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궁전의 복도. 하얀 얼룩처럼 보이는 점이 군데군데 묻어나는 상앗빛 대리석이 기둥과 바닥, 천장 그 모든 곳에 넘쳐났다. 누구나 이곳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다면 압도당할 것이다.
“휴……. 일단 이걸로 끝인가.”
사람 열 명은 위아래로 세워야만 간신히 닿을까 말까 한 높이. 난쟁이족이 남긴 이 유산에 익숙한 엘레나는 그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멍한 눈으로 복도를 걸었다.
“어이, 괜찮아? 전하께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한쪽 구석 벽에 기댄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엘레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왔구나.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 정도야, 뭐. 마시스 산에서 죽을 뻔한 뒤로는 항상 각오하고 있지.”
왕의 맏이인 엘레나에게 이렇듯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네마냐.”
“전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전하는 무슨. 사석에선 편히 하라니까. 뭣보다 승리라고 해도 난 한 게 없는걸.”
“스스로 짐을 지기로 결단을 내리고, 병사들에게 동기를 주었지.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비록 반쯤은 상황이 만든 것이긴 하지만 그래, 자신이 결심한 것이다.
“폭발은 아마도 네가 싸울 때 발생했겠지. 몸은 어때, 괜찮아?”
“어, 응. 별문제는 아니었어.”
애써 태연한 대답이지만 네마냐는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완벽한 상태의 던전 재앙을 직접 경험한 데다 예상을 상회하는 빠른 촉수 덕에 한동안은 검은 마나에 뒤틀린 체내 마나를 회복해야 할 판이었다.
“국왕께서는 어떠신 것 같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펜자르크 일당이 뭔가 손을 쓴 것 같아서 걱정이었잖아.”
“응. 하라드 경과 의사들이 함께 침실에서 살펴보고 있어. 하라드 경의 말로는 큰 문제는 아니고 적마정석 영향을 받은 기간도 짧아서 금방 나을 거래.”
“다행이네.”
만에 하나 국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버렸다면 그림이 꼬였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갑자기 왕위를 이어야 할 상황이 되면 곤란해지니까. 아직 엘레나 너를 지지할 세력이 온전하진 않지.”
“맞아. 적어도 숙부를, 그리고 왕실을 위해 나를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만 말이야.”
“언제까지나 그렇진 않을 거야.”
너무 어두운 얘기만 했나 싶어진 네마냐는 고개를 저으면서 꼭 그렇게만 볼 이야기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 뒷배를 이제 천천히 네 세력으로 만들어 가면 되는 거야. 이제 누가 보더라도 아쇼트는 군주의 자질을 가졌다곤 보기 어려우니까.”
“……펜자르크가 이대로 가만히 물러설까.”
엘레나의 물음에 네마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 하지만 당분간은 상관없어. 맞서 보니, 펜자르크의 직계 세력에겐 적마정석이 거의 없었어.”
“없었다고?”
“응. 던전 현상을 일으킨 건 검은 용병들이었어. 일전에 아쇼트 광장 사건 때 기억하지?”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몸서리가 쳐지는 기억이었다. 용병 각자의 개인기는 대수로울 것이 없는 하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적마정석을 이용한 마법과 그것을 교묘하게 조작해 검은 던전을 만들어내는 기술만은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한 그런 용병 집단은 없었어. 모든 용병과 그 클랜은 성국에 등록해서 검토를 받아야 하거든.”
“그랬겠지. 제국 이상으로 집요하게 적색 마나를 검출하는 성국이 있으니까. 그런 용병이 있을 수가 없겠지.”
“안 되겠네. 지금 당장 트라야브나에게 연락해 봐야겠어.”
엘레나가 움직이려 했다. 네마냐는 몸을 일으켜 앞을 가로막았다.
“갈 땐 가더라도 잠깐.”
“왜? 빨리 신관회가 조사를 해야 확인할 수 있지 않겠어?”
