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아니 시 북쪽 출입구로 군대가 출현한 것은 난리가 터지고 꼬박 보름 만의 일이었다. 연합군에 가담한 영주들이 바누라트를 따라 자신들의 군세를 이끌고 있었다.
“전설적인 바누라트 경의 휘하에서 다시 종군할 수 있는 건 흥미로운 경험입니다. 상황이 영 깔끔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죠.”
엘레나는 최전선의 바누라트보다는 조금 거리를 두어 따라가고 있었다. 덕분에 기사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 요즘에야 전쟁이 없어서 그렇지 바누라트 경이 물러나기 전엔 왕국 최고의 호랑이라는 소리도 있었을 정도니까.”
“그렇다면 바누라트 경이 이번에도 우릴 승리로 이끌어 주겠군요!”
그러나 들뜬 젊은 기사와 달리 중년의 선배 기사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이번엔 어찌 될지 모르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 측의 명분부터가 좀……. 여성 상속은 사실 그렇잖아? 바누라트 경도 이제 거의 예순이 다 돼서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중간중간 계속 들어오는 이야기였다. 엘레나는 더는 모른 척 한 채 들을 수 없어 고삐를 당겼다. 호령 소리에 이야기하던 기사들은 뒤늦게 공주의 존재를 확인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필 전하가 이곳에…….”
“똑같은 갑주와 투구라서 누군지도 몰랐다. 아, 이런 실수를.”
지금이라도 돌이켜서 얼굴만 확인한다면 어느 영지의 어느 기사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일부로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바누라트의 곁으로 다가갔을 뿐이다.
“남아 있는 우리 측 병력은 대략 이백 명 가량의 병사와 두 명의 기사뿐입니다. 여기에 각지 연합군을 합치면 보병 육백, 기병 오십, 기사 이십 기가 될 겁니다.”
“펜자르크가 낼 수 있는 병사만 해도 우리의 두 배는 되겠지.”
삼촌의 목소리가 뒤쪽 엘레나에게까지 전해졌다. 티는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걱정스러워하는 감정은 충분히 전해졌다.
“병력 자체는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기사의 숫자가 거의 세 배 차이라…….”
“일단 그 부분은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하세.”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장에 도착하면 결국 알게 될 겁니다만…….”
“지금부터 벌써 사기가 흔들려선 될 일도 안 되기 마련이지.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렇게 해 둬. 가장 중요한 반전이 올 때까지는 우리가 버티는 게 중요해.”
“숙부.”
나지막한 부름에 움찔하며 바누라트가 뒤를 바라보았다.
“어, 전하께서 오셨군. 그대는 그만 다른 연합군 영주들에게 내가 얘기한 대로만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군량 및 장비 보급 담당관은 엘레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자신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갔다.
“여긴 위험하니까 너무 앞으로 나오진 말라 했을 텐데.”
“시작도 전부터 전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군요. 뒤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한데 섞인 것 같은데 말이죠.”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전면에서 직접 들은 건 아닙니다.”
바누라트는 슬쩍 물어본 것에 예상한 답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과히 마음을 쓰진 말아라. 어차피 모든 일이 일단 뚫리고 나면 잘 풀리기 마련이다.”
“네마냐가 약속한 대로 일이 풀려나가면 말이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할 텐데.”
“그래서 너와 내가 지금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나선 것 아니냐.”
연합군을 결성했다지만 엘레나를 지지하는 세력은 곳곳에 나뉘어 있었다. 왕국의 도성과 주요 통로가 점령된 탓에 각 세력 사이에는 불규칙적인 연락만이 가능했다.
“뭐, 전력이야 어떻게든 작전을 짜서 극복하면 그만이다만. 정말 네마냐 경이 알려 준 것처럼 적마정석을 가져와서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거라면…….”
“왕성이 오염되는 사건이 발생하겠죠. 신관회도 지금 모든 업무가 정지된 상태니까요.”
엘레나가 아무렇지 않게 언급했지만, 왕성 아니에서 그림자 던전이 열리는 건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연유가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지 않겠느냐? 거기다 펜자르크가 적당히 교활해야지. 잘못하다간 제국이 이단 혐의로 우릴 칠 수도 있다.”
“하지만 네마냐는 얼굴도 잘 알려져 있는데, 적진에 잠입해서야 될까요.”
“자신이 있으니 자처했겠지. 그 뜻을 어찌 알겠니. 어쨌거나 우리로선 예정된 시간에 적의 이목을 도시의 남북 양쪽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랬다. 형 하코브를 보좌하며 하야크 왕국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내전을 끝낸 바누라트. 그가 태부족한 병력에도 기꺼이 총책임자를 맡은 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바가반드의 병력은 남쪽에서 진군한다고 했죠? 다른 왕국 병사들도 합류하라는 명령을 보내긴 했는데, 합류했을까요?”
