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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76화 (75/200)

76화

아라가트 산.

하야스단 마법사들의 고향, 암피에르는 산허리 아래 있었다.

“바로 이곳에, 마탑의 뿌리인 망명 학자들이 차린 아카데미아가 있었단 거지.”

“그렇습니다. 이곳이 바로 핍박받아 도망쳐 온 마법사들의 마나 역할을 기른 산실인 셈이죠. 제국이 기원이지만 기른 건 마탑인 셈입니다.”

이제는 정석적인 마법사 양성 조직인 아카데미아. 이제 창설된 지 1,000년이 되어 간다.

‘물론 마법사들이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 거지.’

네마냐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엘레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법학은 2세기에 이미 철학의 한 계통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체제를 부정한다는 혐의로 400년 가까이 제국의 탄압을 받았다. 일부는 제국의 마법 정책에 협조하며 갈라져 나갔다. 아카데미아 중심의 마법학 체제가 공고해진 것은 602년의 마나 역학 공인 이후의 일이다.

“흠흠. 어찌되었든, 공인 이후 발전해 간 아카데미아와 마법학 체제는 그만큼 마탑의 후예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죠.”

불편한 설명을 건너뛴 안내인의 결론은 간단했다. 이른바, 제국과 고원의 마법사 집단은 마탑의 후예라는 것이다.

“제국에서 아카데미아를 억압했어도 이곳에선 마법학이 계속 이어졌죠. 그래서인지 고원 지대에선 다른 건 몰라도 그 전통에 대한 자부심만은 대단하답니다.”

“아, 그렇군요.”

무감각한 대답 조각을 던져 주고 네마냐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엘레나는 그나마 회랑 곳곳에 덧붙여진 모자이크 장식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수백 년간 양식이 변해 온 모자이크들의 연속. 그녀의 눈은 복도를 안내하는 마탑의 안내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안내인은 감동에 젖은 채 안내인지 자랑인지 모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602년에 아카데미아 재건 칙령이 떨어진 이후로도 암피에르의 오랜 전통은……. 마탑이란 이름을 부여받아…….”

끝없는 역사 이야기는 1절, 2절을 넘어 4절로 치달았다.

‘하암.’

소리 없는 하품을 열심히 하는 네마냐다. 미친 듯이 독주하는 마탑에 대한 자부심이란 어찌 보자면 마나의 역동성을 신앙으로까지 받아들인 성국과 다를 것도 없다.

‘행사 때마다 10절이나 되는 지루한 찬송시 낭독을 들을 때의 낭패가 떠오르는데.’

만약 반쯤 실패할 것을 알고서도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면. 그랬다면야 진작 뛰쳐나갔을 두 사람이다. 다행히 5절로 치닫던 역사 다큐멘터리에도 끝이 다가왔다.

“……그래서 오늘날 134대 학장인 프리실라 님에 이르게 된 겁니다. 이 정도가 아라가트 마탑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되겠군요.”

“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눈물도 살짝 났는데, 이거.”

아까 몰래 했던 하품 덕분에 눈물 연기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사정을 알고 있는 엘레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모른 척했다. 사정을 모르는 안내인은 감격한 모양이었다.

“후후, 역시 현명하시군요. 세간의 소문과 달리 현명하신 분인 걸 알겠습니다. 모쪼록 마탑과 성국, 영지가 하나 되도록 힘써 주시길. 자, 어느새 도착했군요.”

‘하나 되도록’이라. 묘한 맛을 풍기는 한 단어였다. 이름조차 잊어버린 안내인의 말을 묵묵히 곱씹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바로 마탑주의 방이군.”

“그래. 나도 처음이야.”

방 안에 길게 드리워져 나머지 방 절반을 뒤덮을 기세로 늘어뜨린 겉옷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웬 새파랗게 젊은 남자가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책을 덮은 채 의자에 기대 누워 있었다.

“젊은 마법사? 학장이?”

“마탑주는 갈퀴같이 뻗어 내린 흰 수염이 특징인데. 하인인가? 저기, 이봐.”

