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정적이 감도는 왕성에는 쥐새끼 하나, 개미 한 마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성을 되찾은 엘레나가 대열의 맨 앞에서 양팔을 휘두르며 활보했으나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았다.
“왕성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겁니까?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지만 너무 조용한데.”
“도시와 마찬가지겠지. 아쇼트 왕자가 이미 내부를 장악했다면 안쪽에서야 달리 대항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네마냐의 추측에 엘레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스스로도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었겠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네마냐는 슬쩍 엘레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 들어가는 건 좋아. 그런데 들어가서 뭘 할 거야? 먼저 생각을 하고 움직이자고.”
“뭘 해야겠어? 뻔하지. 펜자르크와 사생결단을 내든지 해서 끝장을 내야…….”
“휴, 정신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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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얼굴 앞에 두 손을 들이밀고 박수를 쳐 보였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멍한 표정이던 녀석은 조금 혈색이 돌아왔다.
“내 고향에는 이런 속담이 있어.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범이 사람을 물어갑니까? 그 자리에서 먹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급한 와중에 뜬금없는 태클. 필로칼리스에게 그간 네마냐가 하지 않았던 반말이 튀어나왔다. 멋쩍은 듯 젊은 기사가 금발 머리칼을 긁적거렸다. 네마냐는 다시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자. 일부러 티를 내지 말고 태연하게 아쇼트와 펜자르크를 만나자고.”
“아쇼트는 몰라도 펜자르크가 여기 있을까?”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있을 가능성이 크지. 만약 우리가 당할 뻔한 그림자 던전이 정말 진짜였다면 우릴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을 테니까, 그렇지.”
“대체…… 그 던전이란 게 정말 있는 걸까요.”
클로루스가 꺼낸 질문은 네마냐 자신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적마정석이 그림자 던전을 소환하는 도구가 된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방식에 대해선 아무도 몰랐다.
‘정확하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정보를 차단했다 쪽이 가깝겠지만.’
숱하게 거론되던 600년 전의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 동부제국에서 오랜 전쟁이 백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마정석 중에선 적마정석이 가장 활용성이 높다는 건 알고 있지? 순수한 마나 보유량도 크고 말이야.”
“예, 맞습니다. 그건 기본 마공학 입문을 배울 때 항상 짚고 가는 내용이죠.”
“더군다나, 주변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 덕분에 초기 단계인 제국 마법학 수준에서는 최고의 아티팩트 재료였겠지.”
“그러다, 결국엔 사건이 터진 거군요.”
적마정석의 붉은 기운이 한때는 성스러운 황제의 색과 상통한다고 평가가 한없이 높았다. 신나게 펑펑 써댄 끝에 제국에 남은 것은 심각한 후유증이었다.
“흡수된 마나의 일부가 계속 오염된 채로 배출이 되었지. 마침내 그 양이 한계를 넘어서 정상 마나를 압도하자, 그게 나타났지.”
“그림자, 던전.”
엘레나의 두 마디가 서늘하게 다가왔다. 제국 정부가 일련의 쿠데타와 대반란, 던전 전쟁 이후 모든 기록을 지워 버린 만큼, 그 공백은 무섭게 다가왔다.
“일단은 늦기 전에 시전자를 제압한 건 효과적이었어. 그걸로 보아선 일단 우리에게 전개된 그림자 던전은 아직 어설픈 수준 같아.”
“그렇습니다. 백작님 말씀대로 자연적으로 일어났던 그림자 던전은 마나는커녕 우리 세계의 어떤 수단도 먹히지 않았죠.”
불완전한 그림자 던전이라.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것이긴 마찬가지다. 만약 네마냐 자신이 마지막으로 달려들지 않았다면. 고개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누님. 웬일로 이 이른 시간에 왔대? 왔으면 얼른 들어가서 아버님이나 뵙지.”
“……아쇼트?”
엘레나가 참았던 호흡을 내뱉듯이 아무렇지 않게 이복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네마냐와 나머지 두 기사는 그 소리에 자동으로 반응했다.
“왕자께 건강과 복락이 영원하기를.”
“왕자님을 뵙습니다. 건강하셨는지요.”
