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모습을 드러낸 조합장은 허름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내가 바로 자네들이 그렇게 찾던 상인 길드 마스터라네.”
“조합장이셨군요.”
아일라를 제외한 두 사람은 소탈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눈치였다.
“좀 의외인 모양이군. 아, 옷이 너무 간소해서 그러려나?”
그도 그랬다. 상인들은 자신의 지위를 알리고 교섭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치장하는 게 보통이다. 굳이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건가. 그걸 입증이라도 하듯, 바누라트라고 자신을 밝힌 마스터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자신을 광산왕이라 소개하다니. 패기롭고 좋구먼. 요즘 안 그래도 광산 이야기로 들쑤시고 다닌다는 사람들이 있다더니. 주인공을 만나게 될 줄이야.”
“아, 그 소식이 여기까지 퍼졌나요? 딱히 요란스럽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물론 예의상 하는 거짓말이었다. 눈에 띄려고 조합 앞에서 연극을 했던 거니까. 길마도 어째선지 의외로 순순히 수긍해 주었다.
“일행이 하나같이 눈에 띄고 매력적인 사람들이니 어쩌겠나. 게다가 아까 본부 현관 앞에서 하던 연기만 보자면 오히려 노린 것 같던데.”
“하하.”
멋쩍은 웃음과 함께 침묵이 지나가고 바누라트는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긴장할 것 없네. 분명히 자네 사고 건은 우리 측 책임이 맞지. 간부들이 뭔가 이상한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막고 있었네.”
역시, 뭔가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그랬다는 걸 확인받으니 착잡했다. 기사 신분을 가지고도 의심이나 받고, 체면이 살지 않는달까. 인제 와서는 기사 신분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긴 하지만.
“그래서 이런 경우는 보통 체념하기 마련인데 자네의 방식은 새롭더군. 사람의 감정을 일으켜서 움직일 줄도 알고.”
‘왜 이렇게 비행기를 띄워? 보상금 흥정이라도 하려는 건가.’
어떤 꿍꿍이속인지는 모르니 감사하다는 웃음과 함께 조합장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바누라트는 시선을 돌려 이번엔 미하일 녀석을 마주 보았다.
“은발이 멋지군, 자네. 센스 있는 옷맵시까지 보아하니 아마 근래 동네 여자들 사이에서 회자된다는 기사 바드란이겠군. 자네 부모와는 몇 번 본 적 있지.”
“그, 그러셨군요.”
거침없는 친화력에 밀도 움찔하면서 얼른 뒤따라 대답했다.
“부모님은 잘 지내시나?”
“부모님은 잘 지내십니다만, 저는 집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어쨌든 잘 왔네. 자, 그러면…… 오, 이게 누군가, 아일리아.”
“그분의 이름은 아일라입니다.”
네마냐가 앞서서 이름을 정정했다. 어디까지나 동행의 리더는 자신임을 과시하듯. 바누라트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아일라. 이 황금손을 가진 하스페다 가문의 상속자는 우리도 초빙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듣지도 않았지. 그리곤 정작 낯선 무리를 함께 한다니, 이거. 우리가 그만큼 매력 없는 길드가 돼 버린 걸까?”
아일라는 듣기도 귀찮다는 듯 귀를 파는 시늉을 했다. 아마 길드의 알고 있다는 관계자가 바로 조합장이 아니었나 싶었다.
“뭔 소리야, 아재. 그냥 귀찮게 요구할 게 많을 것 같아서 조합 일은 안 한단 거였지.”
“하, 이거 참. 내 권한으로 편하게 지내도록 해 줄 테니 지금이라도 오는 건 어떤가?”
“매달리는 사람은 취향이 아니야. 그리고 뭣보다 나는 지금 계약된 상태라니까?”
아일라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끊었다.
‘나이스, 아일라!’
시무룩해진 바누라트를 보며 속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큼 진상이 아니고서는 흔들리지 않을 아일라가 처음부터 신경질을 내는 걸 보면, 바누라트는 생각보다 말로 사람을 귀찮게 하는 모양이다.
‘말에 괜히 휘둘려선 안 되겠군. 주의하자.’
그래서 네마냐는 빠르게 본론을 나눌 것을 암시하는 대화를 제기했다.
“저기, 조합장님. 죄송하지만 이제 배상금과 제안한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조합장께서도 바쁘신 분이실 테니까요.”
“아아, 내가 사람을 만날 일이 잘 없어서 기회만 생기면 수다쟁이가 되더군. 이해해 주게. 자, 안으로 들어가자고. 아드리드, 손님들과 나눌 다과를 좀 가져다주겠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집무실은 주인의 옷차림 이상으로 더 수수했다. 장식품도 없었고, 흰 벽에 커튼처럼 걸려 있는 걸개마저 어두운색이었다.