네마냐가 던진 물음에 마탑주의 인상을 잘 알고 있는 엘레나도 이상하게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거동이 쉽게끔 한쪽으로만 걸친 망토를 휘저으며 다가간 기사님은 곯아떨어진 마법사를 깨우려 했다. 하지만 좀처럼 잠에서 깰 기미가 없자, 역시나 거친 성정답게 발부터 튀어 나갔다.

“일어나 봐, 당신! 마탑주는 어디 갔어?”

“으으…….”

차마 마탑주일지도 모를 사람을 발로 깨울 수는 없으니 네마냐가 말리려 들었다.

“아니 그래도, 대뜸 발은…….”

“마탑주는 없고 웬 애새끼 하나만 있잖아. 이건 애초에 협상 의지가 없는 거 아냐? 이참에 그냥 확 뒤엎어 버려야지.”

“어, 진정하라고. 마탑주가 이 방에 있긴 있었으니까 안내했겠지. 일단 이 사람 깨워서 확인해 보자고.”

엘레나도 흥분을 곧 가라앉혔다. 마탑과의 해묵은 원한이 문제지, 엘레나 본인도 판단을 흐릴 정도로 감정적이진 않았다. 네마냐에게 더 중요한 건 마탑주의 행방이었다.

‘마탑주가 이 무렵에 교체됐었나? 그럴 린 없을 텐데. 저렇게 젊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군.’

“흐아아!”

괴상한 소리와 함께 책을 덮은 채 누워 있던 그림자가 기지개를 한껏 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어라? 웬 손님이…… 아, 오신다던 분들?”

거칠게 삐걱대는 관절을 펴자 위태롭게 서 있던 책 더미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게 일상인 듯 개의치 않은 마법사는 얕은 하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쏟아진 책 더미는 한쪽 발로 구석에 밀어 넣었다.

“아, 죄송합니다. 하-암. 갑자기 마탑주가 돼 버려서 제가 정신이 없네요. 이쪽 기사님은 엘레나 단장이실 테고 그렇다면 다른 한 분은……. 반갑습니다. 아라가트 마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선뜻 손을 내미는 상대방. 어딘지 낯익은 눈매긴 한데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색하게나마 대표인 네마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곧이어 엘레나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바가반드 백작 네마냐 나자리안입니다……만, 설마 프리실라 마탑주 각하 되십니까?”

“후후, 그럴 리가요. 그 양반은 일흔이나 되는 노인이었는데.”

엘레나가 어색하게 받아 내며 궁금증 가득한 한마디를 내놓았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젊은 마법사는 그 소리에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하하, 여러분들이 오시기 직전에 전 수도회장은 해임됐습니다. 제가 임시로 대행하고 있는 상태죠.”

경질? 네마냐가 기억하는 한 마탑주는 경질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누가 당당한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인 마탑의 우두머리이자 학장을 내쫓는단 말인가?

“네포스였던가요. 원래 학장 성함이.”

“네포스 프리실라. 그런 이름이었죠. 어쩌다가 갑자기 교체된 거랍니까?”

엘레나의 보충하는 물음에 멋쩍게 웃은 젊은 학장은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결국은 모종의 사정으로 교체되었다는 걸 에둘러 이야기한 셈이었다.

“이제 막 이임식을 치른 상탭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저와 구면이니 괜찮을 텐데…….”

“아, 그렇군요……. 네, 구면이요?”

엘레나는 황망하게 되물었지만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구면이었다니까. 그런데 누구였는지는 도통 모르겠는데.’

상대방은 빙긋이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입가를 어루만지며 설명했다.

“여기 수염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면도하고 나니 좀 어설프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힌트를 듣고 나니 비로소 누구인지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말카시안 박사?”

“기억하시는군요. 첫인상은 좋지 않았을 텐데.”

