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열일곱 천애 고아에 사고로 끊어질 듯한 목숨을 가지고 태어났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라 봐야 손바닥만 한 땅이요, 주위에 들끓는 것이라곤 모조리 등쳐먹을 생각이 가득한 적이었다.
“이런 운이 연속인 건 처음인걸.”
“나도 놀랐다니까. 불과 하루 만에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지.”
바쿠헨이 능청맞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용병대장을 자처하며 수하를 이끌 때도 격식 없는 모습이 알맞긴 해도 옷차림이 너무 도련님이었다.
“옷 보고 어느 댁 도련님은 되지 않을까 싶었더니 설마 대공의 후계자였다니
“갑자기 일행에 끼어든 젊은 소년이 고블린 진영을 돌파해 나코르잔을 갔다 온 것만큼이나?”
우측의 바쿠헨이 좀 어려워하는 것과 달리, 왼쪽의 바쿠란은 변함없이 편안하게 대했다.
“흥. 그나저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토벌 작전을 벌인 거지? 병사 숫자도 적지 않은데.”
“우리 영지는 나샤와 사건 이후로 상시 동원 상태거든. 천 명 정도는 가뿐하게 동원하지.”
하기야, 뒤따르는 병사들의 무장이 결코 반나절 만에 준비해서 모일 차림새는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던 네마냐에게 바쿠헨이 무언가를 건넸다.
“자, 이거. 마차 속에 떨어져 있던데 네 거 아니냐? 우리 물건은 아닌데, 이에바가 네가 망토 고정핀으로 쓴다고 하더라.”
“아.”
짐 정리를 하다가 하나를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영지의 무늬가 알려진 상태였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제 막 새로 만든 문양이라 그럴 일은 아예 없었지만.’
“고마워. 짐 정리하다 떨어트린 모양이네.”
“그래서, 신분을 밝히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귀인께선?”
“하, 그러지 않아도 밝히려고 했어.”
네마냐는 바쿠헨의 손에서 단추를 받아들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말을 타고 이동하는 채로 소개하는 게 멋은 나지 않겠지만, 상관은 없었다.
‘녀석들도 멋들어진 걸 원하지는 않을 테고.’
아무렇지 않게 전방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네마냐는 자신을 소개했다.
“바난드 왕국 속령, 바가반드의 영주 네마냐 나자리안이라고 합니다. 공자님들을 사석에 이어 다시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뭐?”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바쿠헨·바쿠란 형제는 귀를 의심하며 자신들이 들은 정보를 차근히 곱씹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그 바가반드의 영주라고? 네마냐 나자리안?”
“응.”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바쿠헨 녀석은 험상궂은 얼굴에 만면 가득한 의문을 띄우며 어리둥절했다. 차라리 머리가 돌아가기론 둘째란 녀석이 훨씬 나은 건 확실했다.
“그런 거였네. 확실히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모양새부터 마나까지 티가 확확 났지. 설마 영주일 줄은 몰랐지만.”
말을 마친 바쿠란은 자신의 형을 툭툭 쳤다.
“뭐 해? 영주의 인사를 받아 놓곤 그냥 넘길 셈이야?”
“어? 어어…….”
잠시 말을 멈춘 세 사람. 바쿠헨과 바쿠란 형제는 오른팔을 가슴께로 올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타위비크 대공의 장남 바쿠헨이 나자리안 백작을 뵙습니다.”
“대공의 차남, 바쿠란이 유명하신 영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색하게 공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나자 세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오갔다.
“어, 음…….”
“…….”
도저히 이런 민망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겠는 듯 바쿠란이 침묵을 깨트렸다.
“아이, 젠장. 분위기 잡는 건 역시 중부 산맥 사내들한텐 무리라니까.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서 말 놓고 지내자고, 어때?”
투구를 벗은 녀석이 답답하다며 건넨 제안. 네마냐는 짐짓 점잖은 척을 하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손해 아닐까? 아무리 영지가 하찮다지만 나는 영주고 당신들은 공자니까.”
“아, 이거 또 비싸게 연기하기 시작했네. 용병 놀음에 그동안 맞춰줬으면 돌아오는 게 있어야지, 정말 내가 둘째 공자라고 팔자가 보통 팔자가 아니라니까.”
바쿠란의 끊임없이 구시렁대는 소리에 네마냐는 작게 웃었다. 바쿠헨 역시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둘째 공자님 힘드시다잖아, 왜 웃는 거야 크큭, 아 눈에서 물 나오네.”
공적인 언어를 연기해야 하는 세 사람은 서로 용병 연기를 하던 대로 하는 데 동의했다.
