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이상하군. 분명 바슈니크 계곡가에 당분간 머문다고 했으니 이쪽 어딘가로 향하는 곳이어야 할 텐데.”
타티온 관문에서부터 북쪽에 펼쳐진 깊은 계곡. 한때는 주민 한 사람 없는 광활한 숲이었다. 이제는 산 아래로 나샤와의 피난민이 정착한 마을이 하나둘 자리 잡고 있었지만.
“희미한 마나의 기운이…… 저쪽이겠군.”
숱하게 주변을 막고 늘어선 산자락. 그 사이에서 네마냐는 산봉우리 하나를 포착했다. 여러 영지의 경계가 지나는 곳이었다.
“키마이라 정도의 성수면 산 전체가 마나로 떨릴 텐데. 아무래도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일부러 절제하는 것 같지. 잠자리에 든 상태라면 내가 직접 찾아야겠지만.”
귀찮더라도 그럴 수밖엔 없었다. 키마이라에게 만약을 위해 건네주었던 수정석 목걸이로는 키마이라만 일방적으로 연락할 수 있었으니까. 파괴된 성소에 머물 순 없었기에, 녀석은 한동안 건너편 산봉우리에 머문다고 했다.
‘하라드에게 기회가 닿거든 양방향 통신기를 만들어 놓으라고 닦달을 해야겠군.’
말에 탄 채로는 더 거슬러 오를 수 없는 험한 길로 들어섰다. 네마냐는 근처 나무에 말을 묶어 둔 뒤 돌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사방에 영지가 몇 개나 있는데, 이렇게 맑을 수가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네마냐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굽혀 잠시 냇가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맑고 향기까지 나는 물가였다. 그런데.
“향……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생각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일이었다. 산의 계곡이라면 어릴 적, 그러니까 현대인이었을 때도 여러 번 갔었다. 숱한 물가를 가봤지만 대부분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는 게 고작이었다.
“이상한 일이군. 키마이라의 내력이 워낙 깊어서 물가에서도 그런 냄새가 나는 건가? 이상하게 자꾸 눈길이 끌리는군.”
저절로 손이 뻗은 네마냐의 손길이 물로 들어갔다. 이내 모은 두 손에 한 모금 분량의 물이 담겼다. 현대인 시절이었으면 수질이 걱정되어 입에 대지도 못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원하게 들이켰다.
“역시 이 세계에선 냉장고가 없으니 계곡물이 최고라니까. 음…….”
마실 때는 그저 청량한 느낌이 진한 물이었다. 하지만 입맛의 뒤끝은 어딘가 묘한 여운이 남는 향기? 감칠맛?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입맛을 다시며 네마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군. 이쪽 물은 뭔가 다른 거라도 있나. 아니면, 그냥 키마이라 때문인가.”
하지만 이내 상념은 접었다. 급한 건 키마이라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젖은 손을 털어내고 일어났다. 그때.
[친구의 기운이 느껴진다. 누가 경계를 넘었나 했더니. 나의 친구, 그대였군.]
“키마이라.”
머리를 울리는 맑은소리에 공중으로 시선을 돌린다. 어느새 제2봉 위에서부터 날아오는 그림자가 공중을 덮었다.
“오늘은 잠깐 나눌 말이 있어서 말이지.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공중에 머물며 천천히 날갯짓하던 녀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지상으로 내려왔다. 느린 날갯짓에도 바람이 워낙 세서 주변의 나무와 덤불이 곧장 날아갈 것처럼 휘어졌다.
“용케 깨어 있었네. 주변 신경 쓰느라 잠을 자는 것 같던데. 내가 깨운 건 아니지?”
[변이하면 표출되는 에너지가 좀 줄어든다. 그만큼 힘은 약해지지만.]
변이. 마법사들의 용어로 ‘메타모르포스’라고 부른다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기술. 주로 위장술이 필요한 마법 길드원들이 사용한다고 했다. 마나를 많이 보유하고, 표면적이 클수록 새어 나가는 마나량도 많고, 그만큼 발각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편하게 얘기하고 싶으면 변이해도 돼. 마나 원천을 떠나 있으니까 당신한테도 힘들 텐데.”
[고맙군.]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보니 보이는 것은 자신의 또래 정도가 될 법한 남자였다. 변이 마법을 쓸 때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했다.
