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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86화 (85/200)

86화

짙은 남색의 옷을 걸친 그림자 하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온갖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해야 할 천막 앞이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도 없었다.

―슥

천막을 열고 들어서니 거친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실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을 메운 빽빽하고 답답한 연기.

“왔군, 마법사. 기다리고 있었다.”

유창한 발음이었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출처를 살폈다. 어둠에 익어가는 눈동자는 길게 피어나는 연기의 시작점에 고정됐다.

“놀랐어.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부를 일은 없을 거라더니.”

“후후, 놀랐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막대기를 천천히 내려놓은 것은 걸상에 반쯤 드러누운 고블린이었다.

“너나 나나 피차 보기를 원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일은 해야 하니까. 그리고 이번 일은 마법사 당신도 알아야 할 일이지.”

“바가반드 영주에 관한 이야기로군.”

“오.”

짧은 감탄사와 함께 녀석은 연기를 뻑뻑 피워 냈다. 독한 냄새 때문에 외면하듯이 고개를 살짝 돌린 마법사라는 그림자.

“흐흐, 그래도 역시 동기간이란 정이 무섭긴 한 게지. 생전 인간들 일엔 관심도 없던 당신도 반응을 보인다니.”

“쓸데없는 얘기나 하려고 부른 거라면 돌아가겠어. 무슨 이야길 하겠다는 거야.”

“좀 기다려 봐.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나도 힘을 내야 하니까.”

거듭 연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하는 녀석.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뱉을 때마다 거대한 덩치가 두 배는 불어나는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쓰읍, 하……. 정신이 좀 맑아졌다.”

“네가 흡입하고 있는 그 연기…… 정말 안전한 건가?”

깊게 드리운 연기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가득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독은 오히려 나를 강하게 한다, 인간 마도사. 나코르잔의 노예 생활과 인간의 음해에도 기어코 살아남았지.”

“독한 놈……. 그런 걸 장기 복용하면 나중에 네 마나도 고갈되어 버릴 거다.”

“크크……. 어차피 오래 살 생각 따위도 없다. 내 목표를 이루는 게 먼저지.”

작은 한숨과 함께 로브를 뒤집어쓴 그림자가 후드를 젖혔다. 짧게 머리를 정리한 페넬로파의 얼굴이 드러났다.

“바가반드에 관한 이야기라는 게 뭐지?”

“성정이 조급하군.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고블린 살갗 냄새는 내 인내심을 갉아먹거든. 시간을 적당히 뺏었으면 좋겠어.”

두 사람의 긴장된 침묵은 한동안 이어졌다. 보다 못한 고블린 부관 하나가 무어라 대장에게 지껄였다.

“흠? 아…….”

이야기를 듣고 감정이 동했는지 대장은 연기 나는 막대기를 내려놓았다. 시종이 미리 가져다 놓은 접시에 문지르니 연기는 곧 사라졌다.

“그렇지. 제국의 마나 결계를 무력화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했지. 나도 잊어버렸어. 아니면 나코르잔을 다녀간 네 친구를 감시하느라 정신이 없던 건가, 크큭.”

어디가 웃긴 것인지 혼자서 음산한 웃음을 흘린 대장은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페넬로파는 그저 묵묵하게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린 마도사 그리엘크에게서 진술을 확보했다. 네가 말하던 것과 달리 새 바가반드 영주는 상당한 실력자더군.”

“……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페넬로파가 시선을 마주했다.

“네마냐가 그리엘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운이고, 같이 있던 동료들 덕분이겠지.”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 으뜸 마도사와 호각으로 싸웠다. 너처럼 전문적인 마법을 쓰는 건 아니었지만, 마치…….”

“마치?”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온통 혼란스러운 페넬로파가 되물었다.

“자연의 힘, 그 자체와 싸운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하던가. 어쨌든 보통의 마법사와도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더군.”

“그럴 리가……. 녀석은 애초에 마나 친화성이 떨어졌는데.”

그제야 페넬로파는 바가반드 영지 전쟁과 마시스에서 고블린 연거푸 쓴 잔을 들이킨 것을 되짚었다. 이건 단순히 우연, 아니면 강력한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대체 녀석에게 무슨 일이…….”

마지막으로 아니에서 만났을 때 마나와 관련된 부분으론 아예 살펴볼 생각도 못 했다. 이게 이제 문제가 될 줄이야. 심지어 어젯밤 타위비크를 황급히 떠나던 녀석을 멀찍이서 봤는데도 말이다.

“도통 모를 일이야. 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데. 더 없었어?”

“정보? 궁금하다면 그리엘크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면회를 허락하지. 나름 네 수제자 아니었던가.”

“역겨우니까 그만하지.”

