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아나무이라’는 콜라케르트가 저번의 전쟁으로 파괴된 뒤 현지 제국총독부가 옮긴 수도였다. 콜라케르트만큼은 아니어도 적당한 인구와 튼튼한 방어벽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구릉 위에 조각 같은 벽돌로 장식된 성채가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벽돌을 쌓은 요새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성벽이 예술품으로 보이는 건 처음이네.”
아나무이라는 네마냐로서도 처음으로 오는 곳이었다. 이전번의 삶에선 영주라는 높은 자리까지 오르지도 못했고, 그만큼 제국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았으니까.
“하하, 어르신 보시는 눈이 훌륭하십니다. 맞습니다. 이곳은 제국이 다스리곤 있지만 난쟁이 왕국 때 처음으로 건설된 곳입니다.”
“난쟁이 왕국?”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고원의 어지간한 도시와 마을이 난쟁이들에 의해 세워졌다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된 경우도 드물었다.
“성벽에서 건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조각하듯 짜 맞췄죠.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학자들도 종종 여길 조사차 방문한다죠.”
길 안내를 자처한 지역의 마부는 신이 나서 고향 자랑을 한가득 늘어놓았다. 그런 모습이 네마냐로선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반가웠다. 이런 살갑고 인간 냄새 물씬 나는 풍경을 어디서 보겠어. 덕분에 네마냐도 일부러 더 말을 걸었다.
“그럼 이 동넨 관광업으로 충분히 생계유지가 가능하겠는걸? 그 정도로 가치가 있다면 말이야.”
“역시, 나으리! 정확하십니다. 이곳 사람들은 척박한 농토는 진작에 버리고 대신 교외에 숙박업소를 차렸지요.”
영감의 말마따나 언덕 위의 성채로부터 경사 아래 자리한 평원에 수많은 숙소와 관광지가 있었다.
“이곳 상황이 마냥 좋지는 않을 텐데, 이렇게 성외에 사람과 물자가 많아도 될까?”
혼잣말처럼 네마냐가 중얼거리자 영감도 대충 내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하, 뭐 하야크 왕국이 여태껏 남아 있었더라도 불안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왕국도 아니고 거대한 제국이 다스리지 않습니까.”
비록 아나무이라가 제법 후방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제국과 고블린은 전쟁 직전,
‘아니, 이미 전쟁 상태지. 총독부 소재지를 그렇게 망가뜨려 버렸으니.’
그러나 여전히 제국 통치 아래 있는 주민들은 콜라케르트 같은 사건은 일회성이라 보았다. 도로를 따라오면서 만난 사람들도 한결같았다.
‘제국의 힘이 그 쟁쟁한 군단도 두려워할 정도라는 건 나도 알지. 하지만 전쟁이라고. 세력만으로 전쟁을 할 것 같으면 고블린이 싸움을 걸었을까?’
차마 겉으로 하지 못할 말이었다.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영감에게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자, 어쨌든 이제 저 위로 보이는 성문이 아나무이라의 출입문입니다. 총독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바가반드 영주님.”
“그래요……. 어찌 되었든 도착했군요. 제국과의 회담을 위해.”
제국 특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야 없겠지만 분명히 궁극적인 목적은 고블린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제발 더는 말썽 없이 순조롭게 고블린 대책만 논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네마냐 자신도 제국의 강력한 힘은 익히 알고 있다. 만약 이들이 허튼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고블린을 상대하는 자신들 하야스단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어이, 문 열어라!”
미리 얘기가 끝났는지, 간단하게 모습을 확인한 수문장은 네마냐를 보자마자 외쳤다. 그에 호응하듯 육중한 떡갈나무 문이 열렸다.
“네마냐 나자리안 백작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국 특사께서 보내신 초청에 응해 왔습니다.”
네마냐가 건넨 초대장을 읽은 집사는 곧 다시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특사 어른께서 미리 언질해 주신 그대로군요. 곧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기다란 복도 끝의 문을 열고 집사는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햇빛도 조금씩만 들어오는 회랑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밖에서 볼 때는 화려해 보이더니 정작 안쪽은 삭막할 지경이군.”
