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아니의 에셀하톤 상단 지부. 바가반드 백작에게 왕성의 상황을 알려주었던 보두앵은 네마냐를 잠자코 기다렸다. 네마냐는 아쇼트와의 임시 휴전이 체결된 뒤, 보두앵을 찾아왔다.
“지부장님.”
“아, 네마냐 경께서 오셨나?”
“오랜만이야, 보두앵 지부장. 진작 찾아와서 감사 인사하는 게 맞는데.”
“천만의 말씀을. 사후 수습 때문에 바빴다는 건 잘 알고 있는걸. 자, 앉자고.”
“기꺼이.”
보두앵은 외눈 안경을 벗어 내려놓곤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요즘도 영지는 잘 돌아가고 있지? 광산업과 제조업이 이젠 확연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보고는 들었는데.”
“이게 다 어디 덕분이겠어. 손해가 컸을 텐데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상단의 공헌을 무시할 순 없지.”
“잊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으하하.”
이어 파이프를 꺼낸 보두앵은 꽉 막힌 재를 털어내면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상인과의 이야기가 현대인 바탕인 네마냐에게 오히려 편한 건 그런 단순함에 있었다.
“그래. 대강 돌아가는 사정은 알았어. 정말 바난드를 두 조각 낸 채로 고블린과 싸울 속셈이야?”
“정보가 역시 빠르군. 아직 공식적으론 휴전 회담이 진행 중일 텐데.”
찻잔을 내려놓으며 네마냐는 다시 영 감흥 없는 감탄을 표현했다. 그리고 조금 김빠진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맞아.”
“각오 제대로 했겠어. 너나, 엘레나 전하 모두. 굳이 힘을 반으로 쪼개더라도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던 건가?”
담뱃불을 붙인 보두앵은 폐부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들끓던 체내 마나가 진정되며 색깔이 한두 군데씩 튀던 시야가 바로 잡혔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네마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전이 얼마나 이어질지 그걸 전혀 예측할 수 없었지. 더군다나 고블린이 다르빌 공격을 준비 중이니 시간제한이 심각하거든.”
시간제한. 정해진 시간 안에 목적을 달성하는 임무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리고 네마냐가 눈을 감을 때마다 한쪽 구석에서 빛을 내는 임무창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타임어택: 선택과 집중]
[바난드 내전과 고블린 전쟁은 서로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또 그 충격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둘 모두를 피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바난드 내전을 진압할지, 아니면 고블린 전쟁을 속개할 것인지 결정해야 함.]
[앞으로의 진행 난이도와 사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지난 며칠 내내 자신을 깊은 고민에 빠트렸던 주범이었다. 이 문제에 비교하면 펜자르크의 같잖은 지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먼저 엘레나에게 그런 정보 없이 상황 판단을 부탁해 봤어. 그랬더니 그 녀석도 지금은 고블린 저지가 가장 급한 문제라는 걸 지적한 거지.”
차를 들이켜는 네마냐를 보며 연무를 뱉은 지부장. 그는 고작 열일곱에 지역을 들었다 놨다 하는 영주를 한번 시험해 보았다. 담뱃대를 내려놓으며 보두앵은 운을 뗐다.
“네가 애초에 다르빌을 어떻게든 지킨 이유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아니었나? 그러면 이미 타격을 입은 펜자르크 토벌을 위한 시간 벌이는 가능할 텐데.”
“그게 그리 말처럼 쉽지 않지.”
“흠.”
역시 가벼운 도발에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판단이 서 있었다. 연기를 한줄기 뿜어내며 지부장은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셈을 돌렸다. 보두앵의 판단 역시 네마냐와 다를 것은 없었다.
“서부의 네 영지를 하나씩 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방어자 처지에서 펜자르크를 막는 건 쉬워도 공수가 역전되었을 때도 쉬울 수는 없으니까.”
“맞아. 뭣보다 반군이 고블린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면 고블린 침공 동안에 버티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겠지.”
“진창길에 발목이 잡히듯?”
