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렇게 해서, 원소 성질을 띤 마법들을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할 수 있는 거지.”
“으음, 그래도 대략적으로 비중을 계산해서 조절하는 게 좋긴 좋네. 혹시나 모를 변수를 제할 수도 있고.”
“이제 기초적인 마법학 지식에 대해선 충분히 숙달한 것 같네.”
“이게 끝은 아니잖아?”
마나의 조율법. 마법학 기초의 심화 과정이었다. 본래라면 원소 마법 중 무작위 세 개를 사용할 수 있는 인증을 받은 뒤, 아카데미아에 입학해 배우는 과목이다. 그래서 네마냐도 배울 때마다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근데 이거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치는 정규 학문일 텐데 네가 가르쳐도 되는 거냐?”
“무슨 소리야. 내가 야매로 가르친다는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녀석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던 네마냐는 고개를 좌우로 스트레칭하면서 마저 대답했다.
“분명 기사학교에서도 마법학을 배우긴 하지만 원소 마법의 기본만 배우거든. 어차피 오라를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배우는 셈이라.”
네마냐의 설명대로다. 이곳 세계에선 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자연에 잠재된 이면의 에너지, 즉 마나를 사용한다. 마법사가 마나 자체의 성질을 이용해 여러 활동을 하지만 소드마스터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차이가 있을 뿐.
“음, 가르치지 못할 건 없지. 안심해도 돼. 학년 마지막 학기에 교사 자격증도 땄거든.”
“못 말리겠어. 너 정말 나를 마법사로 취업시킬 생각인 거냐.”
“마법적 재능을 충실히 쓰려면 그만큼 확실히 배워야지. 그러라고 내가 영주님의 특별 교사로 임명된 거니까.”
싱긋 웃으며 녀석은 옆에 가져다 두었던 보따리를 마저 풀었다. 이윽고 책상 위로 녀석이 올리는 것은 몇 권의 책이었다.
“당분간은 세 권에 집중해서 취급할 거야. 하나같이 부피가 크고 필사시키려니까 힘들더라고. 자.”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마법학 심화 2」, 「마나 가공의 기초」였다. 물론 새벽 댓바람부터 시작되는 마법 공부가 귀찮긴 했어도 공부의 흥미는 느끼고 있었다.
“음?”
그런데 그때. 세 번째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어쩐지 눈에 밟혀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어, 이 책에 관심 있어? 내 생각엔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긴가민가했는데.”
“아니……. 제목이 참 궁금하게 생겼어.”
제목은 「마나해석론 – 오이쿠메네 이론에서 공허 미창조 에너지까지」라는 복잡한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제목만 들어보면 마법 자체보다는 마나 철학에 가까워 보이는데.”
“정답.”
그러면서 녀석은 마나해석론을 넘겨주었다.
“이건 바로 수업을 하긴 어려울 테니까 한동안 읽어 보면서 머릿속에 담아 두자고.”
“설마, 숙제냐?”
“그냥 읽으라고 주면 대충 읽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감상문 쓰면 도움도 될 거야.”
“이런 제길. 마나학 기초 수업 끝나면 좀 쉬려고 했더니만.”
고통받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건지 하라드는 꽤 즐거워 보였다. 코웃음을 돌려주며 네마냐는 이색적인 숙제를 받아들였다.
“좋아. 대신 고블린과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면 그때는 한 주에 사흘만 공부하기로. 내 제안은 어때?”
“씁, 어지간하면 매일 하는 게 좋은데. 어쩔 수 없지. 그럼 그 책이라도 부지런히 읽어 둬.”
“그 책에 꿀이라도 묻혀 뒀나. 알았어.”
대화가 끝나자 하라드는 뭔가 하지 못한 말이라도 있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은 익숙지 않았다. 그 표정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네마냐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건 무슨 뜻으로 지은 표정이지?”
“응? 아, 아냐. 그럼 열심히 공부하시라고.”
가볍게 어깨를 토닥여 준 녀석은 재빨리 보따리에 자신의 짐을 챙겨 빠져나갔다.
“허?”
잠시 녀석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던 네마냐는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았다.
“마나에 대한 해석이라…….”
혹시나 어떤 연관 이벤트가 발동되는지 확인해봤다. 하지만 알림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임무창은 갱신되지 않은 상태였다.
“책자를 살펴봐도 특별한 건 뭐 없어 보이는…….”
거창한 제목과 달리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 이론이었다. 그중에서도 후반부에 비교적 짧게 정리된 상태인 ‘공허의 미창조 에너지 이론’이 눈에 띄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눈에 밟힌단 말이지. 모든 일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려고 들어서 그런가. 속칭 주인공 병인지도.”