“나를 참고해서 변이했구나.”
“……어색한가?”
“아니, 아니. 전혀. 오히려 부러운걸. 외모도 그렇고 옷도 어디서 그런 화사한 이미지를 봐 뒀던 건지 궁금할 뿐이야.”
“예전엔 거리에서 종종 봐 뒀지.”
녀석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옷을 만지작거렸다. 상아 색깔의 깔끔한 옷 한 벌. 소매와 옷자락 끝부분에만 바느질된 붉은 실로 포인트가 들어 있었다. 아주 간단한 옷이었다.
“추운데 괜찮을까? 옷이 얇아 보이는데.”
“그것도 염려할 것 없다. 그보다 용건은?”
“아, 그렇지. 혹시 지금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들어 본 것 있어?”
“인간 세상에서?”
녀석은 갸웃거렸다. 과묵하긴 한데 비슷한 또래의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이니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다. 네마냐는 품에서 가져온 적마정석 조각을 꺼내려 손을 넣었다.
“잠깐, 지금 뭘 꺼내는 거지?”
인상이 급격히 구겨지는 녀석이 급하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살짝 놀란 네마냐는 피식 웃으며 그냥 손을 내렸다.
“조금만 낌새가 있어도 느끼는구나. 역시 성수는 성수야.”
“마시스 성소에서 느꼈던……. 아니, 그것 이상의 불길함인데.”
구체적인 사정은 몰라도 불길함은 적절하게 느끼는 키마이라. 감탄과 민망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림자 던전이 소환됐어. 인위적으로.”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냐, 정확해. 적마정석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그림자 던전도 소환했어.”
“하…….”
키메라가 머리를 짚으며 휘청거렸다. 마나가 요동치는 느낌, 심상치 않았다.
“저기, 괜찮…….”
“다가오지 마.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으니.”
전기 스파크라도 이는 것처럼 네마냐와 키메라 사이엔 불꽃이 튀었다. 격렬한 분노를 느낀 주변의 마나가 격렬하게 끓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쏴아아!
얼마나 지났을까.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자연의 소리 덕분인지 키메라 주변의 마나가 가라앉았다. 그래도 네마냐는 먼저 녀석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 고블린에 이어 금지된 마법까지 튀어나왔으니 고민이 크겠어.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거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평정을 되찾은 키메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음, 바난드 왕국에서 후계를 둘러싼 내분이 터졌어. 그런데 반기를 든 왕자의 세력이 아무래도 고블린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
“그쪽에서 적마정석을 쓰고 있단 소리로군.”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어. 괜찮을까?”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진 키메라가 순순히 대답해 왔다.
“나를 도와주었으니 당연히 나도 도울 건 도와야지. 하지만 그림자 던전에 대해서는 나도 잘은 모른다.”
“아…….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군.”
“당연한 소리지. 내 전대 키메라 성수는 당시 이곳에 닥쳤던 그림자 던전을 막느라 모든 힘을 쓰고 죽었지. 나로선 알 수가 없으니까.”
그렇다. 초인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희망을 품은 것은 사실이라지만, 그림자 던전은 워낙 복잡한 문제였으니까.
‘어쩌면 세계적 근원에 해당하는 문제일 수도. 내가 이곳으로 차원 전이한 것만큼이나 비밀스러울지도 모르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신성 마나와 마정석에 조예가 있는 하라드와 자신이 힘을 합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키메라가 도움을 줄 만한 다른 도움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림자 던전 문제는 우리가 생각해 볼게. 키메라, 당신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어.”
“뭐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블린. 성소를 부수고 오염시키려고 했던 놈들을 무력으로 막는 건 당신에게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싱긋 웃는 네마냐의 표정에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는 키메라의 표정이 대비됐다. 이내 한숨을 쉬며, 그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좋아. 모처럼 인간세계에 개입한다는 게 살육을 위해서라니 영 아니긴 하지만.”
“그러면…….”
“대신 조건이 좀 있어. 인간들이 무슨 ‘조약’인지 같은 걸 맺었다던데, 그게 괜찮겠어?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것뿐인데.”
“뭘 고민하고 있어?”
“응?”