“설마 통신망을 이용할 건 아니지?”
“왜, 안 돼? 펜자르크도 꺾이고 중앙 통신소도 우리 군이 장악했는데.”
“응, 안 돼.”
네마냐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만류했다.
“실제 마나를 오염시킨 주범은 펜자르크보단 그 용병대였지. 그러니까 아직 안심할 수 없어. 아니 신관회 소유의 통신구 몇 개도 도난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러니까 아직 이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엘레나는 다시 뚫렸던 속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펜자르크와 그 지지파도 아직 세력이 남아 있는데, 정말 문제군. 만약 그 용병단이 고블린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비밀조직이라도 된다면 어떡하지?”
“불길한 추측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게 아마 답이지 않을까 싶어. 고블린이 지금 당장에라도 쳐들어오기엔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은데.”
손이 저절로 이마를 짚었다. 네마냐는 고민에 빠진 엘레나를 보면서 재빨리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기억을 헤집었다.
‘분명 뭔가 상황을 정리할 계기가 필요할 텐데. 우리에게 유리한 카드가…… 아!’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자 엘레나가 바라보았다. 잠깐 뻘쭘해진 네마냐는 뒤통수를 긁으면서 자신의 뇌리에 떠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칼주안 관문. 거기가 있었어. 펜자르크가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는 이유. 그가 만약 병력을 빼려고 해도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면 올 수 없어.”
“좁은 산악 도로로 우회를 할 수 있지만 너무 속도가 느리고, 그 사이에 파드 단장이 정예 기사단으로 영지를 점령하겠지.”
사면초가의 형국이란 바로 이런 걸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적어도 서부의 반란 영지를 진압할 순 없어도 협상에서 엘레나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순 있을 것이다.
“정말 네 말대로야. 그렇게 되면 임시로 타협을 하더라도 펜자르크나 아쇼트에게 과도하게 양보하지 않아도 되겠지.”
“괜찮겠어? 펜자르크에게 어쨌든 나라 영지의 절반이 손에 들어가는 셈인데.”
아직 자신의 손에 들린 문서를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키메라와 바흐람이 다르빌에서 보내온 연락이었다.
[나코르잔, 야전에서 고블린 군단에 대패. 고블린의 대규모 병력이 다르빌로 진군할 예정으로 보임. 마법사의 탑이란 존재도 다르빌 근교에 출몰한 것으로 보임. - 바흐람]
손에서 진땀이 배어났다. 바로 이런 때를 대비해서 다르빌을 자유시로 굳히고 무지막지한 투자를 감행했다. 정말 8만의 군단을 막을 수 있을지는 닥쳐 봐야 알겠지만 말이지.
‘엘레나 녀석이 먼저 결정을 내리면 그다음에 얘기해 주는 게 맞겠지. 어차피 선택 순서의 차이야.’
어떤 식으로 진행되더라도 자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먼저 힘을 기울여 바난드의 상황을 진정시키고 나면 그만큼 고블린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있다.
‘만약 임시로 휴전하고 고블린 전쟁에 뛰어든다면 국내 통일까지 걸리는 시간과 자원 소모를 피할 수 있겠지. 어느 쪽이든 나쁜 건 아니지만…….’
하지만 역시나 다르빌 코앞까지 적이 닥쳤다는 긴급 보고문을 손에 든 입장에선 뭘 해도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게 사실이다. 일단 엘레나의 판단을 기다릴 뿐이었다.
“결정했어.”
“빠르네.”
“가장 어려운 결심은 이미 다 해 버렸거든. 이제 겁날 것도 없어졌어.”
의외로 엘레나의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대권에 도전하느냐를 두고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듯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그리고 엘레나는 자신의 결정을 공개했다.
“우리는 진정한 적이 누군지 알잖아. 가장 중요한 건 그쪽 일이지. 다르빌로 가자.”
