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뜻하지 않게 타위비크 대공의 영지에서 하야스단의 북부, 중부를 아우르는 만남이 있었다. 거기에 엘프라 부르는 장이족의 공주까지.
“아버지가 그렇게 쉽게 동맹 전선 구축에 대한 확답을 내려 주실 줄은 몰랐어.”
“신중하기로는 타위비크의 대공이 으뜸이란 소리가 있을 정도인데, 오늘만은 다른 사람이었지.”
바쿠헨과 바쿠란, 두 형제가 새삼스럽게 자신들의 아버지를 다시 봤다며 앞다투어 평가를 내놓았다.
“영공께서도 상황의 심각함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겠지. 너희도 계곡 경계선을 다녀왔으니 느끼지 않았어?”
여행 중에 제대로 들은 적이 없는 아빌리스의 청량한 음성이 들렸다. 장이족의 방언이었지만, 네마냐도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깔끔한 발음을 자랑했다.
“계곡 입구에선 어땠는데? 내가 봤을 때는 이미 고블린이 다들 나자빠져 있던데.”
“음,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이에바?”
용병 연기 때는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주고받던 이에바였다. 하지만 근위대장으로 돌아오자 철두철미하게 존대를 사용했다. 네마냐는 질색했지만 그게 이에바의 방식이었다.
“아마 정면에서 맞붙었다면 놈들은 학살을 당했을 겁니다. 확실하죠.”
“응? 계곡에서 쓰러져 있던 놈들은 뭐였는데?”
“그건, 그건 말이지…….”
바쿠헨이 기세 좋게 입은 열었지만 차마 이후의 말은 꺼내지 못했다. 네마냐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이에바가 대신 대답했다.
“놈들은 나코르잔의 포로 고블린이나 저항 고블린을 화살받이로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뒤편이나 측면 숲에서 공격했죠.”
“화살받이를?”
단지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온 맥락에 가득한 악의가 두통을 유발할 정도로 느껴졌다.
“정말 악질인 놈들이군. 같은 동포들 사이에도 손속 따위 없다니.”
“더군다나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용도로 써먹었으니 말이지.”
좋게 말하자면 반대자도 내치고 의사 결정을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효율성의 극치인 셈이다. 이런 고효율의 적을 앞두고 인간들은 아직 서로를 믿지도 못하는 이들이 절반이었다.
“수단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니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가 정말 걱정이군.”
“탑의 마법사…… 읍!”
바쿠헨이 페넬로파 이야기까지 꺼내려 했지만, 눈치 빠른 바쿠란의 손에 의해 제지당했다.
“지금 그 얘기까지 꺼내면 심란하고만, 눈치 좀 보면서 꺼내라고.”
“후, 괜찮아. 어차피 안 그래도 그 마법사 생각으로도 계속 골치니까.”
일단 바쿠란의 증언에 따르면 페넬로파는 고블린들의 테러를 돕고 있다. 사실 돕는 정도가 아니라 진두지휘가 아닐까 할 정도다.
“어쨌든, 그럼 이제 우리 영지도 바가반드와 합을 맞추게 되는 거지?”
“교역은 도로가 워낙 불안해서 힘들겠지만. 일단은 군사적인 협조 중심으로 운영되겠지”
대공과 네마냐, 그리고 이 자리의 모두가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건 임박한 적의 침략이었다. 평소라면 왕래조차 없었을 두 사람이 동맹으로 급진전한 것은 오직 그 예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영지의 군사권은 일단 너희들 공자에게 있다니.”
원래대로라면 대공인 타위비크 3세가 군대를 직접 지휘해야 한다. 하지만 노환에 병이 깊은 영주는 이미 모든 통솔권을 장남 바쿠헨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인지. 그게 궁금한데, 헨.”
네마냐는 남부 저지대의 특산품인 맥주를 바쿠헨에게 따라주며 물었다.
“항상 첫 발짝은 익숙하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처리해야겠지. 우선 신변의 문제가 해결해야 더 큰 문제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동감. 그렇다는 건 계곡의 고블린 부족 문제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아니면 계곡의 놈들은 제가 담당하고, 공자님들은 바로 구 나샤와 지역 고블린을 토벌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에바의 의견도 그럴듯했다. 협곡의 부족이 작은 위협이라고 하면 나샤와 지역에 정착한 군단 정찰대는 인류의 적이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 영지의 병력을 나누어서 상대하기엔 어렵지 않을까. 당장 나샤와로 넘어가는 길목을 굽어보는 자리에 그 마법사도 있어서.”
