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83화 (82/200)

83화

하루가 지났다. 네마냐는 처음 예정했던 대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시에선 북쪽 군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며 만류했지만 네마냐의 뜻은 변함이 없었다.

“며칠이라도 좀 쉬었다 가시는 편이 최선일 텐데…….”

“저도 자리를 오래 비울 순 없는 상황이라서요. 당장 다르빌도 제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중부 산맥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자 조급함은 배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카운트다운처럼 ‘큰 눈 예보’ 항목이 임무 창 상단에 뜨면서 그 강도는 두 배가 되었다.

“이건 정확도 백퍼센트겠지? 하도 기상청에 당해 봐서 차라리 거짓말이면 좋겠는데.”

불과 일주일 뒤부턴 사나흘에 한 번꼴로 큰 눈이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 본격적으로 끝없는 겨울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쏟아지는 눈……. 네마냐가 뜻을 굽히지 않으니 그나루르그 의장도 별수 없겠다며 동의했다.

“괜찮을 거다. 우리 오체시 군대가 반드시 나자리안 경을 국경까지 안내하도록 하지.”

총사령관 유그하르그는 평민 출신으로 파격 출세한 것답게, 평어 위주의 말로 자신감을 표현했다. 덕분에 훨씬 믿음직해 보였다.

“……그렇다는군요. 그럼 곧 출발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역시 오신 길을 따라 슈니크 쪽으로 향하시는 게 좋겠군요.”

“협조 감사드립니다.”

“동맹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면서 동시에 알림이 도착했다. 말에 올라 눈을 감자 알림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의 적은 친구」 미션 완료]

[보상: 민첩+1, 판단+1, 체력+1]

[행동력 제한 1 증가]

확실하게 체감되는 수치. 민첩이나 체력은 당장 몸으로 와닿는 가벼운 느낌이 있다. 이해나 판단의 경우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훨씬 나은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지는 편이었다.

‘많이도 줬네. 보나 마나 체력은 산을 타서 줬을 테고,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고 민첩, 판단을 준 건가.’

이 시스템을 이제 접한 지도 벌써 반년. 그간 일정한 규칙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시스템과 스텟은 절실하거나 위기에 몰렸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열일곱, 다친 몸에 칼도 제대로 못 써 봤을 네마냐가 고블린을 척척 베어 버리는 일 같은 기적 말이지.’

물론 그렇다고 시스템이 이곳 세상의 법칙을 가볍게 씹어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으면 하나씩 수치가 늘어날 때마다 네마냐가 홀로 군단에 뛰어들어 작살을 냈겠지.

“이미 몇 번이고 해 본 생각이지만 참 밸런스는 기막히게도 잡아 놨다니까.”

바쁘게 이리저리 뺑이를 치다보면 어릴 적 읽던 이고깽이 차라리 부럽단 생각도 들긴 한다. 그렇지만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세상이란 건 본 적도 없고, 결과도 정작 무서워서 꿈이나 꾸는 정도다.

‘뭣보다, 적어도 내가 치열하게 살다 보면 살아 있단 걸 확실하게 느끼고 있지.’

스톡홀름 증후군도 아니고 일순간에 이런 곳에 떨어져 합리화라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여기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게 중요한 거지, 이럇!”

고민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네마냐가 향하는 길 앞으로는 총사령관 유그하르그가 모아 둔 호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는 다 했나? 시간이 얼마 없었을 텐데.”

“뭐, 챙겨온 짐도 없고 이 책뿐이니까.”

오니아스의 「우리 세계 바깥의 역사」 제7권이었다. 마침 고블린 내부의 혁명과 나코르잔 탄생 비화를 다룬 책이다.

“그래, 이 책을 기왕 가져온 거 선물로 주지.”

“오니아스……. 우리가 아는 인간 중에선 가장 유명한 사람일 거다. 책은 구하기 쉽지 않았는데, 고마운 일이군.”

책을 넘겨받은 유그하르그가 책을 훑어보며 감탄했다. 표정은 누가 봐도 뚱하다지만 그거야 고블린족의 특성이니까, 네마냐는 신경 쓰지는 않았다. 고삐를 당기며 출발을 알렸다.

“자, 그럼 그만 가 봐야겠군.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지. 연락은 앞으로 계속 오겠지만.”

“물론이다.”

“당분간 나코르잔의 아름다운 거리를 그리고 있겠어.”

아직 전란의 첫 번째 폭풍마저도 제대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고블린 군단의 힘은 네마냐가 쌓는 이상으로 강력해지고 있다. 적어도 인간과 고블린 저항군의 동맹은 이 시련을 견디는 데 중요한 여유시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 *

유그하르그가 보내 준 호위대는 이라크시스 강을 건너는 나룻가까지 함께했다. 문제는 이곳에서 협곡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미안하게 됐다. 우리 대장이 최대한 호위를 하라곤 했지만, 강 건너는 안전지대가 아니라서.”

