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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78화 (77/200)

78화

바흐람과의 대화는 짧았으나 그것만으로도 다음 일정은 확실해졌다. 바흐람과 헤어진 네마냐는 곧바로 콜라케르트의 사무실에서 간단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진짜 단신으로 가도 되겠어? 길이 너무 먼데. 하다못해 수행단이라도 꾸리는 게 좋아.”

“나보고 고블린 저항군이랑 두 번째 전선을 꾸릴 테니 길을 열어 달라고 동네방네 광고하란 얘기는 아니겠지.”

장난스럽게 하라드에게 던진 답변이라지만 이면엔 무척 암울한 현실이 드리워 있었다. 하라드도 그 부분에 대해선 농담이라도 받아치진 못했다.

“하긴 이제는 고블린의 ‘고’ 자만 나와도 사람들이 아예 이야기를 듣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이 있는 콜라케르트로부터 이라크시스 강 하류에 있는 나코르잔까지는 족히 300km쯤 된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 사이엔 바난드 출신이라면 치를 떠는 미크라야크의 대공과 그 가신의 영지도 많았다.

“가장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은 나샤와를 지나는 것뿐이지. 거긴 이제 우레이미야 군단의 목초지가 되었지만.”

“그럼 어쩔 수 없이 중부 산맥을 넘어야겠는걸. 한 삼 주 정도 걸릴 모양인데.”

“그래야지. 그나마도 미크라야크 군주의 땅을 피해 가려면 일정이 바쁠 거야.”

사건이 터지기 전이었다면 얼마든지 몰래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크라야크는 일단 고블린 문제건 무엇이건 간에 바가반드 영주인 네마냐의 존재 자체를 껄끄럽게 여기는 게 확실했다. 지도를 펼쳐 놓고 네마냐는 경로를 찾아보았다.

“고블린에 마탑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구 왕실 꼰대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삶이 정말 고달프다니까.”

“찾았다. 길은 이렇게 우회하면 되겠어.”

“세상에……. 4~5개 영지를 지나는 여행길인데. 마지막엔 고블린 부족 구역도 하나 지나야 하고. 정말 지금 떠날 거야? 도로 사정이 좀 풀리면 내년에라도 갈 수 있잖아.”

그렇게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면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미 국경에서 일 만이 넘는 고블린이 설치고 있는 판이다.

“아니야. 혼자서라도 빨리 갔다 오는 게 나아. 적 군단의 허점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을 끝마친 네마냐는 더는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는 듯 방한용 외투를 둘렀다. 양모를 얇게 짜서 만든 외투라 충분하진 않지만 노숙할 때 침낭처럼 쓸 수 있었다.

“내가 다녀오는 이삼 주 동안은 별일 없을 거야. 혹시나 해서 재건 작업에 필요한 사항을 적어 두었으니까 참고하면 돼.”

책상 위에 올려 둔 두루마리 뭉치를 톡톡 건드리며 녀석에게 알려 주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대.”

“실수라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준비하게 될걸. 뭐, 그런 부담감을 너까지 느낄 필욘 없지만.”

마지막으로 챙긴 것은 가죽으로 된 물주머니였다. 산간 기슭에 어디 개천 하나 없겠냐마는 겨울이 코앞이라 자칫하면 고드름으로 목을 축일 판이었다.

“그럼 준비는 다 됐다.”

“세반 호수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 거야. 그나마 아직 그쪽은 카판, 슈니크로 가는 길이 열려 있으니까.”

“나랑 똑같은 생각이네? 지도 보는 눈이 좀 늘었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작전 회의에 들어와도 되겠는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고향과 완전히 딴판이라 지리를 헤매던 녀석이다. 그러던 녀석이 어느샌가 완전히 이곳 사람이 된 것처럼 능숙한 공간감을 구현하고 있었다. 마법사로서의 자질을 발휘하는 데는 공간감이 중요하다던가. 과연 마법 대학을 수석으로 조기 졸업한 게 허세는 아니다.

“그럼 그만 가 본다.”

“마중은 안 나갈게.”

―탁.

문을 열고 나선 네마냐는 전과 달리 완전히 허름한 로브 차림이었다. 모자로 머리를 덮으며 그늘 사이로 표정을 감추었다.

“이번엔 최대한 티가 안 나게 다녀오자.”

마구간에서 고른 평범한 갈색 말에 올라탔다. 바가반드의 영주는 하야스단을 남북으로 나누는 중앙 산맥으로 들어갔다.

* * *

나코르잔. 괴짜들이라 불리는 고블린 가운데서도 별종이라며 무시를 당하는 찐 괴짜들의 고향. 놀랍게도 여긴 인간과 장이족, 난쟁이, 고블린이 사는 곳들을 통틀어 네마냐에게 가장 익숙한 냄새를 풍기는 곳이었다.

“허, 투쟁하는 자유국이라.”

어느 이름 모를 동굴에서 불을 피워 놓은 채 편지를 다시 읽어 보는 네마냐. 무려 민의회 의장의 이름으로 도착한 초청장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음…….”