“마치 겨울철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는 기분이 드네요. 기분도 으스스하고.”
미하일은 그 소리를 하며 몸을 떠는 시늉을 보였다. 네마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며 미하일의 말에 덧붙였다.
“옷차림이나 방 안 분위기가 상인의 분위기는 전혀 아니네요.”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런 소릴 많이 한다네. 나야 치장할 필요를 못 느끼는데. 행사 때나 입을 모피 외투 몇 벌이면 충분하지.”
하긴, 이미 상인 경력의 최고봉인 조합장이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겠어. 바누라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옷걸이에 걸린 화려한 외투가 걸려 있었다. 고급스러운 모피 외투에 금실과 은실을 섞어 뽑아낸 자수로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방구석에 화려한 옷이 뜬금포로 걸려 있으니까 더 무서운데요.’
한참을 다시 다른 이야기로 떠들던 조합장은 문득 본론이 기억났다는 듯, 손뼉과 함께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지! 이야기하다 또 딴 길로 샐 뻔했군. 보상금에 관해선 기존의 사례를 참고해서 미리 책정해 놨네. 급하게 넣느라 모자랄 수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게.”
털썩.
제법 괜찮은 재질의 가죽 주머니가 무척 무거워 보였다.
‘벌써?’
의아함을 품은 채로 네마냐는 주머니를 집었다. 굉장한 무게감. 보통은 은화 뭉치나 금화 한두 닢 정도일 텐데. 아니면 생색내려고 동화로 200개씩 넣었을지도 모른다. 생선에 납덩이를 넣거나 컴퓨터 부품 상자에 벽돌을 넣는 이치.
“아…….”
그러나 매듭을 풀고 열어 본 주머니 속에는 온통 햇빛과도 같이 얼굴을 비추는 금화 한 무더기가 들어 있었다. 상상하지 못한 액수였다.
“어, 이건 대체……?”
네마냐가 주머니 속과 바누라트를 번갈아 보며 진위를 파악하는 사이, 미하일과 아일라 역시 주머니를 슬쩍 확인하곤 놀라움에 빠졌다. 그러나 태연하기만 한 조합장.
“어때, 액수가 좀 적나?”
“전혀 아닙니다. 예상보다 액수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얼마나 넣으신 건가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내 표정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바누라트는 다시 걸걸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대략 50골드쯤 넣었네. 거기에 어음으로 쓰라고 차용증도 있고. 그걸 보여 주기만 해도 환전은 받을 걸세. 아, 참고로 그 차용증은 200골드짜리네.”
금화가 250골드. 농민 1천 명 규모의 영지에서 거두는 석 달 수입이 대략 그 정도다. 사고 보상금이라기엔 큰돈이었다. 하지만 네마냐가 놀란 건 비단 액수만의 일은 아니었다. 어째서?
‘뭔가 단단히 바라는 게 있군.’
이 정도로 선뜻 큰 금액을 내주는 건 단지 자신들 이미지를 위한 ‘큰손’ 연기는 아닐 테다. 뭔가 노리고 있단 뜻이겠지. 아마도 흐름상 그건 사업과 관련된 문제일 테고.
“보아하니, 조합장님은 무언가 저희에게 단단히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물론이지. 아, 오해는 말게. 보상금에 대해선 어떤 의도도 없어. 호의로 제공하는 금액일 뿐이지.”
하지만 받는 사람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미묘한 장치였다. 역시 허투루 그 자리에 올라간 건 아니라는 증거였다.
“자네가 제안한 대로면 장차 사업이 커질 것 같단 생각이 들긴 했네. 광산업이야, 애초에 시작부터 초기 자본이 많이 필요하지.”
일단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침묵이란 곧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연극하는 것을 보기 전만 해도 사실 대수로운 생각은 없었네. 그것 하나는 내가 분명히 고백하지. 보상금도 50골드씩이나 주지 않았을 테고.”
그렇지. 상인이 돈 냄새를 맡은 거다. 네마냐가 가져온 마정석 광산 계획이 어딘가 남다르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걸 감안해도 무려 조합장이나 되는 사람이잖아. 지극정성으로 움직이고 막대한 금액을 공짜로 줄 정도는 아닌데.’
의문이 계속 남아 있지만, 뭔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뜻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드러내기로 했다.
“당사자인 저도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우가 많이 후하긴 합니다만.”