“합류했다고 하더군. 아, 이 얘긴 마법사 하라드 군이 보내 주었단다. 왕국 공식 통신망은 믿을 수가 없어서 도시 간 전서구로 보내왔지.”
“위험성을 알아봤군요, 역시 마법사.”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왕국 내 공식 통신망을 이용하는 통신석으로 소영주 하나가 펜자르크와 내통하는 것이 발각된 것이다. 통신망의 근간이 되는 공중 통신석이 아니 근처 산지에 있단 걸 다들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 전에 엘레나 네가 감시를 강화해서 다행이었다. 신관들이 왜 필요한지 다시 깨달았지. 설마하니 그새 통신망까지 손을 뻗었을 줄은…….”
“조금 더 빨리 잡았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연합군 내에서 이미 적마정석에 유혹된 인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부분은 나도 대영주들에게 단단히 단속하도록 하지. 아침에 잡힌 그 소영주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반역죄는 처형의 요건 아닙니까. 하지만 연합군 내부 사기가 흐트러질까 명령은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기? 아, 그렇군.”
연합군을 이루는 구성원은 절반이 조금 안 되는 바난드의 군대와 나머지 아야크, 할야크 및 자리샤트 공화국의 군대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구성만큼, 엘레나의 존재와 지위에 대해서도 통일된 의견이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왕국의 두 대영주가 너를 지지하기로 했으니 순탄하겠지만, 그 아래 영주들은 쉽게 따르지 않겠지.”
“결국 그들이 움직인 건 숙부님의 명성 때문이겠죠. 저의 명분은 어디까지나 이름뿐이고.”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 그들을 움직인 내 명성이란 것도 결국 네 명분을 돕기 위해 있는 것 아니겠느냐.”
바누라트는 고삐를 잡았던 한쪽 손을 엘레나에게 내밀었다. 손을 달라는 뜻일까. 엘레나가 조용히 그 손을 맞잡았다.
“권력의 길이 이렇게나 어렵다. 하지만 물러서면 안 된다는 건 너도 잘 알겠지.”
“물론이죠, 숙부.”
엘레나는 드디어 미소를 지어 돌려보냈다. 보지 않아도 알겠다며 바누라트는 정면을 바라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뭐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상황이 급변했다.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냐?”
앞서 보내 두었던 척후대의 보고였다. 물론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인진 알 것 같았다. 저 멀리 두 강 사이로 끼어 있는 삼각형 고지대. 하야스단 사람들의 마음을 뛰게 한다는 고대 도시 아니가 보이고 있었다.
“아니의 정문을 통해 아쇼트 왕자의 군대가 몰려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리라 예상은 했다만, 생각보다도 반응 속도가 장난이 아니군.”
“통신석에 장난쳤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죠.”
평정을 되찾은 엘레나는 투구를 벗으며 한마디를 보탰다. 그 이야기에 주변에 늘어선 장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바누라트가 왕실과 엘레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 위주로 각지에서 데려온 이들이었다.
“그렇지, 적의 병력은 어느 정도나 되더냐.”
“보병, 기병을 구분하긴 어렵고 대략 합쳐 이천 명은 될 겁니다.”
“많이도 모았군.”
“바가반드와 북부 영지의 병력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얼마나 되며 가까이 왔습니까?”
장교 하나가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다.
“기사단장 파드는 펜자르크 영지의 본군이 넘어오지 못하게 칼주안 관문으로 갔지. 나머지 북부 부대들과 바가반드가 합치면…….”
“대략 천오백 명은 될 겁니다. 기사는 대략 오십 명 정도.”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엘레나의 계산이 빨랐다. 당연하게도 부왕을 도와서 한동안 누구보다도 나랏일을 처리한 덕분이랄까. 숫자를 확인한 장교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 병력만 합친다면 승산은 있군요.”
“그 정도라면 해 볼 만합니다.”
“병력만의 문제는 아니지. 지금 상황이 여전히 여의치 않다는 건 장교들이라면 인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바자르트 경.”
바누라트가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할야크 남작이 헛기침과 함께 말을 몰아 앞으로 몇 발짝 나섰다.
“걱정되어서 문득 나와 봤습니다.”
“알고 있었군, 검은 그림자를.”
“글쎄요, 잘 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걱정은 되더군요.”
바누라트는 손짓으로 남작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곤 잠시 전령에겐 대기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검은 그림자 던전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한 번 그 현상이 일어나면 군대의 창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지금까지 일반적으론 그렇게 알려졌어. 유일한 예방책이 신관회가 불순한 마나를 점검하고 신성력을 주입하는 정도였지.”
“하지만 저들은 불길한 적마정석을 마음대로 난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딱히 우리가 물증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참모들은 다시 사색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적마정석을 정말 적들이 썼단 말입니까?”