잠시 기억을 되짚던 네마냐는 「우리 세계 바깥의 역사」를 마침 가지고 왔다는 걸 기억해 냈다. 100년 전, 고블린 사회를 강타한 소위 ‘혁명’을 짤막하게나마 소개한 유일한 책이었다.

“그게 아마 7권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마침 짐에 챙겨 온 단 한 권의 책이 제7권이었다. 전체 8권 중 기나긴 고블린 신화 시대와 초기 부족 시대가 끝난 다음 시대의 이야기다.

[저지대 고블린은 인간과 자유롭게 왕래하며 문화와 문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평적인 부족 생활에 익숙한 고블린은 왕정과 귀족정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날의 민회와 도시 국가 체제를 선호한다.]

지금 보자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 아래로는 고블린 내부의 정치적 투쟁과 혼란에 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걸 침착하게 기록해 놓은 저자의 정성이 엿보일 정도다.

“사람들이 오니아스를 대마법사로 숭앙하면서도 왜 정작 책을 안 읽는지 알겠군. 지금 상황에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이 되어 버렸으니까.”

이미 고블린에 대한 이미지는 10여 년 전부터 굳어져 버린 상태였다. 정확하게는 우레이미야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갑자기 산맥 건너에서 뛰쳐나왔을 때부터. 네마냐의 손이 책장을 몇 장이고 건너뛰며 훑어 내렸다. 한 장, 두 장, 세 장…….

[고블린 거주구의 북쪽은 인간 거주구의 남쪽 거대한 산맥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지붕’이라 불린다. 남쪽 지붕보다도 오히려 정보가 적다. 이 너머에 사는 고블린은 보통 ‘우레이마’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에 대해선 호전적이고 권위적이란 것만 알려져 있다.]

살포시 책을 덮었다. 그간 모았던 파편 같은 정보들이 하나씩 퍼즐처럼 합쳐졌다.

“그러니까 원래는 우레이미야와 같은 권위적이고 침략적인 종족이 아니었다는 거지. 어쩌면 나코르잔이 과거엔 훨씬 주류였단 뜻일 테고.”

물론 민주 공화정 체제 같은 복잡한 현대의 개념을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 고블린 내부에서도 소수의 우레이미야 통치를 환영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나코르잔, 그래서 여기서 나를 찾은 걸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전광들이 다스리는 우레이미야 부족은 스스로를 군단이라 불렀다. 그들이 고블린 세계를 강제로 점령한 게 고작 15년 전.

“과연 어떤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르겠군.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고블린일지. 아니면 이미 전쟁으로 뒤틀린 놈들일지.”

―따닥.

타오르는 불길에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음을 안심시키는 그 소리를 배경으로 네마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군단의 힘이 너무 강하다면 어떻게든 연합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모닥불의 온기를 의지하며 시선을 돌리자 한쪽 끝은 산 아래쪽으로 펼쳐진 꽤 커다란 분지 평야였다. 그 중앙에는 하야스단 내부에서 바다로까지 불리는 세반 호수가 있었다.

“이곳까지 나와 보긴 처음인데……. 아니나 다를까 전쟁에 대해선 전혀 관심도 없네.”

거울같이 맑은 호수의 수면에 꽉 차오른 두 개의 달이 비쳤다. 평범한 회사원일 때의 세계와 이 세계가 다르다는 확실한 증거.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리 달을 즐겁게만 볼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달을 더 보려거든 부지런히 뛰어야 할 텐데.”

피보라에 얼룩진 달이 황량한 폐허를 굽어보는 장면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 최근에 꿈을 꾸게 되면 무조건 보게 되는 장면. 하도 반복되어 예지몽인가도 싶지만, 정확하게 기억을 할 수는 없었다.

“음. 당분간은 렘수면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어. 몸이 허해져서 자꾸 개꿈을 꾸는 걸지도.”

밤이 깊어진다는 걸 깨달은 네마냐는 모닥불 근처에 깔아 둔 외투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수정석도 있는 데다, 세반 호수 인근은 보통 안전한 편이었다.

“내일부턴 부지런히 이동해서 나흘 안에 닿도록 해야겠어.”

깊은 하품과 함께 숨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달빛을 등진 채 바로 근처에서 노숙 장소를 지켜보던 그림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제라도 시작한 건 네가 유일하다는 게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어. 어디까지 답을 찾아낼지, 그건 기대해 보지.”

아주 작고 맑은 목소리가 특수한 마법으로 처리되어 사방에 흩어졌다. 그 순간, 그림자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밤의 차가운 기온 속에서 마나의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점차 희미해졌다.

* * *

세반 호수 인근, 겔라르쿠니. 호수 주변을 남김없이 장악하고 있는 무역업의 나라, 세반 공화국의 도시였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안내인이 무심코 인사를 하다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을 보고 말을 멈췄다.

“아,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곳 지점에서도 말을 빌려줍니까?”

한 사무실로 들어서며 네마냐는 한숨을 쉬었다. 산 위에서 봤을 때는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벌써 점심이었다. 역시 원래 생각보다 더 빨리 말이나 마차를 구해야 할 판이었다.

“말이요? 빌릴 돈은 있으시고?”

“허…….”

