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12월 2일, 바가반드.
약 8개월 전, 처음 나자리안 백작이 들어서기 이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영지였다.
“죄송합니다. 신분증과 출입 통행서가 없으면 출입이 안 됩니다. 영주님의 지시입니다.”
타티온 관문의 병사들 역시 이전처럼 술에 취해 문도 반쯤 열어 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노크 입성 같은 건 아예 불가능하단 소리다.
“영주의 지시라고?”
검은 로브를 걸친 그림자가 되물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병사가 다시 또박또박 짚었다.
“예. 재무관님이 영주님의 지시라고 하시며 출입 통제를 강화하라고 하셨습니다.”
“하하, 난 또 나도 모르는 영주가 생겼나 했지. 다행히 미하일 녀석이 적당히 둘러댄 거였어.”
“뭐요? 자작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당장 신원을 밝히시오!”
발끈한 병사가 창을 치켜들며 서류를 요구했다. 로브의 그림자는 비어 있는 양손을 내보였다.
“봐줘. 그런 것 없이도 잘 다녔으니까.”
“무슨…….”
“이런 사람입니다.”
로브의 머리쓰개를 벗자 짙은 흑발과 함께 그에 대비되는 희멀건 한 얼굴이 드러났다. 물론 그 이목구비는 관문의 병사들도 익히 아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헉…… 영주님!”
“영주님이 오셨다!”
다른 곳에서 입경 업무를 처리 중이던 병사와 사무관들까지 반응을 보이거나 튀어나왔다. 소란이 커지니 네마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까 봐 일부러 모르게 지나가려고 했더니. 별 이상은 없지?”
“물론입니다. 관문은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고블린의 소문도 문턱을 넘지 못할 겁니다.”
“잘하고 있군. 앞으로도 부탁하지. 아, 그리고 본성으로 연락 좀 보내 주겠어? 저번처럼 사람들 모으느라 시간 보내고 싶진 않거든.”
“물론입니다.”
어차피 말을 열심히 재촉해 달려도 두어 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고 싶기도 하고.
“말이 그동안 너무 열심히 달렸으니까. 이번엔 좀 쉬어야지. 그간 고생 많았다.”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네마냐는 천천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머리 위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쏜살같이 북동쪽을 향해 날았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다고.”
자작 미하일이 사냥복 차림을 한 채 미리 대기 중이었다. 아일라는 조금 먼 곳에서 그을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오고 있었다.
“그간 나 없이 운영하느라 고생 많았다.”
“고생은. 나보단 네 이름이 더 고생이 많았지.”
“아…… 그렇지. 나도 모르는 내 명령이 엄청 많이 돌아다니더군.”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영지에서 재무관이 스스로 부릴 수 있는 권한과 영주의 권한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너니까 그래도 믿고 맡기는 거다, 진짜. 좋은 영주 둔 줄 알아라.”
“좋은 영주님은 보통 영지 안에 머무는 법이라지, 아마.”
두 사람이 눈싸움을 벌이는 사이, 아일라도 도착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일찍 도착했네. 옷 갈아입을 새도 없었는데.”
“괜찮아요. 요즘도 변함없이 바쁜 모양이네요. 공조 장치 때문이에요?”
“항상 두 가지 문제지. 광산 채굴과 가공 작업.”
항상 번거롭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현재는 어느 정도 상황인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었다. 네마냐가 그 점을 확인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로 산업이 커졌나요?”
“놀라지 마. 영지 연 수입은 지난달 기준으로 금화 육백오십을 넘어섰어.”
금화 650개. 재작년 농사로만 먹고 살던 시절의 정상 수입을 살짝 넘는 세입. 자부심에 찬 미하일의 설명대로라면 올해가 끝나기 전에 700개를 찍을 수도 있다고 한다.
“더 신나는 건 아직 가공 공장이 가동 초기 단계란 거지. 장인들이 익숙해지고 재료 공급이 수월해지면 내년엔 이 수입의 두 배 이상도 찍을 수 있을 거야.”
“두 배……. 꿈에서나 그릴 법한 숫자군. 그런 숫자로 뭘 할 수 있지?”
“음. 더 많은 군대라거나, 더 넓은 영주관과 창고에 산같이 쌓아 놓을 황금?”
“……아서라.”
일단 현대의 간소함에 일단 깊은 영향을 받게 되면 그걸 벗어나긴 어렵다. 중세적인 감각의 미칠듯한 장식과 기교, 과시는 오히려 구토를 부를 정도다.
“우선적으론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게 먼저겠지만, 지금 수준으로도 당장 필요한 건 채우는 정도니까.”
“그럼 이건 어때. 여유 금액으로 식량이나 필요한 공산품을 사 두자고. 몇 가지 장기 보관 물품은 나중에 돈으로 바꾸기도 무난할 테니까. 가령 린넨 옷감 같은 것 말이지.”
