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바가반드의 종탑에서 외침이 나온 것은 새해를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인 와중이었다.
“영주께서 돌아오셨다!”
“뭐라고, 영주께서?”
안 그래도 제각기 거나하게 들이켰던 포도주의 취기가 오른 주민들은 신이 난 모양이다. 탈골될 듯 격렬한 어깨춤과 함께 주민들이 비틀대며 영주가 들어올 정문으로 움직였다.
“돌아왔다는 건 승리했다는 뜻이겠지.”
“그러네요.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간 거죠.”
미하일이 시끌벅적해진 광장에서 시선을 돌리며 난간에서 몸을 돌이켰다. 아일라는 이미 당장 원정이라도 나가려는 듯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 누나. 갑자기 무슨 무장이에요?”
“왜긴. 네마냐가 승리했고 다른 전장이 정리되었다면 그게 의미하는 건 분명하잖아.”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나란히 어떤 하나의 대답을 나누었다.
“고블린.”
영지의 재정을 감독하는 재무관 그리고 영지의 핵심 산업을 총괄하는 수석 기술자. 두 사람의 의견이 정확히 들어맞은 순간이었다.
“하, 제길. 제발 한 달이라도 더 늦어지길 바랐는데. 그랬다면 훨씬 더 충실한 재정으로 전쟁을 대비했을 테고.”
“그래. 지금 누구나 다 부족함이 사무칠 수밖엔 없어. 하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은 확실하지. 확신을 믿음으로 끌어올려 움직일 수밖에.”
그간 아일라 자신도 쉴 틈 없이 뛰어다녔다. 그렇기에 비슷하게 매일 같이 돈 문제로 씨름을 벌였던 미하일의 고민에 동감이 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충실하게 하고 난리를 대처할 순 없지. 난리라는 것의 속성부터가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
그런 생각으로 애써 코앞까지 닥친 살육전의 피비린내에 대한 거리낌을 애써 잊었다. 묵묵하게 아일라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 하나를 통째로 내주었다.
“받아.”
“검을 새로 만든 건가요? 저번에 받은 강철검도 아직 멀쩡한데.”
“강철검 주려고 내가 기껏 며칠 밤을 새웠겠냐. 얼른 확인해 봐.”
미하일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동안 특히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대장간에서 거의 숙식을 해결하며 동료들과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설마, 부대에 공급할 아콜타데리움 합성검을 모두 만들어 낸 거예요?”
“그래. 그 설마다, 이 자식아.”
호탕하게 대답한 수석 기술자는 그 유명한 하스페다의 강철 손을 들어 재무관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별로 강한 힘도 아니었지만 미하일은 살짝 휘청거렸다.
“실없긴. 그 정도에 휘청거리기나 하고.”
“강철 손에 놀라는 척은 해 줘야지.”
그러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술에 취한 주민이 반쯤 섞인 성대한 환영단이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자, 그럼 이제 그간 준비한 카드를 모조리 펼쳐 보자고. 고블린 놈들이 얼마나 경악할지 보게 되면 속은 좀 시원해지겠지.”
거센 계곡풍이 불어 뒤엉킨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아일라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공방에서 수하 장인들에게 각종 복잡한 제련 기술을 가르칠 때와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처음엔 그저 살육에 쓰이는 도구를 만들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었지. 지금도 그 뜻은 마찬가지겠지만 어딘가 좀 다른 의지가 느껴지는걸.’
하지만 아직 미하일은 묻지 않은 채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아일라 자신이 아직 자각하지 못했다고 해도 곧 다다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네마냐의 진영에 적응한다는 건 바로 네마냐의 대의에 공감해 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좋아요. 난쟁이 후예건 지주 집안의 막내아들이건, 그런 건 상관없죠. 이제야 겨우 자리 좀 잡고 살 터전을 얻었는데 내줄 순 없고.”
“어쭈, 이제 자작도 되고 출세 좀 했다고 머리 굵어진 소릴 하네?”
