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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75화 (74/200)

75화

11월 8일 아침. 사흘간 해가 뜨지 않았다. 대신 소복한 함박눈이 아침 인사를 대신했다. 평년보다 2주는 빠른 대설이었다. 겨울이 좀 빨리 왔거니 하면서 겨울 계획을 세웠을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눈이다! 이렇게 빨리?”

“폭설……. 이렇게 많은 건 처음이군, 끌끌.”

아이들은 내리는 눈에 신나 골목을 뛰어다녔다. 차가운 골목에는 활기찬 소리가 가득했지만 그걸 지켜보는 어른들의 마음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예언과도 같은 소문 덕분이었다.

폭설이 내리고 내려 길목이 막히면

서쪽에서 신의 채찍이 내려치리라.

불안한 예언이 어른들 사이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읊어졌다. 다행히 폭설 한 번에 길목이 막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단 온도가 낮아지면 연달아 폭설이 내릴 것이다.

“저쪽 사람들은 처음 보는데, 피난민인가? 무서운데. 전염병이라도 옮는 거 아냐?”

아이를 데리러 온 주민이 꺼림칙하게 쳐다보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어깨를 쳤다.

“어허, 부정 탈 소리. 시장이 제대로 정착하도록 한다잖아. 그리고 저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면 우리도 도움이 되는 거고.”

“아이구, 근데 그것도 잘될 때의 이야기지. 우리 그이도 두고 보자고 말은 하드네만.”

얇게 쌓인 눈을 밟으며 걸음을 재촉해도 거리의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무사하게 겨울을 넘겼다는 기쁨, 그 뒤에 담긴 차가운 메시지에 대한 걱정까지.

“아직은 절반 정도 온 모양이군.”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뽀얗게 피어나 공중으로 흩어졌다. 입김 사이로 보이는 일꾼들이 온갖 자재를 수레에 싣고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심하쇼! 다치니까.”

“아, 미안합니다.”

반주라도 걸쳤는지 일꾼들은 유쾌하게 떠들며 지나쳤다. 긴장감에 급히 비키느라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아직은 꽤 어수선하군.”

별 모양의 표식을 달고 있는 기사는 잠시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한쪽으로 시선이 꽂힌 건 그때였다. 좁고 높다란 탑, 불안한 계단으로만 올라갈 수 있는 그곳 꼭대기.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녹색 불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성공했구나, 네마냐.”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감상을 마친 그림자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시내 중심가의 어느 허름한 건물.

“흠, 이쯤 어디라고 했는데. 아.”

어느 건물 입구를 지키는 병사가 보였다. 호위병은 언제나 그렇듯 손님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이번 손님은 튼튼한 갑옷에 완장 및 표식까지 갖췄다. 기사라는 의미를 알아차린 호위병은 잔뜩 군기가 든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켈리도니온에서 온 기사단장이야, 수고 많아. 안에 시장님 계시나?”

“기, 기사단장이십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시장님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말도 귀찮다는 듯 기사단장은 손사래를 치며 문을 열어젖혔다. 호위병은 재빨리 뛰어 들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기사단장 도착입니다!”

“글쎄, 하지 말라니깐…….”

말려 봐야 어쩔 순 없었다. 조금 기다리려니 구르간이 약간 서두르는 걸음으로 실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단장님! 오늘 오실 줄 몰랐습니다. 주변 피난민 구호 작업을 하고 계셨다고.”

“네. 계속 주변의 피난민들을 모으고 고블린 잔당을 잡고 있었죠. 이제 대강 끝난 것 같아서 왔습니다.”

구르간은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한결 후련한 표정을 보니, 잘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작전 중에 특이 사항은 없으셨는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뇨. 이번에 기사단이 확보해서 호위해 온 인원은 5천 명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피난민이 더 많다는 건데.”

시장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겐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다른 이야기보다도 ‘규모’ 때문이었다.

“5천이라. 5천 명이군요. 그렇다고 해도 피난민이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물론이에요. 이번에 기사단이 호위할 수 있는 한계도 그렇고, 근처 폐허에 임시로 모은 인원만 2만 명쯤 됩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는 유랑민은 훨씬 더 많겠죠.”

“그, 지금 흠흠, 우리 도시에 정착한 피난민이 몇 명이나 되지?”