“음……. 가장 위험한 구간인데.”

그나마 북쪽 군단이 움직일 수 있는 구간은 피한 게 다행이려나.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지금까지 호위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이제 그만 돌아가 봐. 남은 길은 내가 가 볼 테니까.”

“알았다. 하지만 말이 다친 게 좀 걱정인데. 우리 말을 좀 빌려줄까.”

아, 그러고 보면 특이한 게 하나 더 있었다. 이들 오체시들도 군단 고블린들과 달리 픽스가 아니라 말을 탄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말을 빌려준다는 것이었겠지.

“아냐, 굳이 그럴 필욘 없어.”

네마냐는 하급장교에게 마음은 고맙다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무슨…….”

“인간의 마법이란 이런 것이지.”

품속에서 하얀색 마정석을 꺼냈다. 좀 깨져나간 부분은 있지만 기능 하나는 멀쩡했다. 왼손에 쥐고 마나를 흘려보내자 은은한 빛이 다시 새어 나왔다.

“저건, 단순한 수정이 아니라 마정석이었군.”

“우오, 마정석! 인간들 마법은 처음 보는데.”

신체의 강건함, 기술적인 세련됨에 의지하는 고블린과 달리 인간의 특성이 돋보이는 마법. 네마냐가 흘려보낸 마나는 마정석을 통해 신성의 치유력으로 전환됐다.

―푸히힝

넘어지면서 관절 주변에 무리가 가서 계속 절룩거리던 말. 그러나 서서히 상태가 호전되면서 태연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빛이 흘러 들어간다.”

“기적인가?”

“기적 비슷할 수도?”

병사들의 신기해하는 반응에 미소로 돌려주는 네마냐. 건강을 되찾은 말이 좀이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듯 콧김을 뿜어댔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싸우게 된다면 얼마든 보게 될 거다. 재밌는 광경 많이 보여 줄 테니 그때까지 살아들 남으라고.”

“그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군. 인간들에게도 전해 줘라.”

“푸흐흐…….”

“갑자기 왜 웃는 것이지?”

“글쎄, 고블린족에게 그런 인사를 받아 본 건 생전 처음이라. 그럼 이만!”

네마냐가 작별을 고하자, 나룻배에서 내려 도열한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올렸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 하던 버릇이라나.

“짧았지만 엄청난 경험을 겪은 여행이 되었어. 고블린 전쟁을 어떻게 혼자 할 수 있을까 막막했는데 그래도 마냥 죽으란 법은 없는 거지.”

시원한 계곡 바람에 자연스레 후드가 벗겨지고 머리칼도 바람에 따라 휘날렸다. 말에 의지해서 달린다면 오늘 저녁까지는 다시 고원지대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협곡의 고블린들이 어디까지나 평화롭게 길을 비켜 준다는 걸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하루가 지나고 오체시 족을 만났다고 해서 협곡 고블린까지 착해지는 건 아니다. 지금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무사하게 길을 지나갈 방법을 찾는 게 먼저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여전히 계곡 북쪽에선 연기가 한창인데.”

그나루르그로부터 고블린의 문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 수상쩍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하나는 협곡 고블린이 부쩍 약탈 활동을 늘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뒤에서 가끔 관찰된다는 검은 옷의 마법사였다. 문제는 후자였다.

[검은 옷의 마법사는 형편없던 고블린 마도사들을 대거 훈련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일전에 철위의 기사단을 전멸시켰던 그리엘크도 사실 그 흑마법사의 도움으로 능력을 얻었다죠.]

그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네마냐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 검은 옷을 걸치고 고블린에게 마법적으로 큰 도움이 된 사람은 한 명뿐이다.

“페넬로파……. 정말 너였나?”

마시 산꼭대기 성소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폐허가 된 신전 구석에서 느낀 마나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녀석의 것이었어. 녀석이 마법을 보여 줄 때의 그 냄새였지. 그렇다면…….”

녀석이 일부로건 아니건 피하게 되는 상황.

“얄궂네. 마주치게 되면 어째서 그랬는지를 물어볼 수 있을까.”

소용없는 상상이다. 이미 전생에서도 자신을 두둔하다가 비명횡사하지 않았나.

‘녀석과 나는 친구로 지내기엔 너무 조합이 안 좋아. 구설수에만 오를 가능성도 있지. 차라리 멀리 떨어지는 게 맞았을 텐데…… 어째서.’

물론 녀석에게 느끼는 것은 족히 삼십 년 이상 같은 뜻을 맞춰 왔던 정치적 동지에 가까운 연대랄까. 그렇기에 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 흑의 마법사는 옛 철위 기사단 영토 안에 있는 산지에 탑을 쌓고 기거한다고 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접근해 보시죠.]

