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여전히 새벽이 한창이었다. 이제 갓 드러난 여명이 동쪽 하늘 끝을 물들 뿐이었다. 클로루스와 필로칼리스, 두 기사만을 대동한 네마냐와 엘레나는 말도 없이 고삐를 몰았다.
“두 분, 조금 있으면 곧 국경입니다. 조금 쉬어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클로루스가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못한 두 사람이 걱정되는 듯 조언을 건넸다. 필로칼리스도 동감이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렇게 계속 달리시다가 정작 아니온에 도착해선 힘이 다할까 걱정입니다. 두어 시간이라도 쉬었다 가시는 게…….”
“그대로 간다.”
엘레나는 단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두 사람이 민망해할까 봐 네마냐는 고개를 돌려 애써 끄덕여 주었다.
“네마냐, 가서 할 일에 대해선 생각해 봤어? 아마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선 아니에서도 그다지 상황이 우호적이진 않을 텐데.”
“우호적인 게 아니라 적대적이겠지. 상속법에서 예외를 만들어 버리는 네 존재를 귀족들이 반기지 않는 건 잘 알잖아.”
“그래서 일부러 성국의 기사단으로 나가겠다고 자원까지 했는데, 참.”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죄책감이 드는 네마냐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내가 와서 달라진 건 타임라인이 조금 빨라진 것뿐,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달라지지 않았어. 엉성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상속법, 여자 상속이라면 질색하는 사람들 하며…….’
그리고 아쇼트 왕자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은 펜자르크까지. 그 백작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과거 바난드 내전이 일어났을 때 네마냐는 그저 행상을 돌아다닐 때라 기억할 거리가 없었다.
“펜자르크는 대체 정체가 뭐지? 왜 지금 반란을 꾸미는 걸까?”
“아쇼트의 외가니까. 녀석하고 내가 남매라는 건 얘기했던가? 지금이야 세상에 안 계시다지만 뭐.”
“왕가의 사정이란 복잡하군.”
결국 그 배후란 간단하게 가문의 싸움까지 얽혀 들어가는 것이었다. 왜 단순히 장녀 계승만의 문제가 아닌, 귀족 세력 간의 암투로까지 이어지는지 알 듯했다.
“우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연합할 수 있는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겠지. 그런 점에선 성국의 후원이 절실하긴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타국의 개입이 확인되는 순간 거부감을 느끼는 귀족들의 이탈을 부를 수 있다. 긍정적인 경우엔 성녀의 권위에 사람들이 따를 수도 있지만, 꼭 그렇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암피에르 조약에선 타국 내정에 개입을 금한다는 명분까지 있었다.
“맞아, 네마냐 너의 판단이 맞지. 성국이 개입하면 마탑은 반드시 상대방을 지원할 테니까. 훨씬 버거워질 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해 보자고.”
분위기 좋게 힘을 북돋웠다. 하지만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었다. 국왕은 늙었고, 숙부인 바누라트는 귀족보단 상인과 장인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말은 힘차게 했지만 난감하군.’
바난드 왕국은 자유로운 바가반드와는 또 달랐다. 바가반드는 이미 많은 기존 체제가 결딴난 탓에 장인과 농민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난드는 훨씬 안정되고 옛 체제를 지키고 있었다.
‘안정되었다는 건 목소리를 크게 낼 귀족들이 보존되었단 뜻도 되는 거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른 네마냐는 그렇다면 국왕, 아니 정확하겐 엘레나에 함께 설 만한 귀족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너를 도와줄 만한 귀족이 있어?”
“귀족?”
“그래. 최대한 봉토를 가진 사람 중에서 생각해 봐. 가급적 큰 봉토.”
잠시 생각에 빠져든 엘레나가 혼잣말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할야크 남작……. 그래 거기가 있었지.”
“할야크? 일전에 거기도 돌았었는데. 거기도 제법 영지가 크지 않나?”
봉토 중에서도 독자적으로 등장할 수 있을 만큼 큰 영지였다. 고작 남작령이었지만 소규모 백작령인 바가반드보다 조금 작은 영지였다.
“거기다 일전에 할야크 마법 길드와의 갈등 당시에 제국으로부터 강제로 남쪽 영지를 독립시켜야 했어. 제국이나 마탑에 경계를 하는 곳이기도 하지.”
“그렇다면 제국이나 마탑이 개입하는 것도 피할 수 있겠군. 하지만 그곳 남작, 음 그러니까 이름이…….”
“야르지, 야르지 할야크.”
“그래, 야르지 남작이 그것 말고도 너를 지지할 만한 유인이 달리 있을까?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접촉할 수라도 있을 텐데.”
어설픈 기대만으로 연락하는 건, 이런 민감한 정국에 불리한 폭탄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엘레나와 국왕이 먼저 선제적으로 세력을 형성한다는 고발을 당할 수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야르지 남작은 우리 아버지 돌격대장이었고 내게도 검술을 가르쳐 주고 신종 선서를 했었어.”
“신종 선서? 그거 주종관계를 맺을 때 쓰는 방법인데, 그것까지 해 주었다고?”