“어, 그거 좋은 생각이네. 우선은 그쪽만 신경을 쓰면서, 차차 어떻게 돈을 영지 복리나 이익 확대에 재투자할지 생각해 보자고.”
그러곤 마침내 자신들이 영주관을 놔두고 마당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 자. 밖은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서 몸이나 녹이자고. 하라드는 아직 안 보이네?”
“아, 하라드는 아직 연구 중이지. 네가 자리를 비운 게 겨우 일주일 남짓인데.”
그렇지. 공조 장치를 보다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연구, 그리고 영지 마나 시스템의 새로운 활용 방법을 찾는 연구 프로젝트.
‘하나같이 어려운 방법이군. 녀석이 침식을 잊고 매달려도 그 정도라니.’
사실 기술 하나를 새로 만드는 건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방식 일부를 뜯어 고쳐 가며 효율을 개선하는 것도 나름 고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흠, 녀석의 문제도 좀 고민해 봐야겠어. 너무 고생이 많으니까.”
“그래. 너무 급한 거 아니면 자제 좀 시켜 봐. 잠깐 밖에 돌아다닐 땐 괜찮더니 요즘엔 또 창백하게 질려선…….”
세 사람은 그렇게 도란거리는 이야기와 함께 영주관 안으로 들어갔다.
* * *
―구구구!
전서구는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통신을 가능하게 했다. 필요한 만큼의 비둘기가 부족하다지만 영지의 중요한 업무만큼은 신속하게 받아볼 수 있을 정도는 충당되고 있었다.
“이놈들이 밥도 다 줬는데 왜 이렇게 요란스러워? 뭔 일이라도 생기려고 하나.”
전서구 관리관은 그래서 어느 영지를 가도 중요한 자리로 인식됐다. 쏟아지는 정보를 재량으로 판단하여 종합해서 보고해야 하니까. 믿을 만한 사람으로 전서구 관리관을 배치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
아직 네마냐는 딱히 전서구 관리관을 바꾸지는 않고 있었다. 특별히 일을 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자고새……. 더군다나 자줏빛 매듭을 매고 있다는 건!”
거리에서 하염없이 똑같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법한 관리관은 재빨리 뛰었다. 속도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지케른에서 보낸 연락이군.”
“성국에서 또? 다녀온 지 며칠도 안 됐는데. 무슨 일로 연락을 보냈담.”
밀려있던 청원 문제를 얘기하고 있던 미하일과 네마냐가 관리관에게서 문서 한 장을 받았다. 설핏 내용을 훑은 네마냐는 아주 짧은 순간, 멈칫하더니 빠르게 두루마리를 말았다.
“그래, 기왕 차 마실 시간도 되었겠다. 장소를 옮겨서 읽어 볼까.”
“어?”
네마냐의 눈치를 본 미하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뭔가 있다는 저 눈치는 장소를 옮겨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이야기하자는 뜻이다.
“그래, 그러자. 자, 호위병들은 따르지 않아도 되니까 쉬고 있어. 우리는 응접실에 가서 이야기나 좀 할까?”
“좋아. 연구실에도 사람을 보내서 하라드에게도 와 달라고 했으면 좋겠군.”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스프란체 씨가 연락하는 사이에, 제가 오랜만에 좋은 차를 대접해 드리죠.”
집사 스프란체 및 집사장으로 재취업한 헬레나 부인이 뒷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라졌다.
“이제 헬레나 유모, 아니 부인이 집사장을 맡으셨으니까 영주관 쪽 크고 작은 문제는 걱정 없겠지. 한 짐 덜었다.”
“그래. 스프란체는 내가 맡은 일을 보조하는 것만도 힘드니까. 헬레나 부인이라도 계시면 참 다행이지.”
“자, 장소를 옮기자.”
두 사람은 한동안 별 쓸데없는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참을 그러다 미하일이 마침내 본론으로 도달했다.
“그…… 좀처럼 물을 수 없었는데 말이야. 제국에 다녀온 이후로 그 이야긴 안 하더라. 제국 사령관들 만나 본 경험은 어땠어?”
“…….”
잠시 대답 없이 묵묵히 걸었다.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녀석이 대답했다.
“미안. 워낙 힘들었나 본데.”
“힘들 건 아니지. 확실한 건 제국이 쉽게 동방 전초기지로서 하야스단을 놔줄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했달까. 씁쓸한 이야기지.”
눈을 감은 미하일이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끼우며 걸었다.
“그런 것 말고는 괜찮았어. 우선 제국군이 당장 삼만의 병사를 하야스단 방위로 돌리기로 했으니까. 부족하긴 해도 적은 수는 아니지.”
“네가 생각하는 연합 작전은 꺼내 봤어?”
