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우웅.
파동이 사방의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니, 평소엔 들리지 않을 소리가 더 강하게 들렸다.
“신경에 영 거슬리는데. 역시나 조그만 조각으로 시스템을 흉내 내기는 어렵다니까.”
한숨을 푹 내쉰 네마냐가 곧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방 네 귀퉁이에 놓아둔 마정석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운이 네마냐에게로 돌아갔다.
“흠, 그래도 짧은 시간 동안 마나를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는 대충 습득한 것 같지? 확인 한번 해 볼까?”
눈을 감자 두 시간 동안 수련한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마나 공조에 대한 이해]
[마나를 인식하고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은 입문 영역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마나의 농도가 균일하지 않게 되면 마법과 마도구의 지속성과 내구성이 약해집니다.]
[마나 공조에 대한 당신의 이해가 깊어집니다.]
[이해 +2, 마나 속성 적합 +2%, 마나 연금술 관련 포인트 2 투자 가능.]
[당신이 만드는 마나 공조 장치는 타인으로부터 훨씬 좋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마나의 농도라.”
하라드가 짧으나마 틈틈이 가르친 지식에 과제까지 내준 결과였다. 처음엔 그저 막연하게 마법과 마나의 원리를 공부하기 위해 요청했던 네마냐다.
“하지만 이젠 내가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마법학은 확실히 배우는 게 답이란 걸 알겠어.”
네마냐 스스로가 느끼는 문제라면 마나를 활용할 때 효율이 떨어지는 점일 테다. 이미 그리엘크를 상대할 때도 나타났지만, 마법 검을 만들어도 자꾸만 검이 깨지거나 날이 나가 손상되곤 했다.
“대체 왜 검이 마나를 주입하지 않았을 때보다도 더 빨리 손상되는 거지?”
“……그래도 벌써 거기에 의문을 가질 정도까지 발전했네. 참 빠르다니까.”
그날 하라드는 이젠 초탈했다며 그날 진도 분량을 끝냈다. 그리고 알려 준 것이 마나 공조의 진정한 의의였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물체 중에 가장 내구성 좋고 지속력 좋은 건 자연, 그 자체야. 마나를 인위 조작하는 마법으론 기껏해야 그 절반이 고작이지.”
“인위 조작이라……. 그러면 인위 조작에도 정도가 있어서 차이가 있는 걸까?”
“물론. 처음 마나 역학이 철학으로 발전했을 당시엔 자연의 힘을 그대로 응집하고 활용했지. 지금처럼 마나를 강제로 재배치하는 방식은 서방에서 수입해 온 방식이야.”
그래, 초기 제국에서 사상적 이유로 탄압받은 마나학자들이 동방으로 망명하긴 했었다. 옛날에 보던 책에서도 종종 나오던 내용이다. ‘기운’이라고 부르는 서방의 마나 활용술을 배운 것도 그때였다지.
“그렇다면 아무래도 마법이 어려워진 건 마나 재배치 방식 때문이겠는데.”
“정확하네. 자연의 힘을 그대로 뽑아 사용하는 것, 그러니까 예를 들면―”
하라드는 설명과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네마냐도 이미 몇 번 봤던 마법이다.
[스파이라 피르(Spaira Pyr)]
구형의 불덩이가 그 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안정하면서도 용케 불덩이는 형태를 유지했다.
“원래 빛, 불, 흙 등의 마나를 그대로 소환해서 사용하는 게 전통적인 마나 역학의 방식이야. 하지만 정말 그대로만 사용한다면 몇 초 유지할 수가 없지. 이렇게 말이야.”
녀석이 불의 공 곁에 대고 있던 손을 떼자, 불의 공은 3초도 안 돼서 무너지고 증발해 버렸다.
“원소를 강제로 모았기 때문인가?”
“이젠 안 알려 줘도 알아서 찾아가는데? 그렇지. 자연계의 원소는 스스로의 원래 상태, 밀도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어. 그래서 억지로 모아도 금세 무너지지. 하지만,”
하라드가 이번에 다시 불의 공을 소환했다. 다른 것이라곤 이번엔 녀석의 마나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아까 전엔 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번엔 느껴진다. 마나를 쓴 건가?”
“맞아. 사람에겐 각자의 앙게이온, 그러니까 그릇이 있다는 걸 알잖아?”
“맨 처음에 배운 부분이지. 그 앙게이온에 마나가 많이 담길수록 자연 원소를 끌어들일 수 있다, 그랬었지.”
자연스럽게 자연계 원소를 의지로 끌어들이는 힘. 명상과 수양으로 정신을 집중해 그 방식을 찾는 것이 고전 마나 역학이었다.
“하지만 형도 자연스레 사용하듯이, 요즘은 그 마나를 직접 꺼내서 재배치하고 사용하지. 나 같은 경우는 이렇게, 원소 마나를 강제로 묶어 두고.”
