마냐는 처음엔 이야기에는 끼지 않은 채 가만히 고깃점이나 썰면서 기다렸다. 군대가 제때 도착한 덕에 도시의 봉쇄가 풀려 누리는 호사였다.
“바가반드 백작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잘 됐군. 오늘날 하야스단의 영웅이 계시니 한번 의견을 물어봅시다.”
조금 상황을 지켜보다가 둘 다 지켰을 때 중재하려던 계획이 어긋났다. 포크를 잡은 채로 어색하게 노출된 네마냐는 애써 짜증을 감추고 난처한 표정을 연기했다.
“두 분이 감정이 좀 진정되거든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우리가요? 아주 호수의 수면같이 잔잔하기 짝이 없는데요.”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짬은 먹었으니 그대의 영웅적인 소견을 들을 준비는 됐소.”
“젠장할 꼴통들.”
“뭐라고 했소?”
“아닙니다.”
낮게 화풀이를 뱉어낸 뒤, 바가반드 백작은 중요한 삼국 군사지휘관 회의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니키타스도 원하진 않았겠지만 자신과 성국 수반이 싸워 버린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이 양쪽 끝을 차지하니 가만히 있던 네마냐가 논의의 중심에 선 것이다.
‘침착하자. 어제 미리 이야기 나눈 대로만.’
역시 흥분한 상태긴 하지만 트라야브나 역시 네마냐 쪽을 보며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네마냐는 마른침을 삼키며 슬쩍 손깍지를 끼운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니키타스 장군에게 향해 있었다.
“장군.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염려하는 게 당연합니다. 성녀께서 언사가 좀 거칠긴 했습니다만 그 본뜻은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이상하단 게요, 백작. 제국이 이미 암피에르 조약으로 오래전부터 고원의 수호자를 자처하지 않았소? 지금도 3만이나 되는 병력이 이곳으로 달려왔고.”
니키타스 한 사람이 진정 그 뜻을 품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중요하지도 않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건, 하야스단이 제국의 중심도, 제국의 전통적인 지방과도 다르다는 점이겠지.
“그럼 한 가지 전제를 해 보죠. 만약 고블린 군단의 공세가 거세어 제국군이 후퇴해야 한다, 그러면 하야스단에서 물러날까요?”
“그런 일이 일어나겠소?”
“물론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전쟁에 확실한 보장이란 건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제국이 밀리게 되면 이 하야스단에 3만 대군의 뼈를 묻고, 더 나아가 더 많은 증원군을 배치할 수 있습니까?”
“극단적이시군. 전쟁이 불확실한 만큼이나 변화무쌍한 건 당연한 이야기지. 그러나 객관적으로 우리 군의 실력은 우수하네. 고블린 정도는 몇 번이고 물리친 적이 있어.”
자신만만한 니키타스의 표정. 저것 하나만큼은 배석한 장교단들도 동의한다는 듯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마구스타나와 변경 전초기지가 연달아 당한 건 무슨 이유였습니까? 제국군이 너무 강해서 고블린이 상대가 안 된다는 데 말이죠.”
“그건, 으음……. 모든 전선과 전투에서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오. 중요한 요지를 지키고 적을 막아 내는 게 현재로선 하야스단 방어의 가장 중요한 전략이라고 보는데.”
지금 순간에도 한쪽 구석에선 신관회의 수습 사제와 제국의 군서기관, 하라드 세 명이 대화록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못내 발언이 강경해지려다가도 니키타스는 적당히 그쪽을 바라보며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렇죠. 방어가 하야스단 방어의 최고의 작전이 될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하야스단 토착 제후와 성국의 힘이 절실한 겁니다.”
네마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리춤에서 주머니 하나를 끄집어 올렸다.
―탁.
불룩한 주머니가 테이블에 떨어지자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가 전해졌다. 살짝 풀린 매듭 사이로 약간의 빛이 전해졌다. 검붉은 빛깔. 그 진한 핏빛에 눈살이 찌푸려진 니키타스가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가리켰다.
“그 주머니는 무엇이지요?”
“장군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최근 바난드에서 일어났던 수상한 마나 폭발. 그리고 그 직후 출현하는 수상한 반란군도.”
“그 현상……! 정확히 우리 지케른과 이곳 수도에서도 일어났던 일이군요. 근처 영지 몇 군데도 그 과정에 파괴되었다고 했어요.”