어찌 잊을까. 방 안에 커튼을 가려 두지만 않았어도 머리칼과 피부의 색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차렸겠지. 빛이 어슴푸레 드는 공간이라 이목구비만으로는 파악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리라.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어두운 방이군요, 박사님. 아니, 이제는 학장이니 마탑주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편하실 대로 부르십시오. 어차피 지금은 제국에서 지명한 대행인에 불과해서.”

“제국에서 학장 인사에 개입한 건가요?”

엘레나가 틈새로 빠르게 파고들자, 말카시안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음, 일단 이야기를 하실까요. 이 방은 좀 지저분하니 저쪽 정원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린 말카시안은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어 내자 늦은 아침의 햇살이 시야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두운 피부가 시각적으로 빛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니, 이제야말로 말카시안이 확실했다. 세 사람은 어지러운 방을 피해 마탑의 실내 정원을 거닐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후, 여기는 좀 편히 숨을 쉴 수 있겠군. 말카시안 님, 얘기 계속하시죠.”

먼지 구덩이 방에서 벗어나자 정신을 차렸다는 듯 엘레나가 말문을 열었다.

“좋습니다. 지금 제국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연합 전선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프리실라 전 학장은 갈등을 키우지 않았습니까?”

대표적인 업적은 몇 가지 있었다. 바난드와 성국의 마정석 거래 협상을 결렬시켰다. 거기에다가 바가반드엔 협박 사절까지 보냈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네마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그러나 그렇다 쳐도, 마법 대학과 동등한 마탑 수장을 간단하게 바꿀 수 있을 줄은 몰랐군요.”

엘레나도 어딘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물론 고원의 보호자이자 사실상의 ‘주인’이 된 제국이다. 마탑 역시 아카데미아 중 하나라서 그 보호자인 황제가 상징적인 학장 지명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개입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마탑 내부에서도 프리실라 경에 대한 불만이 컸습니다. 무리한 마정석 독점 정책으로 마탑의 신뢰를 무너뜨렸으니까요. 그건 우리로서도 좋은 일은 아니지요.”

“요컨대 제국과 마탑 내부가 의견의 일치를 보아 해결했다, 그런 거군요.”

네마냐가 처음으로 이야기에 끼어들자 말카시안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 예리한 눈매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에브디코 본인도 유명한 반성국, 반통합파지. 암피에르 조약에 참가한 대마법사 말카시안의 아들이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온건파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어쩌면 제국의 압박을 염려한 강경파의 속임수일지도. 타협을 위해 프리실라를 내치는 선에서 정리했을지 모른다. 정작 가장 위협적인 말카시안을 학장으로 올려 두고.

“흠, 하지만 정작 말카시안 경, 학장 대리께서도 딱히 다를 것은 없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그의 시선이 한층 더 냉랭해졌다. 이래서야 저번에 처음 만났을 때랑 다를 것도 없는데. 이래 놓고 원장 대행이라니. 대체 뒤에 숨은 이면의 진실이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성국이나 하야스단 통합에 대해선 전 프리실라 공과 의견이 다르지 않을 텐데요. 그러니 지케른에서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고 압박을 넣었던 것 아닌가요? 갑자기 온건파로 모습을 드러내시니 의외라서.”

“아니, 엘레나 경. 갑자기 그렇게 세게 이야기할 것까진, 콜록!”

사적인 대화에서는 이미 몇 놈이고 마법사를 메다꽂았을 엘레나다. 하지만 공적인 대화에서 돌직구를 꽂아 넣을 줄은 몰랐다. 네마냐는 사레가 들려 연거푸 기침을 쏟아 냈다.

‘그래도 틀린 이야긴 아니지. 적어도 오늘은 마탑이 어떤 생각인지 운을 떠봐야겠어.’

헛기침을 한 네마냐는 조금 부드러운 말투로 엘레나의 이야기를 반복했다.

“뭐, 엘레나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그 뜻에는 동의합니다. 암피에르 조약 집단 내부의 갈등이 어떻게 돌아가는진 알아야겠군요.”

“하하……. 알겠습니다.”

