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콜라케르트. 이라크시스 강의 중상류 지역에선 제법 큰 도시였다. 한때 하야크 통일 왕국의 주요 항구로 물류 유통의 중심지 역할도 했다. 뭐, 이젠 그 가치를 눈여겨본 제국의 총독부가 점령해 버렸지만.
“이제 기중기도 제대로 돌아가네. 완벽해.”
불과 일주일 전쯤에 방문했던 기억과 달리 항구는 이제 절반 이상 복구된 상태였다. 여전히 항만 시설 대부분은 가건물에 가조립 상태였지만, 이미 시간당 물자 처리량은 상당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마법사님께서도 시간이 걸리는 작업에선 여러 도움을 주신 덕분이기도 합니다.”
“오, 하라드가?”
곁에 선 녀석에게 시선을 돌리니 과연 보기에 어떻냐며 유세를 부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래, 그래. 밥값은 확실히 했네. 수고 많았다. 돌아가면 고기를 두 배로 주라고 하지.”
“봉급을 우선 2배로 올려주는 건 어때?”
“하하……. 넌 정말 협상의 자질이라곤 개뿔만큼도 없는 것 같다.”
웃는 얼굴로 머릴 쥐어박은 뒤 네마냐는 다시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지케른의 성도 켈리도니온과 다르빌로 필요 물자들이 순조롭게 공급될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두 도시에서 물가가 안정되기 시작했단 소리가 들립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건 분명하다. 눈만 감으면 확인 가능한 창에서 항만 재건이 물가 심리 안정 효과가 있음을 적어 놨을 정도니까.
“그거 기대하지도 않은 효과인데. 의외야.”
“덕분에 영주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는 사이에 인기가 더 올라갔다고 전해드리라더군요.”
“하하……. 누가 그래?”
“성녀님께서 보내신 친필 서한에 그리 쓰여 있더군요. ‘내 친구’ 나자리안 백작에 경의에 찬 인사를 건네며, 라고.”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자질은 변함없이 탁월하시군. 그런 글귀가 공식 서한에 있으면 내가 피곤해질 텐데.”
성국과의 관계야 물론 돈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 왔던 일들은 한결같이 성국을 방어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간 마탑에서는 방해 공작 같은 건 없었지? 마탑주가 바뀌고 나선 그쪽도 자기네 일로 정신이 없겠지만.”
“다행히? 이따금 근교를 돌아다니는 고블린 산적 아니면 문제가 될 건 없었지.”
고블린 잔당이라. 아니면 일부러 이쪽에 혼란을 주기 위해 우레이미야 군단이 풀어 놓은 미끼일 수도 있었다.
“얼른 이 지역 제국군이 복귀해야 안정되겠지. 그때까진 신성 기사단이 우릴 도와줄 거야.”
“우리 영지 기사단은 올 수 없습니까? 강 건너이긴 하지만…….”
감독관이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영지군을 불러올 수는 없었다. 비할 데 없이 편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알잖아. 위급 상황이 아닌데 영지 경계를 군대가 넘으면 암피에르 조약에 저촉되는 거.”
“그놈의 조약은 도움이 되어야 할 때는 언급이 안 되고 어떻게 방해만 된담.”
하라드의 불평에 네마냐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감독관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만 들어가 쉬라는 뜻이었다.
“푹 쉬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감독관이 떠나가자 네마냐는 비로소 지친 표정으로 돌아가 한숨을 쉬었다.
“다르빌로 들어가는 물자는 확보했으니까 됐어.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네.”
“그래. 당분간은 좀 쉬엄쉬엄해. 요즘 너무 빨빨거리고 돌아다녔어. 이제 다르빌 재건도 속도가 빨라지겠지.”
“빠르면 며칠 안에라도 마나 계약식이 있을 거야. 다르빌이야 반대하는 사람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있어도 살아남긴 어려웠겠지.”
하지만 역시, 일이 한 번 생기면 연달아 생긴다던가. 하라드는 어딘가 구린 게 있는 듯 미안한 표정을 갑자기 지었다.
