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콰앙!
성벽 위에 교묘하게 설치된 투석기 열두 대가 일제히 발사했다. 그 하나하나가 몇백 킬로그램은 됨직한 열 두 개의 탄환이 허공을 갈랐다.
“착탄한다! 모두 넓게 흩어져라!”
시력은 떨어졌지만 소리와 기민한 직감으로 정체를 알아차린 바누라트의 명령이 흩어졌다. 재빨리 연합군은 사전에 지정한 지휘계통을 따라 곳곳의 골목과 산등성이로 숨어들었다.
―스릉.
엘레나를 필두로 근처에 있던 사령부의 참모와 근위병까지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여기서 각 부대를 나누어 길목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시죠.”
바누라트는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당겼다.
“그러지. 결전 장소는 수도의 정문 앞 들판으로 잡자고. 적도 이제 겨우 성문으로 나서는 판이니 우리 기동에 대응하긴 어려울 테지.”
“나바자르트 남작께선, 괜찮으시다면 바가반드 군세가 제때 합류할 수 있도록 북동쪽 통로를 장악해 주시겠습니까?”
엘레나가 먼 친척뻘인 나바자르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남작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곧 순조롭게 모인 모든 병력을 보실 수 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할야크의 병력 역시 남작을 따라 자리를 비웠다. 모든 준비가 끝났고 병력의 배치도 순조로웠다. 이제 남은 건 사전에 연락을 보냈던 네마냐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통신관, 신호를 보내도록.”
“정말 통신석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적발된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통신관은 엘레나의 명령대로 준비해 둔 통신석을 가져왔다. 하지만 선뜻 그 수정석의 기계 장치나 덮어 둔 천 조각조차 만지기를 꺼리는 모양새였다.
“걱정할 것 없어요. 저들은 도청하지 못할 테니까. 이리로.”
“네.”
덮어 두었던 천을 통신관이 걷었다. 톱니바퀴 등 기계 장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마나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걸 보조석 자리에 삽입하도록.”
“이건…… 성정석!”
“그랬어. 성국 관계자들에게만 공급되는 마정석만을 사용하는 것이 열쇠였군. 어째서 보안이 훌륭하다는 건지 알겠군.”
통신석은 적마정석 다음으로 가장 강한 파장을 내보낸다. 그래서 거의 붉은색에 가까운 주황빛을 내며, 오직 통신 용도로만 사용하도록 규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계 장치에 삽입한 특정 마법석끼리만 일종의 통신이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이건 네마냐가 쓰라고 언급했던 성정석이야. 성기사단과 신관회 한정으로 나누어 주는 특수 처리가 된 백마정석이지. 이걸 끼우고 연락을 맞춰 보도록 해.”
“……대체 두 분은 어디까지 보고 있으셨는지 모르겠군요.”
“모든 방법을 강구해서 복잡하게 셈을 따질수록 피해는 작아지니까. 나뿐만 아니라 나지리안 경도 그걸 잘 이해하고 있더군.”
통신관은 비어 있는 삽입구에 성정석을 넣고 통신구에 무속성 마나로 자극을 넣었다. 살짝 자극을 넣는 것으로 성정석의 마나가 통신석을 거쳐 동일 파장을 가진 통신석과 연동된다.
―지잉!
기계의 톱니바퀴가 열심히 돌아가는 모습과 함께 성정석의 자체 마나를 균일하게 통신석으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지직
“되는 건가?”
줄곧 반신반의하던 바누라트와 나바자르트 등이 궁금함을 못 참는 아이들처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때, 통신구의 굴곡진 수정 면으로 영상이 나타났다.
“……건가. 엘레나 전하? 전하이십니까?”
“맞아요, 바가반드 경. 엘레나 바그라트입니다. 드디어 연락이 닿았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피차 마찬가지네요.”
네마냐는 고개를 돌리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통신구를 바라보았다. 화면은 물론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휴대용으로 영상까지 담으려니까 품질은 엉망이 되는군.’