말카시안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정원 한편의 나뭇가지를 만졌다. 이미 어두운 복도에서 본모습을 서로 보였던 사이. 딱히 감출 것도 없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 볼까요.”

“어디든, 편하실 대로.”

위장된 웃음기가 걷히자, 머리칼에 맞추기라도 한 듯한 회백색 눈동자와 어울리는 얼음장 같은 표정이 일품이었다.

“첫 만남을 생각해 보면, 굳이 감출 필요까진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저 역시 하야스단 통일론에 대해선 부정적이군요.”

“그렇다면 굳이 학장 교체라는 조치에 앞장설 이유가 있나요? 제국의 입김이 세다고 해도 말이죠.”

말카시안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렇지는 않죠. 저희도 엄연히 이곳 산맥들의 자식입니다. 견해가 다를지언정 고블린 문제도 잊어버릴 만큼 원한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일단은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두 손님은 납득이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말씀이군요. 마탑에서 그렇게 보신다면 다른 영지도 안심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용건을…….”

말카시안은 손을 들어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다르빌 지원을 거절한다는 뜻인가 싶어 잠시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보단 제가 먼저 제안을 하겠습니다.”

“무엇이죠?”

정작 뼈대가 두드러지는 손등을 움직이는 임시 학장 본인은 담담했다. 엉성하게 튀어나온 나뭇가지를 꺾으며, 학장은 긴 침묵을 끊었다.

“성국과 바가반드에서 제안하신 건은 본 마탑으로서도 좋은 일입니다. 좋은 조건으로 다르빌을 지원할 수 있다니.”

“다르빌을 돕는다는 대의명분을 얻어서 그간의 악감정을 해소한다. 물론 우리 측에서도 충분한 대가를 지급할 겁니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손가락으로 집은 채 냄새를 맡던 말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 측은 건설 장비들을 제공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어진 그의 말은 예상을 조금 벗어나는 답변이었다.

“아, 조건은 조금 달리해서 돈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죠. 무상으로 가져가십시오.”

“대금도 받지 않으시겠다고요?”

예상하지도 않은 호의는 오히려 의심스럽다. 본능적으로 마탑이 좀 더 고단수의 전략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지 마나 제도로 묶인 하야스단 동맹 속에 숨어드려는 술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호의로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해서야 실리로든 명분으로든 우리에게만 손해지.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나.’

바가반드 백작은 두 손을 포개며 감사의 뜻을 보였다. 의도가 의심스러운 모양인지 조금 망설인 엘레나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신관회에서도 이번 도움은 잊지 않을 겁니다.”

“어서 좋은 시절이 돌아와서 서로 화기애애한 하야스단을 만들어 봅시다.”

엘레나와 말카시안의 대화만 들어 보면 훈훈한 덕담이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지역 내 가장 험악한 두 세력의 대표자다. 화해의 실마리일 수 있단 희망 고문도 가능하겠지.

‘그럴 리야 없지만.’

인간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건 이제 아예 몸에 익어 버렸다. 대마법사나 이따금 나타나는 현자도 예외가 없다. 씁쓸한 감상과 함께 이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건을 마친 이상 다르빌로 돌아갈 길이 급했다.

“그럼 곧 이곳에 방문할 신성국 대표단과 에카톤 상단원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는 이 길로 바로 떠나야 할 것 같아서.”

“저런,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이래저래 일이 겹쳤으니 저녁이라도 함께 드실까 했는데.”

나뭇가지를 매만지던 가무잡잡한 사내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차가운 미소가 수염 하나 없이 매끄럽게 정리된 피부 위로 흘렀다.

“변경의 고블린은 언제나 심상치 않으니까요. 언젠가는 느긋하게 둘러앉아 안줏거리로 오늘을 이야기할 날이 올 겁니다.”

“마나의 인도하심에?”

말카시안은 체통에 어울리지 않게도 성국의 표어를 인용하며 키득거렸다. 이젠 이 정도의 도발은 양 집단에서 도발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엘레나의 코웃음 소리밖엔 들리지 않았다.

