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검은 그림자. 어쩌면 처음 그 이름을 지었을 때도 이중 강조가 어색했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만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림자 자체도 이미 검다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왜 검은 그림자라고 했는지 알 것 같군. 그림자 정도가 아니라 새까맣잖아.”
사제 하나가 자신의 그림자와 던전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네마냐는 머릿속에서 익숙한 공습 경보 사이렌이라도 울리는 듯 위기 상황이라는 걸 느꼈다.
“당연하지. 이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는 데다 그 질서도 정반대니까.”
“하지만 최근 수도에서 몇 번 있었던 검은 던전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이번의 것이 정말 제대로 된 완전한 검은 던전이거든. 제대로 걸려들었어.”
이를 악물었다. 일전의 허술하고 불완전했던 던전이라면 그 마법을 구현한 사람만 족쳐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 마나를 잡아먹어 자라나는 던전이 아니라 마법사의 마나 공급으로 강제 성장한 버전이니까.
“만약 저게 진짜라면 상대할 방법이 없습니다. 성력으로도 막을 수가 없을 겁니다.”
갈라모 사제가 암담하다는 듯이 결계에 달라붙은 상태에서도 말을 덧붙였다. 네마냐도 마찬가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기껏해야 자기방어밖에 안 되지.”
“제대로 알고 있네? 하지만 그래서야 재미를 줄 수 없는걸. 좀 더 악착같이 덤벼 보라고.”
복면의 손에서 검은 기류가 뭉게뭉게 피어나더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마냐 쪽을 덮쳤다.
“조심하세요!”
사제 하나가 빛줄기를 네마냐 방향으로 쏘았다. 검은 광선을 막아 낼 순 없었지만 적어도 방향은 비켜가게 할 수는 있었다.
“이크.”
“흠, 놀라지 않는데, 영주님.”
“그래. 던전은 적어도 기록에 있었으니까.”
절반 정도는 사실이다. 진짜배기 던전에 대한 공포와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반은 괴담에 가까운 내용으로라도 전하니까. 하지만 네마냐 자신은 어떤가. 고블린 범벅이 된 아포칼립스 세계까지 한번 경험하고 회귀한 사례 아닌가.
“고작 이런 거로 놀라기엔 내가 겪은 사연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이제 그림자 던전은 놀라기보단 피곤한 일에 불과했다. 네마냐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가죽 주머니에 싸여 있던 그것은 아콜타데리움, 그러니까 합금-마정석으로 정성스레 제련한 단검이었다. 합금 재료가 되는 원광석이 아직 수급이 충분하지 않아 아직은 네마냐조차 단검이 고작인 수준이었다.
‘그래도 성능 하나는 발군이겠지.’
천만다행으로 복면 마법사가 펼쳐낸 검은 그림자는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갈라모 사제가 펼쳐낸 신성 결계가 제 역할을 한 셈이었다.
“다행히 던전이 더 커지진 않습니다. 결계가 한 발 더 빨리 가동된 덕분이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갈라모 신관님. 덕분에 이제 저것 하나만 잡으면 되겠네요.”
네마냐가 검을 든 손으로 지긋이 가리킨 곳엔 검은 옷의 마법사가 약간 당황한 듯 던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던전의 성장이 멈춘 거지?”
“당연하지, 이 바보야. 너희도 아직 던전에 대해선 제대로 된 운영법을 몰랐구나.”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로 반쯤 비웃는 말을 건네는 네마냐였다. 그림자 던전이 결국 진압된 건 신성계 마나가 도입된 덕분이었다.
‘가장 약한 백색 파장의 빛을 가진 마나라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그게 정작 가장 강한 적색 마나의 확장을 저지하는 수단이었다니.’
거의 50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애초에 백색 마나가 신성계로 부여되었던 이유도 잊혀버렸을 뿐이었다.
“하라드가 에데시온의 스승을 찾아가서 고문서고까지 뒤져서 찾아온 보람이 있었군요. 역시 신성계 결계 안에선 마나 흡수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 신관인 저조차도 그건 미처 몰랐던 정보로군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필요 없는 정보가 되어 버린 지도 벌써 수백 년이니까. 어쨌든 분명한 건, 우리 상황이 나쁘진 않다는 거죠. 결계 잘 부탁합니다.”
“예? 아…….”