“어, 응. 근데 그, 누구였더라. 한번 본 것 같은데. 내가 기억력이 좀 나빠서, 하하.”
이게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나. 질 나쁜 연기지만 왕자는 왕자다. 네마냐는 역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예. 바가반드 소영지의 네마냐입니다. 네마냐 나자리안.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이제 기억이 나는군. 못 본 사이에 훨씬 영주다워졌어. 나랑 동갑내기라는 게 의심이 갈 정도로군.”
“감사합니다.”
별 관심 없다는 걸 드러내듯 이내 고개를 돌린 아쇼트가 다시 엘레나에게 말을 건넸다.
“누님……. 밖에서 그렇게 자객의 습격을 받을 줄은 몰랐어. 내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앞으론 호위를 더 데리고 다녀.”
“자객과 관련해서 뭔가 아는 게 있지 않니?”
엘레나의 말은 이미 묻는 투가 아니었다. 모든 확인이 끝난 뒤 해명을 요구하는데 가까웠다. 그러나 아쇼트는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그럴 리가. 나도 바깥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서 궁성만 지키고 있었을 뿐이니까. 오해는 하지 말라고. 내가 그…… 수상한 놈을 죽였잖아? 같은 편이라구, 하핫!”
“같은 편…….”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믿을 리야 없겠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부정할 방법도 없었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론 아쇼트 왕자가 자객의 대장을 쓰러뜨리고 던전을 중지시킨 셈이었다.
“도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엘레나 공주께선 그림자 던전에 충격을 받으셔서 지금 좀 말이 나오지 않으십니다.”
“응, 그럴 것 같았지. 그래서야 아버지를 어디 뵐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쉬다가 시간을 내서 점심쯤에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엘레나 공주님?”
녀석과 엘레나가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 않도록 내가 단호하게 돌아서 물음을 건넸다. 착잡한 녀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좋습니다. 저희는 그럼 잠시 대기하겠습니다.”
“그래…….”
네마냐가 돌아서서 대답하자 어딘가 아쉬운 듯 왕자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이번엔 네마냐를 향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누이를 직접 챙겨 주었으니 내가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군.”
“주군의 가족이기도 하고, 성국의 기사단장이기도 합니다. 제가 도와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아니, 이건 내 개인적인 감사의 표시라서 말이야. 꼭 갚도록 허락해 주어야겠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사의 표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이건 예전 직장의 웬수만도 못했던 상무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제대로 찍혔군…….’
두려울 건 없었다. 왕자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네마냐도 싱긋 웃음을 돌려주었다.
“그럼 언젠가 선물을 꼭 받으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다시 뵙죠.”
“그래. 기대하지. 그럼 나중에 보자고. 누님도…….”
엘레나를 압박하려던 의도가 꺾인 아쇼트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저 멀리 사라졌다. 그 뒤를 따르는 수상한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저 뒤를 따르는 녀석이 펜자르크야.”
“확실해?”
“확실해. 젊을 때 내전에서 발을 다쳐서 절뚝거리거든. 저 움직임은 분명히 녀석이야.”
네 사람은 그렇게 계단을 올라 국왕 하코브가 있을 침전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지켜봐야 했다.
“우선 근처의 장소로 가서 체력을 회복하고 가자. 전하께선 무사하신 모양이니까.”
“그게 좋겠습니다, 단장!”
“저희가 부축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근처의 빈 숙소를 찾으러 떠났다. 네마냐는 한동안 우두커니 선 채로 어두움 가득한 대전 위를 노려보았다. 언제라도 그렁대는 붉은 아지랑이가 쏟아질 것 같다는 눈치로.
* * *
“오, 엘레나. 왔느냐.”
몇 개월 만에 폭삭 늙은 듯한 하코브 4세는 어색하게 팔을 벌렸다.
‘완전 딱딱해! 아무리 연기 톤이라지만 저렇게 할 수 있나.’
이런 위기상황에서 부녀가 서로를 살아남아 다시 봤으니 얼마나 다행이련만.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부녀상봉을 반기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국왕 곁에 아쇼트가 당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흠, 흠!”
아쇼트가 헛기침으로 대화를 끊더니 국왕에게 무어라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힘없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하코브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자객이 너희를 노려 위험했다고. 나 역시 그랬단다 만약 아쇼트와 펜자르크가 우릴 구하지 않았다면 어쨌을지 모르겠구나.”