페넬로파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단추를 채운 마법사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경고를 날렸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협박해서 나를 끌어낼 순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도, 남동생도 없다. 우레이미야.”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인간들의 마을에선 공포스럽게 회자되는 다섯 음이었다. 소위 자신의 이름을 딴 우레이미야 군단의 우두머리, 총사령관.

“흠. 그럼 이제 너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이지? 복수심인가? 아니면 반고블린?”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페넬로파는 뒤로 몸을 돌이켰다. 잠시 멈춰선 끝에 흘러나온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종말……. 모든 것의 끝이 더 큰 희생을 부르기 전에 시작하길 바랄 뿐이야. 나는 그 시작을 앞당길 뿐이고.”

“시작의 끝이라……. 그럴듯한 소리군. 적어도 제 아비보다는 현명해.”

우레이미야는 거대한 몸집을 몇 발짝 옮겼다.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 잘 챙기라고, 마법사.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의 끝을 보려면 몸을 챙겨야 한다고.”

대족장의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페넬로파는 그대로 천막을 벗어났다. 족장 주변의 고블린 가신들이 그림자를 벗어나 이구동성으로 떠들어 댔다. 역시 군단 출신답게 존대는 없고 오직 호칭 끝에만 ‘님’을 붙여 구분할 뿐이다.

“저 건방진 인간을 언제까지 품고 갈 건가, 대족장님.”

“대하는 자세가 언제라도 상황이 틀리면 칼, 아니 지팡이를 돌릴 기세다. 지금 죽여 없애야 걱정이 없다.”

“누가 너희들에게 말할 기회를 줬지?”

우레이미야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윽한 눈길 속에 담긴 형광 붉은빛이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 빛을 냈다.

“힉!”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친 고블린 가신이 경련이라도 일으킨 듯 그 자리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다른 이들도 모두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치우고 불을 달라.”

시종을 드는 일반 고블린이 재빨리 불을 붙였다. 하나같이 모두 전사형 고블린임에도 꼼짝 못 하는 매서운 눈빛이었다.

“후우…….”

연기를 몇 번 내뿜은 뒤에야 눈빛의 형광 붉은빛이 사그라들고 눈매도 사근사근해졌다.

“저 인간 마법사는 내게 칼을 들이밀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목표 하나만큼은 저와 내가 한결같거든.”

하지만 천막 밖의 그림자를 쫓는 시선은 결코 아군을 보는 그것은 아니었다.

“뭐, 언젠가 도구가 쓸데없이 달리 마음을 먹게 된다면 그땐 제거해야겠지. 물론 그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고, 지금은 하지 않을 뿐.”

그렇게 한참을 막사 바깥의 우중충한 하늘을 지켜보는 우레이미야였다. 그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는 새로운 명령을 내릴 시간이었다.

“산악 군단으로 연락을 보내. 나코르잔이 정신 차리지도 못하게 압박하라고 해. 건방진 놈들이 감히 인간 동맹군을 구하려고 해?”

“하지만 우리가 석 달 동안 치지 않기로 하고 금과 향신료, 강철을 받기로 했는데…….”

그랬지. 나코르잔을 바로 점령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재물 정도는 뜯어오잔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젠 판이 바뀌고 있지.

“상관없다. 약탈하면 그것 이상을 얻을 수 있지. 쓸모없이 식량이나 축내는 고블린 수백 정도 죽다 보면 알겠지. 저번에 나코르잔으로 도망간 우리 패잔병을 받아들인 걸 명분으로 조약은 무효화시키면 된다.”

“좋아. 그럼 원래대로 모두 쳐 죽이라는 명령 하나면 되는 건가?”

“그거면 된다.”

신이 난 고블린 가신 하나는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족장의 명령은 그것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녀석, 기다리지도 않고. 거기 너, 가서 마저 전해라. 슈니크 협곡의 부족에게도 출진 명령을 전달해. 중부 산맥의 인간을 모두 죽여 버리라고.”

“알겠다.”

이로써 고블린 전쟁의 첫 막이 오를 것이다. 이날만을 위해 지난 10년간 거짓 웃음을 짓고 위장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막판에 걸림돌이 생겨 일정이 달라지긴 했지만, 뭐 어쩌랴.

“발버둥 쳐 봤자지. 높은 땅, 하야스단은 우리의 거주지가 될 것이다.”

* * *

자신의 움직임 덕분에 어떤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지 미처 모를 네마냐. 그 일행이 도착한 곳은 세반의 국경이자 처음 네마냐가 갔었던 겔라르쿠니였다. 도착한 시각은 그다음 날 새벽이었다.

“나자리안 백작님, 도착했습니다.”

차창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이에바의 손길. 머지않아 문이 열리고 네마냐가 내려왔다.

“빠르다. 이렇게 금방 올 줄이야.”

“작정하고 준비를 한 결과죠. 물론 처음 이곳에 도착하셨을 때도 빨리 움직인 편이지만요.”