네마냐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단검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당황하면서도 계속 지루하다는 듯 한 손에 든 지팡이로 다른 손을 두드렸다.
“이제 본 실력을 보여 주는 건가?”
“피차 방해되니, 얼른 끝내자고.”
“아주 좋아. 자, 오라고. 특별히 어린 녀석이니 기다려 주지.”
“나일리지 드립은……. 그래, 시작하기 전에 네 이름은 뭐지?”
어차피 정보를 얻으리란 기대는 없었다. 다만 혹시 한 조각이라도 더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이름을 물어보았을 뿐. 하지만 역시 용병답게 고용자나 자신의 정체도 밝힐 리는 없다.
“어둠에서 나와 어둠 속에 죽는 용병에게 이름이란 건 가당찮지. 어서 오기나 하거라!”
“후회하지 말라고.”
네마냐는 심호흡과 함께 눈을 한 번 감았다. 빠르게 켜진 화면에서 골라낸 것은 「화술」 스킬트리 중 「시선 효과」 항목에 들어 있는 기술이었다. 이름하여, 「위압」. 시선만으로 상대방에게 일정 확률로 판단력을 흐트러트리는 효과가 있었다.
―부릅.
네마냐가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순간 경련에라도 걸린 듯 몸을 움찔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의 대처 능력 저하.
‘충분하지.’
하라드에게 배웠던 대로 마나를 짤막한 검신 곳곳에 균등하게 불어넣었다. 많은 마나를 넣지 않았는데도 검에서 오라가 솟구쳤다.
“오라 검! 그걸 네가 어떻게? 설마 수염도 안 난 녀석이 소드마스터를 달았다고?”
“소드마스터는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뭔가인 것 같긴 하지.”
―쨍!
마치 가위에서 풀린 것처럼 푸드덕거리며 재빨리 마법사는 지팡이를 단단히 굳혔다.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는 단검과 지팡이. 두 사람은 반작용 덕분에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걸 쉽게 풀어내다니. 역시 보통은 아닌걸?”
“너야말로. 설마 검은 그림자를 갖고서도 우리가 열세에 처할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펜자르크에게 병력이라도 달라고 할걸 그랬군.”
“그게 바로 네 실책이지.”
“하지만 그렇게 쉽게 죽어 주진 않는다!”
―파팟!
검은 기류가 재차 소용돌이치며 달려들었다.
“큭!”
미처 막지 못한 공세에 네마냐는 재빨리 단검을 들어 가로막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기류는 방향을 틀어 검을 피하더니, 네마냐에게로 달려들었다.
“크악!”
온 정신을 정면을 향해 집중하고 있던 네마냐는 충격을 제대로 받아 후방으로 밀려났다. 다행히 무릎을 꿇으면서 자세를 낮춘 덕분에 날아가진 않았다.
“괜찮습니까.”
근처에 있던 사제 하나가 재빨리 다가와 회복 주술을 걸어주었다. 당장 낫는 치유 마법은 아니고 부작용 없도록 회복력을 보태 주는 방식이었다.
“전투 상태에서 회복 마법을 썼다간 체내 마나가 뒤엉킬 수도 있어서 쓰지 않았습니다.”
“휴, 다행히 많이 다치진 않았어요.”
“만만치 않은 것 같군요. 저희도 지금부터 함께하도록 하죠.”
“부탁합니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야 제가 하고 싶은 광산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일상으로의 복귀, 지금 누구나 다 애달파하는 이야기일 겁니다.”
이름 모를 사제 하나가 정말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며 건넨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 네마냐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쐐액!
어디 휴식을 취하냐는 듯 일행을 노린 던전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때로는 예리한 검으로, 어떤 때는 리치가 긴 장창이 되어 덮쳐 왔다.
“정말 기가 막힌 마법이로군. 무작위로 무기 종류를 소환하다니.”
“조심하십시오. 무기의 형태긴 하지만 어지간한 맹독보다도 훨씬 위험합니다. 잠깐이라도 스치면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군요.”
“역시, 아무리 흡수력을 차단당해도 적마정석은 적마정석이라 이거군. 한동안 엄호를 부탁합니다.”
“맡기십시오.”
어깨를 으쓱하는 세 명의 사제에게 인사의 고갯짓을 건네고, 네마냐는 다시 달려들었다.
―챙!