시장이 허공에 던진 질문에 관리 한 명이 급하게 대답했다.

“저번 바가반드 경 일행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정착한 인원이 5천 명쯤 됩니다. 그들은 모두 공동 주택에 들어갔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도시 내에 2만 명, 아니 그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있을까?”

구르간의 질문에도 비교적 능란하게 답변하던 그가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건 안 됩니다. 이 도시가 가장 번성했을 때도 3만 명 이상은 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구르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관리는 다르빌 한 곳만 정착할 순 없다고 다시 지적했다.

“근처의 도시와 요새의 방어망을 복구해서 정착할 것을 계획해야 합니다.”

대화를 잠자코 듣던 엘레나는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커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구르간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단장에게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뭐, 이렇습니다. 지금도 외부 지원이 없이 도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물며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까진…….”

“시급한 건 결국 항만이겠네요. 도시의 물자는 물론이고 재건을 위해서도 하역을 해야 하니. 급하게 다르빌 강변에라도 내려놓을 수는 없답니까?”

이 문제를 처음 접했던 네마냐도 꺼냈던 이야기였다. 난처한 표정으로 시장은 머릴 긁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도시 맞은편에서 흐르는 강의 유속이 빠른 데다, 그 앞은 대부분 늪지대죠.”

“음. 이러니저러니 해도 콜라케르트에서 우회해 오는 길이 빠른 이유가 있군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쌌다. 골치 아픈 일이다. 복구 작업이라고 해도 현재 폐허가 된 항구에 인원을 투입하기 어려웠다. 항구가 마비되다 보니 현지 인건비와 물가가 모두 치솟았다. 장비를 들여오거나 현지에서 만들어도 턱없이 비쌌다.

“그나마 물자가 여유로운 곳에서 가져오는 것만이 답인데, 그게 좀…….”

“지금 상황에서 물자가 여유로운 곳이라면 몇 군데 없죠.”

가격이 저렴할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거든. 다들 한쪽으로 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창가 너머론 아스라이 가물가물한 경계선을 가진 바위산이 평원 위에 홀로 솟아 있었다.

아라가트 산과 그 위로 솟은 마탑.

“결국, 마탑과 또 엮이겠군요.”

곤란한 상대였다. 역시 곤혹스러운 시장은 가벼운 헛기침을 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저, 그래서 생각해 본 방법입니다만, 단장님 생각은 어떠실지 궁금합니다.”

“네, 무슨 생각이요?”

엘레나는 어딘지 조심스러워하는 시장의 모습에 되물었다. 지금 상황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건.

“아무래도 아라가트 마탑이 각종 건설 장비 등을 조달하기에는 조건이 좋지 않겠습니까. 신관회에서 협상에 도움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심스러워도 분명히 다리를 놓아 달란 이야기였다. 최근에도 키메라 사건을 둘러싼 해석 때문에 신관회와 마탑 사이에 충돌이 커진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협상이 가능했을 텐데.”

현재는 신관회나 마탑이나 이야길 먼저 꺼내길 꺼리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물자 지원이라면 지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신관회 설득은 어렵다.

“……후, 신관회에 거론은 해 보겠지만 쉽진 않을 것 같군요. 지금 양국 관계가 최악이라.”

“그렇군요…….”

구르간은 조금 맥이 풀린 모양이었다. 도움을 얻지 못하면 다르빌은 다시 얼음 위를 걷는 형국이 될 것이다.

“차라리, 그럼 이렇게 해 보죠.”

의자를 좀 더 당기고 앉은 엘레나의 제안. 시장의 눈빛도 진지하게 빛났다.

“안 그래도 지금 바가반드 백작을 만나 뵈러 온 길이랍니다. 대신 전해 줘야 할 서신이 생겨서. 그런 김에 이 문제도 얘기해 볼게요.”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제가 알기론 마탑과 바가반드도 최근에는 관계가 영…….”

키메라가 대단한 주제긴 했지. 이젠 주위의 시종들도 다 아는 내용인 모양이다. 하야크 왕국이 망하고 10년 만에 다시 나타난 옛 왕조의 상징. 마탑이 경악할 만도 했다.

“설사 그렇다곤 해도 아라가트 역시 바가반드 경을 함부로 대하진 못할 테죠.”

“영주라든가 왕국과 같은 정치적 후원자라면야 그렇긴 합니다.”

