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세반 공화국의 건국제는 정말 엄청난 행사였다. 수도 바사카셴은 비싼 부동산 때문인지 고층 건물이 많았고, 그 마천루 위로는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와……. 이렇게 먼 곳에서도 보일 정도라니. 오랜만에 보는 대단한 불꽃놀이야.”
“오랜만에? 어디 다른 데서도 본 적 있었어?”
바쿠란의 물음에 무의식적으로 답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유도 신문이란 걸 알았으니까.
“뭐, 어디든 돌아다니다 보면 보는 거지.”
“와, 이거 물건이네. 유도 신문을 이리저리 피하고. 너 솔직히 용병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머리 좋으면 용병은 안 하지.”
칭찬인지 욕인지 묘한 뉘앙스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유롭게 웃음을 띤 네마냐는 팔짱을 낀 채로 이야기를 받아 냈다.
“그럼 너도 용병인데 멍청한 마법사란 거냐? 바쿠란의 적은 바쿠란인 것도 아니고.”
“말했지? 이 몸은 희대의 천재라 마탑 같은 옹졸한 그릇이 품을 바가 못 됐다고.”
“흔히 그렇게들 많이 주장하더라. 동네 노점상 아저씨들이.”
“하!”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입씨름은 세반의 국경을 건너 중부 산맥으로 접어들 때까지 계속됐다. 눈을 감은 채 명상을 하는 아빌리스는 무관심해 보였지만 이에바는 끝내 한마디 했다.
“아이고, 그만들 좀 해라. 뭘 이렇게 온종일 말씨름이야. 란, 너도 그만해, 이제.”
“이게 뭘 말씨름이야. 문답이지.”
“에휴, 내가 마음이 넓으니까 넘어가 줘야지.”
“하?”
한참을 그렇게 더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아빌리스가 가만히 눈을 뜨고 바라보자 ‘문답’을 끝냈다.
“어휴, 정신없어. 야, 헨, 지금 우리 어디를 지나는 중이야? 해가 더 지기 전에 숙소를 잡아야지 않을까?”
“엇, 그러네. 정신없이 말만 몰았더니 벌써 해질녘이구나.”
중부 산맥 일대는 산이 워낙 험준하고 해가 금방 지기로 유명했다. 험한 오르막을 오른 뒤 고원에서 달리기 위해 속도를 낸 덕분에 그래도 시간은 조금 번 셈이었다.
“바쿠헨이 뭐래? 곧 숙소로 간대?”
아빌리스의 물음에 이에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험준한 중부 산맥 안쪽에는 도시나 큰 마을이 있을 법한 공간이 별로 없는 탓이었다.
“도시의 숙소를 찾으려면 바이쿠니크나 예르무크로 가야 할 텐데 다들 남쪽이나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거기다가 예르무크는…….”
미크라야크 대공의 도시다. 고원 동쪽 사람들도 싫어하는 동네다. 거기에 고블린에게 배신당한 경력으로 엘프라고도 부르는 장이족에게까지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아빌리스를 생각하면 가지 않는 게 좋겠지. 그게 아니라도 우리도 좀 꺼림칙하고.”
“그냥 이대로 속도를 내서 갈 수는 없는 거야? 이미 대협곡은 지나간 것 같은데.”
아빌리스는 은은한 초원의 냄새를 풍기며 눈에서 빛을 내보냈다. 아마도 장이족의 특기인 정령술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러기엔 아직도 고원 초입부라. 이 황무지를 돌파하기엔 고블린 산적이나 들짐승도 위험한 존재니까.”
“고블린 산적이 여기까지…….”
그나마 150km나 훨씬 안쪽에 있는 바난드까지 고블린이 출몰했던 것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산맥 입구를 지키던 철위 기사단이 무너진 뒤인데도 말이다.
“그나마 중부 산맥이 우릴 지켜 주고 있는 거지. 미크라야크 대공이 자꾸 중부 산맥의 국가들을 공격하는 것도 그 이유일 테고.”
“그 자식 얘기는 꺼내기도 싫다.”