네마냐의 움직임을 예측한 것처럼 다시 촉수처럼 기다란 검은 기류가 뻗어 왔다. 이미 세 번이나 맞닥뜨리며 대충 움직임에는 익숙해진 차였다.
“세 번이면 네 녀석의 공격 패턴 같은 건 파악하는 데 충분하지. 막으면 오히려 파고드는 습성도 말이지.”
“오, 제법인데?”
동시에 다섯 가닥의 촉수가 닥쳐온다지만 네마냐의 배후엔 사제들도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쏘아내는 하얀 빛의 마나는 파괴력은 없다지만 검은 촉수는 마비시킬 수 있었다.
“크윽! 조무래기들은 방해하지 마!”
―쿠구궁
점점 다가오는 네마냐를 막지 못해 초조해진 마법사는 지면을 향해 검은 파동을 쏘았다. 지표면이 뒤틀리며 사제들이 선 곳이 흔들렸다.
“으아아!”
“땅, 땅이!”
“젠장, 아주 활용엔 도가 텄군.”
비록 던전과 신성력의 원리에 대해선 박식하진 않지만, 사용에 대해선 박사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네마냐도 이미 호흡 한 번이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근접전이라면 내가 이길 수가 없는데.’
거기다 애송이가 들고 있는 검이 무슨 재질인지는 몰라도 오라로 잔뜩 빛나고 있었다. 털끝이라도 스쳤다가는 자신조차 무사하기 어렵다는 건 분명했다.
“자, 와라!”
하지만 자신이 죽는 건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미 자신이 자신을 인식하면서부터 삶 자체에 어떤 가치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하잘것없는 목숨을 제물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
‘응?’
네마냐는 변함없이 짧은 검을 바로 세우며 상대를 향해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위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엔 먹히지 않았다. 심지어 오히려 가슴을 활짝 펼쳐 보인 것 아닌가.
‘이 광경, 설마 불길한 예감이…….’
마시스의 키메라 성소에서 맞닥뜨렸던 고블린 신관. 종말과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늘어놓던 그의 자살 폭발 공격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빠른 직감이 검은 마법사의 늘어진 소매를 가리켰다.
“젠장, 모두 피해!”
이미 검신은 마법사의 가슴팍을 향해 빨려들 듯 다가가고 있었다. 뉴턴 운동의 첫째 법칙, 일단 외력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그 움직임을 계속하는 관성을 갖는다는 그것. 야속하게 이곳에서도 그 법칙은 여전했다.
“그게 무슨……!”
사제들은 무슨 소린지 찰나의 외침에 답하지 못했고, 그나마 눈치가 빠른 갈라모가 마지막 순간에 모든 성력을 정면으로 집중했다. 아주 짧은 순간, 검은 그림자는 점으로 되어 사라지더니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쾅!!!
격렬한 폭발. 불과 보름 전쯤, 아쇼트 광장을 증발시킨 폭발과도 비교가 안 되는 대규모 폭발이었다. 작은 광장과 거리의 돌기둥이 사정없이 파괴되고 사방으로 나뭇가지와 흙먼지가 휘날렸다. 사람 따위는 가볍게 분해할 만한 충격파가 도시를 휩쓸었다.
* * *
―쿠쿠궁!
거대한 버섯 형태의 구름 기둥이 사자문 뒤편, 아니의 시가지 한구석에서 솟아올랐다. 눈 깜짝할 순간에 족히 수 킬로미터는 될 법한 높이로 치솟은 것이다.
“아니, 저게 뭐야?”
바누라트의 놀란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 거대한 충격파가 열기와 바람을 대동한 채로 도시의 앞에 늘어선 평원을 강타했다.
“끄악!”
“크헉!”
“으아, 이 무슨……!”
펜자르크의 병사들은 일제히 충격파에 밀려 앞으로 쓰러졌고, 조금 더 가까운 쪽에 섰던 병사들은 멀찍이 날아가 개울가와 바위 더미에 처박혔다. 그나마 더 멀리, 정면에서 충격파에 휩쓸린 연합군은 사정이 나았다. 그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기절하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히히힝!
―누가, 누가 사람 좀 살려!
―우, 우와아…….
곳곳에서 대혼란에 빠진 소란이 가득 일었다. 어지간한 영주와 기사들조차 충격파에 여러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쓰러졌다.