다행히도 대화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네마냐는 지하도에서 거리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서 멈춰선 채 통신구의 영상을 응시했다.
“그쪽은 준비가 끝났어? 아니 안에서는 이미 준비를 마쳤고, 그쪽에서 신호만 주면 바로 움직일 거야.”
“우리도 이제 막 병력을 전개하는 중이야. 펜자르크의 본대와 맞닥뜨리면 신호를 줄게.”
“알았어. 기다리지. 통신구가 불안하니까 다시 연락하자고.”
“알았어. 부대 배치가 완료되는 대로 연락하지.”
“네마냐, 통신 종료.”
네마냐는 통신을 종료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흐르는 상황을 파악했으니 됐다. 휴대용 기기로 영상을 재생하는 것은 보유 마나가 적어서 한계가 있었다. 무턱대고 자신의 마나로 충전한다고 해도 중간에 도청당할 위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 우선, 도시의 지구 한 곳마다 신성 결계를 펼치는 겁니다. 모두, 준비는 됐죠?”
“완벽합니다.”
네마냐와 한 무리의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것은 정해진 시간뿐이었다.
바로 그 시간, 아니의 정문인 서문, 곧 사자문 앞에는 펜자르크의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고 있었다.
“영주님, 병력이 모두 전개를 완료했습니다. 이대로 사자문 앞을 방어합니까?”
“적은 어디까지 왔느냐.”
바로 답하기보단 먼저 상황을 물어보는 아쇼트 왕자의 후견인이었다.
“이미 도시 근처까지 도착했습니다. 저쪽 북서쪽에서 두 군대는 합류할 겁니다.”
“합쳐서 삼천 명이 넘지 않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어리석게도 사자 굴로 대가리를 들이미는군.”
말을 마친 펜자르크는 꼭 쥐고 있던 주먹을 들어 펼쳤다. 은은하게 검붉은 빛을 띠고 있는 적마정석에선 불길한 기운이 자꾸 흘러나왔다. 이내 그는 그 상서롭지 못한 돌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필요해서 가지긴 했지만 오래 써선 안 될 것 같군. 일만 잘 처리되면 적당히 봉인시키는 게 맞겠지.”
“준비는 잘되었나?”
“왕자님.”
아쇼트의 섭정을 자처하는 펜자르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쇼트는 전장에 나서는 사람답지 않게 화려한 예식용 복장을 차려입었다. 올라탄 말조차 군마가 아닌 행진용 말의 차림새였다.
“나도 나가지 않아도 되겠어? 기왕 누이와 맞선다고 하면 내가 나가는 게 좋을 텐데.”
“아닙니다. 우리 군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지 않습니까. 위험하기 때문에 전하께선 나오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런가.”
아쇼트도 달리 더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사실상 뒷방으로 내몰고 누나와 싸움으로 향하는 상황이었다. 야망은 있어도 결단하기 어려운 일을 가능케 한 것, 그 원동력.
“나를 여기까지 끌어준 건, 섭정 당신 덕분이지. 펜자르크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믿고 맡길 수 있어.”
“반드시 은혜에 부응하겠습니다.”
펜자르크는 내색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건넨 뒤, 아쇼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수상한 신원 불상의 신관을 임의 통과시킨 자들은 죄에 알맞게 엄벌했습니다.”
“신관이라고? 그건 처음 듣는 얘기인데.”
“새벽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처음 들으시는 겁니다.”
“설마, 성국에서 상황을 조사하라고 신관을 보낸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쓰는 걸 알아내고 말 텐데.”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관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그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저번에 누이를 상대했던 그자들?”
아쇼트가 살짝 긴장하며 거론한 ‘그들’. 펜자르크는 달리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곳 일은 맡기시고 전하께선 하루라도 빨리 정부에서 친엘레나파와 중립파를 몰아내십시오. 일단 수도와 정부를 장악하면 잘난 제국도 우릴 승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 섭정의 말이 맞지. 그럼 나는 이대로 궁으로 들어가 업무를 봐야겠어.”
