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세반 지역의 최대 도시인 바사카셴에 도착한 건 불과 반나절 뒤였다. 굳이 상단에 호위를 붙일 것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편안한 길이었다.
“이렇게 편한 길에 호위를 붙이는 상단도 있나? 아니면 내가 뭘 잘못 아는 건가?”
다시 말하지만 세반 지역은 생애 처음 와 보는 곳이기 때문에 더 궁금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의문을 풀어 줄 만한 현지 용병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랄까.
“굳이 호위를 붙이는 이유는 법률 때문이지. 세반 공화국은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수송하려면 용병을 붙여야 하거든.”
“상인들의 반발이 좀 컸겠는데.”
자신을 바쿠헨이라고 소개한 소규모 용병단 단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쩌겠어. 그렇게 결정이 나 버리면 따라야 하는 게 상인이니까. 그 덕에 용병일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생활이 안정됐고.”
“중부 산맥엔 고블린이 말썽이지 않아?”
네마냐의 그 말에 용병대의 마법사인 바쿠란이 비웃음을 흘렸다. 대장 바쿠헨의 동생이라는 소개는 받아 놓은 참이었다.
“여기가 북부 지역도 아니고 고블린이 왜 돌아다녀? 아직 중부 산맥을 다녀 본 적이 없구나?”
“바쿠란, 상대가 어리다고 비꼬는 말이 허용되는 건 아니야. 조심해.”
바쿠헨이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제지하자 바쿠란은 콧방귀를 뀌며 입을 다물었다.
“미안, 저 녀석이 남한테 시비를 잘 거는 성격이라. 무슨 나쁜 뜻이 있는 건 아닐 테니 너그럽게 이해해 줘.”
“뭐, 그 정도야……. 그런데 마법사면 아카데미아 교육을 이수한 건가? 마나를 쓰는 용병이면 마법사라고 부르지는 않을 텐데.”
“아, 그건…….”
“나? 마탑에 다니다가 중퇴했지. 꼴통 자식들이 꼴값을 떨어서 좀 패 줬거든.”
“입, 입조심하랬지!”
“아씨…….”
바쿠헨이 동생의 입을 때려 가며 입조심을 시켰다. 세반 일대에서는 마탑의 영향력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지만, 마탑의 심기에 거슬릴 말은 삼가는 게 좋았다.
‘흉터가 많아서 성격도 험상궂을 줄 알았는데 정반대로군. 거의 업어 기른 형이 가르치는 모양새라.’
두 사람의 말씨름은 점차 맥락을 벗어나 말싸움으로 치달았다. 네마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 짐 더미 너머에 있던 여자 동료 하나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이에바(Yeba)라고 소개한 사람은 보아하니 마법 검을 쓸 줄 아는 모양이다. 미약하나마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우테이스, 라고 했지? 어디 출신이야? 요즘 젊은 아이들은 다 상단으로 뛰어들어서 보기 어려웠는데.”
“그쪽도 애초에 젊은 아이 같은데.”
“에이, 내가 좀 동안이지만 이 바닥에서 구른 지가 삼 년인걸?”
뜻하지 않은 귀여움을 받게 되었다. 아무래도 최근엔 용병업이 사양세인 모양이었다.
“다들 상단으로 뛰어든다고?”
“그래. 최근에 북부에서 엄청나게 큰 마정석 광맥이 튀어나왔다는 거야. 그래서 그쪽으로 인력과 돈이 몰리고 있어.”
자신이 일으킨 변화가 족히 50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나가는 대화로 그것을 느끼자니 어딘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렇게 되면 몸값 자체는 좀 올랐겠는데. 목숨 걸고 하는데 경쟁까지 붙으면 그게 더 좋진 않을 테니.”
“맞아. 어쩌면 이게 정상적일지도.”
그때 바쿠란이 대화의 틈새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우테이스라니. 이름이 그게 뭐야? 너, 제국 출신이냐?”
“아, 우테이스의 뜻을 알아?”
“내가 중퇴했다곤 해도 제국어는 좀 배워서 알고 있다고.”
우테이스. 없다는 뜻의 ‘우토’와 나는 ~이다, 라는 뜻의 ‘에이스’가 합쳐진 파생어다. 그러니까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언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하다.
“제국어를 아는 사람이 많진 않을 것 같았는데, 좀 민망하네.”
“아니, 진짜 이름이야 그게?”
바쿠란은 이제 좀 흥미가 동했는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 채로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동네에선 아이들 오래 살라고 별로 좋지 않은 이름을 붙이거든. 코프로니무스라던가, 하여간 그런 것들.”
“재밌는 관습이군. 근데, 코프로니무스는 무슨 뜻의 단어야? 처음 들어 보는데.”
“똥싸개.”