꿀밤을 들이박는 시늉을 하며 아일라는 회의실에서 나가는 문을 열었다.
“늦기 전에 어서 네마냐를 맞이하러 가자고.”
“예이, 그러시죠. 위대한 강철 손 누님 명령을 누가 거부하려고.”
두 사람은 회의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네마냐를 맞으러 나갈 도로변. 바가반드의 중심부는 벌써 쇠 냄새와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화려하고 복잡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 * *
[기초 능력]
[체력 14]
[근력 13]
[민첩 14]
[이해 18]
[판단 13]
“무시무시하게도 성장했군. 고작 1년이었는데.”
눈을 감았음에도 살갗을 타고 흐르는 찬물의 숨 막힐 듯한 냉기가 섬뜩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고 나니 의식은 무척 예리해졌다.
“아무래도 아직 몸이 성장기 후반이었던 덕분이겠지. 처음엔 앙상했던 몸이지만 제법 근력도 붙었고.”
문득 생각에 미쳐 몸 이곳저곳을 쓸어 보니 감개가 무량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전생에선 고질병처럼 정착해 버린 만성적인 관절통이나 기침 증세도 흔적조차 없었다.
“시스템이 보조하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닌 게 꽤 유효하게 작용한 모양이야. 하긴, 사고 후유증이 있던 몸으로 고블린을 몇이고 썰어 넘긴 것부터 이상한 일이었지.”
몇 번 팔을 휘둘러보았다. 하도 하야스단 전 지방을 하루 생활권처럼 돌아다녀 피곤해서 뻐근한 걸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좋아. 당분간은 고블린 전쟁으로 정신이 없겠지만 몸은 더 버틸 수 있겠지.”
세수를 마친 네마냐는 세숫대야와 수건을 놓고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을 울렸다. 이제 시종 집사의 일에 완전히 적응한 스프란체가 나와 세숫대야와 수건을 거두었다.
“영주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고마워. 스프란체도 잘 지냈지? 헬레나 집사장하곤 진작 인사도 나눴는데 정작 당신은 지금 봤어.”
“워낙 영지 곳곳에서 구빈책을 하느라 바빠서 말입니다. 어느 정도 적당한 지위가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탓이겠죠.”
인구는 반년 만에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만큼 빈민도 늘어나 무료로 공급해야 할 식량과 옷가지도 적지 않았다.
“하긴 영지에 늘어난 인구만큼 관리 인력이 많지 않으니 영주관에서도 나서야 했겠지. 조금만 더 참아줘. 조만간 여유자금이 확보되는 대로 추가 인력을 모집할 테니까.”
“너무 늦지만 않으면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다들 영지에 활력이 붙는 걸 보고 의욕이 가득하니까요.”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는 스프란체. 그 얼굴에도 이미 상당한 그늘이 져 있었다. 영지가 예상보다도 월등하게 성장세를 이룩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직 그 효과를 모두가 절절하게 느끼는 건 아니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 비어 버린 방에서 네마냐는 마음을 먹었다. 그간 상대적으로 영지는 가신들에게 맡겨 두었다. 미하일과 아일라, 하라드의 능력으로도 영지는 충분히 잘 돌아갔지만 어디까지나 기존 토대 위에서였다.
“새 시대에 알맞은 영지가 되려면 결국 최고 책임자인 영주가 토대를 새로 만들어야지.”
세수 덕분에 먼지도 싹 씻어내고 정신도 예리해졌다. 미래의 계획을 다시 검토하기 좋은 기회였다.
[시스템]
촤르륵 펼쳐지는 목록들. 얼핏 보면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실은 이미 네마냐가 중요도에 따라 재정렬해 둔 상태였다.
“역시나 가장 중요한 현안은 바가반드의 공업기지 문제겠지. 그건 지금 미하일 등이 보두앵과 협의에 들어갔으니 곧 어떤 형태로든 결정이 날 테니, 완료.”