시종에게서 잔을 받아 한 번에 마셔 버린 엘레나는 웃으면서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요식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었다.

“뭐, 그런 이야길 하자는 건 아니에요. 정확하게는 마탑이 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죠. 지금 다르빌도 누리게 된 그 힘.”

“아.”

무슨 소린지, 대번에 알아차린 구르간은 뒤늦게 입을 벌리며 멍하게 있었다. 몇 초가 지난 뒤에야 수긍의 뜻으로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렇군요. 다행히 백작께선 가까운 별관에 숙소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낡은 시설인데 개의치 않고 들어가시더니 이것저것 많이 바꿔 놓으셨더군요.”

앞다투어 화려한 색상을 수놓은 사람들 중, 홀로 칙칙한 옷을 입었던 하례회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그런 괴짜 녀석이었지.

“좋습니다. 지금 바로 처리하러 가죠.”

들고 있던 잔을 마저 비워 낸 엘레나는 다른 인사말이나 의전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기사가 갖는 최대의 장점이란 그것이다. 남이 아닌 자신에 한해서는 복잡한 예법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뒤따르는 시종이나 시장은 놀란 듯 일어섰다.

“아, 됐습니다. 그것보단 나자리안 백작이 유숙 중인 숙소까지만 길잡이를 붙여 주세요.”

애써 손을 휘두르며 물리쳤다. 알고 보니 별관은 길잡이를 애써 둘 필요도 없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야기의 기밀성을 고려해 보건대 사람이 없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 * *

“오, 웬일이야. 기사단장님도 찾아오시다니. 이 집, 조금만 있으면 다르빌의 명물이 되겠는데.”

“이젠 놀라지도 않는 모양인데?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기에.”

하도 사람이 찾아오다 보니 이젠 별로 놀라지 않는 모양이다. 엘레나가 흥이 좀 식었다는 투로 이야기를 해 올 정도니.

“하하, 놀라지 않을 리가. 언제고 찾아오리란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그런 거지.”

“아직 말발은 여전하다니까.”

코웃음을 흘리며 엘레나는 자리에 앉았다. 갑옷의 금속이 찰칵대는 소리가 오랜만에 귀를 자극했다. 차를 마시겠냐는 제안을 거절한 채, 엘레나는 곱게 세 번 접은 양피지 편지 1장을 올려 두었다.

“바흐람이라는 장교로부터 부탁을 받았다고만 이야기하지. 훌륭한 정보대던데, 앞으로 두고두고 두려울 만하겠어.”

“아, 아. 바흐람? 고마워.”

정보대가 성국을 통하면 쉽게 전달되리라 생각한 건가.

‘바흐람이 연락이 잘 닿지 않으니 엘레나에게 전달한 건가. 확실히 신관회 조직이 각지에 뻗어 있으니 유용한 전달 체계긴 하지만.’

엘레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투로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건넸다.

“마탑의 매복조가 사방에 쫙 깔린 모양이야. 용의주도한 놈들이라 아직 우리도 꼬릴 잡지 못했거든. 아마, 내 예상대로면 네 정보대도 고전 중일 것 같은데.”

“마탑……. 정말 한시가 바쁜데 자객들까지. 골치가 아프군.”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동감이야.”

두 기사는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은 골칫거리에 동의하곤 킬킬거리며 웃음을 나눴다.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지자 엘레나는 투구를 내려놓고 묶은 머리를 드리웠다.

“먼저, 다르빌에서 기어코 영역 마나를 시행한 걸 축하하지. 원래 같았으면 축제라도 열었을 일이지만.”

“아휴, 말도 말아. 안 그래도 네 부왕께서 어디서 구했는지 독주에다 나를 담그려고 했지. 연회 같은 건 이제 사절이야.”

바흐람의 서찰은 고이 옆에 내려 두었다. 성국 내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려나. 그런 의문과 함께 냉수 한 잔씩을 따라 낸 뒤 네마냐는 엘레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목 좀 축이고 쉬어.”

“고마워.”

목이 좀 타는지 눈치를 보던 기사단장이 벌컥벌컥 원샷을 때리곤 곧바로 한마디를 던진다. 그 한마디가 또한 골치 아픈 한 방이 아닐 수 없었다.

“너, 나 좀 데리고 마탑에 가 주지 않겠어?”

- 7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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