“뭐? 풉! 누가 아이한테 그런 이름을 지어 준다는 거야?”
“5대 황제가 마나 세례를 받던 중 실수를 해서 붙여진 별명에서 유래했지. 이제는 부모들이 많이 붙인달까.”
“똥싸개, 똥싸개, 똥싸개…….”
역시 괴짜 같은 성격은 분명한지 바쿠란은 계속 ‘똥싸개’ 세 음절을 반복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에바가 짜증이 났는지 그만하라며 맞붙었다.
“쉴 새 없이 싸우는데, 지치지도 않나 보군.”
“입 하나로 지가 빚을 만들고 갚는 녀석이야. 그러려니 생각해.”
바쿠헨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곤 마부석에 앉은 궁수에게 무어라 외쳤다. 장이족 혼혈로 보이는 여자가 마찬가지로 무어라 대답했다. 바쿠헨이 돌아오자 무슨 이야기였냐고 물어보았다.
“어, 곧 바사카셴에 도착한다고 하더라고. 마차로 내달리니까 금방이지?”
“그렇네. 엉덩이가 해어질 것 같지만.”
“곧 익숙해질 거다.”
그러면서 바쿠헨은 본론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자신들이 호위하는 상단은 바사카셴이 목적지이지만, 자신들은 이후 좀 더 먼 곳으로 간다고 했다.
“우테이스, 어디 달리 갈 데가 있어? 괜찮으면 조금 더 산맥 깊숙이 가 보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용병은 경험이 많은 게 최고잖아?”
네마냐가 진짜 초보 용병이었다면 고마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어디 용병단에 배속되는 행운이 최고다. 막 직업 전선에 뛰어든 용병들은 목숨을 걸고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음, 제안은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만날 사람이 있어서 슈니크 백국으로 가는 중이야.”
“슈니크? 그 먼 곳까지?”
바쿠헨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며 놀라워했다. 슈니크 백국은 바사카셴으로부터도 250km 가까이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되게 험한데. 그런데도 혼자 보낸 거야? 다른 가족들은?”
“아, 이제는 가족이 없어서. 그래도 뭐 거기까지 가는 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
네마냐의 그 이야기에 말다툼하던 이에바와 바쿠란까지도 이쪽을 쳐다보았다.
“슈니크……. 거기는 지금 좀 곤란할 텐데.”
“아빌리스에게 물어볼까? 얼마 전 슈니크 근처에 다녀왔다던데.”
“그럴 건 없어. 우리도 일단 가는 방향은 똑같잖아. 가면서 천천히 확인해 보자.”
마치 물가에 내놓은 자식이라도 보듯 바쿠헨이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더니 문득 무엇인가를 눈치 챈 듯 두리번거렸다. 뭔가 달라졌나 했더니 마차가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언제 선지도 모르게 도착했네. 자, 일단 내려서 얘기하자고. 상단과 결산은 해야겠으니까.”
일행은 대열의 마지막 짐마차에서 하차했다. 너른 공터 너머로 야트막한 성벽이 터질 듯 커다란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성벽이 불쌍한 지경인데. 왜 이렇게 작지?”
그 소리에 이에바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들 바사카셴을 처음 오면 그런 감상을 내놓지. 하지만 실제론 도시가 너무 커서 성벽이 작아 보일 뿐이야.”
“흠…….”
이에바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당연하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켈리도니온이나 콜라케르트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네마냐다. 감상보다는 그저 얼른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뭐, 아직 오후 해도 기울지 않았으니 너무 서두를 건 없겠지.”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이따금 지나치는 사람들이었다. 평소보다 마나를 분출하는 사람이 많았고, 때로는 인간의 것이 아닌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건 대체 무슨…….’
만약 이곳이 성국이나 바난드만 되었어도 진작에 정체를 밝히고 조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바난드나 옛 하야크 왕국과도 관계가 없는 지역이었다.
“확실히 들어와 보니까 도시가 번화하지? 아마 성도 켈리도니온이나 제국의 수도 레파티아도 이보다 더 번영하긴 힘들 거야.”
마천루에 연신 감탄하던 바쿠헨이 자부심에 찬 목소리로 순박한 경험을 고백했다. 이에바나 장이족, 그러니까 엘프의 혼혈이라는 아빌리스는 물론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바쿠란은 차라리 친절하게 반박이라도 해 주었다.
“그게 뭔 소리야. 꼭 촌티를 내도 저런 걸 가지고 낸다니까. 얘가 어디 출신인 줄 알고.”
“하하…….”
말을 마친 바쿠란은 어색하게 웃는 우테이스에게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쿠란이 일행 중 가장 골격이 크다는 게 느껴졌다.
“우테이스, 이름부터 시작해서 뭔가 대단한 사정이 있지? 너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장난이 아닌데.”