“……예?”
멍청하게 자리에서 굳어 버린 엘레나가 되물었다. 당황스러울 노릇이었다. 국왕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오늘 수도를 습격한 무리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펜자르크 경에겐 아주 깊이 감사하고 있네. 아쇼트 왕자를 충실히 보필해 주더군.”
“이미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할 겁니다.”
“허허…….”
언제나 곁에 있던 동생 바누라트가 보이지 않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국왕. 그나마 네마냐 자신조차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흠…….’
말없이 지켜보던 네마냐는 피곤한 척 눈을 슬쩍 감았다. 어차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상태니 눈치를 챌 일도 없었다.
[탐지]
거리는 비교적 있지만 이미 거리 향상 기능이 있는 2단계를 개방한 상태. 거리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음?”
“……왜 그러나, 펜자르크?”
조용하게 왕과 엘레나의 대화가 이어지던 찰나에 갑작스러운 펜자르크의 반응.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괜히 네마냐의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음, 아닙니다. 제가 뭔가 느꼈나 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 엘레나, 그래서 말이다만…….”
하코브 왕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네마냐는 시야 앞에 드러난 보고를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감지가 가능하다고?’
분명 마지막 순간, 펜자르크의 한마디와 함께 탐지가 중단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일렁이는 붉은 마나의 기운. 아쇼트 광장에서 살짝 느꼈던 적마정석의 기운은 사실 왕성 전체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 같은데. 설마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 놨을 줄은…….’
[국왕에게서 정상적인 마나의 기운이 탐지되지 않음. 전반적으로 주변 공간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어 탐지가 불가능.]
왕성을 군대로 장악하더라도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버티는 게 고작일 터였다. 어떤 마력도 먹혀들지 않고 거꾸로 잡아먹히던 검은 그림자 던전을 떠올리니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바누라트 숙부께선 어디에 계신가요? 그분도 뵈어야 할 것 같은데.”
“으응…… 바누라트? 그게 누구냐?”
“숙부를 모르신다고요?”
엘레나도 이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문제가 있단 걸 깨달은 모양이다. 무언가 다시 물으려 했지만 다시 펜자르크가 가로막고 나섰다.
“반가운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전하께서 역도들의 공격에 놀라 당황하신 상태입니다.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만 하시는 게 좋겠군요.”
고개를 돌린 펜자르크가 하코브 국왕에게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전하.”
“으응. 그대 말대로 하지.”
“그러시다는군요, 공주님. 바가반드 백작도 그만 물러가서 쉬시는 게 좋겠군요. 영지나 국내의 일과 관련해선 저나 왕자님과 따로 자리를 잡는 게 좋겠습니다.”
펜자르크 백작은 예의 바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 미소는 전혀 자신에 대한 호감이 한 푼어치도 담기지 않았다.
* * *
“어떻게 생각해?”
“응? 뭘?”
어쩔 수 없이 국왕을 남겨 둔 채 나오는 길. 엘레나가 문득 물음을 던져왔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 말이야. 뭔가 고블린 군단을 상대하던 때의 느낌이 느껴졌는데. 너도 느꼈어?”
“아, 너도 느꼈구나. 그건 적마정석의 기운이었지. 더군다나…….”
“더군다나?”
시스템상의 탐지 스킬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이 무슨 의미지? 그걸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이르니 말문이 턱 막혔다. 펜자르크라는 녀석이 홀로 진정한 적이란 걸까, 아니면 그 배후에…….
“네마냐, 괜찮아?”
“어, 응. 별 것 아냐. 처음 생각했을 때보다 복잡해져서.”
“그래.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우선 바누라트 경부터 찾아보자.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선 궁 안에는 들어오지 못한 것 같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확인해 봐야지.”
층계의 마지막 부분을 내려서며 네마냐는 단호하게 끝맺었다. 생각지도 못한 데서 시작된 위협이지만 차근차근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여전히 유일한 답일 것이다.
“적마정석에, 내분이라. 하필 이런 상황에서.”
새벽부터 연달아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벌써 다음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차갑게 가라앉은 이성으로 헤아리는 네마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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