“전하께 하야스단 수호 성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수호 성수, 그러니까 키메라의 축복까지 튀어나왔다. 이 말을 하는 펜자르크는 이미 아쇼트 같은 애송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부 공작을 통한 바난드 왕국의 분열. 그렇게 되면 현재 고블린 전쟁에 휩쓸리는 암피에르 조약의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때만을 위해서 하야크의 원수인 마탑은 물론 고블린과도 손을 잡았다. 이 멍청한 녀석은 자기 목을 조르는 줄도 모르고 나를 이용하려 했겠지만.’
그런 자신에게 진정한 주군은 바난드의 바그라트 왕가가 아니었다. 아쇼트는 그저 원래의 좋았던 하야크로 돌아가기 위한 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 나는 돌아가지. 마중하지 않아도 좋소.”
“바난드의 대왕이 세상을 통치하길.”
그 바난드가 남아 있다면 말이지, 하고 그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읊었다. 그리곤 아쇼트가 떠난 쪽이 부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부하에게로 돌렸다.
“이제 북을 울려라. 사자문을 박차고 나가서 녀석들에게 사자의 맛을 보여 주어야겠다.”
“바로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
전령이 황급히 뛰쳐나간 천막 바깥 진영에선 금방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울렸다. 병사들의 웅성거림과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아마도 이 한 번의 싸움으로 바난드의 운명은 상당히 달라질 터였다.
“바가반드와 엘레나. 어디까지 발버둥을 칠 수 있나 보자고. 그런다고 십 년을 기다린 내 복수를 피할 수 있을까 싶지만, 후후…….”
* * *
“노포 부대를 앞으로 세워라! 적이 움찔거리지도 못하게 발사해라!”
“발사!”
―슈슝!
―슝!
팽팽하게 당겨졌던 시위가 풀리고, 노포에 장전된 통나무 화살들이 연이어 허공을 갈랐다.
“으악…….”
“어머니!”
짧은 한마디씩의 불완전한 유언을 남기며 스러져가는 병사들. 아무리 왕의 무기고에서 고급 갑옷을 꺼내 입혔다지만 노포에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펜자르크에게야 아무 타격이 없었지만.
“어차피 몇 명 죽이지도 못한다. 전열이나 흔들리지 않도록 해라. 흔들리는 놈이 있으면 베어도 좋다. 사실 이것보다는…….”
그가 스윽 고개를 돌려 바라본 것은 배후의 사자문과 그 너머의 왕성이었다.
“과연 녀석이 언제 움직일까, 그걸 지켜보는 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역시 이게 그 열쇠겠지. 정말 대단하다니까.”
촌 동네 바가반드의 열등감에 찬 가스파리얀이나 본 펜자르크로선 의외였던 지난 반년. 혜성과도 등장한 네마냐란 소영웅이 벌인 일들은 은연중에 자신이 꾸미던 일과는 정반대였다.
“이번에는 결코 만만하진 않을 테니까.”
치아가 서로 긁히는 건지 살짝 부서지는 건지, 거친 뿌드득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부서질 정도로 손에 든 적마정석을 움켜쥐었다. 마나에 자극을 받은 수정이 터질 듯한 검붉은 빛을 내뿜었다.
―펑!
―퍼펑!
마치 불꽃놀이라도 터트리듯 웅장한 폭발음 소리가 허공에서 연신 터졌다.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 낼 정도는 아니지만 이건 순전히 신호용이었다.
“자! 이제 너희들의 움직임은 다 알고 있으니 너희의 수를 펼쳐 보거라!”
양팔을 번쩍 들어 보이는 섭정의 외침. 아니와 바난드의 운명이 걸려 있을지도 모를 단판싸움의 시작이었다.
―짝!
“으윽…….”
“건방진 놈들. 이제는 네깟 놈들이 내전에까지 개입하려 들어? 아주 매운 맛을 보여 주지.”
장교로 보이는 사람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연이어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두들겨 팼다. 신음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사제는 몸을 잔뜩 구부린 채 헐떡거릴 뿐이었다.