입에 물었던 파이프를 꺼낸 보두앵이 파이프 잡은 손으로 제스처를 취했다. 막 떠오른 신박한 비유는 꼭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네마냐도 맞는 비교라며 수긍했다.
“그래. 그러느니 기왕이면 우리보단 저들이 발목이 잡히도록 해야겠지. 바난드의 수렁에 아주 깊숙이.”
“바난드의 수렁.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설마? 나는 왜 그 지역을 아쇼트 왕자 관할로 정한 건지 의아했는데 말이야.”
“햐, 역시 제대로 꿰고 있구나. 궁중 관리들마저도 이해 못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설마 이것까지 맞히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네마냐의 감탄에 조금 민망해진 모양이다. 파이프를 꺼뜨리고 탁탁 털어낸 보두앵이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파르티즈를 저들 영지로 넘겨준 게 실은 넘겨준 척이었단 거군.”
파르티즈. 왕국의 서부 최전방에 돌출된 산골 깊숙이 위치한 영지다. 제국이나 제국 보호령인 외국과 맞닿은 곳인 만큼 국왕 충성파 영주와 군대가 배치된 곳이다.
“파르티즈를 넘겨주겠다고 하면, 저들도 일단 받을 수밖엔 없지. 포기한다고 하면 영지 하나도 접수할 능력이 없다는 공식 선언이니까.”
가뜩이나 허세를 부리며 통치자 자질이 있다고 유세했던 아쇼트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처음엔 영지 하나를 내놓자는 이야기로 알아들은 바누라트 등이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이내 네마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궁중의 의견도 정반대로 바뀌었다.
“그래서 고블린이 바난드를 붙들어두기 위해 아쇼트를 이용한 걸 되돌려주는 셈이군. 파르티즈를 일부러 내어주곤 알아서 그곳 세력에 발이 매이도록.”
“아쇼트는 엘레나의 화려한 행적에 주눅이 든 데다 야망과 질투심도 크다고 하지. 펜자르크가 말린다고 해도 아쇼트가 계속 거기다 병력과 자원을 꼬라박게 될 거야.”
“거기다 파르티즈 영지가 산악 깊숙이 틀어박혔으니 설사 전쟁이 벌어져도 소모전만 이어질 테니까. 정말 무서운 일이군. 피할 수 없는데 끝나지도 않을 전쟁이라니.”
두 사람은 그 후에도 한동안 여러 담소를 나누었다. 특히 가장 핵심이 되는 이야기는 고블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보급과 물자 공급이다. 그 시작은 보두앵이 상단의 한계를 선언하면서부터였다.
“그간은 우리가 여러 보급품과 완성된 물건을 들여와 전쟁을 지탱할 수 있었어. 하지만 본격적으로 대전쟁이 시작되면 모든 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댈 수 없을 거야.”
“그렇겠지. 먼 서부 대륙의 게람나에서 들여오기엔 비용이 많이 들고, 제국은 제국대로 전쟁 준비로 다 들어가겠지.”
한숨을 쉬며 보두앵은 다시 파이프를 집어 들곤 연초를 구겨 넣으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이곳 주민들에게야 미안한 소리지만 우리도 참 자괴감에 빠진다니까. 본격적으로 활동할 기회건만 정작 생산기지가 없으니.”
마땅한 생산기지가 없이 보따리상처럼 물건을 멀리서 들여오는 처지. 그것이 현재 에살하톤의 근본적인 문제였다. 바난드와 성국, 다르빌에 독점 공급계약을 맺었다지만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그런 공급이 가능할진 알 수 없었다.
“최근에 몇 가지 기호식품이나 잡화류 공급이 중단되었다는 불만이 영지에서 있었지. 그것도 공급 능력 한계 때문이었어?”
“아, 역시 그것도 알고 있었군. 맞아. 최근엔 선단의 적재 용량이 한계여서 몇 가지 물품이 공급 중단 상태지. 최대한 생필품은 유지하려고 하지만.”
“선박을 더 건조하는 계획은 없어?”