“그게 소문이 아니었던 겁니까? 우리 측엔 변변한 마법이나 오라를 쓰는 병력도 없는데.”
“왜, 오라 쓰는 기사가 있지 않나.”
“그 기사가 몇 명도 채 안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바누라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손을 들어 이야기를 끊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잘 알겠다. 하지만 지금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 원한다면 지금 여기서 보내 주겠다.”
물론 그럴 눈치 없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손을 들려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경우는 슬쩍 옆구리를 찌르는 옆 사람의 눈치에 진압됐다.
‘하나같이 펜자르크를 미심쩍게 보는 사람들이지. 아직도 미크라야크 대공이 하야크 왕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하코브 군주에 의해 패배하고 수도마저 잃은 채 동쪽 산등성이 영지로 도망간 슴바트 왕자. ‘작은 하야크’라는 뜻의 미크라야크 영지에서 지금도 칼을 갈고 있었다. 엘레나의 기억 속에 성국기사단을 견제하던 미크라야크 장교가 떠올랐다.
“미크라야크가 아직도 보복에 미쳐서 칼날을 갈고 있는 한 펜자르크를 지지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쇼트 왕자는 어쩌다 그런 작자한테 휘말려서는, 아휴…….”
‘그랬다면 얼마나 맘 편하게 지지를 했겠느냐, 이런 뜻이겠지. 가시방석이 따로 없군.’
그렇다고 딱히 저들 좋아하는 대로 웃고 넘길 엘레나도 아니다. 이미 마브리쿠폴리스에서 맹약의 유리잔을 비운 일행은 그 잔을 깨트리며 물러서지 않기로 맹세했다.
“누가 누구를 지지하건, 휘말리건 상황은 달라질 게 없습니다. 펜자르크가 아쇼트의 이름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을 더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맞는 말씀이시네. 여기에 뭔가를 더하거나 감하는 건 곧 반역이나 다름이 없지.”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지금 이 모든 전황을 뒤집을 만한 강력한 카드가 있습니다. 바로 아니에 잠입하여 적의 수단을 무력화 작업 중인 바가반드 백작이 있습니다.”
이 모든 불확실성과 위태로운 연합군. 그 모든 변수에 확실성을 부여하는 것. 그건 바로 네마냐라는 존재였다.
‘네마냐는 이미 하야스단에서 하나의 기둥으로 거듭나고 있었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다르빌의 기적을 끌어낸 소영웅 한 명. 이제는 제법 그 존재만으로도 사기를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르빌의 그 영웅이 직접 아니로 잠입을 했다는 겁니까? 검은 그림자를 막기 위해?”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랍니까? 예방도 아닌 맞대응이 가능하다고?”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네마냐를 잘 아는 엘레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가 그렇다고 했다면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적어도 지난 반년간 전선에서 함께 등을 맞대며 얻은 결론이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적을 압박해야 합니다.”
엘레나는 허리에 찬 세검을 뽑으며 마침내 첫 전투의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여러분들, 기사와 각급 영주들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바친 충성과 신종의 맹약에 부응할 것입니다.”
“기꺼이.”
왕국의 현 권력 순위로 두 번째인 바누라트가 말이 끝날세라 응답했다. 누가 그 권위를 무시할 수 있을까. 좋은 흐름을 타고, 엘레나는 마침내 최후의 동의를 구했다.
“지금부턴 왕국의 후계자요 군대의 통수권자인 나의 지휘에 따르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하야스단 고원의 유일한 왕국인 바난드. 사실상 이 왕국의 모든 권력이 엘레나 공주에게로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그 시점, 아니의 지하 교회당에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움직임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마냐 경, 펜자르크 일당이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근 이천 명의 병력이 움직입니다.”
억류된 아니 대신관을 대신해 사제들이 네마냐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왔군. 모두 준비는 끝났습니까? 저들이 움직이는 결정적 순간에 맞춰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완벽합니다. 저들은 대신관을 볼모로 잡아 모든 저항을 막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림없는 일입니다.”
이미 희생을 각오했다는 이야기로도 들렸다. 위험천만한 권력욕을 향해 자신들을 기꺼이 내던지겠다는 의지. 그 굳은 다짐을 네마냐는 진지하게 받았다. 물론 자살특공대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각인해야 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적의 수단을 무력화하는 게 목적입니다. 무리하지 말고 하나뿐인 생명은 지킵시다.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면 남을 지키기도 어려울 테니까요.”
앞장서서 함께하기로 한 간부급 사제 십여 명이 지팡이를 굳게 잡은 채 끄덕였다. 네마냐는 웃으며 목걸이의 백색 수정을 한 손으로 꼭 틀어쥐었다.
“좋습니다. 그럼 갈까요?”
어느 지하 수조의 통로를 통해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도 탈환 작전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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