네마냐는 성큼성큼 거리낌 없이 다가가 어깨를 한 대 때렸다. 한국식 친구 문화에 익숙할 리 없는 키메라는 당황했는지 삑사리까지 내며 되물었다.
“아얏, 뭐야?”
“변이하고 활동하면 되지!”
이것이 하야스단의 땅에 새로운 대마법사가 출현하게 된 곡절이었다.
* * *
“너무 걱정하진 마, 고블린 문제는. 스프란체, 몸통부터 먼저 입혀 줘.”
“알겠습니다. 팔을 내주시죠.”
“제가 보기엔 영주님께서 태평하신 것 같습니다. 너무 아니에 신경을 쓰고 계신 건 아닌지…….”
“무슨 소리야, 그게?”
한창 갑옷을 입고 있던 네마냐는 바흐람의 가시 돋친 말에 살짝 짜증을 내며 쳐다보았다.
“군단이 나코르잔을 향해서 진격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침략은 이미 시작됐고, 단지 우리가 있는 방향이 아직 무사할 뿐입니다.”
“너무 타박하진 마.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으니까. 최대한 바난드 상태를 정리하고 군대와 함께 복귀할 거야.”
바흐람은 기가 찬다는 듯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다시 상황을 설명했다.
“제가 윽박질러 처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만, 시간이 진짜 얼마 없습니다. 나코르잔의 잔당이야 얼마 가지 못할 테고, 중부 산맥의 공작령도 허술합니다. 거기다가 다르빌은 준비는 좀 갖췄지만…….”
“나도 알아. 하지만 걱정이 너무 과해, 당신. 줄곧 생각했던 거지만.”
네마냐는 갑옷의 몸통을 조이고 매듭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사슬이 서로 부딪치는 찰랑대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바흐람은 말문이 막힌 듯 신음과 같은 소리를 흘렸다.
“그런…….”
“내 말이 틀려? 우리는 그간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나코르잔도 그렇게 허술하지 않고, 타위비크는 원정도 가능한 병력이야. 좀 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믿어 봐.”
“음, 죄송합니다. 제가 좀……. 과거를 생각하면 항상 도를 지나치게 됩니다.”
바흐람은 조금 진정된 듯 고개를 돌렸다. 얼음장 같은 표정은 여전하지만 시선은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동공에서 네마냐는 불타오르는 나샤와의 밤을 읽었다. 투구를 스프란체에게서 받아들곤 옆구리에 끼고 바흐람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바흐람, 그때의 기억이 시시때때로 괴롭힐 거야. 그건 문제가 아니야. 당신은 그때 최선을 다했고, 불가항력이었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상당히 다르고.”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 영지나 적게나마 일부의 사람은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거야.”
PTSD에 시달리는 사람을 말 몇 마디로 치유할 수 있을까? 그럴 순 없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이서준으로 살 때는 심리치료와도 인연이 없었다.
‘한 가지는 알겠어. 곁에서 들으면서 붙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네마냐는 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곤 투구를 썼다.
“이런 말, 자화자찬 같아서 보통 안 하는데 말이야. 꼭 해 주고 싶었어. 비단 당신뿐만은 아니고.”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음, 나는 이길 것만 생각하고 작전을 짠다는 것? 질 가능성이 큰 싸움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마친 네마냐는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영지의 문양의 봉인이 곱게 찍혀 있었다.
“이대로만 처리하도록 해. 내가 밤새 생각해 둔 거니까.”
“……아, 알겠습니다.”
모처럼 얼떨떨하게 얼어붙는 바흐람의 표정을 봐서 즐거운 네마냐였다.
“그럼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엔 나 대신 영지를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뭐 해? 얼른 안 나오고.”
하라드가 추운 날씨에 잔뜩 질린 듯 창백한 얼굴에 홍조까지 띄우며 바깥에서 재촉했다. 귀마개까지 쓰고 두꺼운 외투를 입어 둥글둥글해진 마법사.
“알았다, 알았어. 나간다고.”
네마냐는 그렇게 스프란체와 바흐람의 마중을 만류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 뒤를 멍하니 바라보던 바흐람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를 수도 있으려나.”
그의 손에 들린 봉인 서찰이 손아귀 속에서 살짝 구겨지며 살짝 떨렸다. 운명에 대항하는 인간들의 반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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