“정신 차려! 우리는 거리가 제법 있었으니 괜찮을 거다. 오히려 지금 들이쳐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대폭발의 모습과 충격파에 다들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엘레나는 말의 등에 바짝 엎드려 능숙하게 피하곤 재빨리 기회를 잡았다.
“군단 사제들에게 얼른 치료를 부탁하도록. 중상자들은 얼른 후방으로 보내고, 경상자들은 간단한 치료 후에 계속 임무를 수행한다.”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전하?”
“이미 다르빌에서 실컷 경험해 봤습니다, 숙부. 앞으론 평화에 젖었던 우리 사람들도 익숙해져야 할 일상이 될 겁니다.”
그리곤 아직도 폭발로 인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도심을 바라보았다. 아직 엘레나가 기다리고 있는 그 약속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지금 펜자르크 부대가 당황한 시점이 가장 완벽한 반격의 기회인데.
“네마냐나 신관회로부턴 아직 연락이 없소?”
“통신망이 아직 회복이 안 됐습니다. 지금 최대한 빨리 연결하려 노력 중이니 잠시만…….”
“아니, 잠깐만.”
엘레나는 송구한 듯 떠들어대던 통신관을 제지하듯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목걸이로 걸어두었던 성정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엘레나의 화색이 밝아지는 외침. 불과 몇 초 뒤. 마침내 도시의 시가지 곳곳에서 반투명한 하얀빛 반구가 떠올랐다.
“결계다!”
“신관의 결계야!”
“성공……했구나.”
그림자 던전. 전설적인 대마법사들도 정면에서 파훼한 적이 없었다고 하는 함정이었다. 그걸 어떤 식으로든 돌파한 걸까. 도시 곳곳에서 피어난 결계들이 서로 겹치고 겹치며, 차츰 아니를 뒤덮는 초대형 결계로 성장했다.
“되었다.”
“그럼, 성공한 것이냐?”
엘레나는 나바자르트 남작의 초조한 물음에 안심하라는 것처럼 찬찬히 끄덕여 주었다.
“지금 당장 돌격 가능한 기사들을 모아주십시오. 제가 직접 인솔해서 펜자르크를 격파하겠습니다.”
“우리도 전하의 뒤를 따르지.”
“언제나 함께할 겁니다.”
주위에서 재빨리 정신을 차린 열성적인 기사들이 주먹을 흔들며 지지를 선언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시하고, 마침내 검을 뽑아 최전선으로 나섰다. 뒤를 돌아보는 그에겐 더는 망설임의 표정이 없었다.
“정신이 돌아온 기사들은 들어라.”
이십 명은 되어 보이는 중무장 기사들은 목청이 터지라고 호응을 보냈다. 위기가 닥칠수록 고된 훈련으로 무장된 그들의 정신은 빛을 발할 것이다.
―후아!
“그대들의 존재 이유, 가장 절박한 위기의 상황에서 그대들에게 나는 호소한다. 내전을 겨우 끝내고 들어선 우리의 작은 터전을 이대로 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나!”
“맞습니다!”
“펜자르크에게 저주와도 같은 창날을!”
“적에게 죽음을!”
엘레나는 검을 높이 치켜들고는 다시 정면의 사자문을 향하여 고삐를 돌렸다. 날카로운 햇볕이 검의 끝에 맺히며 모두의 시야를 왕성 아니, 그리고 바난드와 하야스단 전체로 넓혔다.
“돌격! 바난드의 후예여, 돌격!”
“와아!”
불과 이십여 명이다. 하지만 그 앞에 ‘기사’ 두 글자가 붙으면 어떨까.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고, 전황은 열세에서 우세로 바뀔 것이다.
―두두두!!
일제히 걸음을 뗀 말의 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천천히 앞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매우 느릿느릿했어도 점차 무거운 군마와 갑옷 무게 덕분에 무서울 정도로 가속이 붙었다.
“엘레나 진영에서 기사들이 달려든다!”
“모두 제 자리를 지켜, 무너지면 그대로 모두 죽는 거다!”
펜자르크의 수하 기사들은 이제 생전 처음 겪는 충격을 수습하고 부하들을 호령했다. 하지만 수습은 잘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엘레나의 기사로서의 명성만은 잘 알려져 있으니 혼란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성기사단장 엘레나……! 석양마저 베어 버리는 자다, 도망쳐!”
“도망치는 놈은 누구든지 베어도 좋다. 전선을 유지해!”