녀석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불의 공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안정적인 공의 형태를 유지한 채로. 그래, 이것이 오늘날 마법학으로 거듭난 마나 연구의 결정체로군.
“후.”
하지만 정작 하라드는 한숨과 함께 지우듯 불공을 없애 버렸다. 마주한 의자에 앉은 녀석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꺼냈다.
“물론, 마법학의 현재 방식에도 문제가 있어. 마나의 제한 따위 없이 얼마든 큰 힘을 소환할 수 있던 마나 역학과 달리 마나의 제약이 커.”
무슨 소린지 알 듯했다.
“하긴, 스스로의 앙게이온에 담긴 마나만큼만 쓸 수 있단 소리니까. 그리고 그 마나 용량을 늘릴 방법이란…….”
“안전하고 과학적이며 합법적인 방법은 오직 명상과 수양 아니면 ‘충전’뿐이지.”
“충전…….”
하라드는 사실 두 가지 더 있는 방법은 꺼내지 않았다. 한 가지는 자신처럼 금속계 같은 자연 마나를 자연스레 받을 수 있는 체질이었다.
‘이건 물론 체질이 가능한 사람이 아예 없어서 의미가 없지만.’
좀 더 일반적인 방법은, 심장 아래에 적마정석을 삽입하는 방식이었다. 절반 이상의 사망 확률과 그 나머지 중 8할의 부적응 현상만 견뎌내면 순식간에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는 방법이다.
‘물론 그딴 방식은 쓰다가 뜬금 검은 영역에 세계가 잠식될 뻔했지. 정상적인 마법사라면 아예 얘기도 꺼내지 않는 거겠지만.’
네마냐는 대충 그 정도로 정리하고 다시 하라드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결국 중요한 건 마나의 공조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말은 길었지만, 결국엔 간단한 소리야. 마법학에선 마나를 재배치하느라 자연적으론 균일하고 고르게 퍼져 있던 상태를 깨트린 거지.”
“그걸 고르게 할 수 있는 게 마나 공조라는 방법이란 소리인 거고?”
“그렇지. 마나 역학에서 연구하던 자연 마나 공조술을 바탕으로 최대한 자연계에 가깝게 특정 마법, 물체에 고르게 마나를 배치하는 거야.”
이어진 하라드의 설명에 의하면 마나 공조술이나 공조 장치를 통해 재편성된 마법 검과 마법식은 상당히 안정된다고 했다. 자연계 마나 그 자체만큼은 아니라도, 사람이 쓰기엔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웅.
방 주위로 설치해 둔 다섯 개의 마정석이 다시 울음을 내기 시작했다. 특정한 마정석에 마나가 많이 유입되어 균형이 깨진 탓이었다. 그 덕에 기억을 되짚어 보던 네마냐도 눈을 떴다.
“얼른 마저 연습해야지. 하면 할수록 이것만큼은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니까.”
처음 시작했던 두 시간 전에 비하면 벌써 다섯 개 중 세 개나 되는 걸 안정화했다. 하라드나 심지어 아일라가 봤어도 이번엔 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하……. 보면 좀 놀라겠지. 아마 다음번에 공조 장치를 만들면 한 20% 정도는 효율이 더 좋아질 것 같단 말이야.”
이미 지금도 무서운 에너지 효율이 더 올라간다면, 고블린 상대로 위력과 방어력은 더 증강된다. 반면 고갈된 마정석을 교체하는 시간 간격은 더 줄어들고, 그만큼 위험한 시간도 줄어들 테지.
“마정석과 그걸 활용한 도구의 가치가 상승한다는 건 더 많은 돈도 끌어들인단 거지.”
결론이 결국 돈으로 치닫긴 했지만, 앞으로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은 분명했다. 갑자기 더 신이 난 네마냐는 내친김에 오늘 공조술을 다 끝내 놓겠다며 달려들었다. 곧 저녁 시간인 걸 미처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똑똑
“아.”
잠깐의 집중은 금세 끝나 버렸다. 저녁 만찬 연락이 있을 거란 니콜라스의 말이 이제야 떠올랐다.
“아, 아쉬운데.”
지금 이대로 분위기를 타서 마나 공조술을 완성하면 완벽할 것이었다. 하라드의 조언을 떠올려보면 분위기나 시간, 환경에 따라서도 마나 수련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고 했다.
[개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받으니까.]
그리 생각해 보니, 어차피 집중이 깨어진 이상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헝클며 네마냐는 아쉬운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예, 무슨 일입니까.”
“아, 계셨군요. 안에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 했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잠깐 명상 중이어서요.”
“그렇군요.”
집사 다이달론은 슬쩍 방안을 들여다보며 구석에 놓인 마정석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은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저녁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곧 저녁 만찬 장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옷은 달리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까?”
“안에 걸칠 옷만 새로 가져왔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서요.”