감상과 함께 벽체를 만져 보니 표면은 고르지 않고 어딘가 오돌토돌했다. 중간중간 사람이나 동물, 마모된 글자 같은 형상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각인 모양이다.
“입혀져 있던 색깔이 벗겨져서 그런가. 우중충해서 그런 모양이지.”
건물의 상태는 매우 튼튼하고 양호하지만 이런 장식이 대부분 빛이 바랜 상태였다. 성벽뿐 아니라 내부 건물조차 대부분 난쟁이의 유산인 모양이다.
“흠, 흠. 백작 각하? 특사께서 세워 두어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십니다.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음, 아. 그렇군요.”
집사의 헛기침에 상념에서 깨어난 네마냐는 재빨리 손을 떼고 대답했다. 갑자기 약속을 미뤄야 할 정도의 일이라.
“오래 걸릴 일은 아니라니 잠깐 옆의 응접실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이곳 특유의 차도 대접해 드리지요.”
“그리 해 주시면 저야 좋죠.”
다른 문을 통해 들어온 응접실은 복도와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제국이 그렇듯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 색 휘장이 높은 벽을 장식하고 은촛대가 곳곳에서 빛을 냈다.
“이 방으로 들어오니 또 제국의 냄새가 물씬 나네. 기묘한 총독관저로군.”
불과 십 년 전에야 제국의 손에 떨어진 도시란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만큼이나 하야스단 사람들과 제국인의 감정도 복잡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알면서도 손을 잡도록 이끌려면 그만큼 고블린을 강조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건가.”
그나마도 고블린의 위협을 직접 느껴 본 자들에게나 해당하는 소리였다. 마탑이나 중부 산맥, 남부 저지대의 여러 나라는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번영의 꿈이 며칠 만에 사그라들고 말면, 그제나 잠에서 깰 건가.”
여기서 골머리를 앓아 봐야 소용이 없었다. 마침 집사가 들고 온 차 한 잔에 고민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차라도 좀 드시지요. 곧 특사께서도 찾아오실 겁니다. 사람 기다리게 하는 분은 아니라서.”
“그렇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황제께서도 총애하시는 측근이시라고…….”
“황제만 내리 세 분을 연달아 모시는 분이니까요. 그만큼 살아 있는 경험이라고 할 분이죠.”
“아, 하하. 그렇군요.”
순간 ‘경험’이 ‘경험치 덩어리’로 들려 네마냐는 찻잔을 들고 흠칫했다. 다행히 절묘한 위치 덕분에 은은한 허브 향기를 느끼는 것처럼 연출할 수 있었다.
“음, 역시 차의 향이 좋군요.”
“예, 이곳 특산물인 허브가 꽤 인기가 좋죠. 원하시면 더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럼 내 것도 좀 부탁하지, 다이달론.”
불쑥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드는 목소리. 중후하지만 결코 거슬리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아주 찰나, 성악가의 목소리로 느껴질 정도였다. 다이달론이란 이름의 집사가 바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 벌써 마치셨습니까.”
“금방 마친다지 않았나. 어째 내 생각보다도 일찍 끝나긴 했지만. 자, 그럼…….”
성큼성큼 노인네가 안으로 들어선다. 은은한 향이 안으로 전해졌다. 네마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굳이 허리를 굽힐 이유는 없다. 황제의 신하가 아니라 이웃 국가의 제후였으니까.
“특사 영감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알다마다. 귀공의 이름을 몰라서야 어떻게 사절이란 이름을 달고 오겠습니까. 나자리안 백작의 이름은 제국 정부에도 알려져 있답니다.”
친근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물론 제국 정부에 귀가 있어서 하야스단, 제국 말로는 알메니아의 소릴 들은 건 아닐 것이다.
‘그 잘나신 정보 기구가 또 열심히 돌아다녔겠지. 광산 조사한다고 시끄럽던 무리도 그들이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면 제국의 마수가 가공하게 무서울 정도다. 정보국과 황립 지리학회가 의도한 대로 바가반드의 광산이 제국 측 소유가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미래였다.
“제국 정부에까지 알려졌다니, 어떤 내용과 함께 전해졌을지 그게 좀 걱정이군요. 한 귀퉁이의 작은 영지인데 말입니다.”