“놀랐어. 다르빌 전투와 마시스 사건은 들어봤지만, 그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어릴 줄은 몰랐지.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올해 몇 살이야?”
“열일곱이지. 너희는?”
“나는 스물셋이지.”
“얘가 형이라고 하긴 철이 없지. 나는 열여덟.”
스물셋 바쿠헨과 열여덟 바쿠란이라. 회귀 이전의 삶에선 도통 연이 닿을 이유가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치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만나는 인연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역시나 무엇인가를 예감한 네마냐가 살짝 눈을 감으니 예상하던 대로 무엇인가가 떠 있었다.
[중부 산맥의 지배자]
[중부 산맥은 고대 7왕국을 세웠던 난쟁이들의 후손이 사는 곳입니다. 키는 크지 않으나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한번 친해지고 원수가 되는 것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중부의 국가와 아무거나 교섭 완료 0/1]
빠르게 훑어봤으나 이상한 지점이 하나 있었다. 눈을 뜬 네마냐가 곧바로 바쿠헨을 향한다. 얼핏 봐도 190은 되어 보이는 신장에 강건한 어깨, 얼굴의 흉터만 봐도 난쟁이족과는 정반대였다.
“그런데 중부 산맥 사람들은 난쟁이족 후손 아니었어? 근데 왜 이리 키가…….”
“외조부 쪽 혈통 때문일 거야. 외가가 장이족 혼혈이었거든. 아빌리스 봤었지? 걔가 또 외가 쪽으로 사촌뻘이거든.”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들어. 정확하게 엘프 중왕국 공주님이라고 설명해야 감이 오지.”
“……중왕국 공주라고?”
녀석들은 대단한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늘어놓았다. 이쪽 지역은 뭔가 이야기와 생각의 기준이 북부 영지들과 다른 건가?
“아, 그래. 그래서 그런 거였군.”
티가 나지 않게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심에선 자신이 들은 내용을 의심할 정도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타위비크 대공령에 엘프족 중왕국 공주라니. 산속에서 무슨 이런 알짜배기 인맥을…….’
* * *
타위비크 대공령의 수도는 얄궂게도 슈니크라는 이름이었다. 덕분에 슈니크 백작령에선 호시탐탐 수도를 공격할 기회를 노린다 했다.
“공자님들 일행이시다, 통과!”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 온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 한다, 이 말이야. 영주님이어도 들어오기 어려운 상태라고.”
“와, 정말 고맙네.”
콧방귀를 뀌면서 네마냐는 가벼운 마나 바람을 쏘았다. 턱에 정면으로 바람을 맞은 바쿠란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턱을 감싸 쥐었다.
“이 자식이 정말…….”
“공식 석상에서 마차를 타고 갈 땐 말조심하셔야죠, 공자님.”
“으윽.”
바쿠헨은 그만하라면서 마부 쪽 차창을 두드렸다. 소릴 들은 마부가 차창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자님.”
“혹시 아버님이 지금 관저에 계시나?”
“계실 겁니다. 제가 모시러 나올 때만 해도 집무실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좋아. 하마터면 모처럼 모신 손님을 허탕 치게 할 뻔했군.”
예법 상으로는 알맞지 않지만, 네마냐로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곧바로 타위비크 가문의 가주이자 대공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를 뵙자니 좀 생뚱맞았어. 보나 마나 고블린 문제겠지만.”
“그래, 얘기가 나와서 그렇지만 우리도 요즘 주변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아서 말이지.”
바쿠란은 문득 고개를 네마냐에게로 불쑥 들이밀었다. 녀석의 얼굴을 살짝 밀어내며 되물었다.
“뭔데 그래?”
“너도 들어봤지? ‘탑의 마법사’. 너는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탑의 마법사라……. 그건 왜?”
마지막 유그하르그 사령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탑의 마법사’는 이미 유명한 존재였다. 타위비크 공국의 영지에서도 맨눈으로 보일 정도라니까 별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왜긴 왜야. 나는 그 녀석을 일전에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 녀석, 전대 바가반드 영주의 공녀잖아?”
“……뭐라고? 전대 영주?”
아마 바쿠란도 이 이야긴 쉽게 꺼내 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남의 영지와 밀접하게 관련된 이야기를 함부로 들먹일 만한 신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 테지. 덕분에 갑작스럽게 정보에 휩쓸린 바쿠헨 녀석만 멍한 표정이었다.
“……그걸 잘도 알고 숨겼군. 어떻게, 어디까지 아는 거야?”
침이 저절로 삼켜진다. 잠깐 진지한 바쿠란의 눈빛을 보고선 알 수 있었다. 이건 추정이나 유도 신문이 아니라 확신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진지한 표정을 다시 뒤로하고 미소 가득한 얼굴로, 바쿠란은 뜸을 들였다.