“그게 쉽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아르사니아, 이라크시스 두 강에 배를 더 등록하려면 제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거든.”
제국은 동부 제국 상단의 경쟁자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바난드와 바가반드가 더 부강해져서 제국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도 싫긴 마찬가지. 동맹의 탈은 쓰고 있다지만 언제든 웃는 낯으로 견제 조치를 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바로 선박 등록을 막거나 도로 검문을 강화하는 것 같은 사소한 문제들 말이지.
“그렇단 말이지…….”
잠시 고민에 빠졌던 네마냐의 머릿속. 불현듯 스치는 해결책이 떠올랐다.
“잠깐, 그렇다면 영지의 물품 부족이나 상단의 공급 한계를 모두 해결할 방법이 있지 않아?”
“모두 해결한다니?”
파이프를 뻐끔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던 보두앵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마냐는 다시 그 와중에 예전에 받아 두었던 임무 하나가 떠올랐다.
“잠시만. 확실한지 생각 좀 해 보고.”
잠시 눈을 감고 쌓여 있는 임무트리를 헤집었다. 완료와 미완료가 잔뜩 섞여 있는 더미를 헤치자 아쇼트 왕자의 성년식 당시 받았던 임무가 눈에 띄었다.
[추가 임무: 정보 수소문. 성기사단과의 협력 방법을 찾아보자.]
[선결 과제: 신성 기사단용 장비의 생산, 공급 능력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보상: 하야스단에서의 전반적인 명성 외.]
처음에 얼핏 보았을 때는 ‘연결’로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협력’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황과 진행에 따라서 조금씩 내용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이미 성국이나 신성기사단과 동맹 관계니 협력 쪽으로 방점을 찍으라는 것이다. 네마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내 제안은 이거야. 아예 하야스단에 공급할 물품의 생산기지를 내 영지에 설치하자고.”
야심 차게 고안해 낸 답은 바로 바가반드를 생산기지로 만드는 것이다. 비록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의 시대는 아니지만 이미 마정석 제조업만으로 영지 경제는 일어서고 있었다. 그 흐름에 쐐기를 박을 참이었다.
“생산기지? 무기와 기타 제품 생산지를 바가반드에 유치하겠다, 이 소리로군.”
“나쁜 소리는 아니지 않아? 어쨌든 네 상단과 우리 영지는 동맹을 맺은 상태지. 거기다 마정석 채굴 및 가공 공업도 이미 자리를 잡았고.”
“다른 산업도 집중시키면 이익이 된다, 이런 소리인 건가?”
“그렇지. 시장에 가까우면서 동시에 자원 산지와도 가깝지. 거기에 마지막으로 마정석 가공품이 필요한 높은 가치의 제품 생산도 유리하겠지.”
현대적 상식에 따르면 이건 규모의 경제다. 서로 관련이 있는 산업이 유리한 지점에 집중되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거지. 그런 이론을 배우진 못했지만 보두앵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듯하다고 수긍했다.
“네마냐, 자네 말이 십분 옳은 것 같아.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군.”
“문제라니?”
“하야스단 전체와 그 너머까지 공급할 생산기지로 작동하려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해.”
“그렇지.”
어느새 파이프를 완전히 내팽개친 녀석은 다시 안경을 쓰고 서류 더미를 뒤적였다. 그리고 이내 지저분한 글씨가 가득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녀석이 읊기 시작했다.
“바가반드의 현재 인구. 음, 대략 칠만 명 정도 되는군. 거기서 성인이 대략 절반인 삼만 오천이지. 그중 삼만은 다시 농업인이고.”
“그래. 가스파리얀 시대의 보고서야.”
“이제 겨우 1년 지났는데 달라져 봐야 얼마나 달라졌겠어.”
직접 바가반드 영지의 크고 작은 변화를 겪어 본 보두앵이다. 그런데도 절대적인 수치의 추이는 큰 차이가 없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마냐는 회심의 웃음을 흘렸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지금부터 내가 읊어 주는 숫자에 놀라지나 말라고.”
