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바가반드 영주관의 나뭇가지에서 재잘대던 새들이 갑자기 벌떼같이 일어나 날아갔다. 마당에선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오늘 당직 수비병이 갑작스러운 영주의 출현에 놀라서 말을 더듬거렸다.
“영주님, 연락도 없이 갑자기 돌아오십니까? 무슨 일로…….”
“시간 없어. 지금 바로 정보대가 필요해. 정보대장은 영지 안에 있나?”
네마냐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망토를 곧장 풀어 버렸다. 망토를 던져 주자, 그것을 받아든 다른 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탄내와 피비린내는 물론이고 곳곳이 찢어지거나 그슬렸기 때문이다.
“영주님, 대체……!”
“미안하지만 지금은 세세하게 얘기하기 어려워. 얘기한 대로 정보대장과 미하일 자작, 하라드 마법사에게도 들어오라고 연락해.”
“아, 알겠습니다!”
수위병 하나가 재빨리 밖으로 튀어 나갔다. 다른 병사는 망토를 짊어진 채로 영주관 안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가장 빠르게 달려온 건 하라드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인상을 굳혔다. 자신이 느낀 감각에 점차 경악의 빛이 드러났다.
“이 냄새. 대체 어떤 자식들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불길한 기운을 쓴 거야? 설마 바난드에 일이 있어서 갔다는 게…….”
옷을 채 벗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던 네마냐는 상체만 일으키며 하라드를 마주 보았다. 사악해 보이는 웃음이 그늘진 얼굴에 드리웠다.
“잘 왔다.”
“뭐, 뭐야, 그 웃음은?”
“이제야말로 우리 대마법사님이 밥값을 하실 때가 온 거지, 뭐긴 뭐야.”
“에효, 뭔지 용건부터 말해 봐.”
녀석은 방 안으로 대뜸 들어와 소파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네마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겠어?”
“한 십 분 정도 눈을 붙였더니 할 만해. 그것보다 용건이 중요하지. 너, 그림자 던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냐?”
자리에 앉는 네마냐가 대뜸 던진 말에 하라드는 잠시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림자 던전이라니. 진작에 없어진 걸 왜 지금 찾아?”
“사라지지 않았다니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두 사람 모두 영문을 모르고 답답해했다. 네마냐는 다시 말을 가다듬어 자신이 겪은 일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적마정석을 자유자재로, 대량으로 사용하는 의문의 적이 그림자 던전을 소환했단 걸 믿으라고?”
“……내가 직접 그림자 던전 함정에 빠질 뻔했다니까?”
“제기랄.”
하라드는 그때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두 손으로 이마를 짚는 녀석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웠다.
“후, 실은 나도 그림자 던전에 대해선 잘 몰라. 정확하게는 오늘날의 마법사들은 그 존재의 실질과 허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잘 없어. 너무 오래전 얘기고, 마법학도 발전하지 않은 시절에 허구적인 내용이 많이 섞였거든.”
“그런…….”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단순한 적마정석의 활용일 뿐이라면 하라드만이 아니라 네마냐만으로도 대응할 수 있었다. 네마냐에게는 어차피 마나 흡수가 먹히지 않으니까. 문제는…….
“거기다 직접 갇혀 봤다니 알 테지. 미완성 상태에서도 그림자 던전은 이 세계의 모든 마나의 원리나 물리의 법칙이 통하지 않아.”
“그랬지. 모든 마법을 삼키듯 먹어 버렸지.”
굳이 표현하자면, 그래. 먹어치운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작용이 있다면 반작용이 있다. 깨지든, 부서지든, 뒤로 밀려나든 간에. 하지만 어둠의 던전은 그저 모든 빛을 빼앗으며 꾸역꾸역 덩치를 키울 뿐, 모든 저항이 무력해졌다.
“그림자 던전의 진정한 위험이지. 왜 먼 서쪽 변방 사투리로 감옥이란 뜻인 던전을 붙인 것도 그것 때문이지.”
“……그 파훼법은 알고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에 고개를 젓는 녀석.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직접 맞서서 없애는 방식은 확인된 게 없어. 그걸 확인해 보려면 너무 피해가 크거든.”
“혹시 신성 마나가 어떻게 견제할 수 없나? 적마정석이 마계의 기운이라면 분명히 양자는 상극일 텐데.”
“아, 마침 거길 배울 참이었지, 분명. 신성 마나도 마찬가지야. 어둠의 던전에선 먹히지 않아.”
“……정말이야?”
“내가 말했잖아. 그림자 던전이란 건 이 세계의 상식이란 게 통하지 않는 ‘뒤집힌 세계’. 이 세상의 질서로는 설명할 수 없고, 혼돈조차도 넘어서는 논외의 세상이야.”