“그래. 아버지가 부탁을 했던 모양이야.”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할야크 남작령은 수도 아니에서도 매우 지척에 있는 영지. 어째서 그렇게 가까운 곳에 큰 영지를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유사시 얼마든 개입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었군. 네 아버님, 역시 현명하셨어.”
“설마 왕국의 절반 가까이가 이렇게 빨리 반란의 마각을 드러낼 줄은 몰랐겠지만. 알았다면 진작에 제압했겠지.”
“그래.”
네마냐의 대답을 끝으로 오랜 대화가 다시 끊어졌다. 이번엔 클로루스가 물었다.
“그런데 아까 파드 단장께선 어디로 가신 겁니까? 상황이 급하다면 기사단 병력이 있는 수도로 가시는 게 맞을 텐데.”
“칼주안으로 가셨어.”
“칼주안이요? 거기가 어딥니까?”
칼주안. 펜자르크의 영지에서 이라크시스 강을 따라 수도 아니로 향하는 계곡, 그 길목을 틀어막는 관문이었다. 그 점을 설명한 엘레나가 반드시 저지해야 할 몇 군데를 짚었다. 그걸 염두에 둔 일행은 계속 아니를 향해 움직였다.
“누구십니까?”
아침이라 이미 문을 열고 있었어야 할 문지기가 문루 위에서 소리를 외쳤다.
“이상하군요. 어째서 문을 닫고 있는 걸까요?”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엄중해서 비상 경계에 들어간 것 같아.”
그렇게 설명한 엘레나는 말을 몇 발짝 앞으로 몰아가더니 성루 위를 향해 소리쳤다.
“성국 기사단장이요, 바난드의 공주 엘레나다. 문을 열어라.”
“그 곁에는 바난드의 백작, 바가반드 영주 네마냐 나자리안도 있다. 전하의 부르심을 받아 왔으니 문을 열어라.”
네마냐도 재빨리 엘레나의 뒤를 따라가 함께했다. 만약 이미 바누라트가 염려했던 대로 상황이 악화되었다면 성문도 장악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궁정과 정부의 상당수 인원도 펜자르크의 대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언제 반기를 드느냐에 따라서 왕국도 뒤집힐지 모를 일입니다.]
편지의 한 귀퉁이를 아직도 떠올리며 네마냐가 끙끙대는 사이, 생각보다 간단하게 문이 열렸다. 엘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호위 기사 두 명은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사람 죽으란 법은 없나 봅니다. 아직 도시의 치안은 멀쩡한 것 같군요.”
“어서 들어가서 처리하시죠.”
“…….”
네마냐는 말없이 열린 문 너머 시내를 훑었다. 아침 해가 슬슬 밝아올 새벽이니 건물에 불빛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보초들이 섰을 성벽이나 거리 가로등에까지 불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나?’
만약 불을 끌 시점이 되어 껐다고 하면 하다못해 불을 끄러 다니는 병사라도 보여야 했다. 그런 모습조차 없었다. 그보단 마치…….
“사람 인기척조차 없으니 이래서야 도시인지 공동묘지인지 모르겠는데.”
네마냐의 한마디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도 어딘지 이상한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하긴, 지금처럼 비상상황이니 국왕이나 조합장께서 계엄령을 내리셨겠죠.”
“차라리 이렇게 조용해 버리면 골치 아플 일은 없겠네요. 안 그렇습니까, 단장님.”
하지만 엘레나 역시 어딘가 께름칙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네마냐, 네가 느끼는 불안감이 뭔지 나도 대충 느껴지는데…… 그래도 들어가야겠지?”
“아무리 불길해도 네 아버지와 숙부가 계시는 궁전이니까. 펜자르크에게 그대로 왕관을 내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들어가자.”
“어차피 그러려고 했어. 누군가 그 얘길 해 주길 바랐지만.”
“나중에 밥이나 한 끼 사라고.”
말을 마친 두 사람은 숨을 들이켠 뒤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인지 함정인지 모를 어두운 거리를 향하여.
“정말 아무도 없군요.”
“원래 이때쯤이면 새벽 일꾼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할 무렵 아닙니까?”
“뭐, 그거야 계엄이라면 모두 정지시켰겠지.”
네 사람은 텅 비어 있는 중앙대로를 따라 왕성으로 난 길을 따라갔다. 이윽고 일행이 다다른 곳은 중앙에 원형 분수대가 자리한 커다란 광장이었다. 주변엔 2층으로 된 회랑이 역시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성 아쇼트 광장이야.”
엘레나의 착잡한 한마디. 하야스단 통일 왕국을 세웠던 대왕, 아쇼트를 기리는 광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동명이인인 누군가의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래. 나도 오가면서 두어 번 봤지. 하지만 저것 하나만큼은 처음 보는군.”
“저것……?”
클로루스가 이상하단 듯 되물었다. 허공의 어느 한구석을 가리키는 네마냐의 손가락.
“저 깃발은 어느 영지의 것이지?”
늑대의 머리통을 그려낸 기괴한 문양이 하얀 깃발에 찍힌 채 하늘에 휘날렸다. 참 센스라곤 단 1도 없다 할 만한 것이었다.