고개를 저었다. 총사령관이라는 니키, 풀네임 니키타스와 지휘권을 두고 타협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도움을 받는다곤 하지만 자기네들도 결국 본인 이익을 위한 건데. 명목상 통솔권도 아닌 직접 통제관까지 보내겠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어우, 여기 자존심 강한 제후들이 그걸 놔둘 리가 없지.”
암피에르 조약의 맹점이 그것이다. 모든 사안이 만장일치로 진행되어야 하고, 이견이 표출되면 안 된다. 이러니 결국 누구도 이해관계가 없어 쓸모없는 일이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웠다. 당장 지금 문제되는 지휘권 문제부터가 그랬다.
“에휴, 관두자. 차라리 독자 활동을 하는 게 낫지. 들어가자고.”
어느새 도착한 응접실 안으로 미하일을 들여보내고 네마냐도 안으로 들어섰다.
“여, 왔네.”
“얼굴 좀 보자. 이거 무슨 얼굴 보기가 유니콘만큼이나 어렵냐.”
“내가 연구를 하나만 하고, 시간도 줄이라고 했는데도 아직 매여 있는 거냐.”
앉았던 하라드는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아니, 단지 스승님하고 연락할 일이 있어서 그랬을 뿐이야. 오해하진 말라고.”
“스승님이라. 에데시온 학장 선생?”
네마냐와 미하일이 의자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들이 들어와 차를 따라 주었다.
“응. 본인이 알고 지내시는 근처 아카데미아 시설 학장들과 비밀리에 조사를 시작하신 모양이야.”
“마탑과 관련해서 말이지. 선뜻 응해 주는 건가, 학장들이.”
마탑이 그 정도로 아카데미아 가운데서도 신망을 잃었던가? 아무래도 하야스단 안쪽과 바깥쪽에 뭔가 정보의 격차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였다.
“그간 아카데미아 교류 중에서 수시로 스파이나 분열 공작, 이간질을 시도한 곳이니까. 최근에 있었던 학장 교체에 제국이 개입한 것도 그래서일 거야.”
“……마법성에 단체로 항의라도 했나 보군. 그 정도로 원한이 깊다면.”
“그리고 제국의 마법성도 사실상 제국 영토라고 선언해 놓은 하야스단 마탑이 신경 쓰였을 테니까.”
애써 제국과 아무렇지 않은 듯하고 하야스단에서 평화를 중재하겠다는 마탑주 말카시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흠, 평범한 위선자인 줄 알았더니 처음 봤을 때 인상 그대로 머리 쓰는 악인이었군.”
네마냐의 말로 일단 마탑 관련 주제는 끝났다. ‘말카시안 나쁜 놈’ 이상의 이야기가 나올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자, 이제 조용해졌으니까 왜 세 사람을 모이게 했는지 들어 볼까.”
“맞아. 원래는 아일라도 부르려다 바빠서 차마 못 뺐을 정도니까.”
말을 할까 말까 하면서 네마냐는 잠시 망설였다. 제국과의 문제, 마탑의 사보타주 문제 그리고 가장 골치 아픈 고블린도 그대로였다. 거기에 새로운 문제가, 더 심각한 하나가 생겨난 셈이었다.
“그…….”
“왜 뜸을 들여, 무슨 무거운 이야기길래.”
“뭔가 좀 심상치 않은데.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인데 그래.”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하라드는 재빨리 공간 차단 마법을 사용했다. 1단계 주문이라 소리만 차단됐지만, 그것으로도 네마냐는 안정을 찾았다. 밀실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내가 차마 이렇게까지 일찍 터질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본토의 귀족들이 마나 징수제에 반발이 심한 모양이야.”
“반발이야 당연한 일이었지, 그게 무슨…….”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녀석들에게 네마냐는 던지듯이 서신을 건넸다.
“성국에서 보낸 서찰이긴 한데 정작 내용은 바난드 본토에 관한 글이야.”
“대체 무슨 소리야?”
미하일과 하라드는 나란히 두루마리를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 몇 단락은 멀쩡하게 현재 다르빌과 켈리도니온의 대비 상태를 기록한 것이었다.
“마저 읽어 봐. 특히 후반 부분.”
네마냐가 이마를 두드리면서 말한 대로, 두 사람의 시선이 나란히 아래쪽을 훑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로소 충격적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건…… 엘레나 경이 보론한 부분이잖아? 바난드에서 곧 내전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그랬다. 본래라면 전쟁이 격화되고 엘레나의 입지가 튼튼해진 다음,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어야 조짐이 보이는 내전이다.
‘이렇게 일찍 나타나다니. 이것도 내가 개입한 탓이란 건가.’
누가, 무엇이 원인이건 설상가상이라고 이 문제도 동시에 네마냐 자신이 덤벼들어야 할 판이었다. 특히 바가반드 영지의 안전과 직접 관련된 상국, 바난드 왕국의 문제였으니.
“각오 단단히 해야겠어.”
중대한 타격을 각오하고서라도 잘라낼 건 잘라낼 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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