네마냐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정리했다. 그만 책을 덮었다.
―꼬끼오!
닭 울음소리가 아직 어두운 허공을 뚫고 들려왔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새벽녘에도 한동안 어둠도 끝을 알 수 없었다.
“며칠 뒤면 동지인가. 이때쯤 한번 폭설이 쏘아질 때가 됐을 텐데. 밤도 길어서 잘못하다간 발이 다들 묶여 버릴지도 모르겠군.”
폭설과 긴 밤의 조합. 하야스단 곳곳의
좁고 험한 통로와 절벽 위의 도로라는 환경에선 충분히 위협적이다. 지름길을 사용하지 못하면 고블린의 침공에 대응하기 어렵다. 말발굽도 미끌미끌한 빙판에선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 반면 고블린이 타고 다니는 픽스들은 발굽이 거칠게 되어 있다. 절벽이나 빙판도 녀석들이 잘 다니는 원인이다.
“상황을 좀 봤다가 날씨가 나빠질 것 같으면 당장에라도 진영을 옮기는 게 좋겠지.”
당장 바가반드의 군대가 장기간 숙영하면서 보급물자를 받으려면 적당한 장소가 필요하다. 또 만약에 대비해 영지와 너무 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콜라케르트가 위치상 딱 좋긴 하지. 에살하톤 쪽 보급을 받기도 좋고.”
물론 그 지역에 병사까지 데리고 주둔하는 건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격이다. 아나무이라 같은 총독부 후방은 그나마 우호적인 특사라도 있지.
“정 안 되면 멀더라도 켈리도니온이나 다빌로 옮겨야겠군. 우선은 먼저 사람들하고 이야기부터 나눠 보도록 하고.”
의자에 앉아 미명을 지켜보던 네마냐는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이내 일어섰다. 책상에 놓였던 촛대를 한 손에 든 채였다.
“오늘은 일단 영지 산업체들 일괄 점검부터 하고 나서. 떠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하고 가는 거다, 네마냐. 전쟁은 길고 겨울은 혹독할 테니.”
자신에게 하는 말을 열심히 주워섬기며 그렇게 새벽 이른 시간부터 하루 일정은 시작될 것이었다.
―똑똑.
“나갈게요, 헬레나.”
헬레나의 아침 준비를 알리는 노크 소리로 네마냐는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 * *
“아니에서 온 소식은 없었어요?”
“조금 전에 얘기하지 않았느냐? 믿고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꾸나.”
자꾸만 초조한 성녀를 그나마 가라앉힐 수 있는 건 백부인 가기크뿐이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우리 기사단을 보내서라도 개입해야 해요.”
“허, 대놓고 우리가 조약을 어기자는 것이냐?”
“아휴, 그놈의 암피에르, 암피에르!”
답답하단 듯이 트라야브나는 가슴께를 세차게 두들겼다. 하지만 그래 봐야 본인 손과 흉부에 통증만 수반할 뿐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성녀님. 웬일로 이렇게 평정을 잃으십니까. 아아, 마나 파형이!”
곁에 서 있던 감찰관이 불안정하게 멋대로 빛을 내뿜는 수정을 들고 있었다. 초조한 목소리였다.
“감찰관, 괜찮다. 이건 성녀님의 감정이지 적마정석 문제랑은 관련 없으니까.”
“그래도 파형 변화가 너무 불규칙…….”
“좋은 말 할 때 끄라고.”
성녀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기겁한 감찰관은 재빨리 수정을 툭툭 두들긴 뒤 천을 뒤집어씌웠다. 푸르던 수정의 빛이 사라지니 주변은 다시 따뜻한 색이 돌아왔다.
“감찰관 제도도 손을 보던가 해야겠어요. 아무리 비상시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지만 매번 코앞에 정신 사나운 수정석을 들이대고.”
가기크 입장에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애초에 마나 오염 사건으로 성립된 마나교에서 할 소린 아닌 것 같구나.”
“할 일은 쌓여 가는데 아니에선 쿠데타가 어떻게 되었다는 후속 전갈도 없지. 전방에선 매번 위급하다고 채근하지.”