“아쇼트 문제를 얼렁뚱땅 마무리할 수 있겠어? 내가 보기에도 그게 최선이긴 하지만.”
“이 지저분한 판에 끼기로 마음먹었을 때 명예와 오욕을 모두 짊어지기로 한 거야, 네마냐. 같이할 친구만 있다면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니지. 그렇지 않아?”
엘레나는 말을 마치면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사슬을 서로 엮어 만들어낸 두툼한 사슬 장갑을 덮은 손이었다. 네마냐는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그럼. 같이 가면 적어도 외로울 일은 없지. 그런 의미에서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유감이지만, 자.”
“뭐지?”
엘레나는 네마냐가 건네는 두루마리 문서를 드디어 알아보았다. 그건 일전에 자신이 정보대라는 장교의 부탁을 받아 전달했던 문서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특히나 문서를 봉인한 도장의 무늬, 저건…….
“그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정보대 문서야. 무슨 내용일지는 대강 짐작은 하겠지만.”
“고블린 침공.”
말없이 시선을 나누는 두 사람. 짧은 머리를 온 힘을 다해 묶어 올렸던 엘레나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타협하기로 했다면,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겠어. 만약 펜자르크가 고블린과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먼저 닿아 버리면 대번에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겠지.”
“그렇네. 동감이야.”
엘레나도 마침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을 사실상 절반으로 나누고 분열을 고착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면 적어도 더 불리한 조건이 생기기 전에 결착을 내야 한다.
“좋아. 나바자르트 남작과 호바니샨 자작의 명망이 높으니 대신 중재를 부탁해야겠어. 궁지에 몰린 아쇼트나 펜자르크는 현 상태에서 휴전하자는 걸 거부할 수 없을 거야.”
두 사람은 결연한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쪽으로 뻗는 강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평야 지대, 그 너머에는 지케른의 성국 그리고 다르빌 자유국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차가운 정적 속에서 이미 실무자끼리 합의된 사항은 빠르게 서류로 정리되었다. 총책임자로 임명된 나바자르트 남작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상대측 테이블에 앉은 펜자르크를 보았다.
“자, 그럼 이제 합의 조건에 대해선 서로 이해가 닿은 것 같군. 어떤가?”
“그렇구려. 서로의 오해를 불식할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오.”
서로 표정을 감춘 채 환장할 소리를 늘어놓는 위선자들의 자리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호바니샨 자작은 분통이 터져 할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공식 서열에서 한 등급 아래인 나바자르트가 대표가 된 이유기도 했다.
“그럼, 펜자르크 영지와 왕국직할령 중 서부 네 곳의 영지를 아쇼트 왕자의 아래로 두고, 동부 여섯 영지는 엘레나 전하의 아래에 두게 되었소. 동의하시오?”
아쇼트 지지파는 총 다섯 영지, 그중 중립을 표방한 파르티즈를 제외한 네 영지를 차지했다. 나머지 동부와 칼주안 관문을 포함한 여섯 영지는 엘레나의 관할이 되었다.
“아쉽게 되었소, 남작. 할야크 남작께서도 평소 계승법에 대한 신념을 보여 주셨거늘, 신념과 반대되는 세력에 힘을 싣다니.”
“상속법 문제는 한 가문의 문제지만, 현재 우리의 내전은 왕국 온 백성의 목숨과도 직결된 문제거든. 당연한 결정을 내린 셈이지.”
“……현명한 선택이었길 바라오.”
펜자르크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궁정 안팎을 이리저리 눈치껏 살폈다.
“음, 엘레나 전하나 바가반드 경은 오지 않았소? 오늘 혹시 뵐 수 있을까 했는데.”
“그럴 리가. 그분들은 바쁜 분들이니 쉽게 보기 어려울 걸세.”
호바니샨은 차갑게 대화를 끊었다. 그런 적의야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펜자르크는 어깨를 들썩였다.