“저건, 펜자르크…… 그 영지의 문장인데.”
“펜자르크?”
필로칼리스가 자기도 모르게 꺼낸 그 이름. 네마냐는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필 떠올리기 싫은 시나리오가 튀어나왔군.”
“펜자르크 놈들이 벌써 도시를 장악하다니, 우리 생각보다도 결단력이 대단한데.”
“아쇼트 전하가 위기감을 느꼈는지도 모르지.”
잠시 피곤을 억누르듯 눈을 감은 네마냐의 시선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탐지]
[사방에서 위협적인 살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즉석 임무 발생 : 자객의 습격]
‘즉석 임무라니, 지랄…….’
바로 곁 엘레나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할 말 못 할 말을 다 뱉어낸 네마냐. 재빠른 손길로 검집을 붙들었다.
“모두 준비해. 다가온다.”
“하, 준비됐습니다.”
“저도.”
“미안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네 사람 모두가 검을 뽑은 채 서로 등을 맞댔다. 엘레나가 재차 네마냐에게 물었다.
“놈들의 숫자는 어떨 것 같아? 정체는?”
“기다려 봐.”
그렇게 다시 눈을 꼭 감은 네마냐가 이번엔 2단계 탐지를 시행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다시 결과를 얻어냈다.
[마나가 흡수되는 층이 있어 일정 거리 이상에선 탐지가 불가능합니다. 마나를 사용하는 인원 20명가량이 접근 중! 경고!]
마지막 단락을 본 네마냐는 눈을 뜨기도 전에 소리부터 냈다.
“마법 사용자 20명, 접근 중!”
“간다!”
엘레나와 두 호위 기사는 순식간에 오라를 끌어올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네마냐 역시 마나를 검에 불어넣었다.
―우우웅!
검이 마나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눈 부신 빛을 냈다.
‘빛이 훨씬 밝은데. 아나무이라에서의 짧은 연습이 이 정도로 결과를 낸다고?’
똑같은 마나를 불어넣는다고 해도 균일한 밀도로 마나를 배치하는 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모두 없애 버려! 특히 여자와 검은 망토의 녀석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광장 한쪽에서 들리는 거친 목소리. 그리고 불덩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피해!”
굳이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 신호에 세 사람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네마냐 역시 가볍게 몸을 던져 피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어딜 피해!”
“어림도 없지.”
어둠 속에서 갑자기 어두운 붉은색의 오라가 실린 무기가 달려들었다. 각각 철퇴와 전투용 도끼였다.
“보르크 이래로 가장 무례한 고블린들이군.”
“뭐? 우린 인간이거든?”
격분했는지 말소리가 나온 곳에서 다시 붉은빛이 쏘아져 나왔다. 네마냐는 검을 들어 가볍게 튕겨 냈다.
‘와. 이 오라를 가볍게 튕겨 낸다고?’
속으로 감탄하면서 네마냐는 말대답과 함께 검을 바로잡느라 바빴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적마정석의 기운이나 끌어다 쓰면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살육하려 들지 않거든. 그건 딱 고블린이지.”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에잇!”
성인 몸통만 한 도끼가 가로로 하늘과 땅마저 베어 버릴 듯 달려들었다. 피하거나 공격 마법으로 튕겨 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마냐는 가슴팍에 걸려 있을 백색 수정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카스텔론]
작지만 아주 튼튼한 구형의 실드가 세워졌다. 특히나 네마냐가 틈틈이 충전시킨 금속계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으앗! 이놈의 도끼가 왜 이래?”
“멍청한 데다 용감하기까지 하면 제 명을 재촉하는 법이지.”
금속계 마나의 실드는 오라를 띤 금속기를 꽉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네마냐는 가볍게 검을 뽑아 들고 앞을 향해 찔렀다. 완전히 마나의 균형을 이루어 그 어느 금속보다 단단해진 마법 검, 순식간에 검신에서 튀어나온 빛은 도끼를 그대로 부수어 버리고 직선으로 달려나갔다.
[에드라미 파오스]
일직선으로 튀어 나가는 빛을 생각하기만 해도 구현이 가능하다는 간단 마법.
“끄아악!”
“으악!”
아무 대비도 없이 강한 빛에 노출된 자객들은 뒤로 나자빠졌다. 이쪽에 달려들었던 자들은 모두 제압했다. 다행히 모두 죽이지도 않았다. 네마냐는 손을 탈탈 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 명 모두 기절. 너희들은 어때?”
“순식간에 완료.”
“생각보단 별 것 아니군요.”
역시 마법 도구나 마법에 능숙한 기사들이니 이 정도 허술한 자객엔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첫 번째 파도에 불과했다. 점점 불길하게 차오르는 감각.
“이런, 모두 엎드려!”
뭐라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단 1초 만에 붉게 광장을 가득 채운 빛이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거대한 구름과 함께 분수대를 장식하던 석상의 머리마저 날아가 주변 건물 옥상에 꽂혔다. 과연 네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었을까. 성 아쇼트 광장의 폭발은 곧 연쇄적인 반응을 보이며, 광장 주변을 통째로 날려 버리기 시작했다.
- 9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