내전에 정신없는 바난드나 한창 떠날 준비가 한창일 바가반드도 바빴다. 그러나 그 두 나라보다도 성국은 한참 고블린에 가깝다. 매번 고블린 관련 소식이 들어올 때마다 잘못 퍼진 유언비어로 사람들이 피난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 바난드 쪽 관련해선 어쩔 수 없겠군요. 백부께서 계속 정보는 살펴주세요.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우리 기사단장님과 네마냐 경에게도 빨리 와 달라고 해 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공식적인 문답에선 가기크 역시 성녀에 대한 존칭을 지켜 대답했다. 비록 암피에르 조약 때문에 직접적인 개입은 불가능해도 연락으로 직접 도움을 청하는 건 가능했다. 가기크는 대번에 성녀가 어떤 걸 노리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바로 수긍했다.
“다행이라면 얼마 전 바가반드발 소식으론 제국과 바가반드 사이에 신사협정이 있었다는 겁니다. 다행히도 제국까지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휴, 그건 천만다행이네요. 우리도 그것 관련해서 분위기를 좋게 띄워 보는 건 어떨까요?”
성녀의 제안은 제법 시의적절했다. 좋은 소식이 들어올 것 하나 없는 지금 상황에서 바가반드-제국의 전략적 공조다. 자칫 사기가 꺾일 수 있는 주민과 기사단에도 동기부여가 가능하겠지.
“그거 좋군요. 그것도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회의실 뒤쪽에서 이 문답을 받아적은 서기관은 성녀의 허락을 받아 내각 건물로 이 제안을 전달하기 위해 떠났다. 회의장은 이제 구석에 앉아 있는 감찰관 한 명을 제외하면 이제 성녀와 가기크 신관뿐이었다. 트라야브나는 조금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정말 하고 싶었던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저께 고블린이 성벽을 뚫고 들어왔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작자들은 잡았나요, 가기크?”
“아직입니다. 목격자만 있으면 금방 잡았을 텐데 이상하게 아직 보고가 없군요.”
“이상한 일인데…….”
가기크는 잠시 곁에서 물러난 감찰관과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살피더니 귓전에 속삭였다.
“최근 성도 근처에서도 적마정석의 존재가 확인되는 모양이다.”
“뭐라고요? 그, 그렇군요.”
놀라서 반응하려는 성녀를 향해 가기크가 재빨리 입조심 하라는 손짓을 보였다.
“그래서 백부님이 비상조치를 발동하신 건가요? 그렇다는 건, 성도 안에도 어쩌면…….”
“아마도. 바난드처럼 대놓고 세력화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배반자는 얼마든 가능하지.”
만약 적마정석의 어두운 마나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잠입했을 가능성. 만약 그렇다면 성국 감찰관의 마나 검사로 대처할 수 있었다. 마나 오염에 대처하기 위해 오래전 아카데미아에서 개발된 방식.
“이래서야 바난드나 다빌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곤란하겠는데요. 어디로 어떻게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그래도 대비는 필요하겠지.”
트라야브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원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신성한 책임에 대해선 모른 척할 사람은 아니었다.
“감찰관.”
“네, 넵! 내리실 분부가 있으십니까?”
잠시 골똘하게 생각하던 트라야브나는 깔아 둔 파피루스 종이에 글자를 휘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감찰관을 통해 감찰국에 전할 명령을 전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성기사단을 동원하고, 모든 영지와 다르빌에 경계령을 내리겠어요.”
“그런데 그 명령은, 굳이 감찰국을 통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주 특수한 상황이 되었거든요. 감찰국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성녀와 신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감찰관이었지만, 무언가 심각한 일이 있다는 것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 성녀가 긴장된 표정으로 최종 명령을 전달했다.
“앞으로 정부의 모든 일은 감찰국 계통을 따라 전달하고 감독하겠어. 모든 정부 관계자들부터 하루 매 1회씩 마나 검사를 받도록 합시다. 최종 목적은 지케르니아 땅에 침입한 첩자를 완전히 걸러내는 겁니다.”
불과 몇 시간 뒤. 겨울 눈이 산 위에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켈리도니온에 연이어 나팔과 종소리가 울렸다.
“비상 경계령이라…….”
“자자, 어서들 들어가세요! 일몰 이후엔 모두 출타 금지입니다!”
경비병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온 거리에선 출타 금지 이야기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이지만 그걸 봐줄 상황은 못 되었다.
“좀 더 놀다 들어가면 안 돼요?”
“얼른 들어가지 않으면 너희들도 고블린 첩자로 조사받는다. 얼른 부모님께 돌아가!”
켈리도니온 주민들은 이미 곳곳에서 먼저 터져 나온 악재 때문에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 그렇지만 불길한 기분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부우웅.
―대앵대앵대앵.
시내로 몰려들던 눈발이 점점 더 굵어지며 곧 하염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블린 족장 우레이미야가 약속했던 전쟁의 계절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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