“어째서 내가 직접 나설 정도로 생각이 달라졌느냐, 그것이 중요한 점이네. 잘 물었어. 실은 아까 자네가 사용한 탐지술을 보고 결정한 일이네.”
“탐지술이요?”
바누라트의 이야기가 다소 설명조로 흘러갔다. 탐지술이란 무엇인가. 대단히 기초적인 주문이다. 마나의 흐름을 인식하고 자유자재로 그 파동을 조절할 수 있는 만큼, 그 능력에도 많은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법 능력자라면 단순히 원소를 소환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어떤 초보자라도 가능할 기초적인 마법이었다. 요컨대 실력만큼 맞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기술일 뿐인 것이다.
‘내 탐지가 뭔가 다르다는 걸 알고 하는 소리 같은데, 어디까지 반응해 줘야 하나.’
네마냐가 속으로 고민하는 사이, 조금 당황한 듯한 미하일 녀석이 나를 대신 변호하고 나섰다.
“뭔가 착오하신 게 아닐까요? 마나 탐지가 금속에 적용되는지는 둘째치고, 마나량이 적은 네마냐 같은 친구한텐 효용이 더 없죠. 똑같은 기술을 써도 마나 자체가 부족하면 활용도에서 실력자에게 밀리는 게 현실이니까요.”
밀은 어딘지 석연치 않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옆자리의 아일라 역시 비슷한 인상이었다. 네마냐는 몇 마디 덧붙이려다 직접 나서는 게 아직은 마뜩잖아 우선은 입을 다물었다.
“딴은 그렇지.”
“딴……이요?”
태클을 당한 미하일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네마냐는 어디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바누라트를 보았다. 생각이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손은 깍지를 끼워 두었다.
“저 친구와 광산을 찾아다녀 봤다면 미하일, 자네도 아마 봤을 텐데. 금속과 접촉했을 때 상호반응을 일으키는걸.”
“그랬었죠.”
“네마냐 경에겐 보통 사람을 초월하는 광물 친화력이 있네. 아까 정원에서 내가 맞닥뜨린 탐지의 마나 파동은 그 자체만으로 광물에서 마나를 끌어내는 힘을 발휘했지.”
바누라트가 미하일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내게 집중했다. 이윽고 품속에서 아주 작은 구슬을 하나 꺼내 들었다. 구슬을 내미는 투박한 손.
“한 번 더 보게 되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걸세. 어쩌면 장본인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마냐 경, 이걸 한번 쥐어 보게.”
네마냐는 구슬치기 때 쓰던 것과 비슷한 유리구슬을 살짝 쥐었다. 이번에는 손을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움찔했다.
“당황하지 말고, 좀 더 기운을 느껴 보게.”
손을 놓지는 않은 대신 손가락 부분을 살펴보았다. 물이나 다른 액체 같은 것들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아티팩트입니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티팩트, 그러니까 마정석으로 만든 마법 보조 도구가 맞긴 하지. 상당한 양의 마나를 품고 있지만, 속성 때문에 사실 그리 쓸모는 없어.”
“어디 한번 줘 봐.”
아일라가 빼앗듯이 구슬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이리저리 살펴보고, 손으로 만지작거리길 반복했다. 알아차렸다는 듯, 구슬을 던지듯이 넘겨준 것은 그 직후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정말 마정석이 맞긴 하네. 꽤 품질 좋은 암청석이야. 다만…… 비호환 등급이군. 마나의 양은 많아도 쓸모가 없어.”
“비호환이요?”
마정석은 보통 색깔에 따라 그 마나 보유량, 속성과 특징, 사용처가 달라졌다. 하지만 비호환 등급이라는 말은 나로서도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아마, 기술자들이 쓰는 용어겠지?
“어. 마정석도 종류가 크게 몇 가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지? 기사 생도 수업에도 기초 수준은 다룰 테니까.”
“음……. 적정석, 청정석, 녹정석 같은 것 말이죠? 색깔별 구분이라는 거였는데.”
“맞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통틀어 순호환이라고 불러. 나머지 애매하고 매우 희귀한 준호환의 광석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비호환이지. 사람이 아예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종류의 돌이야.”
호환. 한국에서 지낼 당시엔 반도체 부품 간의 규격이나 시스템이 통하는가에 대한 단어로 활용되었던 단어.
‘이곳 세계의 최첨단(?)에서 사용되긴 하니 나름대로 의미는 통하네.’
이곳의 다른 세계에서 호환 역시 최첨단 산업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다만 그 최첨단 산업이 전기공학이나 반도체 영역이 아니라 마법학의 영역에 발을 걸쳤다는 게 조금(?) 다를 뿐. 하지만 어쨌건, 이야기를 들으며 네마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비호환 등급이면 사람이 마나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등급인데? 내가 방금 느낀 건 뭐지?’