“으음.”
니키타스는 팔짱을 끼고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는 뜻. 일단은 이 정도까지 잠잠하게 만든 것으로도 모종의 성과였다.
“지금 제가 내놓은 이게 그 원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제국군 역시 난처해질 거란 이야기입니다.”
―와르르!
남김없이 제 속에 든 것을 게워낸 주머니.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겼지만 흉흉한 검붉은 색 기운만은 확실한 수정석 혹은 돌이었다.
“마정……석? 마정석 아닙니까? 나는 군인이지 마법에 정통한 사람은 아닌데 이게 우리 군과 무슨 상관이 있지요?”
“아주 깊은. 아아주 깊은 연관이 있죠. 바로 이걸 사용하는 고블린 마도사가 대량 출현한다는 겁니다. 감히 제국법에서도 사용을 금지한 「적마정석」을 사용하는 건 그뿐이니까요.”
“마도사. 마도사라고.”
그 한 단어를 연신 곱씹은 니키타스가 옆에 앉아 있던 참모와 무어라 작게 소곤거렸다. 물론 명색이 최고 사령관인데, 고블린 마도사의 존재를 모를 리는 없다.
‘고블린 마법이 제국군에게 위협이 되는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거지.’
그렇다면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는 편이 공감하지 못하는 문제를 인식시키기엔 확실할 것이다. 600년 전 사건처럼 말이다.
“6백 년 전에도 제국은 바로 이 적색 마나를 사용한 검은 던전과 싸워야 했습니다. 설마 그것까지 모르시진 않을 테죠.”
“그 지랄 맞은 던전이 이, 이 적색 마나란 걸 쓴단 말인가?”
“적어도 이제는 아셨군요. 다행입니다.”
장군의 얼굴빛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검은 그림자 던전.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건 검은 마나와 던전, 그리고 그 시기를 풍미한 대전쟁, 내전은 공포로 얼룩진 기억이었다.
“그럼…… 우리 군대가 고블린에 맞서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건 바로 그 주술 이야기인가?”
“사령관께서 이곳 지휘권을 잡기 직전, 콜라케르트 시가 잠깐 파괴되어 통제권을 잃었습니다. 아십니까?”
살짝 긴장한 니키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굳게 확신하지는 못한 표정이었다.
“그렇소. 자세한 건 황제와 원로원으로만 올라가 아직 비공개 사항이지. 일단 내게 알려진 건 고블린의 신무기라고 하던데. 생각보단 파괴력이 약해서 도시도 금방 재건했다고.”
“아쉽지만 신무기가 아닙니다. 놈들의 잘 준비된 마법 공격이었죠. 마시스 성산의 마나를 점령한 전략 타격 마법으로 말이죠.”
“놈들이 전략 마법을…….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구먼.”
“하지만 사실인걸요.”
성녀는 네마냐의 이야기에 강력한 증인으로 나서주었다. 그렇게까지 뒷받침을 하고 나오니 장군도 더 반박할 말은 없었다. 오히려 네마냐는 한 발 더 나갔다.
“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콜라케르트는 철저하게 점령됐을 겁니다. 장군께서는 어쩌면 이곳이 아니라 제국 본토의 국경에서 전쟁을 준비했을 수도 있죠.”
깍지를 꼈던 손을 풀어 맞잡은 채 테이블 위로 내렸다. 잠시 틈을 둔 네마냐는 사형선고라도 내리듯 무겁게 선언했다.
“적 고블린 주술사는 한 개 군단도 날려 버릴 수 있는 전략 마법을 사용합니다. 엇맞기라도 하면 장군께서 데려오신 3만 명의 병력도 반신불수가 되겠죠.”
“그렇다는 건. 아니, 당신들 하야스단인들에겐 그렇다면 놈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는 건가?”
“물론 다는 아닙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어깨를 들썩이는 시늉을 보이며 네마냐는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하지만 적어도 놈들을 상대할 방법을 알선해 드릴 순 있을 것 같군요. 적당한 합의를 이룬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흐음.”
“어떻습니까. 합의 조건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 볼까요.”
볼 것도 없다. 오랜 전장에서의 신경전과 심리전 경험으로 다져진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논리에 말려들면 안 된다고.
“쓰읍……. 아니야. 먼저 해결 방법을 얘기해 주게. 얼마나 매력적이길래 자신이 있는지 그것부터 봐야겠어.”