하라드의 설명은 담담하게 이어졌지만 그 내용은 참 어려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신성 마나는 다른 마나랑은 좀 달라, 그러니까……. 다른 모든 종류의 마나를 관리하는 일종의 문지기? 감독관? 같은 거지.”
“그래서 신성 마나를 관리하는 신관회가 불순한 기운을 감독한다는 게 그런 뜻인가?”
마법학의 뿌리, 그러니까 마나역학의 시초는 일종의 자연철학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학문의 전제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마나를 낼 수도, 못 낼 수도 있다.
“그래. 지금이야 마나의 지고지순함과 자연질서를 숭앙한다고 하지. 하지만 원래는 영역 마나 시스템에서 불순한 붉은 마나의 존재를 감시하는 역할인 거지.”
“그래, 그래서……. 성국에서 그렇게 빨리 대처할 수 있던 거였어.”
바누라트의 편지 한 장에 성국이 그렇게 신속하게 움직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출발 신호라도 온 것처럼 나를 부르고, 갖가지 대비를 서둘렀다.
“그렇다면 어쨌든 신성 마나로도 그림자 던전을 직접 상대할 순 없다는 뜻인 거지?”
“맞아. 단 두 가지 방법만이 있을 뿐이지. 하나는 예방법, 하나는 그나마 대응 방법.”
자세를 고쳐잡은 하라드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그 두 가지 방법이란 것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네마냐는 잔뜩 집중한 표정으로 그 정보를 듣기 시작했다.
* * *
―쾅!
“헉헉……. 네마냐가 날 불렀다고? 어디에……아! 뭐야 내가 잘못 들어온 건가.”
문을 부서지도록 열고 들어온 것은 미하일이었다. 근처 수정광산을 시찰하다가 뒤늦게 호출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온 모양이다. 바흐람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고 있던 네마냐가 눈을 끔뻑대며 쳐다보았다.
“……아냐. 마침 할 말은 끝난 참이었어, 그렇지 바흐람?”
“더 말씀 없으시다면 하신 말씀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고는 언제가 될지 확신할 순 없지만.”
“부탁하지. 이번에야말로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니까. 그…… 연락망도 부탁하고.”
회색빛의 무감각한 표정은 변함없는 눈빛으로 네마냐의 명령을 받아냈다. 그는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는 그에게 눈길을 주며 미하일은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지시를 한 거야?”
의자에 앉는 녀석이 사뭇 분위기가 무거운 모습에 적잖이 긴장한 듯한 모양새였다. 네마냐는 숨을 들이마시면서 고개를 저었다.
“별 것 아니야. 척후 강화를 요청했어.”
“척후? 아, 고블린 말이지? 이번에 바난드에서 결국 사고가 터진 거야?”
“너도 대충 짐작은 했냐? 정확한 사건에 대한 건 아는 게 있고?”
미하일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영지 관리로도 바쁜 녀석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리는 없었다.
“아니. 아까 잠깐 하라드를 만나서 대충 이야기만 들었지. 적마정석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뒤집힌 세계라니, 어우.”
“우리 바난드에 있을 때도 아쇼트 왕자가 은근히 억하심정이 있으리란 추측은 있었거든. 그때야, 헛소문일 테니 네게 알리진 않았지만.”
“우선 영지의 군대에 소집령을 내려줘. 하루 이틀 정도 고블린 쪽 상황을 보고 나서 움직여야겠어.”
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하일이 좀 더 긴장된 목소리로 물어왔다.
“결국 바난드로 진군할 생각이야? 잘못하면 영지 전체가 역적이 될 수 있어. 아쇼트 왕자와 적절하게 타협을 잡을 수 없겠어?”
“타협……. 거침없이 반대자에게 금기의 그림자 던전을 펼치고 적마정석을 쓰는 자식들이랑 말이지?”
“어휴, 어렵다. 마정석이나 수정이나 좀 캐서 동네 사람들이랑 즐겁게 사나 싶었더니, 무슨 침략에 내란에 전쟁에 어휴…….”
머리를 탁 치는 시늉과 함께 미하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느냐는 물음에 마지못해서 말한다는 식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병사들에게 동원 대기시켜야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암피에르 조약의 동맹군 발동 조건도 좀 살펴보고.”
“그렇지, 참. 그 망할 조약의 규정에 맞는지 검토도 해 봐야 하니까.”
“큰 기대는 안 된다만……. 아무튼, 오늘 저녁까지는 한번 살펴보고 알려 줄게.”
“고맙다.”
“네가 고생이지.”
시시껄렁한 덕담을 주고받은 미하일이 자리를 떠났다. 연달아 세 명의 사람을 만난 네마냐는 눈을 감았다. 모든 메인 미션들이 중단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창과 함께 떠오른 ‘바난드 내전’ 항목이 압박해 왔다.
“이게 정말 고블린의 술수라면, 기가 막힐 정도로 무서운 놈들이라니까.”