“확실한 건 아니야. 일단 탑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거든. 바쿠란, 네가 봤다던 그 탑의 정확한 위치를 기억해?”
바쿠란은 고개를 저었다.
“철위단 영토 내의 산자락인 것만은 확실해. 하지만 우리 영지로 넘어오는 길목인지는 몰라. 아마 그럴 것 같지도 않고.”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상식적으로 탑을 봤으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을 이야기였다. 녀석도 답답하다는 듯 가볍게 가슴을 쳤다.
“그러니까, 지나가다 보긴 했는데 그 지점에서 정확한 거리를 몰랐던 거야. 안개가 자욱해서 가뜩이나 아래쪽은 보이지도 않았거든.”
“암만 그래도 대강 위치는 알 수 있지 않나?”
근본적인 해답은 다시 바통을 넘겨받은 이에바가 내놓았다.
“소공자님이 말씀하신 장소에 병사를 보내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해괴하다는 것입니다.”
“저런……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군.”
“동감입니다.”
―탁
말없이 잔을 비운 대공자 바쿠헨이 입가에 묻은 거품을 쓱 닦아 냈다. 안주인 비스킷은 보지도 않은 채, 그가 마저 덧붙였다.
“그런데도 지금도 꾸준히 인근 산악에서 그 탑을 봤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어. 주로 산에서 허브를 캐는 약초꾼들이 중심이고.”
“보이긴 보이는데, 정작 위치를 짚을 수가 없다니. 무슨 괴담도 아니고 말이야.”
거기까지 얘기를 하니 짚이는 바가 있었다. 네마냐는 아빌리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저기, 아빌리스…… 공주님? 공주님이라고 불러야겠지?”
“그냥 아빌리스라고 불러. 일일이 그거 다 붙이면 대화를 못 하니까.”
“그래. 어쨌든 네 눈이나 감각으론 느껴지는 게 없었어? 녀석이 정말 대마법사 자질이 있고 탑을 옮겨 다닌다면, 마나의 파동이 심각할 텐데.”
아빌리스는 잠시 기운을 살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바쿠란이 어깨를 들썩이며 대신 대답했다.
“경계 밖 일정 지점부터는 아예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아. 마나가 부족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마치…….”
“공허.”
아빌리스의 단어. 네마냐는 신경이 그 한 단어에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그 단어.
“손을 내밀어도 닿지 않고 물러나는 바람을 만지는 느낌이었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냄새가 나지도 않아.”
“이상한 일이지. 형이랑 예전부터 다녔지만 원래 그 지역이 그런 현상은 없었거든. 요즘은 나무도 많이 죽어 버렸고.”
하기 싫은 상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최소한 적마정석의 존재가 확실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고블린 군단의 손에 쥐여준 것은…….
“아마 원인은 적마정석일 거야. 주변의 마나를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효과를 보이는 건 그것뿐이거든.”
―콜록콜록
마시던 잔을 급히 내려놓고 헛기침을 한 바쿠란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뭐? 군단이 그 다루기 어려운 적마정석을 함부로 쓴다고? 아니, 그걸 넘어서 어떻게 그걸 쓰는 거지? 채굴부터 취급까지 온통 어려운 물건인데.”
“배신자의 소행이겠지.”
의외로 침착한 바쿠헨의 한마디. 나중에 나눈 이야기로 알게 되었지만, 영지 전쟁, 고블린 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배신자가 나왔다. 생계의 위협, 내부 갈등과 원한 등 이유도 많았다.
“우리 동네에 그런 속담이 있었지.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정확히 그런 꼴이로군.”
먼 타향에 나와 있을 때의 장점은 바로 현대 지구에서의 속담도 적당히 포장해 쓸 수 있단 점이다. 얼마나 편한지, 회귀를 해 본 사람만이 느끼겠지만.
“꽤 적절하네. 이번엔 그 무덤이 엄청나게 큰 건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빌리스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조촐한 술자리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네마냐는 씁쓸한 맛을 잊기 위해 남은 잔을 비웠다. 잔이 테이블에 닿으며 정적이 깨졌다.
“쌉싸름한 게 딱 내가 좋아할 만한 맛이군.”
“말술이네. 앞으로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종종 자리를 가져야겠어.”
“좋은 자리에 좋은 사람들이라니 내가 사양할 건 없지.”