“야, 너 표정이 좀 불안하다? 이상한 소식 가져온 건 아니지? 그런 게 있으면 너 혼자 처리하라고―”
이야기를 빠른 끝내기로 넘어가려던 네마냐의 시도는 보기 좋게 좌절당했다. 소매 춤에 어떻게 숨기고 있었는지, 녀석은 두루마리 편지를 들이밀었다. 코앞의 두루마리는 무척이나 위압적이고 두꺼워 보였다.
“하……. 뭐냐 이건.”
네마냐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제국의 황제가 보낸 감찰관이 아나무이라로 와 있대. 중앙에서 보낸 파견병력도 거느렸다는데. 그 감찰관이 형을 만나고 싶다는군.”
“감찰관이……나를?”
직감, 아니 그런 거창한 감각이 없이 보아도 딱 피곤하게 생긴 일이었다. 물론 네마냐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제국이 언젠가는 이질적인 자신에게 접근하리란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그거 거절할 수 없나. 내일이라도 당장 다르빌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고블린과 싸운다며. 제국의 도움 없이 그게 가능하겠어?”
물론 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그것만큼은 제국을 죽어라 미워하는 마탑 강경파나 미크라야크 자칭 국왕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다.
“알아, 그냥 귀찮아서 해 본 소리야. 내 고블린 포위망 계획 자체가 제국의 참전 없이는 불가능한 생각이니까.”
“그래. 마침 감찰관에게 제대로 진상을 알려 주면, 꽉 막힌 현지 사령관들보단 훨씬 잘 먹힐 거야. 황제에게도 상황이 전달될 테지.”
“다만 제국이 정말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그 진상은 아직 모르겠어.”
마탑에서의 수상쩍은 개입, 그리고 일관되게 제국 중심의 하야스단 재편에 반대하는 미크라야크, 한 발 더 나가면 페넬로파 문제까지. 뭔가 자신이 놓치는 것이 있나, 싶은 생각까지 드는 네마냐였다. 그러다 보니 귀찮음 문제가 아니더라도 제국과 직접 접촉하는 건 꺼려지는 것이었다.
“뭐.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만 피해선 안 되지. 네가 대신 아나무이라로 편지를 보내 줘. 이번 주 안으로 방문하겠다고.”
“이번 주면 닷새 뒤인데, 괜찮겠어?”
“걱정도 팔자다. 닷새면 푹 쉬고 다르빌 행사에 참석했다가 영지에서 마법 수련도 할 수 있을걸?”
그렇게 단번에 일정을 짜고 나니, 막연하게 다가왔던 부담도 차라리 덜하게 느껴졌다. 뉘엿뉘엿 서쪽을 향해 돌진하는 태양 덕분에 동쪽에선 어두운 그림자가 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은 시간이 너무 늦지는 않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그저 그 한마디뿐. 항구 인부들이 늦은 시간에도 앞장서서 물건을 내리는 것을 고맙게 지켜볼 뿐이었다.
* * *
다르빌 중앙광장, 11월 30일, 오전 11시.
‘좌충우돌, 동분서주’의 여덟 글자로 요약할 수 있는 11월도 바야흐로 끝을 향해 갔다. 불과 하루 전에 도착해 죽은 듯이 잠을 청했던 네마냐는 생기를 완벽히 되찾아 자리에 함께했다.
“아, 나자리안 영주님! 오셨군요.”
“시장님, 무탈하셨지요. 오늘이 드디어 그날이네요. 저도 손꼽아 이날만 기다렸답니다.”
“그간 저희 주민 중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다리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만큼 감사 말씀을 올리기도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하하, 이 기쁜 날에 죄송할 것도 많으십니다.”
사실 이날의 마나 계약식 행사는 굉장히 즉흥적으로 준비되었다. 항만 정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유입 물자가 늘어 물가가 안정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딱 분위기 가장 좋을 때 진행하려고 노력하신 티가 많이 납니다. 아마 고원의 정치가 지망생들이 대대로 교재로 삼아 공부하겠죠.”