펜자르크는 본보기라도 보이려는 양 도망병 하나를 정면에서 그대로 베어 버렸다. 우뚝 멈춰 선 탈주병은 그대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주변의 병사와 기사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애써 그 곁을 지켰다.
“주군, 하지만 엘레나와 호위 기사들이 최전선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참모 하나가 결단을 촉구하며 가리킨 그곳에선 이미 압도적인 파괴력을 뽐내는 기사들의 돌파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퍼억!
―히히힝!
“끄악!”
“저항하지 않는 자는 상대하지 않는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펜자르크의 앞잡이들만 나서라!”
빠져나갈 구멍을 제시하는 엘레나의 외침과 뒤따르는 기사들의 복창. 병사들과 충성이 의심스럽던 기사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어차피 막으려고 해봤자 말발굽에 치이거나 깔리기 일쑤였다.
“이이……!”
펜자르크는 마침내 손아귀에 쥐고 있던 적마정석을 떠올렸다. 자신의 명분을 위해 쓰지 않으려 했건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후방의 폭발만 아니었으면 됐을 텐데. 이 무능한 마법 용병들 같으니라고.’
어째서 그런 폭발이 일어났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못한 판단 착오였다.
―번쩍!
적마정석에 마나를 강제로 주입하며, 마침내 폭주를 일으켰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펜자르크의 옷깃과 망토가 거세게 펄럭였다.
「그림자 던전」
아직 습득이 불완전하고 가지고 있는 적마정석도 힘이 약하다. 하지만 상대는 검의 사용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엘레나다.
―뿌득.
“날 여기까지 몰아넣었군, 바난드의 혈통.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윽!”
거꾸로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며 어지럼증이 엄습했다.
―울컥!
“이건. 설마, 하하…….”
그림자 던전이 적마정석의 힘을 이용하지 못해 인체와 충돌을 일으키는 현상. 그러니까 적마석의 사용이 차단된 것이다.
“바누라트, 엘레나에 이제는 하다 하다 애송이까지 어깃장을 놓는구나.”
“주군, 어서 몸을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쇼트 왕자께서도 조금 전에 성을 빠져나가셨다고 합니다.”
기세 좋았던 보름간의 공든 탑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피가 솟구치도록 입술을 잘근 씹으며 펜자르크는 평생 할 일이 없다 여겼던 명령을 내려야 했다.
“읏……. 모두 후퇴하라! 서부 아군의 영지로 물러선다! 적을 피해라!”
아직 죽을 생각은 없었던 병사와 기사는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함께하던 온통 검은색 위장복 차림인 용병 자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을 쫓읍시다, 전하.”
“아냐. 결계가 있는 수도 밖으로 쫓아가면 다시 던전에 당할 수 있어. 당장은 수도를 평정하는 데 집중한다. 수고했다.”
엘레나는 추격을 거절하고 먼저 왕성을 제대로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네마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내전은 이미 펜자르크의 뒤에 고블린이 있다는 걸 확인한 뒤였다.
“분명히 곧 동쪽에서 새로운 소식이 올 거야. 이제는 시간이 더 없어. 가장 위험한 적과 싸울 때가 온 거지.”
네마냐는 그 말을 마치고 곧바로 네마냐와 신관들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은 곧장 적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도시 곳곳으로 네마냐 일행을 찾으러 흩어졌다.
“이제 큰 판은 끝난 모양이군. 내 임무도 끝났으려나.”
울창한 한 가지 위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누군가의 혼잣말이었다.
“그림자 던전이 이 정도로까지 위험한 상태였던 건가. 정말 무시무시하군.”
온통 싸우고 도망치고 쫓느라 정신이 없는 지상을 보며 혀를 차는 비밀 요원. 주변 환경에 잘 녹아들 수 있도록 어두운 녹색으로 된 로브를 걸치고 아주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얼른 특사 각하께 보고를 드려야겠어. 어쩌면 이걸로 하야스단을 확실하게 복속시킬 수 있겠군.”
재빠른 손길로 얼굴을 가린 첩자였다. 그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울창한 숲에 숨어들었다. 지금도 충분히 얽히고설킨 영지의 문제였건만, 앞으론 더욱 복잡해질 것을 암시한 걸까.
확실한 건, 네마냐가 바라마지 않는 바가반드 영지 발전 사업에는 점점 더 조급함이 묻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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