이 모든 숫자는 네마냐가 비밀리에 재무관 미하일에게 지시한 인구 조사의 결과였다. 어느 정도로 영지의 구조가 바뀌었는지 알아야 다음 발전을 계획하고 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총인구 십만 천오백 명, 개중 성인이 대략 육만 명. 농업 인구는 꽤 줄어서 삼만 명 이하가 되었어. 대신 광공업 인구가 크게 늘어서 만 오천 명이 넘지.”
자신이 들은 숫자와 문서를 대조하면서 하나씩 곱씹던 보두앵의 표정이 상당히 딱딱해졌다. 의구심에 찬 표정이 네마냐에게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라고? 고작 일 년 지났는데 어떻게 그런 극적인 변화가 가능하지?”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너희 상단이 도와준 게 굉장히 유효했다고. 그때 덮어 놓고 적극적으로 밀어준 덕분에 산업을 전환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지.”
막대한 자본과 상품의 유입. 전통적인 농업이 무너지는 기후 상황에서 광공업으로 영지 경제를 바꾸려면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채굴 마정석의 상당수 몫을 에살하톤에 떼어주어도 아까울 게 없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형성된 동맹 관계로 더욱 큰 이익인 생산기지를 유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꿀꺽.
보두앵은 성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생각보다도 달달한 제안이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티는 내지 않으려 했으나 문서를 내려놓는 손가락은 긴장감에 살짝 떨었다.
“확실히……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 제안이야. 네 영지나 우리 상단으로서나.”
“그럼 승낙하는 건가?”
“확실하게 경제성이 있는지 검토를 거쳐야겠지만, 모든 상황을 살펴보면 문제는 없을 거야.”
사실 지부장인 보두앵 자신이 명령을 내린다면야 타당성 조사 같은 절차도 필요 없겠지. 하지만 이런 거대한 문제는 직접 검토하고 보는 깐깐한 성격이 있었다. 네마냐도 보두앵이 안경을 쓰고 있는 한은 그렇다는 걸 본인만큼이나 잘 알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이렇게 의심할수록 매번 자신을 신뢰하게 되는 결과로 돌아올 테니까.
‘이 녀석을 완전히 동료로 끌어들이려고 꽤나 아등바등하긴 하지. 하지만 일단 끌어들이면 그 이상의 도움이 될 녀석이니까. 지금으로서도 그렇고.’
어쨌든 이제 바야흐로 바가반드 영지를 자급자족의 단계까지 끌어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회귀 이전의 네마냐라면 그 정도로도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세운 목표는 이제 지금 정도로는 그칠 수 없다.
“자, 그럼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지금 당장 우리와 동행해 주실까요. 보두앵 지부장님?”
머릿속에서 폭주하는 셈을 못 이기고 안경을 막 벗던 녀석이 깜짝 놀라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미 네마냐는 몸을 일으키며 손을 뻗은 상태였다.
“간다고? 갑자기 어딜?”
“사실 이미 엘레나와 내가 이끄는 별동대가 다르빌로 가기로 했거든. 이참에 우리가 협력해서 완성한 다르빌 프로젝트도 시찰해 보라고. 그다음엔 바가반드 영지로 가서 타당성 검사인지 뭔지도 해야지.”
“허…… 뭐야, 그럼 설마 엘레나 전하가 지금 쭉 밖에서 기다렸다는 이야기야?”
“하하……. 그러니까 얼른 움직이자고.”
막판에 생각할 여유는커녕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반강제로 상황을 조성해 버렸다. 순조롭고 평등한 협상이 이어진다고 생각하게 만든 다음, 결과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유경험자가 보일 수 있는 여유란 거지, 하하.”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로 그렇게 짧은 만남은 끝났다. 그리고 이제 한 명의 인원이 더 늘어난 별동대는 아직 이른 아침, 불완전한 바난드의 고향을 떠났다.
목적지는 한 곳. 다시 전장의 구름이 모여들고 있는 다르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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