완료 처리한 문건은 비활성화되어 별도의 칸으로 옮겨졌다. 일종의 스케줄러가 되는 셈인데 직접 손으로 일정을 짜는 데는 재능이 없는 네마냐로선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공업기지가 완성되면 그래도 빈민이나 실직자는 많이 줄어들겠지. 지금까지 공장 두 개를 세운 것만으로도 많이 줄었으니까.”
자연스레 구휼 명목으로 소요되는 돈과 자원, 그리고 소모되는 인력도 절약할 수 있다. 바가반드의 행정은 인구 5만 명으로 세금을 걷고 병사나 좀 뽑아 쓰던 원시적 조직이었다. 지금 하야스단뿐만 아니라 제국까지 포함해도 그다지 뒤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흔한 중세국가 하나일 뿐이겠지.
“하지만 지금 돌리는 시스템이면 적어도 두 배나 세 배로 관리 인력을 늘려야 감당되겠지. 무엇보다 관리들의 기본적인 지식도 전문직에 가까울 정도로 늘릴 필요가 있고.”
[영지 행정 개혁]
[바가반드는 양적으로 급격히 성장했지만 모든 기반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먼저 충분한 성장을 이끌 수 있도록 인프라와 인력을 충분히 확보해야 합니다.]
영지에 필요한 점을 찾아가다 보니 결국 이벤트가 발생했다. 이른바 행정 개혁. 이서준으로 공무원 준비나 할까 설렁설렁 보던 그런 행정학 수준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현대 수준의 전문화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디서 어느 정도가 부족한지 알아보는 게 먼저겠지. 아무래도 계속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는 게 최선이긴 한데…….”
하지만 모든 시간을 영지에만 쏟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여전히 집무실 한편에 걸려 있는 지도를 들여보았다. 미하일이 위기감을 강조한답시고 붉은색 도료로 떡칠해 놓은 고블린 영역이 몹시도 두드러졌다.
“이제 황금모래펄에 이어 미크라야크 대공령의 저지대도 고블린 부족이 장악했댔지? 나날이 조금씩 가까워지는군. 마치 숨통을 조이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로 다가간 네마냐는 다르빌과 바가반드를 어루만졌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동서로 놓인 두 영지는 조금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말 그대로 치아와 입술의 관계……. 입술이 사라지면 이가 시리다는 게 이렇게 와닿을 때가 있었을까.”
그렇게 언제까지고 지도를 들여다볼 것 같았던 네마냐를 일깨우듯, 노크 소리가 났다.
“계십니까.”
바람에 이는 모래바람처럼 건조하고 칼칼한 인상의 목소리. 당장 이 자리에 적군이 나타나도 침착을 유지할 듯한 느낌이었다.
“어, 들어와도 돼.”
“나도 실례하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함께 양해를 구했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건 바흐람 그리고…….
“기다렸어, 바흐람. 내가 없는 동안 나코르잔과 타위비크 쪽 연락을 유지해 주느라 수고가 많았어. 다르빌 쪽에 시의적절하게 경고도 넣어 주었더군. 그쪽에서도 감사해하고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것치곤 틈틈이 나샤와의 폐허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던데. 보고를 안 하면 모른다지만 좀 너무한 것 아냐?”
“정보대의 생명은 비밀 엄수인데 너무하시군요.”
그 목석같은 바흐람과 농담을 주고받다니. 이런 사람이 영지에 있었나? 네마냐의 시선이 젊은 마법사를 살폈다.
[분석]
[실패: 분석이 불가합니다. 상대의 마법 이해도는 압도적으로 높으며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러고 보니 푸른색 머리칼마저 무척 돋보였다. 바흐람이 이런 사람을 데리고 다닐 이유가…… 잠깐.
“설마, 당신……!”
“쉿. 이제야 알아보는군. 이거 좀 섭섭한데 네마냐 경. 당신의 요청대로 여기까지 직접 온 거잖아.”