“아까 잠시 돌을 만졌을 때, 그건 비호환급인데도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는데?”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바누라트가 무언가를 기대하는지 느릿느릿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언가 느껴지지 않던가? 아까 탐지할 때 느껴지던 마나가 예사롭지 않던데.”
“장난하는 거야, 아저씨? 사람이 어떻게 저런 거에서 힘을 느껴.”
바누라트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아일라가 반박했다. 이야기가 약간 버거워진다고 생각했는지 미하일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비호환이면 정말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건가요? 반드시 광석으로서만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네마냐도 궁금한 점을 잘 찌르고 들었다.
“사람 일에 ‘반드시’라는 건 없어. 하지만 이 건에 대해서만은 내 판단이 거의 맞다고 보면 돼.”
“어째서죠?”
나도 나서서 강한 어조로 물었다. 아일라는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곧 이야기를 재개했다.
“비호환 등급 마정석은 지표상에서 발견되는 마정석의 대부분이야. 그런데 발견을 못 하거나, 쓸모가 없어서 값어치가 없을 뿐이지. 그렇지 아저씨? 장사꾼인 아저씨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길가에서 저번에 돌멩이를 주웠는데 그게 C급 마정석이라고 했었지.’
이제야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바누라트는 수상한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말대로네. 동시에 비호환 등급이란, 자연 원소의 특성이 극대화된 마나를 축적한 암석이지. 어째서 암석마다 속성이 다른 건지는 아직 연구 중일세. 추측하기론, 암석 형성 과정이나 위치와 관련이 있다더군.”
가만히 놔두면 연구 내용을 설명해 준다고 종일 떠들 태세였다. 아일라가 몇 차례 위협을 가하고 나자, 헛기침과 함께 비로소 이야기가 본론으로 넘어갔다.
“예컨대 강 하구에서 발견되는 퇴적암 종류에선 물의 기운이 강하게 나오는 사례 같은 것이 있지.”
“자연 원소의 특성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요. 그럼 훨씬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원래 마법은 체내의 무속성 마나를 불이나 물 같은 원소로 변환하는 형태니까요. 친화율을 극대화하는 대마법사 정도가 아니면 무속성 마나를 체내로 축적시킬 때 효율이 정말 엉망이라고 배웠거든요.”
밀의 지적은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기존 마법사들은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무속성 마나를 필요로 했다. 어떤 마법으로든 쉽게 변환하려면 꼭 무속성이 절실하다. 여기서 문제라면, 속성을 뺐다가 부여하는 과정에 마나의 손실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난드의 으뜸이라는 궁정 마법사들도 헤맸지. 6, 7서클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변환시키면 고작해야 3서클 정도의 힘밖에 만들 수 없어. 덕분에 고블린은 물론 훗날의 전쟁에서 맥을 추지 못했어. 어찌 보면 심각한 문제지.’
미하일의 이야기는 내용만 보면 긍정적이었다. 자연에 흔한 속성 마정석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쁜 효율을 감수하면서까지 마나 속성을 바꿀 필요도 없다. 불이 필요하면 불 속성을 쓰면 된다. 금속 속성이 필요하면 금속 속성으로 대응하면 되는 거고.
“문제는, 적어도 지난 40년간 그런 경우는 전혀 들어 본 적도 없다는 것이지.”
바누라트의 선언은 무척 절망적인 결론이었다.
‘전혀 이야기가 없었다는 건, 당연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단 뜻이겠지. 그리고 길드장이 정말 마나석과 관련해 원하는 게 있다면, 이제 나와도 관련되어 있을 게 분명해.’
이제야 조금씩 상대의 의중이 보이는 듯했다. 바누라트는 그런 장밋빛 같은 일이 왜 불가능한지를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곧, 자신의 진정한 목적도 제시하겠지.
“자연적인 특성 마나를 그대로 사용하려면 해당 특성에 대한 친화력이 ‘미쳐 팔짝 날뛰는 수준’이어야 하네. 인간 중에서 그런 고도의 친화력이 나타났던 적이 없었지. 바로 조금 전까지도…….”
“그렇다면 그냥 조금 비싸더라도 호환되는 종류들을 쓰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기사 수습학교에 다녔을 때 보니 교보재실에 온통 온갖 종류의 마정석 도구들이 많던데…….”
“……풋.”
아일라의 코웃음에 미하일의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지켜보던 바누라트는 잠시 숨을 고르곤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점에서 온 정성을 다해 마정석을 캐고 있지. 하지만 대개 채굴업자들은 마나의 성질과 마정석의 등급을 가려 볼 만큼의 지식이나 실력이 없어. 장비는 턱없이 비싸지.”