“적당히 해 둬라. 나중에 말 나오면 곤란하니까. 성국과도 척을 질 순 없지.”
“하지만, 이 새끼들이 기껏 해 둔 통신망까지 교란하지 않았습니까. 당장 요절을 내도 모자랍니다.”
“……내가 네 의견을 물어봤나?”
복면과 터번을 쓰고 책을 읽으며 아랫것처럼 장교를 다루던 여자는 책을 덮었다. 그리곤 장교에게 다가가 정강이를 깠다.
“윽…….”
“내가 시킨 대로 아직 잡지 못한 놈들이나 잡아들여. 시건방진 소리 뱉지 말고.”
완전히 계급이 다른 사람인 모양이다. 저렇게까지 장교를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네마냐는 들키지 않도록 숨을 더 죽였다. 수로의 뚜껑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잠자코 기다리는 여러 사람을 비췄다. 다리를 절룩이는 장교가 무어라 명령을 뱉었다. 흑막의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각 골목을 감시해! 신관 놈들이 무슨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니 보이는 대로 몽땅 잡아!”
“알겠습니다! 저희는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골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아침부터 지하 통로를 뒤지는 헌병대를 피해 하수도로 빠져나온 네마냐 일행에겐 좋지 않은 소식.
“아무래도…….”
“왜 그러십니까. 어딘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
처음 이곳에 도착한 뒤 가장 헌신적으로 네마냐를 도와준 막내 신관 갈라모가 물었다.
“내가 여기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준 병사가 있었지. 아무래도 그들이 당하면서 우리 계획이 어느 정도 발설되지 않았나 싶어.”
“그럼 큰일 아닙니까? 우리 계획마저 막혀 버리면 기껏 연합군이 와도 던전에 갇힐 겁니다.”
“진정해요. 아직 우리가 발각된 건 아니니까. 일단 신성 결계를 펼치고 나면 싸우는 건 문제는 없을 테니까.”
그리곤 다시 작은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른 빠져나가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위험에 처한 병사도 도와야 하고, 체포된 사제도 구출해야 한다. 하지만 역시 그러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게 엘레나를 돕는 일.
“자, 다행히 바깥이 조용해졌네요. 도심 외곽의 광장이라 그나마 괜찮은 것 같아요. 다른 곳은 많이 잡힌 모양이지만.”
“그럼 움직이죠. 더 지체했다간 일 자체가 틀어질까 걱정입니다.”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갈라모 사제 등과 함께 수로의 뚜껑인 돌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끼익.
다행히 광장에서 소란을 피우던 일행들은 모두 도시의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주민들도 지레 겁을 먹고 집에 틀어박혔다.
“됐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네마냐가 지시하기도 전에, 마음이 급한 사제들은 재빨리 성정석을 무더기로 내려놓았다. 네마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열었다. 미리 챙겨 둔 마나 공조기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걸 꺼내자 갈라모가 궁금해했다.
“그게 뭡니까?”
“마나 공조기. 사람의 무속성 마나를 직접 성정석에 제공할 수 있도록 해 줄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성정석 하나가 고갈될 때마다 이곳에 설치할 결계 장치에 몇 사람이 들러붙어야 한다. 몇 분을 낑낑대며 강제로 마정석을 떨어뜨리면, 다시 거꾸로 새 마정석을 결합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 공조기에 마정석을 끼워서 결계를 펼치면 마나 충분한 사람 하나만으로도 얼마든 유지가 가능하죠.”
“그런 신기술이…….”
다들 신기해했지만, 아무래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마나를 인위적으로 개조한 것이 그림자 던전의 원인이라고 보는 마나교 입장에선 꺼림칙하겠지.
“어쩔 수 없죠. 자기 수호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거운 처벌은 받지 않을 겁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물론 처벌 같은 건 받지 않도록 제가 도와드리죠. 이래 보여도 제가 성녀님과도 제법 친구 사이랍니다.”
“하하,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아니, 진짜라니까…….”
그렇게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나누고, 갈라모는 수정에 손을 뻗고 눈을 꼭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게 신관들의 주문 방식이었다.