오랜만에 겪어 보는 푸대접이다. 악의 없는 문전박대에 네마냐는 불쾌하다기보단 살짝 재밌다는 기색이 되었다.

“이것 보여 주면 된다고 하던데.”

“얼른 보여 줘 보세요. 이상한 거면 바로 내쫓아 버릴 테니까.”

헛웃음을 지은 네마냐는 품속에서 굼뜬 손짓으로 마패 같은 인장 하나를 꺼내 보였다.

“자, 이거 봐.”

“……세상에, 세상에! 저기, 저 사무장님!”

어린 직원은 바로 안쪽으로 날듯이 뛰어들어 갔다. 중간에 어딘가에 부딪쳤는지 요란한 와장창 소리는 덤이었다. 이어서 사무실 저 안쪽에서 더 시끄러운 소란이 일었다.

“어디, 어디 계십니까!”

에살하톤 상단의 세반 지점. 아직 지부가 설치되지 않아 파견 근무원인 사무장급이 관리하고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에고고, 영주님을 뵙습니다.”

“부디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길. 이 녀석이 몰라서 그런 걸 겁니다. 아무쪼록…….”

“잘못한 걸 알면 됐어. 어떤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이따위로 하진 말라고.”

말은 거칠게 했지만 사실 대수로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입단속하라는 말과 함께 바로 자신의 용건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내가 쓸 만한 말이 있을까?”

“지금 공화국 건국 기념제라 어지간한 말들이 징발됐습니다. 노새 몇 마리가 있긴 한데 체통상…….”

“체통이 밥 먹여 주나. 공무 때문에 왔으니 그거밖에 없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노새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도로로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니 천천히 인내심 있게 이동하는 운송용 노새는 용도가 맞지 않았다.

“휴, 그럼 물 한 잔 좀 갖다 줘.”

“네, 네. 알겠습니다. 얼른! 가져와!”

칼을 한쪽에 기대어 두고 소파에 앉은 네마냐. 지점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마 공화국을 지나서 북쪽 경계로 가시려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제게 괜찮은 생각이 있습니다.”

“괜찮은 생각이라니. 그게 뭐지?”

물 잔을 건네주며 그가 건넨 제안은 다소 뜬금없는 의뢰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건국제 전까지 발송해야 하는 상단 배송 일행에 호위역으로 동행해라?”

“지금 당장 공화국 수도 바사카셴으로 가는 길엔 말이 한 마리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호위로 가는 게 신분 감추기도 좋지요.”

“상단 호위를 하려면 그것도 자격증 구비 사항일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거야?”

서류 조작, 증명서 조작. 이 시대가 그리 엄격한 관료제 시대가 아니란 걸 깜빡한 네마냐였다. 불과 삼십여 분만에 네마냐 나자리안 백작은 우테이스라는 평민 출신으로 탈바꿈했다.

“여기 정식 서류와 증명패입니다. 이걸 가지고 계시면 아무도 의심 않을 겁니다.”

“참……. 어쨌든 고맙게 됐군. 그럼 이제 일행에 합류하면 되는 건가?”

“네. 호위 용병대가 있으니 그들과 함께 움직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정이 거친 자들이 좀 있지만…….”

“됐어, 그 정도면. 난 그만 가 보지. 고마웠어.”

무어라 대답을 듣기도 전에 네마냐는 로브를 덮어쓴 채 문을 나섰다. 이전 생에서 잠깐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할 때 험한 꼴은 많이 봐서 이런 건 문제도 아니다.

“여, 네가 그 뒤늦게 합류한다던 우테이슨가 하는 녀석인가?”

한창 출발 준비로 들썩이던 한 무리 중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키는 네마냐보다 머리 한 개 정도는 더 크고 흉터가 얼굴에 잔뜩 얽힌 남자였다.

“어, 북서쪽으로 여행을 갈 일이 생겨서. 같이 해도 괜찮겠지? 사람이 좀 많아 보이는데.”

그 이야기에 마부석에서 말을 몰던 담회색 로브를 쓴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말을 섞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마 여성 용병인 모양.

“상관없어. 마차가 넓어서 공간이 많거든. 그런데, 얘기로 들은 것보다도 어린데?”

“성년식 치른 지 얼마 안 됐거든……. 훗차!”

네마냐, 아니 우테이스는 한 손을 마차에 짚고 뛰어올랐다. 이제는 교통사고 부상이 완전히 나은 데다가 그간 이것저것 많이 활동한 게 자연스레 체력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뭐, 몸 놀리는 걸 보니 멀쩡하군. 아무쪼록 자기 몫은 하라고. 부모처럼 챙겨 줄 수 있는 현장이 아니니까.”

짐마차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나지막하게 소감을 읊는 인원도 있었다. 오랜만에 경험해 보는 무관심 가득한 조언이군.

“자기 몸 하난 건사하고도 남지.”

그러곤 익숙하게 짐마차의 나무 벽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다. 이내 말의 울음소리와 덜컹거리는 진동이 전해졌다. 이렇게 나코르잔을 향한 여정은 본격적으로 막을 열었다.

- 지도로 이어집니다 -

- 7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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