“어쨌든 고마워요. 세반 국경지대까지 데려다줄 줄은 몰랐는데.”

이에바는 투구를 벗었다. 조금 지친 기색이 있지만 달려온 거리에 비해 매우 건강해 보였다.

“천만의 말씀을. 원래대로라면 다르빌까지는 모셔드리는 게 맞으니까요. 워낙 사양하시니 어쩔 수 없었지만.”

“북부 영지만큼이나 중부 산맥도 상황이 마냥 좋지는 않으니까. 내게도 타위비크는 중요한 친구야. 여기까지 왔으면 나도 안전한 편이고.”

얼마간의 이야기를 나누곤 인사를 나누었다. 이에바의 일행은 반나절 정도 쉬었다가 출발한다고 했다.

“그럼 곧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해요, 이에바.”

네마냐가 내민 손을 붙잡으며 이에바도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 영지가 무탈하기를 바랍니다.”

호위 일행과 헤어진 네마냐는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겔라르쿠니의 에살하톤 지부를 들렀다. 신분을 밝히고 말 한 필을 빌린 네마냐는 곧바로 고개를 내달렸다.

―워, 워!

정신없이 중부 산맥 끄트머리를 넘었다. 이라크시스 강이 모래사장을 끼고 흘러가는 모습이 드러났다.

“고향은 고향이군. 얼마나 되었다고 이 광경이 그리웠는지.”

오른편으론 마탑의 거대한 탑들이 한눈에 보이는 암피에르, 좌측으론 지케른 성국의 수도 켈리도니온이 있었다. 두 도시를 옆구리에 낀 네마냐는 그대로 콜라케르트로 향했다.

“마법사님, 최종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콜라케르트 항만 재건에 대한 최종 평가만이 남았습니다.”

바가반드에서 지명한 콜라케르트 항만 재건 감독관이 두툼한 서류를 올렸다. 하라드는 이미 모두 읽어 본 문서라며 몇 장 들춰 보곤 이내 덮었다.

“하지만 불과 닷새 만에……. 정말 기적인데. 아마 영지에 계시는 미하일 자작이 보면 환호성을 지를 게 훤히 보이네.”

“그럼 항만 시설을 마지막으로 살펴보시고 최종 승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 그건 네마냐 영주께서 돌아오시면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 어차피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돌아오실 테니까.”

보통 나코르잔이라고 하면 느긋하게 잡아 2주 정도로 일정을 잡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강박증이 의심될 정도로 조급한 네마냐의 성격을 하라드도 익히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정도를 가늠하지 못했단 것이지.

“그걸 뭐 내일모레 하고 있어. 그냥 바로 해, 지금.”

목소리에 깜짝 놀란 감독관과 하라드가 벌떡 일어섰다. 이제 겨우 닷새가 지나서 들을 수가 없을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쿠당탕!

2층의 집무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계단으로 발걸음이 쏟아져 내려왔다.

“형!”

“영주님!”

“잘 있었어? 내가 돌아왔다고. 양손에 선물은 딱히 없지만.”

하라드가 어떻게 닷새 만에 다녀왔느냐며 황망하게 물어 왔다. 네마냐는 먼저 진정 좀 하라며 영지 마법사를 토닥여 주었다.

“그 이야기는 이따가 저녁에 찬찬히 말해 줄게. 먼저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해야지. 마지막에 하던 얘길 들어 보니 콜라케르트 항만 설비를 모두 설치했다던데, 사실이야?”

“예, 맞습니다. 지금 막 최종 승인을 요청하는 보고서가 올라온 상태입니다.”

“엄청난 속도전이지. 원래라면 한 달은 족히 걸릴 일이거든. 아무리 임시로 만들었다지만……. 그래도 역시 형이 다녀온 속도보다는 덜 놀랍지만.”

마법으로 시간 감각이 뒤틀리기라도 한 것 같다는 녀석. 웃음을 짓고 푸념을 들어주면서 네마냐는 집에 돌아온 것 같다는 익숙함에 안도를 느꼈다.

“자, 그럼 얼른 항구로 가 보자. 얼른 하역 작업을 시작하도록 준비해야 다르빌의 재무장도 하루라도 빨리 가능하지.”

“드디어 본 궤도에 오르는구나!”

하라드의 감탄대로, 고통스럽게 삐걱거리던 북부 영지도 이젠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늦지만은 않았기를.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평지를 달리는 군단의 기병대 그리고 나코르잔의 창병 방진, 타위비크의 능숙한 사격진을 세우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마지막에 다시 떠오른 것은 우레이미야의 모래알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군대였지만.

[「다르빌 재무장 준비」 완료]

[「다르빌 재무장」과 「반격」 시작]

물론, 새로운 방향을 알려 주는 미션도 함께였다.

- 8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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