자리를 펼쳐 놓은 망루에선 보름달이 훤하게 보였다. 크고 작은 두 개의 달에서 쏟아지는 빛은 골짜기 깊숙이 옅은 그림자를 걷어냈다.
“부디 두 곳의 고블린을 상대로 너무 부서지지 않기만을!”
“너무 세지만 않기를!”
마지막 남은 잔을 일행은 그렇게 비워 냈다.
* * *
타위비크를 떠나 하야스단 북부로 돌아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처음에 올 때야 마탑이나 미크라야크의 군주의 감시를 염려했지만, 이제는 대공의 공식적인 후원도 받은 뒤였다.
“선뜻 호위를 수용하셔서, 오히려 저희가 놀랐습니다.”
이에바 근위대장이 투구의 술을 뒤로 넘기며 말을 건넸다.
“어째서?”
“평소 나자리안 경의 모습을 보면 호위를 쓰지 않겠다고 하실 것 같아서요.”
“아, 평소엔 좀 탈권위적으로 하는 편이지?”
“애초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느낌이죠.”
“그게 정확한 표현이겠네.”
현대인의 몸에 밴 감각은 역시 오십 년을 신분제 사회에서 살아도 멀쩡할 수밖에 없나 보다. 물론 그렇다고 적당히 이용할 줄 모르는 순둥이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필요 없으면 쓸 일이 없겠지만, 대놓고 나를 노리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말이야.”
“마탑 말입니까?”
“뭐, 마탑의 영감님들도 적잖이 싫어하고.”
말은 그래도 당분간 마탑과는 임시 휴전 중이었다. 어딘지 상쾌하지는 않은 제국의 개입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 덕에 마탑이 바난드 왕국과 전쟁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헛짓거리를 벌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의문사를 꾸며 낼 순 있잖아. 암살자만 보낼 수도 있고.”
“나자리안 경이 전사 고블린들의 목도 베고 벌써 대군을 물리쳤는데, 누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말로만 그러겠죠.”
“에헤이. 사람이 한번 원한을 가지게 되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이지. 불가능이란 건 아주 정상적인 상태의 제한적인 이야기일 뿐이거든.”
“말씀은 어렵지만 그래도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적어도 저희들이 호위하는 동안엔 불상사가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럼 나는 덕분에 눈 좀 붙일 수 있겠어. 잠은 잤는데도 일이 워낙 많아서 피로하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에도 불구하고 잠은 오히려 더 쏟아졌다. 살짝 감긴 눈으로 네마냐가 이야기하자 이에바는 차창 밖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도중에 쉬어야 할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크라야크 영지 근처는 최대한 머물지 말고 지나갔으면 좋겠어. 나는 좀 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사를 간단하게 나눈 뒤 차창을 닫았다.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으니 덜컹거리는 거센 움직임조차 자장가처럼 간지럽게 느껴졌다.
“며칠 새에 일이 엄청나게 많았어. 고블린 자유 투사와 젊은 공자들에 장이족 공주에…….”
그러나 역시 심중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진상을 찾아볼수록 고블린의 위협은 점점 더 숨을 조여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다…….
“움직이는 마법의 탑이라니, 이게 무슨 판타지 소설…… 아니, 돌아가는 꼴은 판타지 세계가 맞다지만, 적당해야지.”
시스템의 불합리한 개입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네마냐로선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하단 생각도 든다. 그저 어째서 녀석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갔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마법사 페넬로파는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떠날 것 같으면 조용히라도 떠나든지, 이유라도 알려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제야 부질없는 소리일 뿐이다. 아무리 과거의 절친이요, 사연이 깊다고 해도 새로운 현재에는 어떤 힘도 없다. 더군다나 인간 족속의 공적으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이상…….
“내가 동정의 빛이라도 비추는 건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지. 다음에 볼 때는 친구가 아니라 생존을 건…… 결투의 상대가 될 테고.”
네마냐는 마차 속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품속의 백마정석이 은은한 마나 반응을 보이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우우웅.
오직 마정석만이 느끼고 반응하는 희미한 파동. 일행이 지나고 있던 산간 기슭 위로는 짙은 안개가 내렸다.
“안개가 더 몰려오기 전에 이 계곡을 나가자!”
이에바의 호령에 병사들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구릉 위. 하단이 보이지 않는 탑 한 채가 우뚝 솟아 있었다. 달빛을 고고하게 받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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