“이번에는 운이 좋지 않아 이렇게 불충분하게 끝났네. 하지만 머잖아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정화할 생각이니까.”
“아무리 여기서 우겨 봐야 자네가 뼛속까지 충성하는 미크라야크 대공 전하는 오지 못한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 때 집에 돌아가 푹 쉬어라.”
선언과도 같은 대화 종료를 알리는 목소리. 나바자르트는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두 일행은 서로 아는 체도 하지 않으며 회의장 양쪽으로 벗어나 헤어졌다.
“……연기는 그럴듯했나?”
“잘하셨어, 형님. 가뜩이나 바누라트 님이 내부 수습하느라 바쁘신데 엘레나 전하와 네마냐 경이 이미 다르빌로 떠났다는 소리까지 할 순 없지 않소.”
“그렇지. 그랬다간 대뜸 있는 조약도 파기하고 다시 전쟁하자고 덤빌 놈들이니까.”
두 사람은 한밤의 달빛이 창백하게 쏟아지는 정원 호숫가를 살피면서 잠시 말을 잃었다.
“작년만 해도 일이 이렇게 급하게 전개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인생 참 파란만장하네.”
“뭐, 뒷세대에 보탬은 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짐이라도 하나 덜고는 가야 하지 않겠소?”
그리곤 정원석으로 세워 둔 바위 위에 호바니샨이 걸터앉았다. 품속에서 호리병을 꺼내 들며 하는 말.
“그러지 말고 여기서 술이나 듭시다. 맨정신에 잠들긴 틀린 것 같으니.”
“쯧쯧.”
혀는 찼지만 나바자르트 역시 옆의 한 나무 그루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 *
그 시각, 왕성 바깥의 파괴된 주택가 골목.
“뭐라고! 군단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단 말인가? 그걸 이제 나한테 알려 주면 어떡하나!”
“설마 그간 연락이 끊긴 사이에 타협해 버린 겁니까? 어떤 조건으로?”
낭패였다. 펜자르크는 엘레나 측이 정전을 요청해 온 게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을 더 압박하지 않고 정전에 만족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그 이유가 밝혀진 셈이었다.
“그 승부욕 강한 엘레나가 뜻을 가지고 나섰을 때 어째서 쉽게 물러섰나 했지. 설마, 대군주께서 움직였으리라고 어떻게 생각했겠어.”
“……솔직히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빠지리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우리 길드 쪽으로서도 낭패입니다. 군주 우레이미야 대족장께서는 큰 흐름은 상관없다 하십니다만…….”
일반 통신구와 달리 아주 값비싼 장치를 달아 영상 송수신이 가능한 영상구의 빛이 반짝거렸다. 펜자르크는 한숨을 쉬면서 대화를 이었다.
“자네들이 보내 준 병력은 대폭발과 함께 몰살했네. 당장은 우리 세력이 후방을 장악할 테지만, 자네들의 추가 지원도 필요하네.”
“당장은 고블린 군단 지원에 돌릴 인력도 부족합니다. 조금만 참으시죠. 곧 마법사를 더 모아서 보내겠습니다.”
―스륵.
통신이 끝나고 영상구는 만약의 도청을 대비해 린넨 천으로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이번엔 꽤나 보기 좋게 당했군. 지금쯤 나바자르트나 호바니샨은 즐거워 죽겠지. 즐거워할 때는 오직 지금뿐일 거란 걸 모르고 말이야.”
그렇게 어느 텅 빈 폐허 한가운데서 불길한 빛에 둘러싸인 펜자르크. 결단코 꺾이지 않는 복수의 화신이 될 작정이었다.
‘원하는 뜻을 이룰 때까지는 고블린조차 나의 수단으로 실컷 써먹어 주지. 그때까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의 세계를 뒤엎을 기세로 고블린 위기가 닥치는 이런 상황. 그러나 그것마저 새로운 기회로 삼아 도약하려는 음모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인간의 진정한 적은 오직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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