“허허,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떻든 고블린은 상존하는 위협이니 최대한 좋은 시기에 최대 효과를 얻어야겠죠.”
“동감합니다. 겨울은 아직 오는 중이니까요.”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 들이마셨다. 진한 포도의 향기가 코끝을 부드럽게 파고들며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오, 이 포도주는 평소에 마시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향기가 이렇게 진한 품종이 있었던가요?”
“아, 그건 이번에 특별히 얻게 된 시르테 산입니다. 이번에 새로 재배를 시작했다고…….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시르테라……. 일전의 장미 차도 그렇고, 관심을 들게 하는 곳이었다. 광업을 좇는 자신과 달리 농업을 최대한 다른 환금성 작물로 교체하는 성과를 이룬 것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뒤를 돌아본 네마냐는 멀찍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한 손님을 보았다.
“아, 저 옅은 분홍색 옷을 안에 걸친 손님인가요, 시르테에서 오셨다는 분이?”
“그렇습니다. 이야길 나눠 보시겠습니까?”
시장 역시 자생 산업 발전에 관심이 많다 보니, 시르테의 손님을 기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네마냐도 궁금하긴 했지만 애써 사양했다.
“아닙니다. 당장 이야기나 교류를 한다고 농업을 전환할 상황도 아니고…….”
사실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시르테가 아예 제국의 북서부에 해당하는 속주라는 점이었다.
‘제국의 속주 장관과 외부 제후인 내가 이야기를 나누면 뭔가 좀 모양새가 나지 않지. 이상한 소문을 만들면서까지 대화를 열 필요는 없어. 저쪽에서 찾아오는 게 아닌 이상은 말이야.’
지금으로선 다르빌과 주변의 안전이 훨씬 중요했다. 고블린은 잠깐이나마 조용했고 곳곳의 건축은 순조로우며 정착민은 계속 늘어났다. 네마냐는 화제를 자연스럽게 전환했다.
“이제 슬슬 행사를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관계자가 찾는군요, 시장님. 올라가 보시죠.”
“어, 그렇군요. 실례하겠습니다.”
연단으로 황급하게 뛰어 올라간 시장. 중간의 계단에 발이 걸려 휘청이는 모습에 내빈과 주민들이 만찬을 들다 말고 폭소를 터뜨렸다.
“아저씨, 또 희극 연기 시작하시네!”
“우리 시장이 재미난 거로는 황제감이라니까?”
“아무튼 분위기는 무척 좋군. 좋아, 좋아.”
팔짱을 낀 네마냐도 가족처럼 화기애애한 행사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이제 영지 마나라는 양날의 검이 요구하는 책임과 희생은 작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사람들이 해나갈 문제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 줬으니, 이젠 앞으로 잘하길 바라야지.”
주민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연단 위를 바라보는 가운데, 구르간은 하라드가 준비해 건네는 반지를 받아들었다. 특별히 네마냐가 양호한 초록석을 골라 제련한 것이었다.
“시민과 시장의 엄숙한 계약과 상호 합의에 따라, 영지의 마나를 오롯이 도시의 발전과 수호에만 쓸 것입니다.”
하라드와 네마냐가 초안을 짜준 서약문. 구르간은 마음에 든다며 약간의 배치만 바꾼 뒤 그대로 낭독했다.
―쏴아.
물살이 거칠게 쏟아지는 소리. 하라드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미리 그려 놓은 마법진으로 도시민의 마나를 집중시켰다. 녹색의 물결이 반지로부터 솟구치며 장관을 이루었다.
―파앗!
“와!”
“세상에, 저런 빛이…….”
“저게 우리가 만든 빛이에요, 엄마?”
“그래…… 기적이야.”
사람이 만드는 기적과 같은 빛. 물론 기적과는 거리가 먼 아주 현실적인 힘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저 힘이 자신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럼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가능하겠지.”