이것이 그가 그나마 페넬로파라 생각하는 흑의 마법사에 대해 들은 유일한 정보였다. 이미 오체시 부족 안에서 ‘탑의 마법사’라는 경멸 어린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탑의 마법사라……. 생각할 거리가 점점 많아지는구나, 골치 아파.”

이내 고개를 털어냈다. 일단은 눈앞에 당당하게 길목을 막고 있을 고블린부터 생각해야 했다. 이건 몰래 빠져나가기도 힘든 상대니까.

“근처 샛길이 있나 찾아봐야겠다. 샛길로 빠져나가면 놈들도 마주치진 않겠지.”

무언가 상황이 달라졌다는 건 길을 찾기 시작한 뒤 약간의 시간이 흘러서였다. 일전에 고블린이 약탈한 곳에서 나오는 줄 알았던 연기는 지금, 계곡 상류 전체를 덮고 있었다.

“뭐야, 이건…….”

상황이 이렇다면 아무리 심장이 강철 재질이어도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마냐는 이곳을 지나지 않으면 영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미친. 정말 네마냐 네 녀석 운빨로는 몇 년 못 가 죽어 버리고 말거다, 시발!”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 길 앞에 적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이판사판 돌진하는 것뿐.

―히힝!

힘껏 재촉을 받은 말이 기함하며 쏜살같이 계곡 옆 좁은 길을 달려나갔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곧 사방을 가득 메웠다.

“욱, 냄새가 이게 뭐야. 설마…….”

계곡의 상류 부분으로 점점 더 다가가자 제멋대로 쓰러진 이상한 군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픽스 몇 마리가 피를 흘리며 난도질당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론…….

“세상에, 고블린들 토벌 작전이 있었던 건가.”

사방에서 쏟아져 내린 바윗돌에 납작하게 깔려 바닥에 붙어 버린 고블린, 고블린의 터진 내장과 이리저리 흩어진 신체 조각들.

“기어코 이곳 영지에서도 참지 못한 모양이군. 차라리 정신 차리고 나섰으니 다행이네.”

속도를 늦추며 누군가 수습하기 위해 쌓아둔 고블린 사체 더미 곁을 지났다. 고블린들이 창에 찔린 자국도 일정하고, 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정리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기 영지 군대가 이 정도로 세련되었던가? 슈니크 영지는 병사가 채 500명도 안 나올 텐데.”

이만한 세력을 가진 영주가 정말 중부 산맥 어딘가에 있다면 꼭 만나야 했다. 지금은 이미 비상상태. 도움이 필요하다면 고블린의 새끼발가락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다. 네마냐는 재빨리 계곡 상류를 향해 말을 재촉했다.

“이 정도면 분명히 규모도 있고 정예 병력이야. 꼭 우리 편으로 포섭해야 해!”

사흘 만에 수백 킬로미터를 날다시피 달려왔고, 다시 그만큼 날아가야 하는 네마냐다. 하지만 지금은 피로조차 잊은 채 질주했다.

“저건가?”

얼마나 한참을 달렸을까. 말도, 네마냐 자신도 호흡이 가팔라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멀리 가지 못한 인간 군세가 커다란 깃발을 들고 거꾸로 행군을 하고 있었다.

“이럇!”

다시 말을 재촉하며 마지막 힘을 쏟아 전력으로 질주했다. 말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파르르 떨리는 감각마저 안장 너머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다시 달리고 나니 비로소, 대열의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간신히 보인다지만 목소리가 닿을 턱은 없으니 몇 번이고 힘을 모아 큰소리로 외쳤다. 끄트머리 대열의 병사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곤, 무어라 떠들어댔다.

“휴……. 놓치지 않았다.”

큰 한숨을 몰아쉬며 네마냐는 고삐를 내려놓고 말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모두, 좌우로 밀착!”

“공자님께서 행차하신다!”

“공자?”

아무래도 영주의 아들인 공자가 직접 토벌전을 수행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지치긴 했지만 네마냐 자신도 예절은 갖춰서 응대해야겠지.

“신원불상자가 어디라고?”

“저쪽입니다!”

“복장으로 보면 암살자는 아닌 것 같긴 한데.”

“물어보면 알겠지.”

전투 직후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평범한 두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군.”

그리고 옷소매를 보던 시선을 드는 순간, 예상치 못한 아는 얼굴에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바, 바쿠헨? 바쿠란?”

“어, 어?”

“우테이스?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하나? 벌써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건가?”

“뭐라고?”

녀석들이 그냥 일개 용병은 아니란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중규모 병력을 부리는 영지의 공자들이라니.

“허허, 참. 살다 보니 이런 우연도 겹치는군. 이런 일이.”

역시 비슷하게 당황한 듯한 녀석들의 표정과 그저 어리둥절한 뒤편의 병사들까지. 뒤편에서 펄럭이는 타위비크 공작령의 푸른 매 깃발이 아무 말 없이 그 정경을 뒤덮었다.

- 84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