“어떻게 알긴, 같은 마탑 동기생으로 공부를 했었으니까. 당시 있었던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걸? 마탑 노친네들이 그렇게 아꼈는데.”
“그렇군, 마탑…….”
한 가지 단서가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빙의되기 이전 네마냐의 기억에는 분명 페넬로파가 마탑에 입학하는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마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면서 과거 기억들이 꽤 불안정하단 점이었다.
“근데 너는 같은 영지 출신이니 알았을 법도 한데, 정말 몰랐던 건가?”
“몰랐어. 아니, 정확하게는 잊어버렸다고 해야지. 몇 년 전에 사고로 죽다 살아났거든.”
“저런.”
이야기가 잠시 끝나고 각자가 생각에 젖었다. 마차의 덜컹거리는 진동이 약해지는 것으로 보아 관저 근처의 도로를 지나는 모양이다.
‘페넬로파가 실은 마탑의 우수학생이었고, 마탑의 유망주였다니.’
마탑의 석연찮은 태도, 마지막으로 보았던 페넬로파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겹쳐졌다. 도무지 무슨 사연이 얽힌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말 탑 위의 마법사란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다면……. 정말 골치 아프겠어.”
“페넬로파였지, 이름이 아마. 열네 살이던 당시에 이미 대마법사의 계보에 이름을 올릴 거라고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대마법사 유력 후보가 고블린에 붙어 대마도사를 양성한다. 거기다 자신의 고향까지 서슴없이 공격한다, 인가. 못 믿겠다는 바쿠헨이 바쿠란에게 윽박지르듯 되물었다.
“네가 그 마법사를 봤었다고?”
“그랬다니까. 우리 영지에서 옛날 철위단 영토로 진입하면 머지않은 언덕에 그 탑이 있어. 거기서 그 얼굴을 봤었어.”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대강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했다. 이 위기는 단순하게 고블린 자체 군단뿐만 아니라, 마법사들 내부의 배신자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보다 좀 더 심하긴 하지만, 다르빌 사태는 너희도 들어봤겠지? 내가 나코르잔도 다녀왔지만,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이제부터가 진정한 고블린의 위협이라 보면 될 거야.”
“……후아, 계곡 고블린도 겨우 일부 죽이는 게 고작인데. 군단 놈들은 대체 몇 마리야?”
적어도 고블린 숫자에 대해선 독자적인 정보대를 운용하는 데는 네마냐만 한 존재가 없을 것이다. 바흐람이 보고한 숫자를 떠올리니, 저절로 두통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손가락 여덟 개.”
“8천? 8천 명 얘기하는 건가?”
“그런 거면 내가 연합하러 여기까지 왔겠냐. 우레이미야 하나에만 8만이야, 8만.”
“와……. 진짜 정신 나간 숫자네.”
이곳 세계에서 ‘1만’이면 곧 세상의 이치라 할 정도로 큰 숫자로 해석된다. 별 징그러운 숫자 단위까지 시달려 본 서준의 기억으로는 코웃음 칠 소리지만, 아무튼 네마냐로 살아가려면 익숙해져야 했다.
“자, 그래서 우리 백작님께선 나코르잔에 이어 우리와도 교섭을 해 보시겠다, 이거군.”
“처음부터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어. 만약 용병대 연기로 동행하지 못했다면 이런 인연도 없었겠지.”
그때 모퉁잇돌에 걸렸는지 마차가 살짝 거칠게 흔들렸다. 하지만 몸이 흔들리면서도 바쿠헨과 바쿠란 두 공자 모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았지만 존재감은 적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좀 잘났어야지.”
“형? 대화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거였어?”
두 형제가 다시 투닥 거릴 찰나,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난처해진 바쿠헨은 곧바로 문을 열어젖히고 나섰다.
“우리가 왔다! 모두 잘 있었냐.”
“어디 한 군데 다치고 정신 차리길 기원했는데, 안 된 모양이군. 쳇.”
“너무한데? 우리가 데려온 손님을 보고서도 그런 소릴 할 수 있을까?”
두 형제의 소개를 받아 마차 아래로 내려섰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미늘 갑옷을 입고 무장한 이에바와 가벼운 옷차림에 활을 차고 있는 아빌리스였다.
“타위비크 근위대의 이름으로 우리 영주님을 안내해 드리지.”
중부 산맥으로부터 내려오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네마냐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새로운 친구와 예상 밖의 적.
‘새로운 변수 덕에 당분간은 우울증에 걸릴 틈도 없겠는데.’
본격적으로 무대의 판이 북부 영지를 넘어서 중부 영지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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