“마나도 결국은 사람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니까요. 마탑에서 부디 잘 헤아려 주길 바랍니다.”

엘레나가 입술을 가볍게 물며 내놓은 대답.

‘마나의 활용에 관심이 있는 것이 마탑. 반면 마나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그 원리를 사람이 습득하자는 것이 신관회였지. 만날 길이 없는 평행선이군.’

두 사람의 대화가 어정쩡한 대치 구도로 끝났다. 제삼자인 네마냐는 진땀을 흘리며 부드럽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군요. 양측의 바람대로 모쪼록 다르빌의 주민들에게 평화가 깃들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중요한 일이니.”

두 사람은 마탑주의 인사를 받으며 곧바로 기분 나쁜 건물을 떠났다. 거리로 나서자 눈에 띄는 복장으로 인해 적대감 가득한 시선이 다시금 쏟아졌다. 차라리 노골적인 적의가 나았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더군. 마나의 기운이 완전히 달랐달까. 마치 검기를 쓰는 소드 마스터의 오라와 같은 느낌이었어.”

“맞아, 그 느낌이었지.”

네마냐는 숨이 답답한 기분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목덜미의 옷자락을 연신 펄럭거렸다. 엘레나는 구토하는 흉내를 내면서 냉소를 지었다.

“완전 능구렁이야. 30이 넘었는데 어떻게 전 원장보다 더 능구렁이람.”

“정말 제국이 제대로 손을 쓴 게 맞다면 말카시안을 막았어야 할 텐데.”

그렇게 혼잣말처럼 의아함을 삼키노라니 서늘한 기운이 두뇌 속을 스쳤다. 제국이 만약 바가반드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선택했다면? 제국에서 슬슬 자신을 인식한다는 바흐람의 보고가 신경 쓰였다.

‘제국에서 입질이 들어온 걸지도 모르겠군. 아직 준비가 모자란 데 앞으로 나선 게 잘한 일이려나.’

그러나 부질없는 걱정은 고갯짓으로 털었다. 적어도 스스로가 생각하는 고블린과의 대결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위험은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다행이라면 제국이 고블린 문제로 바가반드를 견제할지언정 공격할 수는 없다는 거겠지.’

하야스단의 자립을 위해선, 제국이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때 얼른 자신이 성장해야 한다. 네마냐의 결심이 점점 더 굳어졌다.

* * *

네마냐와 엘레나 두 사람이 떠났다. 시종일관 웃던 말카시안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주위는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안전 확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쪽 소매를 걷었다. 드러난 손 위에서 작은 수정구 하나가 빛났다. 들릴락 말락 한 한숨과 함께 말카시안은 허공에 말을 건넸다.

“……자, 이제 제가 할 일은 했습니다. 니콜라스 특사, 잘 듣고 있으셨겠지만.”

마탑의 주요 생산품인 주홍석답게 주홍빛이 세졌다 약해졌다 반복하며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마탑의 일인자다운 행보였네. 앞으로도 제국의 후원을 믿고 열심히 균형을 잡아 주길.”

“통신 종료.”

마탑의 일인자는 통신이 끊어지자 한동안 무언가를 곱씹듯 이죽거렸다. 가식으로나마 있었던 웃음기는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균형이라. 나를 도구로 생각하는 거군.”

어두운 그늘에서 음울한 표정이 차갑게 빛을 발했다. 아무 말도 없이, 에브디코는 수정구를 받쳐 든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쨍!

돌연 통신석을 볼링이라도 하듯 정원의 나무 곁으로 던지곤 침을 뱉었다. 그토록 값비싼 고급 통신석조차 거리낌 없이 내뱉게 하는 증오감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통신석을 새로 장만해야겠군.”

흔들리지 않는 무표정. 무거운 음성과 어울리는 발걸음이 그 장소를 떠나갔다. 발톱을 감춘 채 기회를 노리는 짐승의 소리가 돌바닥을 타고 마탑 전체에 울려 퍼졌다.

- 7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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