바쿠란이 웬일로 ‘말’이 하기 싫다며 대화에서 빠져 버렸다. 무슨 이유인지 네마냐는 알 수 없었지만 이에바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무튼, 그럼 이대로 다음 도시까지 가긴 힘들다는 거지?”
“그런 얘기지. 노숙할 수밖에.”
얼마나 더 내달렸을까. 마침내 해가 산 아래로 모습을 감추고 석양이 하늘을 물들였다. 땅거미는 동쪽에서부터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자, 도착이야. 저 나무를 중심으로 솟은 구릉에다 임시 숙소를 치자.”
“야, 오늘도 야근이다! 아주 신이 나는걸!”
동행들은 바쿠란의 말을 들으며 천막 자재와 횃불 하나씩을 가지고 마차에서 내렸다.
“아, 저쪽에 도시가 있긴 있었네. 근처에 불을 밝힌 마을도 많아 보이고.”
네마냐의 말에 아빌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대부분은 광산촌이거나 허름한 산촌들이지. 네가 본 도시도 여기서 가려면 족히 몇 시간은 더 달려야 해.”
“맞아. 저곳이 샬라트니까 그래도 오늘은 많이 온 편이야. 바사카셴에서 샬라트까지의 거리면 여기서 이라크시스 강까지 되는 거리거든.”
이라크시스 강 하류. 네마냐의 목적지인 오체나시움 자유국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그러니까 못해도 40% 정도는 왔다는 소리지.
‘하루 만에 제법 많이 오긴 했군. 그래도 아직 맘을 놓을 순 없지.’
타위비크 대공국이나 슈니크 백작령은 크게 걸리적거릴 일이 없었다. 미크라야크 영지는 아예 피하는 지름길을 택했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다음부터다.
“근데 우테이스 너한텐 문제겠어.”
“내가 생각하는 거랑 같은 이유에선가?”
아래쪽 멀리서 빛나는 도시의 야경을 보며, 이에바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전개했다.
“지금까진 괜찮았어도 이라크시스 강가 근처로 가려면 협곡을 지나게 되거든. 근데 그 협곡이란 곳이 지금은…….”
이에바가 마무리를 조금 망설였다. 그러자 아빌리스가 대신 대답했다.
“지금 슈니크 백작령 곁을 지나는 협곡 일대가 모두 고블린 천지야. 군단만큼은 아니어도 위협이 되는 건 사실이지.”
“아, 그쪽 계곡도 고블린이 점령했어? 생각보다 심각하네.”
중부 산맥은 세반 공화국 인근에서부터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나란하게 진행된다. 그 한쪽 언덕엔 타위비크와 슈니크 백작령이 있고 협곡 반대편엔 카첸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있는 대협곡 중 절반 정도가 침탈을 당해 버린 거야. 주변국들은 누가 반격에 앞장서겠느냐며 차일피일 미루고, 결국 이 지역 통행이 굉장히 어려워진 거지.”
“흠…….”
마치 다르빌 방어를 둘러싼 암피에르 조약 국가들의 논쟁 같았다. 서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한 논쟁의 복제판.
“그래, 그런데도 그르함으로 가야겠어? 슈니크 백작령도 지금 한창 위기 상태야.”
“협곡도 문제고 강 건너로 군단 2개가 동시에 압박하고 있거든.”
이에바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바쿠헨도 안쓰러운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네마냐에게도 참 귀찮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여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르함은 참고로 슈니크 영지에서도 이라크시스 강에 가까운 마을이다.
“그래도 꼭 가야지. 거기서 만날 사람이 있어.”
“참, 어쩔 수 없군.”
실제론 훨씬 어려운 일이 되었다. 실제 네마냐가 갈 곳은 그르함도 아니다. 아예 강을 건너 서쪽으로 더 가야 한다.
‘협곡의 토착 고블린과 북쪽 군단이라는 고블린 부대를 지나가야겠지.’