“음.”
동의의 침음을 흘리면서 네마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채굴업을 한다고 해도 똑같은 수준의 사업이 아니다.
‘석탄이나 캐는 동네 업자와 국가에서 후원하는 마정석 산업은 차원이 달라.’
“더군다나, 그렇게 캐낸다고 해 봤자 별 효과도 없어. 마정석 100덩이 중 90덩이쯤은 비호환 등급이라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곳에만 마정석을 공급하는 수준이지. 미하일 자네가 봤다는 실습용 교보자 같은 곳 말일세.”
나 역시 이미 한 차례 살아 보면서, 마정석의 효율이 채굴 단계부터 엉망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 낙후한 기술도 문제긴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광물이 절대적인 양에서 부족한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다.
생각이 이어지는 사이 아일라의 차가운 웃음이 방안을 메웠다.
“아직도 마탑이나 저지대 마법 조합에서 그쪽 관련 협조는 하지 않겠다고 버티나 보죠? 아직도 수급이 부족할 정도면.”
조합장은 무슨 그런 얘기까지 하냐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휴, 그 복잡한 문제까지 얘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쨌든 협상이 잘 안 됐지. 정부나 조합에서도 그냥 아라가트 마탑 쪽에 검별 인원을 파견해 달라고 했어. 하지만 마탑은 우리랑 생각이 다르더군.”
“대가를 더 달라는, 뭐 그런 부탁이었던가요? 지역 사제로부터 비슷한 얘길 들은 것 같아서요.”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티가 나지 않게 한마디를 얹었다. 한때 아라가트와 바난드 사이의 지역 감정을 뜨겁게 달궜던 이슈였다. 거나하게 취한 양 지방 사람들이 패싸움을 종종 벌였을 정도니까.
“그래, 그 조건도 문제였지. 결정적인 건 마정석 분배에 대한 마법 학회 쪽의 주장이었어. 자신들이 상급품을 전부 가져가고, 나머지 것들만 우리 상인들에게 제공하겠다는 거였네.”
“세상에…… 마탑도 마찬가지로 공공기구일 텐데 하급품들만 시장에 풀겠다고요? 마정석 분배 시스템이 무너질 텐데.”
미하일의 불안한 예언은 바누라트가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아일라는 슬쩍 화까지 난 모양으로 강한 비난을 쏟아냈다.
“그래. 통일왕국이 무너진 뒤론 마탑도 제 앞가림하기 바빠졌다는 증거겠지. 그 덕분에 추태를 드러내놓은 셈이지만.”
‘아일라는 마법 학회에 특별한 유감이라도 있는 걸까. 유독 강경하게 느껴지네.’
아일라의 이죽거림에 바누라트는 뭐라 덧붙이지 않았다. 마탑에 조심스럽게 대응해야 하는 길드의 대장으로선 입을 열기 어려운 문제겠지.
“분위기가 어둡구먼, 어쨌든!”
시종일관 어둡던 표정을 지우고, 조합장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손뼉을 쳤다.
“이런 상황에서 중대한 예외가 등장해서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예외…… 예외라……. 여기 네마냐가 예외가 될 수 있다는 뜻이야, 조합장?”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바누라트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아티팩트를 가리켰다.
“아까 준 그 아티팩트를 한번 ‘탐지’해 보게.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아. 탐지 자체는 마나의 흔적을 쫓을 뿐이지. 하지만, 자네는 마나를 쫓지 않고 상호반응을 하는 것 같았네. 예사롭지 않아.”
“그것도 ‘비호환’ 등급 암석에 대고 말이지.”
아일라의 무신경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네마냐는 다시 구슬처럼 생긴 수정 형태의 돌을 바라봤다. 차가운 수정 안에서, 꿈틀대는 어떤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제 열어 본…… 시스템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시스템에서 확인한 탐지 계열 기술. 「마나 흡수」. 구체적으로 어떤 건진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큰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가느다란 명주실에 꿰여 있는 마정석 결정체를 손가락으로 살짝 문질렀다. 차갑던 손아귀에서 급격한 무언가의 흐름이 느껴지면서 강렬한 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읏, 열기가…….”
사라타에서 겪었던 마정석 반응과 유사하긴 하지만, 그 효과는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거셌다. 붉은색으로 강조된 상태창들이 마구잡이로 생겨나는 데도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엇!”
“무슨 일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무심코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생애 처음으로 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던 까닭이었다. 푸르다고 할지 회백색이라고 할지 모를 빛이, 나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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