“물론입니다.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정령사. 정령사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고 모병할 수 있으면 얼마든 대항할 수 있습니다.”
사령관부터 일개 참모에 이르기까지 제국군이 일제히 새삼 깨달은 표정 그리고 뒤이어 난감함에 붉어지는 얼굴색까지.
“아니면 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시간이 많진 않아도 고민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대화를 중재하는 걸 넘어서 어느 순간부터 흐름을 장악한 네마냐. 대단한 기회라도 주는 것처럼 유예의 시간을 주었다.
‘확실하게 자신이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도록 적당히 풀어주는 게 좋겠지.’
당장은 원하는 ‘흐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만족하고 다시 기다리면 될 일이다. 네마냐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현명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저녁 시간에 맛있는 요리와 뜻깊은 이야길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떡밥은 던져졌다. 남은 건 미끼가 알면서도 주저하며 낚싯바늘을 무는 걸 기다리는 것뿐. 수행원 없이 수백 년 역사를 프레스코로 그려낸 복도를 걷는 네마냐는 흥겨운 콧노래를 불렀다.
“적당히 치면 물러나서 기다릴 줄 알아야지. 게다가 정령사에 대한 규제가 풀린다고 해도 막상 어떻게 구할지, 그것도 문제니까.”
돌아가는 판세만으로는 계속해서 몰아붙인 자신의 완승으로 보인다. 하지만 네마냐는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물리적 조건을 알고 있었다.
‘말싸움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 제국군이 어쨌든 가장 강력한 동맹이자 위협인 건 변하지 않지. 어떻게 적에게만 잘 드는 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정령사는 어떻게 모집한다?’
끝없이 이어질 고민의 덩어리를 안은 채 네마냐는 숙소에 도착했다. 키마라스와 하라드가 말린 과일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휴, 나 왔어. 어, 아일라도 와 있었네요.”
“중간까지만 듣다가 나왔지. 제국 놈들 말은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체하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너는 어떻게 떠들면서 잘도 먹더라. 덕분에 뭘 얘기하려다가도 내가 까먹고 나와 버렸지.”
“하하, 뭘 말씀하시려고요?”
“정령사. 네가 필요하다길래. 원한다면 내가 아는 정령사 친구 하나 알선해 줄게. 그 녀석이 나랑은 다르게 마당발이라 이래저래 정령사들 모으는 덴 도움이 될 거야.”
아. 순간 멈칫했다. 정령사. 그들은 보통의 무속성 마나라는 체질을 갖는 인간과 다른, 조금은 다른 체질이 필요하다. 인간이라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힘들다는 이야기다.
“워낙 가족처럼 지내다 보니 잊었나 보네, 형도. 우리도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뒤늦게 알았지.”
하라드의 설명이 이어지며, 순간 영지에서 지나가듯 보았던 마법서의 한 문장이 하라드의 목소리와 포개어졌다.
[정령사가 되기 위해선 보통 자연과 높은 정도의 친화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프네우마-정령과의 교감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정령사는 고대 난쟁이들의 후손에서 배출되었다.]
고대 난쟁이 왕국. 그리고 그중에서도 한때 대장장이의 대부라고 불리던 ‘하스페투스’ 또는 ‘하스페다’. 바로 그 황금 씨족의 직계 후손이 자신의 눈앞에 그동안 있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열쇠가 여기에 있었다니.’
놀라움과 당혹 그리고 감추기 어려운 희열이 전신을 덮었다. 네마냐는 헛기침 두어 번으로 감동을 위장했다. 그리고 조금 더 정중하게 아일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우리 영지의 금속 기술 대장인님.”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가 네 목표가 마음에 들어서, 또 네가 나를 필요하다고 생각해 합의한 계약이었지. 네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당연히 제공해야지.”
아일라는 굳은살 가득한 손을 내밀어 네마냐의 손을 붙잡았다. 악수가 생소한 건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는진 모르겠다. 아일라의 손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느낌이었다.
“좋습니다. 주고, 받고. 비로소 완벽한 계약이라는 확신이 서네요.”
하지만 역시 뜻하지 않은 돌파구에 눈이 뜨인 네마냐는 굳은살의 거친 감각이건, 악력이건 관심 밖이었다.
‘긴장감에 찬 팽팽한 구도가 적어도 당분간은 무너지지 않을 절호의 기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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