정말 그렇게 먼 구석에 처박혀 있는 망명자들의 나라다. 과연 네마냐 자신이 원하는 고블린 반격의 키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시간을 들여 투자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정 안 되면 바흐람한테 핀잔이나 좀 듣고 말지. 뭘 걱정을 한다고.”
어느새 다른 사람들은 천막을 치기 위해 구릉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네마냐도 구릉을 걸어 올랐다. 밤은 아득하게 깊었지만 새로운 인연과 함께 하는 여행에 잠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 *
―덜컹!
다음 날.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으나 여명에 의지해 충분히 길을 떠날 만큼은 되었다. 한밤중 근처에서 곰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던 일행은 재빨리 마차와 말 2마리를 준비시켜 출발을 서둘렀다.
“아이고 엉덩이야, 엉덩이 작살난다. 엄청나게 달리네, 이에바 녀석.”
바쿠란의 불평불만은 끝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지리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 방금 지나온 곳이 샬라트야. 타위비크 공작령의 남쪽 관문이지. 조금만 더 가면 수도 슈니크고.”
엉뚱하게도 도시 슈니크는 슈니크 백작령이 아닌 타위비크 공작령의 수도였다.
“그러고 보면 슈니크 시는 슈니크 백작이 아니라 타위비크 공작의 수도지? 뭔가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아무렇지 않게 그저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전생에서도 지나가면서 들은 것뿐이라 정확한 사정은 몰랐다. 애초에 네마냐의 활동 지역인 바가반드에서 너무 먼 지역인 게 문제였다.
“어, 음……. 내가 자세한 이야긴 할 수 있겠지만, 음 사정이 좀 복잡해서.”
“아, 그래?”
네마냐의 질문에 바쿠헨은 뭔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주저했다. 이번엔 바쿠란 녀석도 어딘가 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호라, 뭔가 있군. 이 녀석들이 단순한 용병대일 뿐이라면 이렇게 정치적인 문제에 반응할 리는 없을 테니.’
자세한 문제는 몰라도 두 영지 사이에 얽힌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도 용병대는 간판일 뿐, 무언가 영지에 관련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래서 바쿠란이 나를 금방 눈치챈 건가.’
일단 거기까지만 하고 깊게는 캐지 않으려 했다. 당장은 나코르잔까지 도착하는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으니까. 모든 다른 문제는 그다음 일이다.
“그러니까 그냥 옛날에 슈니크 가문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왕가였고, 모종의 일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백작 가문으로 내려갔다는 거 아냐. 내 말 맞지?”
예전에 타위비크 출신 용병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조합해서 대충 때웠다. 바쿠헨이 작은 한숨과 함께 고맙다며 굳이 감사를 표했다.
“걱정하지 마. 그저 란 녀석이 약 올렸던 걸 갚아 준 것뿐이니까.”
“란? 너 또 뭐 했냐?”
“아, 뭐만 나오면 다 나래. 내가 동네북이야?”
“왜, 당당한 동네 사고뭉치긴 하지, 크큭.”
이에바가 마부석에서 크게 외쳤다. 예상치 못한 집중 공격에 당황했는지 바쿠란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어버버 댔다.
“일단 넌 돌아가서 나랑 제대로 얘기 좀 해야겠다. 아버님께도 얘길 드려야지.”
“아, 정말…….”
“불만 있어?”
헨은 여행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동생 란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하하, 형제간의 우애가 투철하네.”
그 말을 끝으로 네마냐는 흔들리는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애초의 종착지는 슈니크까지였다. 하지만 일행의 배려 덕분에 슈니크 백작령의 영지인 타테오 근교까지 얻어 탈 수 있었다. 문제는 거기까지 순조롭게 도달할 수 없었다는 것뿐이다.
“정지!”
―콱!
미리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이에바가 소리를 외쳤지만, 거센 후폭풍을 막을 순 없었다. 다행히 네마냐는 쌓아 둔 짐 사이에 기대서 괜찮았다.
“으아아……. 야, 이에바! 운전을 왜 그따위로 하는 거야? 죽는 줄 알았잖아.”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마차 밖으로 튕겨 날아갔던 바쿠헨은 그래도 튼튼한 몸 덕분에 빠르게 일어났다. 엘프족의 특기인지 멀쩡하게 버텨 낸 아빌리스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한마디를 차게 내뱉었다.