“……어?”
조금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라드 또한 네마냐의 마나가 너무 세게 피어나는 걸 염려했다. 마나를 볼 줄 안다면 정체를 의심 받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적색 마정석 하나를 품에 쥐고 네마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는 중이었다. 어지간한 마법 감지력이 아니면 느끼지도 못할 텐데.
“내가 품성 부적합으로 쫓겨난 거지, 머리나 실력은 좀 알아주거든.”
“…….”
네마냐는 일단 녀석이 적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침묵을 지켰다. 녀석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꽤 순수하고 깔끔했다. 오히려…….
[새로운 관계?]
잠시 눈을 끔뻑이며 확인해 보니 시스템은 오히려 이벤트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거부할 건 없겠지.’
확인을 하느라 우테이스 가명을 쓰는 네마냐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자신을 경계한다고 생각했는지 바쿠란은 달래듯이 몇 마디를 더 속삭였다.
“뭐, 풍문으로 들어 본 정보를 바탕으로 짚어 본 거야. 하지만 내가 중퇴했다고 나쁜 놈인 건 아니니까, 염려는 접어 둬도 돼. 우리 집인 타위비크로 돌아가는 길에 근거를 보여 줄 테니까.”
“허튼소리면 조용히 끝나진 않을 거야.”
아주 근거리에서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 네마냐는 가벼운 헛기침을 했고 바쿠란은 히죽 웃어 보였다. 그 실없는 표정에 네마냐도 긴장을 살짝 풀었다. 상단에서도 이상 없이 활동하는 인간이라면 적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네가 아카데미아 출신이라면 중퇴를 했어도 마법사의 덕목은 지키길 바라지.”
“그럼, 그럼. 재밌는 일에 끼워만 준다면야 얼마든지 환영이지.”
“참, 여기까지 와서 별난 녀석을 다 보겠네.”
“그건 나도 동감.”
둘이서 자꾸 수군거리자 뭐 하냐며 이에바도 바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빌리스는 어쩐지 말도 섞지 않고 이쪽을 지켜볼 뿐이었다.
“일단, 그럼 이야기도 찬찬히 들어 볼 겸 바로 출발할까. 지금 바로 시립 마구간에 찾아가면 작은 마차 하나랑 말 두어 마리는 구하겠는데.”
“벌써 간다고? 모처럼 온 도시인데 좀 더 머물렀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분명히 소개를 받기론 바쿠헨이 형이라고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두 형제가 정반대로 바뀐 모양이었다. 바쿠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얼른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해야지. 에살하톤이랑 거래를 텄으니까 앞으론 더 자주 올 거야. 그만 징징대자고 이제.”
“에휴, 알았어! 이에바 쟤는 뭘 보는 거야?”
“여분 마법 검 하나 더 사려나 보지.”
이에바는 매대에서 마법 검을 들여다보며 망설이다가 하나를 골라 들었다.
“요즘 금값은 많이 올랐지만 마정석 값이 많이 내려서 다행이야. 바가반드 영지에서 폭리를 취하진 않아서 다행이지.”
“바가반드 영지가 뭐 얼마나 했겠어. 마탑에서 나오는 마정석도 충분히 많은데.”
네마냐가 덧붙인 이야기도 얼추 맞는 말이다. 마탑이 위치한 암피에르는 고급 마정석이 대량 축적된 광산 도시다. 거기다 최근 바가반드산 마정석과 경쟁이 시작되면서 일부러 공급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고 있었다.
“적당한 경쟁은 괜찮지. 그동안 마탑이 혼자서 마정석을 독점하고 있을 때는 마법 검 하나도 살 수 없었으니까.”
이에바는 그런 말을 하면서 잔금을 치르고 마법 단검을 하나 챙겼다.
“오늘도 모처럼 횡재했어. 운수 좋은데?”
이에바를 끝으로 일행은 근처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대로 가면 도시 중심부에서 마구간이 있는 외부로 길이 통한다고 했다.
“이제 따로 할 것 없지, 다들? 그러면 그냥 이참에 지금 바로 가자고. 건국제 준비 때문에 기다리다간 말 한 마리도 못 구할 거야.”
이에바가 질문을 던지자 아무도 이의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조금 부담스러워진 네마냐가 혼자 갈 수 있다고 얘기하려고 했지만,
“하긴, 우테이스는 좀 바쁘다고 했지? 그럼 우리도 이왕 그리된 거 빨리 가지, 뭐.”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인원은 예정하지 않았던 시간에 갑자기 바사카셴을 출발하게 되었다. 이들의 다음 목적지는 타위비크 대공국. 세반 공화국과 네마냐가 목적지로 밝힌 슈니크 백국 사이에 자리 잡은 독립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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