“각하께서 일전에 제게 알려 주신 대로 대마법사 키마라스 경께서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키메라. 키마라스. 설마 「변형」할 수 있다는 게 이런 걸 의미한 거였나.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대놓고 인간들 앞에서 돌아다녀도 괜찮은지 알 수는 없었다. 일단 바흐람의 이상한 눈치를 눈치챘으니 네마냐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무마했다.
“흠흠. 진짜로 만나 뵙는 건 저도 처음이라 실례가 많았습니다. 키마…….”
“키마라스입니다, 각하. 물론 다들 처음 이름 듣고 실수를 많이 합니다만. 제가 성수일 리야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하…….”
바흐람에게서 들은 소식은 크게 별다를 것은 없었다. 이미 비밀보고서로 받아본 내용이었다.
“나코르잔의 위기에 타위비크가 기꺼이 움직여 줄 줄은 몰랐어. 덕분에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우레이미야 군단도 놀랐을 거야.”
“그렇습니다. 직후엔 두 영지가 힘을 합쳐서 협곡 고블린까지 토벌했죠. 고블린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의 영지들도 놀란 눈치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바흐람은 처음 나코르잔 얘기가 나왔을 몇 달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바흐람, 당신 표정도 좀 달라졌어.”
“제가 말입니까?”
“그래. 나코르잔에 연락을 부탁했을 때도 정색하고 거절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우리 영지에서 나코르잔까지 연락망을 유지하고 있고.”
“필요한 일이니까요. 적어도 이번 건으로 군단이 곧 고블린이라는 생각은 조금 거둘 수 있었던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좋은 발전이야. 적은 최대한 줄이고, 아군은 가능한 한 늘린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이것만 믿고 가자고.”
말을 마친 네마냐는 옆에 있던 서랍을 열어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사자 몸통에 독수리 머리와 날개가 달린 작은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그리폰. 바가반드의 새로운 상징이었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키메라 대신 선택한 방법이었다.
“이번 작전은 정말 잘해 줬어. 나코르잔이 안전해졌으니 군단을 묶어 놓을 큰 기회를 만든 셈이지. 작전 비용을 더 줄 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말도록 해. 뭐든 필요한 게 있다면 얘기하고.”
바흐람은 별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주머니를 순순히 받아들었다. 그리곤 몇 마디 체면치레용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를 떴다.
“저 사람, 꽤나 부끄러워하는데?”
“당신도 그걸 느꼈군. 적어도 나는 몇 달 이상 만나고 나서야 지금 겨우 느끼는데.”
“내가 괜히 하야스단 대왕의 상징인 성수로 불리는 게 아니지. 당신처럼 알 수 없고 별난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지만.”
거의 언제나 말이 아닌 마나를 통해서만 의사를 주고받았던 터라 목소리가 무척 낯설었다. 하지만 적어도 키메라가 인간 마법사 키마라스로 움직이게 된다면 네마냐 자신에게도 부담은 덜할 것이다.
“어쨌든 무리할 수도 있는 부탁에 응해 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네마냐가 손을 뻗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지만 키마라스는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당신과 인간만의 일은 아니지.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고블린에 대해선 나 역시 강한 의구심과 두려움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왜 손을 내미는지는 모르겠다만.”
“아, 그냥 심심해서 뻗어 봤어.”
민망한 감정을 키마이라에게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무안한 손을 거두었다. 이런 사소한 것은 천천히 익혀 가면 그만일 뿐.
“그래. 기왕 한동안 나와 함께 할 테니까 내 동료들도 제대로 다시 소개해 줘야겠지?”
“일전에 봤던 그대의 동료들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마냐는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분명하게 손을 뻗으며 도와주겠다고 이야기까지 건넸다.
“그래. 고블린을 상대하기 위해서 동료로 골라낸 사람들이지. 조금 전 나간 바흐람처럼. 아마 당신도 좋아할 거야.”
그저 순진무구하게 사람 일은 모르는 얼굴의 키마라스. 네마냐는 그 얼굴에 다시 한번 확신을 보여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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