“피 냄새.”
“뭐?”
특이한 냄새는 네마냐에겐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아주 희미하게 쇠 비린내와 같은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네마냐의 정신 속에서 숱하게 느껴 왔던 그 냄새다. 살육의 냄새. 유혈의 냄새. 갑자기 각성제라도 들이켠 듯 긴장감이 퍼뜩 솟았다.
―타탁.
세 사람은 재빨리 마차 앞으로 나섰다. 이에바는 이미 마부석에서 내려 마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세상에…….”
이에바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일행들 모두 황망할 따름이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수백여 구의 시신이 늘어진 오로탄 지역의 한 마을. 마을에선 언제 시작됐는지 끝을 알 수 없는 연기가 인간의 흔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
아빌리스는 피 비린내가 너무 지독하여 정면으로 설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옆으로 잠시 비켜서자, 바쿠헨과 란은 바로 집단 처형장으로 다가갔다.
“어느 놈의 소행이지? 슈니크의 짓인가?”
“슈니크가 자기 백성으로 삼으려고 혈안이 됐던 백성을 학살하는 마귀가 되었을 리가 있나.”
바쿠헨은 그 말을 마치곤 슈니크가 있을 산등성이 위가 아니라, 계곡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아빌리스도 곧 곁으로 다가왔다.
“피 냄새는 계곡 아래로부터 계속 불어온다. 낮에는 바람이 계곡 위로 상승하지.”
“출처는 분명해졌군.”
“뭐? 협곡에서 온 거라고? 제기랄……!”
바쿠란도 재빨리 다가와 협곡 아래를 바라보았다. 네마냐 역시 분명히 보았다. 집단 학살의 현장에서 흐르는 피가 흘러내리는 계곡 아래쪽을.
‘붉은 기운……. 이곳에도 적마정석이 있었군.’
부서진 목책들. 군데군데 주인을 잃은 마나 지팡이가 일부 신체 부위, 장기의 끔찍했던 시간을 되살리고 있었다.
“우욱!”
욕지기가 치민 듯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네마냐는 점점 차갑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산맥 북쪽의 인간들에 못지않게,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 중부 산맥의 인간들도 이 지경이다.
“서둘러야…….”
차원을 전이하고 나서는 처음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남기는 초조한 외마디. 바쿠헨은 그 소릴 듣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우테이스. 목적지가 어디라고 했지?”
“어, 어? 난 그르함. 그래, 그르함으로 가는 중인데……. 엇!”
헨 녀석은 네마냐의 손목을 틀어쥐고 마차로 향했다. 네마냐를 마차에 올려 준 뒤 녀석은 마부석을 자처했다.
“나는 지금 바로 우테이스를 국경 지대까지 데려다주고 오겠어. 란, 이에바, 아빌리스. 수습과 다음 순서를 부탁한다.”
“……알겠어, 대장.”
“알겠습니다.”
“고맙다.”
말을 마치자마자 헨은 급하게 마차를 움직였다.
―덜컹!
“읏.”
“꽉 잡아, 최대 속도로 달릴 거니까!”
알겠습니다, 라니. 용병대원이 대장에게 쓰던 화법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구체적인 사정을 캘 상황이 아니다.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급한 일이 있겠지.
“그럼 그동안만 부탁할게.”
네마냐는 그저 필요한 대답만을 내어놓았다. 네마냐가 나코르잔으로 가는 것은 이제 다르빌이나 바가반드가 위험해서만은 아니게 됐다. 바사카셴의 마천루와 화려한 불꽃, 산지 곳곳에서 생명을 꽃피우는 사람들……. 그리고 집단 처형장의 모습이 스쳐 갔다.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를 만들어 낼 것이다. 꼭……!”
마차는 험한 계곡 길을 쉼 없이 달렸다. 끝 간 데 모를 작은 비원 하나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실은 채로.
- 지도로 이어집니다 -
- 8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