‘그럴듯한 말과 이미지로 보여 주는 건 마나의 은혜와 힘을 개인의 것인 척하는 거라지. 하기야, 원래 꼭 주문이 있어야 마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주문이란 단순히 마법을 잊지 않기 위해, 혹은 집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쨌든 주문이 없어도 마법이 가능하단 건 흥미로운 광경이다. 곧 공조기를 장착한 수정에서 하얀 우윳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빛이었다.
“오, 세상에. 섭리여…….”
“마나의 의지가 발현이라도 된 건가. 저 작은 성정석에서 저렇게 큰 힘이…….”
강력한 신관의 힘까지 결합하자 전혀 그런 힘을 낼 수 없으리라던 마정석에서 강한 신성의 힘이 몰아쳤다.
“호…… 그게 너희들이 바락바락 숨겨가며 벌이려던 파괴 공작인가?”
“누구냐?”
긴장한 신관이 한쪽 구석을 바라보며 다그치듯 외쳤다.
“아.”
아까 보았던 그 복면과 터번을 쓴 여자다. 대번에 심상치 않은 마나의 요동이 느껴졌다. 네마냐는 갈라모 사제 앞을 틀어막은 채 앞으로 나섰다.
“영주가 뭘 그리 애타나 해서 신경을 써 봤더니, 고작 이런 거나 준비하고 있었군. 역시 애송이 사제들다운 생각이라니까.”
“흑의에 복면. 며칠 전 성 아쇼트 광장을 날려 버린 그 일행이지?”
네마냐가 작정하고 날린 질문에 상대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알겠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알겠다! 너는 그 바가반드의 애송이 영주로군. 왜 그렇게 젊은 종자가 높은 신분 행세를 하나 궁금했지.”
“맞나 보군. 바난드의 주민이 이런 짓을 할 리는 없을 테니 외국인일 텐데, 감히 이런 짓을 해도 괜찮나?”
“하하……. 곧 지상에서 사라질 텐데 질문이 많다니까. 그것보단 죽기 전에 한번 제대로 붙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
그리고 상대방은 재빨리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눈에 보일 정도로 무섭게 휘몰아치는 검붉은 기운.
‘이건……!’
네마냐와 사제들 모두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며 급히 물러섰다.
“사제님, 결계는 아직입니까!”
“으…… 아직입니다. 집중이 안 돼서 계속 마나가 흐트러집니다. 삼십 분…… 아니, 단 십 분이라도 엄호를 부탁합니다.”
농담이라도 정색하기 좋은 요청이었다. 저토록 무서운 적색 마나를 휘두르는 상대를 어떻게 그렇게 오래 저지할 수 있을까.
“하……. 최대한 서둘러 봐요.”
어쩔 수 없이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왜 항상 이렇게 쪼들리는 상황이 찾아오는지. 궁상스럽지만 일단 네마냐는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에 계속 마나가 소실되는 상황.
‘최대한 빨리 끌지 않다간 나 혼자 녀석들을 상대하게 생겼군.’
손에 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이곳이 결계를 먼저 펼쳐야 한다. 그래야 계획대로 아직 숨은 다른 곳의 사제도 검은 그림자 걱정 없이 안전하게 결계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모두 갑시다, 일제히. 너는 얼른 끝내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후후……. 즐겁겠어.”
웃음을 흘린 상대방에게서 마침내 완전히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허공에 휘몰아쳤다. 검은색의 창살과 거대한 벽.
“저, 저건…….”
“맙소사, 섭리시여!”
“젠장.”
원하지 않는 예측이 실현된 것에 네마냐는 한탄했고 나머지 사제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적조차 없었던, 정말 완벽 그 자체의 검은 그림자 세계가 이들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인사해. 육백 년 만에 돌아온 완벽한 어둠의 세계야. 너희의 어설픈 싸움을 모조리 침묵 속에 잠재워 버릴 힘이지.”
전혀 거짓말이 아닌 여자의 말을 들으며, 네마냐는 두려움 속에서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발을 떼어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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