마법이나 마나의 역동과 같은 웅장한 힘은 본 적이 없긴 하다. 대신 그와 비슷한 ‘혁명’은 이서준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래서 민회 조직을 확장해서 일찍이 영지민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결속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
“다른 곳도 이렇게 해 봐야겠지만, 아마 한번 데이고 나서야 정착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당면한 고블린을 막으려면 이게 최선이니까.”
―슈우욱 펑!
―퍼펑!
“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라드가 분위기를 한껏 띄우기 위해 손짓을 휘두를 때마다 빛이 올라가 어두움을 걷어냈다. 마법으로 불꽃놀이 하는 모습도 진풍경이었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네마냐 역시 손뼉을 치면서 새로운 다르빌의 출발을 축하했다.
[「다르빌 재건」 완료. 보상은 상세 확인.]
[「다르빌에서의 반격」 시작]
그리고 새로운 장이 시작될 순간도 찾아왔다.
* * *
다르빌의 소식은 곧 여러 정보통을 통해 각지로 전해졌다. 특이하게도 가장 빠르게 소식을 접한 곳은 성국도, 의심하는 눈길에 찬 미크라야크도, 심지어 바가반드도 아니었다.
“그래, 얼마 전에 세반을 드나들었다는 첩보는 확인했지. 우리 애들이 뒤를 쫓다가 행사 인파에 섞여 놓쳤다더군.”
가무잡잡한 얼굴로 역시 검은 로브를 걸친 대마법사가 보고서를 돌려주며 대답했다. 보고를 위해 찾아온 것은 아예 검은 복면까지 써서 눈밖에 보이지 않는 요원들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아직 개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생각보다도 동맹을 구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모양입니다.”
“이번엔 어디까지 갔다더냐.”
“타위비크 대공령까진 갔다 온 게 확실합니다. 겔라르쿠니로 돌아온 백작을 수행하던 호위병들이 타위비크의 수하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별의별 촌것들까지 튀어나오는군. 그래 놓고 이제 다르빌까지 가서 참관까지 한 건가. 행사는 잘 진행됐고?”
다리까지 여유롭게 꼰 마탑주는 어딘지 맘에 들지 않는 모양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성황리에 끝난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 발표된 바로는 주변에 작은 도시 최대 10개를 세우겠다고…….”
“아주 신이 났군. 이젠 아예 마법사들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무시할 작정이군. 초청도 안 하더니 암피에르 조약은 상관도 없이 그런 걸 발표해?”
평소 성격대로라면 앞으로 삼십 분 정도는 더 떠들어야 속이 풀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화풀이가 소용없다는 걸 아는 이상 떠들며 시간을 할애하는 건 마탑주, 말카시안이 아니었다.
“우선은 제국 눈치가 있으니 적립만 해 두자고. 각 영지에 있는 마법사조합에 연락해서 일단 의견부터 모아야겠군.”
한편에 새로 사서 놓아 둔 통신석으로 손을 뻗는 말카시안. 요원 중 대표인 듯한 하나가 입을 열어 물었다.
“저희는 그동안 변함없이 척후를 하면 되겠습니까? 필요하면 얼마든지 특수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만.”
“아직은.”
마탑주는 잘라서 대답했다. 어둠 속에 사는 요원들에겐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어둠 속에 말 그대로 녹아들었다. 눈 한 번 깜빡이니 증발한 듯 사라졌다.
“떠오르는 걸 막을 순 없다지만, 반드시 곧 틈이 생기겠지. 하찮은 것들에게 힘을 주었으니 조만간 우리가 다시 돌아올 길이 열릴 테니까. 마탑이 괜히 천년을 군림한 게 아니란 걸 보여 주도록 하지.”
마탑주가 보기에 고블린 문제 이상으로 질서의 뒤틀림은 심각했다. 그리고 조만간 제대로 이 야무진 도전자들에게 힘을 보여 줄 때가 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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