“하하, 정보국 악명이 자자한 걸 잘 알고 계시는군. 하긴, 우리 정보전사를 앞질러 광산도 장악하고 기술자도 앞지르던데 말이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소?”
“네, 쿨럭! 네? 그건 무슨…….”
이것저것 따지지 않아도 되는 고위층이라서 나오는 담력일까.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소리를 뱉어냈다.
“하하, 좀 당황스러운 소리였나. 의표를 찌를까 하고 꺼내 본 이야기였는데 너무 갑작스러웠나 보군.”
“물어보셔도 달리 드릴 대답도 없습니다. 그저 책을 열심히 읽었을 뿐이니까요.”
“아이고, 저런. 그 드물다는 교과서 독학파셨군. 우리 연구자들은 비싼 돈을 들이고도 신통찮던데.”
말을 마친 영감은 비린내 나는 웃음을 지으며 비쩍 마르고 주름 가득한 손을 내밀었다.
“제국 상급 전권특사, 니콜라스가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인사를 전하네. 나자리안 백작.”
상급 전권특사. 해외에서 황제의 뜻을 대신하며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지는 자리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졸지에 네마냐는 하야스단 전체의 운명을 건 문답을 나눠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무슨 얘기를 해야 하려나. 먼저 궁금한 것 있으신가, 신임 영주님?”
살벌한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은 두 사람. 니콜라스가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트렸다. 대화를 시작하는 데 능숙해 보였다.
“음, 요즘 궁금해진 게 있습니다.”
“뭐지? 기탄없이 말씀하시지요.”
“제국은 하야스단, 아니 알메니아의 고블린 침공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됩니까?”
“워, 워.”
이번엔 네마냐의 질문이 훅 의표를 파고든 모양이었다.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니콜라스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이번 만남의 목적이 고블린의 침략인 건 확실했다.
‘성공이군.’
[찌르기 성공]
마치 격투나 전투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기술명이지만, 엄연히 화술에 속한 스킬이었다. 설득이 몇 번 반복되면서 개방된 경우였다. 문제는 그 발동 원리였다.
[상대와 신경전을 벌이는 대화 속에서 확률적으로 발동. 발동 확률은 기본 5%. 대화가 길어질수록, 이해/판단 능력이 높아질수록 높아짐.]
‘이해, 판단 두 가지가 이런 효과가 있는 것이었군. 그래서…….’
딱 와닿는 신체적 능력이나 효과로 와닿지 않았던 두 기능이 체감되는 건 지금이었다. 네마냐는 잠시 눈을 감고 답을 기다렸다. 헛기침으로 호흡을 고른 니콜라스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말이야 옳은 말이지. 서로가 사정을 생각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더더욱.”
“편하게 말씀하시죠. 제 할아버님뻘인 분이 존대를 쓰시는 게 썩 편하진 않군요.”
“그럴까? 그럽시다. 쇠뿔도 바로 뽑으랬다고 같이 봅시다.”
그러면서 니콜라스는 한쪽에 말아 두었던 양피지를 탁상 위에 펼쳤다. 본격적인 상황 전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지금 황제 폐하나 제국군 수뇌부는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소. 예전과 달리 군단을 이 지역에 많이 배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배치할 수 없단 말씀입니까?”
“아…… 없는 건 아니고 여력이 좀 부족하다, 이 소리지. 이민족이 이쪽 국경에만 있는 건 아니거든.”
그에 따르면 10년 전 하야크 내전에 개입할 당시와 마찬가지로 약 10만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적당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다른 전선 문제로 현재는 그게 불가능했다.
“물론, 우리도 최대한 상황을 정리하고 이쪽 전선을 주목할 생각이네만. 그게 한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모르지.”
“몇 년이라, 무서운 이야기군요. 고블린 군단이 이미 전쟁 준비를 마쳐 가는 상태라서 최전선은 지금도 매일 비상입니다.”
물론 평소 생각보다도 과한 호들갑이었다. 니콜라스도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그러나 이미 나자리안 경은 다르빌과 곳곳에서 전쟁 준비를 서두르고 있지 않았는지? 호락호락하진 않을 텐데.”