“예, 옷차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식사 때 드실 메뉴에 대해서도, 먼저 못 드시는 음식은…….”
과연 제국의 쟁쟁한 군인과 특사가 만나는 제국의 ‘정치판’에 네마냐가 참여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건 나도 끝나고 난 뒤에나 생각해 봐야겠지.’
정작 웃기게도 하야스단의 주요 제후 중에 몇 명이나 과연 초대를 받을지도 포인트가 될 것이다. 하야스단의 운명을 쥐고 있는 회의였으니까.
* * *
“하하하, 오늘 이렇게 이름 드높으신 분들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내가 다 영광이군!”
뭐가 그렇게나 기쁜지 니콜라스의 얼굴은 벌써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특사 영감. 영감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폐하의 대리인 아니십니까. 그런 분이 그런 소릴.”
“인사치레죠, 니키. 뭐 그런 당연한 걸 되묻고 그럽니까. 교양 없어 보이게.”
“뭐 인마?”
“으하핫, 장군도 술에 거나하게 취하신 모양이군!”
“푸하하!”
―와장창!
만찬이라고 해서 와 보니 온통 술판이었다. 실내 가득한 알콜 냄새에 머리가 다 지끈해질 판이었다. 뭘까, 이 익숙한 느낌은.
“마치……. 고향의 주점이나 대학 새터의 역함이 느껴지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렸으니 듣지는 못했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다이달론이 다가왔다.
“뭐……. 자랑거리가 아니긴 합니다. 제국의 군인들을 위로한답시고 최근엔 만찬이란 이름의 술판을 열곤 하죠.”
“그래서, 아까 옷은 신경 쓰지 말라던…….”
“제가 다 송구합니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하며 상석의 니콜라스를 향해 다가갔다. 최대한 억지웃음을 짜내면서. 그 사이, 니콜라스는 술병을 통째로 들이키더니 탕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크하하, 그래서 그때 당황한 그 자식의 표정을 자네도 봤어야 했다니까? 황제께서도 웃음을 참느라…….”
“저, 특사 영감. 저도 부르셔서 오긴 했습니다만 지금 이게 만찬 모임이 맞죠? 겉보기엔 주연 같아서 말입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붉은 얼굴의 니콜라스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뒤늦은 깨달음이 물결처럼 밀려온 건 그다음이었다.
“아아, 내 정신 좀 보게. 군인들 대접한답시고 벌써……. 이리, 이리로 와서 앉으시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드셔야 하니 상은 좀 치우는 게 좋겠군요.”
“어, 어. 그래야지. 다이달론! 상 좀 정리해 주겠나?”
“물론이지요. 기다렸습니다, 나리.”
딱딱하게 굳은 다이달론의 대답에 니콜라스는 한층 더 당황해서 헛기침을 뱉었다.
“자, 그러잖아도 이번에 가장 초대하고 싶었던 사람이지. 네마냐 나자리안, 바가반드의 영주일세. 다들 동부 지역 근무자들이니 이름은 들어봤겠지. 앞으로 자네들이 우선적으로 협력해야 할 제후지. 여기에 있는 니키가 작전 총사령관이라네.”
니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장군이 가장 최선임자인 모양이다. 그가 번득이는 눈빛으로 이곳을 바라보았다.
“아, 콜라케르트 주 총독으로부터 일전에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활약상이 엄청나더군요. 저희 참모들도 혀를 내두르던데요.”
“과한 칭찬이시군요.”
물론 술이 들어가고 칭찬을 하는 사람치곤 지나치게 정색한 눈매가 두드러졌지만. 그 눈매는 결코 우호적인 표정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스윽
“이제는 우리 제국군이 다시 앞장서서 알메니아의 안정을 되찾아야 할 겁니다. 그게 바로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닐까요.”
“물론이지.”
니콜라스의 당연하다는 대답. 아주 자연스레 하야스단도 맥락에서 지워지고, 그곳의 사람들도 지워진다. 그게 제국이 지금까지 각지를 평정하며 동화시킨 원리겠지. 딱 어딘가를 식민화하던 옛일을 없던 것처럼 묻어 버리려던 어딘가가 생각나는 일이었다.
“아쉽게도 제국군이 원정을 나선 개념이라면 이번 전쟁은 쉽게 풀리진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게좋게 갔겠지만, 네마냐는 그렇게 순순히 넘어갈 생각은 없어졌다. 특히나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나서는 군사령관이 총사령관이라니.
“그건 무슨 의미인지 좀 궁금하군. 얘길 좀 해 볼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니키 역시 도발에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무시와 의도적인 부재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쪽의 판으로 들어오도록 상대를 끌어내는 거지. 현대인을 우습게 보지는 말라고.’
니콜라스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한발 물러나면서 완벽한 토론의 장이 다시 열릴 참이었다. 설득이 가능한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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