일단 네마냐가 결심한 것은 최대한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이었다. 고블린이 정말 쳐들어오는 것인지 확인한 뒤, 곧바로 쳐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아니로 갈 생각이었다. 불가피한 위험을 감수하자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차피 고블린이 쳐들어오게 되면 무조건 내란과 겹칠 수밖엔 없어. 놈들이 바로 쳐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내란부터 최대한 수습하고 움직여야겠지.’
가장 이상적인 결론은 고블린을 격퇴하고 아쇼트와 펜자르크를 꺾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세계에서도 물리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무력하게 당해 버린 왕국, 여전히 취약한 성국과 다르빌까지.
[언제든 필요하다면 나를 부르거라, 친구여.]
그때였을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키마이라!”
네 글자 이름을 외치며, 미친 사람처럼 네마냐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겉옷을 대충 몸에 걸친 채로 방을 나섰다.
“영주님, 마침 저녁 식사…… 영주님?”
집사장인 헬레나 유모가 반갑게 저녁 메뉴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지나쳤다. 지나치면서 네마냐는 간단한 설명을 남겼다.
“잠깐 밖에 다녀올게요. 한 시간이면 될 거예요. 제 저녁은 그냥 방에 둬 주세요.”
“이 저녁에 어딜 가시는데요?”
물어볼 질문도 끝나지 않은 참에 네마냐는 현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빠른 움직임에 유모도 놀랄 정도였다.
“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뭔가 일이 있으신 것이겠죠. 걱정 말고 들어가서 저녁 드시죠. 정리는 제가 해 두겠습니다.”
집사 스프란체가 아무렇지 않은 은은한 미소로 유모에게 들어갈 것을 청했다. 헬레나는 알겠다며 순순히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프란체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건물 현관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막연하게 현관을 쳐다보는 느낌보단,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시선이었다.
* * *
―덜커덩!
“고블린이요? 요즘은 좀 잔잔합니다. 오죽하면 여기가 얼마 전만 해도 습격으로 다급했다는 그 도시가 맞느냔 소리도 나왔습니다.”
연이어 짐수레가 경비병의 제지도 거치지 않은 채 성문을 드나들었다. 바흐람은 수비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시 곳곳의 장벽을 휘휘 둘러보았다.
“확실히…… 예전에 봤던 것에 비하면 훨씬 튼튼해졌어. 이 정도라면 진짜 적이 오더라도 당분간은 괜찮겠지. 식량 보유량은?”
“주민 5천 명이 한 달 정도는 너끈히 먹고 지낼 수 있습니다.”
“정말 급해지면 배급량을 줄일 수도 있을 테니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다행히 영주의 어두운 전망은 전망으로 그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수비대장과 그쯤에서 이야기를 마친 바흐람은 이내 시내의 한 여관에 잡아둔 숙소로 들어갔다.
“대장, 다녀왔습니다.”
“국경지대는 어땠나?”
“바라즈케르트에도, 또 ‘그곳’에도 다녀왔습니다만, 딱히 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역시, 영주님이 그저 불안하게 생각하신 것뿐이겠지. 어쩌면 겨울에 놈들이 쳐들어온다던 계획도 바뀐 것일지도 모르지.”
바흐람의 회색 눈동자는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블린 관찰 보고서를 훑었다. 수하들은 복면을 어느새 걷고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
“대장? 그…….”
바흐람은 물끄러미 소리를 낸 수하들의 으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지?”
“우리가 있던 이라크시스 강변은 고블린의 활동이 일체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보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째서 뜸을 들이고 있어? 그럴 녀석들이 아닌 건 수십 년 경험으로 알고 있을 텐데. 얘기해 봐.”
“나코르잔 방면으로 군단의 병력 5만이 쳐들어갔답니다. 대규모 살육과 초토화가 일어나고 있다고도 전해 들었습니다.”
나코르잔. 나자리안 백작이 느꼈던 불안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고블린 군단이 마침내 무거운 발을 떼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그 시작은 보통의 인간들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을 뿐.
“나코르잔……. 곧 중부 산맥에도 놈들이 출현하겠군. 탑의 마법사, 그 개자식도. 역시나, 바난드의 사태는 놈들이 주도한 건가.”
들고 있던 종이가 잔뜩 주먹 속에서 구겨졌다. 바흐람의 회색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흰자위에는 핏발이 서렸다.
“모두 비상 경계에 들어가라. 나는 이 문제를 바로 보고하러 가보겠다.”
“존명!”
예정되었던 것처럼, 차마 바라지 않았던 시리즈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흐람은 불타오르는 나샤와를 기억해 내며 귀에서 삐 하는 이상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느꼈다. 이를 악물며 혼자서 되뇌는 중얼거림.
“이번에는 반드시…….”
운명의 흐름은 회귀한 세계를 다시 시험해 보겠다는 듯 가혹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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