“이쪽은 다들 하나같이 군소제후에 힘도 미약하고 모아도 몇만 명씩이나 되는 고블린과 싸우긴 역부족입니다.”
그때 다이달론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격론 중이시지만 차는 드시면서 하시죠. 목이 건조하면 건강에 좋지 않답니다.”
“의사에게서 모처럼 떨어져서 좋았다 했더니, 이번엔 자네가 잔소리로군.”
일상의 사람 좋은 미소를 되찾은 니콜라스는 잔소리라며 타박하면서도 차를 받아들었다. 네마냐도 향긋한 차를 받아냈다.
“긴장되는 이야기지만 느긋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도 괜찮은 일이야. 머리가 긴장해 버리면 평소에 생각했을 것도 못 하게 되거든.”
니콜라스가 희끗희끗한 자신의 머리칼 부분을 두드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하하…….”
“자! 그래서 아까 얘기를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게 되겠구만…….”
이야기는 계속됐다. 네마냐는 마나 공조 장치나 오체시 고블린들과의 협력과 같은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내가 꺼낼 이야기는 아니고, 어지간하면 비밀일 테니까.’
제국 정보국의 능력으로 보아 대충이라도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굳이 스스로 노출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선 제국이 하야스단에 지고 있는 방위의 의무를 옭아매는 게 중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국의 의지와 실력입니다. 제국의 힘과 그에 연합한 각처 제후의 힘이 결합해야만 온전히 맞설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럴 생각이긴 한데, 다만 현재 상황이…….”
니콜라스는 적당히 선을 치고 물러서려 했지만 네마냐는 허락하지 않았다.
“암피에르 조약, 제후들의 손을 묶어 버리고 제국의 통치 아래 평화를 이룩했습니다. 그 조건이 뭡니까? 다름 아닌 제국의 하야스단의 보호 아니었습니까?”
하야스단이 아닌. 만약 제국이 보호하지 못한다면 얼마든 멍에를 벗어나 다시 이름을 찾겠다는 압박 아닌 압박이다.
“음, 뭐……. 제국이 스스로 알메니아의 수호자를 자처했으니 그 임무를 무시하겠단 소린 아니네. 늦었지만 며칠 뒤부턴 제국군이 각처 요지에 배치될 거야.”
“듣던 이야기 중엔 가장 반가운 말씀입니다. 앞으로도 암피에르 조약이 부디 제국과 하야스단의 공존하는 미래를 열어 주도록 바라야겠군요.”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니콜라스는 빙긋 웃으며 끄덕였다. 물론 표정이 그럴 뿐 음성은 한참 나중에 흘러나왔다.
“……그래야지. 황제께서도 감사히 여기실 걸세. 잠시 쉬었다가 좀 더 자세하게 고블린의 동향에 대해 들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나 그러겠습니다.”
도움이라. 물끄러미 젊은 영주를 쳐다본 전권특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좀 더 머무르면 현지에 배치될 제국군 수뇌부와의 만남도 주선하지. 고블린과 직접 싸워 본 사람과 이야기해 보면 우리 군도 대응할 때의 주의할 점을 알 테니.”
“그럼 저녁 만찬 때까지는 잠시 쉬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생각을 더듬어 봐야겠습니다.”
“바쁘게 다녔을 텐데 피곤도 하겠지. 좀 쉬고 나서 저녁에 좀 더 깊은 얘길 해 봅시다.”
네마냐는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물러갔다. 남은 것은 덩그러니 식어버린 두 잔의 찻잔과 주전자.
“흠…….”
깊은 한숨과 함께 니콜라스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리면서.
“아직은 모르겠군. 위험하다면 위험하달까, 잘 토닥이면 될 것도 같달까. 일단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지만.”
계속 타오르다 못해 몽당이 된 촛불 하나가 불씨를 밀랍 속에 파묻었다. 가벼운 퍽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저런, 불길이…….”
무언가 혼잣말을 꺼내려다 망설인 니콜라스는 고개를 흔들며 단념했다. 말로 괜한 단초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담담히 해내야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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